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역 곡절 끝에 “존엄사법” 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이제 암 환자들이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되었다는 안도의 목소리가 신문지상을 비롯하여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죽음을, 죽음의 방식이든, 혹은 시기이든, 선택할 수 있는 것 인가 ?
에 대한 의문도 생각할 만한 일이다.
먼저,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태어난다.
물론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이의 출생은, 시기와 방법 , 장소까지도 거의 완전한 선택의 결과이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선택이 아니다. 다만 태어나게되었을 뿐, 장소나, 가난한 부모의 자녀로 태어나든 그반대이든, 부모, 우월한 용모와 건강한 유전인자를 갖고 로 태어나든, 혹은 선천성 기형을 갖고 태어나든, 혹은 음악적 재능을 갖고 태어나든, 수학 재능이 부족하여 대입시험에서 대책없는 상황이 벌어질 애로 태어나든, 가을에 태어나든 혹은 겨울이든, 정상분만이건 제