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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리뷰

 

리뷰를 쓰는 한 사람의 이룰 수 없는 욕망

 

나는 지금 리뷰를 쓴다.

나는 리뷰를 쓰며 내가 읽은 책의

줄거리와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을 더듬고

미약하나마 내 생각의 흔적들을 남기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욕망은

내가 느꼈던 감정이,

마음에 맞는 한 구절과 책 한권이 주는 감동에

젖어 순간의 환희를 느끼는 경험이

그 현상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 없다는

현실 앞에서, 내 능력으로 불리는 언어적 사용의

한계앞에서 무참하게 짓밟힌다.

 

나는 안다.

결코 지금의 내가 쓰는 이러한 리뷰로는

책을 읽고 느낀 감상을 생생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더군다나 그 책이 나로 하여금

세상을 향한 진실의 문을 열어주고,

정신의 성숙을 향한 계단이 되어주고,

정서적인 엑스터시를 경험하게 해주는

좋은 책이라면

내가 느꼈던 것은 거의 표현되지 못한다.

 

그러하기에 나는 어떤 책들에 관해서는

리뷰를 쓰기가 두렵다.

 

내가 느꼈고, 생각했던 것들의

일부의 일부의 일부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리뷰로 어떻게

나와 그 책이 나누던 교감을 말한단 말인가?

아니 그러한 행위는 심각한 기만 행위가 아닌가?

장님이 코끼리 더듬는 리뷰를 왜 써야만 한단 말인가?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도

리뷰 쓰기가 두려운 책이다.

나는 명확하게 알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동과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러나 나는 오늘 이 리뷰를 쓸 것이다.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내가 느꼈던 일부나마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에 내가 승복했기에,

내가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될것 같은 어떤 클럽을 위해서

리뷰를 자주 쓰기로 내 자신과 약속했기에.

 

모모, 몽도 그리고 다시 모모



독일의 마지막 낭만주의자로 불리는

미하엘 엔데가 쓴 <모모>.

 

동화이자 환상소설인 이 작품의

주인공 모모는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삶의 의미와 잃어버린 가치의 소중함을 깨우치기 위해

시간 속으로 모험을 떠나는 존재다.

 

도시안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곳처럼 여기는 도시의 공터에서

살아가는 모모는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친구이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순간에

우리를 위해 일어서는 존재였다.

 

모모를 읽고 나는 모모라는 소중한 친구를

얻은 느낌이었다.

그 친구는 그렇게 내가 구축한 생각의 도시에서

공터를 차지하고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르 클레지오의 단편집인 <어린 여행자 몽도>.

 

이 책의 처음을 장식하는

작품이 <어린 여행자 몽도>이다.

 

거기에서 몽도는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간직하고

도시를 방황하는 존재였다.

 

도시인들이 잃어버린 아이적인 순수함,

인간적인 가치, 삶과 인간에 대한 사랑같은

그 무엇을 간직하고 있는 몽도는

바로 그 무엇을 간직하고 있기에

도시를 방황할 수 밖에 없는,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역시 몽도도 내 친구가 되어주었다.

몽도가 비록 도시를 떠나서 어딘가로 가 버렸지만

그가 언젠가는 돌아올 것을 알기에,

내가 그 무엇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도시안의 다른 누군가가 나와 함께 노력한다면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나는 그를 친구로서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또 하나의 어린 친구를 만났다.

 

바로 <자기 앞의 생>의 주인공인

또 다른 모모가 그 주인공이다.

 

슬픔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소년, 모모

 

모모는 파리에 살고 있다.

모모의 원래 이름은 모하메드이지만

사람들은 그를 모모라고 부른다.

모모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창녀들의 아이를 맡아 키워주는

창녀 출신의 로자 아줌마와 함께 살아간다.

 

세상 밑바닥의 삶.

인종 차별과 가난과 무시와 고독과 무관심의

그늘에서 자신들의 모진 삶을 이어가는

빈민들과 유색인과 창녀들과 고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모는

세상에 대한 기대따위는 하지 않는다.

 

모모는 단지 자신에게

사랑을 베풀어준 로자 아줌마가

조금 더 자신과 함께 살아주면서

자신이 그 사랑에 보답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힘들지만 자신에게 웃음을 보여주고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준 이웃들이

조금 더 행복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세상의 냉혹함은

모모를 끊임없이 절망으로, 슬픔으로 내 몬다.

 

절망 속에서, 슬픔 속에서 모모는 깨닫는다.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것도,

슬프게 하는 것도 삶이라는 사실을.

자기 앞에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삶이 고달프고 힘겨울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고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모의 삶과 경험이 가르쳐 준

그 깨달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눈물 몇 방울을 흘리는 것 정도였다.

 

나는 감히 이 책을 추천한다.

 

사실 1년 반 정도만 해도

나는 거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

 

논리적인 글이 보여주는 날카로운 지성과

치밀한 구조, 세상에 대한 시야의 확장과

지적인 충족감에 중독되어

소설은 멀리하고 지적인 쾌감을 얻기 위한

독서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알고 있다.

그런 나의 독서가 반쪽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심하게 반발할 수도 있는 말이겠지만

소설이 주는 감동과 정서적 울림은

논리적인 글이 줄 수는 없다.

 

소설이 보여주는 세계를

논리적인 글이 보여줄 수는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정서와 감동을

논리적인 글로는 얻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지적인 쾌감만을 위해서 독서를 하는 것은

불균형한 독서 이전에

절름발이가 걷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이 지적인 것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독서 또한 지성과 더불어 감성이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

냉정한 것만으로, 논리적인 것만으로는 안 된다.

날카롭고 냉정한 것만으로 이룰 수 있는 세상은

<터미네이터: 사라 코너 연대기>가 보여주듯이

기계들이 행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거기에 우리가 인간적인 것이라

칭할 수 있는 그 무엇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것이 포함되어야 기계가 아닌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 된다.

 

<자기 앞의 생>은 나의 그런 생각을

다시한번 확인시켜 주는 소설이었다.

 

논리적인 글로는 이런 소설이 나올 수 없다.

아니 이런 감동을 줄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삶의 의미를 절절히 깨닫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감히 이 책을 추천해본다.

소설을 읽고자 하시는 분들이라면,

지성과 더불어 감성을 충족시키기 원하시는 분들이라면,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시고 계신 분들이라면,

냉정함만이 아닌 삶의 감성을 원하시는 분들이라면

이 책을 한번 꼭 읽어 보셨으면 한다.

 

읽고서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따듯한 사랑이 전해주는

울림과 삶의 의미를 한번 음미해보셨으면 한다.

 

삶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금 깨달았으면 한다.

 

내가 느꼈던 것처럼

많은 이들의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었으면 한다.

 

자기 앞의 생이 던져주는

그 무엇을 우리 모두가 받아 먹었으면 한다.

 

그것이 자살한 이 소설의 작가가 우리에게 남긴

최후의 유산을 우리가 제대로 이용하는 방법일 것이다.

 

*에밀 아자르는 로맹 가리의 필명이다.

가리가 에밀 아자르란 필명으로 글을 써서 상을 받고

자살하기 까지의 과정이 책에 소상하게 나와 있다.

 

*이 소설을 읽고 나는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란

이름을 내 상상 속 문학의 전당에 아로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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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독 밀리어네어 - Q & A
비카스 스와루프 지음, 강주헌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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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나는 구속되었다. 퀴즈쇼에서 우승한 대가로. 첫 문장

 

나는 구속되었다. Q&A를 읽은 대가로.

집에서 끌려나간 나는 경찰서의 취조실로 급히 옮겨져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들이 내게 원한 건 Q&A의 내용과

십억 루피의 상금이 걸린 퀴즈쇼에서 우승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나는 밑에 글과 같은

나의 생각을 말해 주었다.

 

1.Q&A에는 파란만장한 삶이 배어있다.

십억 루피가 걸린 퀴즈쇼에서 우승한

일자무식의 웨이터는

버려진 아이였다.

 

성모 마리아 성당에 버려진 그 아이는

입양 실패 이후 티모시 신부의 보살핌을 받는다.

 

아이의 이름은 심상치 않은 삶을 예고하는 바

3교의 전통이 융합된

람(힌두교)모하마드(이슬람교)토마스(기독교)가

그 이름이었다.

 

이후 람은 모든 장르의 영화의 결합된 것 같은

파란만장한 삶을 경험한다.

 

동성애자의 위협,

스파이와의 동거,

살인사건,

퇴역 군인의 슬픈 사기극,

부두교 주술사의 저주,

한물 간 여배우와의 묘한 연대감,

빈민가 가족의 비극등과 같은

그의 경험은

그가 12문제를 연속으로 맞히는

원동력이 된다.

 

2.Q&A에는 인도 빈민의 삶이 있다.

중국과 함께 급속한 경제 성장을 하고 있는

인도는 그 급격한 성장만큼이나

빈부격차도 급격하게 벌어지고 있다.

 

상층부는 선진구의 어떤 부자보다

화려한 삶을 살지만

빈민층은 하루하루가 살아가기도 버겁다.

 

그 적나라한 삶이 이 소설 속에는

묘사되고 있다.

아버지가 가족을 때리고,

딸을 강간하는 것이 일상적인 빈민들의 삶.

그리고 그들의 그 모든 소리가 다 들릴 정도로

초라한 그들의 주택.

병에 걸려도 고칠 수 없어 죽어야만 하는 삶.

부패한 관리와 경찰들의 먹이가 되는 삶.

언제나 범조의 희생양이 될지 모르는 위험성.

거기다가 파키스탄과의 전쟁이 불러오는 위험까지.

 

람은 그런 빈민의 삶을 묵묵히 견디며

강렬한 의지와 생활력, 복수심을 키워간다.

 

그리고 그것이 퀴즈 쇼 우승의 힘이 된다.

 

3.Q&A는 손과 눈을 땔수 없게 만드는 책이다.

비카스 스와루프는 

처음 소설을 쓴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흥미있고, 응집력 있는 구성을 보여준다.

 

첫 문장부터 강한 흥미를 유발시키며

단시간에 읽어버리게 만드는

마력을 발휘한다.

 

손과 눈에 접착제를 발라서 책에서

떼지 못하게 만드는 마력.

 

그 마력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이야기 구성이다.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가 퀴즈 쇼의

한 문제를 담당하는

이 구조는

독자로 하여금 지루함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다양한 재미를 느끼게 한다.

 

한가지 맛의 음식이 아니라

다양한 요리가 퓨전된 음식과 같은 책이

바로 Q&A이다.

 

4.Q&A는 꿈의 환상을 보여준다.

희망없는 삶을 모질게 이어가고 있는

인도의 빈민들.

마찬가지로 특색없이 이어지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다른 나라의 사람들.

 

그 모두에게 이 책은

자본주의적 판타지를 선사한다.

 

거액의 획득.

그것을 얻기 위한 드라마틱한 경험.

그리고 사랑의 성공.

 

이렇듯

Q&A는 일상의 무력함을 벗어나게 만드는

판타지이기도 하다.

 

 

나는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들을

다 말해 주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곳에서 쉽게 풀려나기를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나 같은 거리의 자식은

먹이사슬에서 가장 밑바닥.'

 

나 같은 거리의 자식은

가장 밑바닥이기에.

그래서 나는

변호사 스미타의 등장을 기다린다.

그녀는 나에게 목숨을 빚졌기에

반드시 와줄 것이다.

 

그녀가 온다면

나는 그녀의 도움으로

이곳을 벗어나고,

배운 대로 파란만장한 경험을 해서

퀴즈 쇼에 참가할 것이다.

 

그녀는 언제 올까?

그녀의 등장을 기다려본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사진들



그녀와 만난 람



퀴즈쇼에 출현한 람



어린시절의 람



타지마할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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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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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1.

단순히 길을 걷는 것 뿐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살기 위해,

다른 이들의 위협을 피하고

먹을 것을 얻기 위해 걸을 뿐이었다.

 

그런데,

단지 길을 걷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들의 행동이

이리도 절망적일 줄이야!

 

어둠다는 것을 넘어선

절망 그 자체인 그들의 삶.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실현된 것처럼

느껴지는 현세의 지옥은

벌레보다 못한 삶을 이끌어내고,

인간을 식용으로 사용하는 상황까지

만들어낸다.

 

그 속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원칙을 지키고자

노력하지만 그들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내지는 못한다.

 

죽음이 자신의 숨결을

옆에서 뿜어내는 상황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산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미 죽은 이들을 부러워하며

내일 눈을 뜨지 않고 이대로 죽었으면 하고

바란다.

 

2.

현재 미국을 대표하는

스타일리쉬 소설가 코믹 매카시의

이 소설은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책 중에서

가장 어두운 책이었다.

 

그야말로 절망의 묵시록이자 절망의 소설.

 

읽는내내 책에서 뿜어지는 다크포스에

책 속에서 희망의 빛을 찾지 못하고

헤매기만 했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제공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지배하는

어두움을 넘어선

절망적 분위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근데 왜 현실이 이 책보다 

낳다고 여겨지지 않는 것일까?

 

현실적인 모습은 우리가 그들의 삶보다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만의 악몽에서 살고 있다.

떨쳐낼 수 없고, 쫓아내지 못하는

우리만의 악몽들은

분명히 우리 곁에서 우리를 향해 웃고 있다.

 

'우린 죽나요?

언젠가는 죽지. 지금은 아니지만'

'나한테 영원한 희망은 무야.'

'모두가 사라지면 좀 나아지겠지'

'남자는 거의 매일 밤 어둠 속에 누워 죽은 자들을 부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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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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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리뷰

 

1.

보수적인 아카데미가

코엔 형제에게 작품상을 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난 영화의 원작을 읽고 싶었다.

 

그것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모호한 제목까지 있으니

호기심은 배가 되었다.

 

호기심에 이끌려

책을 펼친 순간

내가 본건 유혈이 낭자한 잔혹 서부극이었다.

 

2.

한 소년의 사형 집행에 참여하는 보안관 벨.

그는 그것을 보며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저기 어딘가에는 살아 있는 진정한 파괴의 예언자가 있다.

다시는 그 자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

나는 알고 있다.

그가 진짜라는 것을.'

 

시체들이 널부러진 현장에서 우연히

돈가방을 얻는 모스.

그러나 그는 그 순간부터 시거의 추격을 받는

지옥의 레이스를 시작한다.

'인생은 매 순간이 갈림길이고 선택이지. 어느 순간 당신은 선택을 했어.'


달아나는 모스


부보안관을 죽이고 탈출한 살인마 시거.

그는 돈 가방의 행방을 찾아 모스를 추격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특별한 이유없이 살해한다.

소설 속에서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자신만의 궤변으로 살인을 꺼리낌없이 자행하는

그는 진정한 악의 화신이었다.

'이건 겨우 동전 아니냐고.

별다를 것 없는 동전일 뿐이라고.

...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물론 이건 그저 동전일 뿐이오.

그렇소, 맞소. 그저 동전. 하지만 정말 그럴까?"

(동전 던지기로 사람의 생사를 결정하는 시거)



두려움 없는 살인마 시거

 

마을의 보안관 벨. 그는 전쟁에서

비겁하게 혼자 살아왔다는 죄책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그는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모스와 시거의 뒤를 쫓는다.



시거와 대척점에 위치한

인물인 벨. 그러나 그의 힘은

미약했다.

 

쫓고 쫓기는 그들의 유혈이 낭자한

지옥의 레이스.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3.

유혈과 폭력이 가득한 이 소설은

매카시의 스타일이 그대로 드러난 책이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그것도 서부의 문화적 전통을 이어받은

그는 이 책에서 그것들을

어두움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총기난사,마약,폭력,선악의 대립,

전쟁의 후유증 같은 요소들이 그려내는

미국은 그 자체로 절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롤러코스터처럼 느껴졌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라는

모호한 제목은

그런 매카시의 세계관을 토대로 살펴본다면

어렴풋이나마 윤곽을 그릴 수 있다.

 

노인.

단순히 늙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이 단어는 사회적 약자나 폭력의 희생자,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폭력과 범죄의 순환 고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그 안에서 언제나 위협받고 있는

평범한 사람 모두를 가리키는

광범위하고 모호한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 노인은 보호받지 못한다.

책 속에서 시거와 벨의 대립은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역동적이고 리드미컬하며 막강한 시거.

그에 비해 보안관 벨은

무력하고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벨의 좌절과 죄책감은

악의 막강함과 선의 무력함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4.

미국은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었다.

매카시는 그것을 이미 제목에서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 한국은?

당연하게도 한국은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이 말은 진짜 노인과

상징적 노인 모두를 포함한다.)

 

그러면 더 나아가서

세상에 노인을 위한 나라가 있는가?

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이미 책 제목에 나와 있다.

 

세상 천지 어디에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노인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으니

책을 읽으면서 각자가 해보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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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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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진정한 외톨이 로버트 네빌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다.

그러나 그 고독이라는 것이 완벽한 수준은 아니다.

개인마다, 주어진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리들은

완벽한 고독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곁에는 누군가가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언제나 관계망 안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여기 <나는 전설이다>의

주인공 로버트 네빌은

진짜 생생한 고독을 경험하고 있다.

 

핵 전쟁 이후 발생한 변종 바이러스로 인해서

주변의 모든 사람이 흡혈귀로 변해버린 상황에 처해버린

그에게 고독은 유일한 친구였다.

 

그야말로 고독만이 친구인

진정한 외톨이.

<나는 전설이다>는 이렇게 진정한 외톨이가 되어버린

로버트 네빌의 이야기이다.

 

일상의 지옥

 

아무도 없다.

가족도, 친구도, 이웃도.

존재하는 것은 그의 육신을 노리는

굼주린 흡혈귀들 뿐.

 

단지 흡혈귀만 있는 것이라면

어쩌면 생에 대한 의지로

지옥같은 일상까지는 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흡혈귀의 위협만

그를 괴롭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삶을 진정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독과

과거의 상처였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점.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눌 수 없고,

누구와도 교류할 수 없다는

그 엄청난 고독이

네빌의 심신을 좀먹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잊을만 하면 찾아오는 과거의 상처도

그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었다.

병에 걸려 죽은 아내가 살아 있는 괴물이 되어

돌아오던 날 아내를 직접 죽인 기억.

딸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기억.

그 모든 것이 그를 괴롭히고, 얽어매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미쳐지 않고 버틸 수 있겠는가?

 

일상의 지옥 속에서 로버트 네빌은

점점 광기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영화는 미약한 전설, 소설은 진짜 전설

 

영화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묘사가 미진하다.

물론 고독한 남자의 삶이라는 주 테마가 살아있긴 하지만

고독으로 미쳐가는 한 남자의 생생한 묘사가 주인

소설에 비한다면 영화의 고독은 미약하다.

 

거기에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결말은 정말 안타깝다.

헐리우드 영화들이 종종 보여주는 자기 희생과 휴머니즘의

테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영화의 결말은

소설이 보여주는 진정한 전설을 희석시키고

미약한 결말로 마무리짓고 있다.

 

자기희생은 재난영화나 휴머니즘적인 영화들에서,

숭고하고 헌신적이게 살았던 인물들의 삶에서

볼 수 있기에 그 정도를 가지고

네빌이 전설이라고 하기에는 약하다.

 

스티븐 킹과 딘 쿤츠의 원조가 되는 공포소설가

매드슨은 이 점에서 영화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네빌은 진정한 공포, 진정한 전설이 된다.

그는 최후의 생존자이자 최초의 사탄으로서,

마지막 남은 인간이자 첫 재앙으로서,

그들에게 진정한 공포가 된다.

 

성경에 기록된 악마 사탄처럼,

인류가 처음 기록했던 신화나 전설처럼

그의 이름은 진정한 전설의 장이 되는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소설에서 ^^;; 죄송합니다.

스포일러는 싫어하는 사람이라서)

 

이런 결말을 가지고 있는 소설을

그 정도의 결말로 마무리 짓는 것은

정녕 안쓰러운 모습이다.

 

아마도 이 소설의 매니아적이고 어두운 분위기를

빼려는 영화사의 의도가 작용 했기 때문에

그러했으리라.

그러나 그 점이 결국은 이 영화를

그저 그런 범작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영화는 소설의 정수를 빼어버린

겉만 비슷한 블록버스터가 되어버린 것이다.

 

좀비물의 원조 그러나 진짜 공포는 인간에게 있다!

 

이 소설은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라는 좀비 영화와

바이오 해저드나 사일런트 힐 같은 게임,

스티븐 킹의 공포 소설들에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좀비물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나 작품은 좀비나 흡혈귀보다는

인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점은

네빌이 처한 상황이고,

거기에서 공포가 나온다.

 

매드슨은 네빌이 미쳐가는 과정과

그가 처한 상황을 통해서

우리 안의 공포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전설이 되는 시점에서

사회가 우리를 바라보는 눈과

우리가 우리와 다른 이를 바라보는 시각까지

고찰한다.

 

그러니까 매드슨이 느끼는 공포는

귀신이나 유령, 흡혈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인 셈이다.

그것은 인간이 가장 공포스럽다는 말로서 이어지고

결국은 이 한마디로 말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공포는 인간 그 자신이다.

 

*<나는 전설이다>는 표제작인 <나는 전설이다>외에도 다른 리처드 매드슨의 단편소설도 수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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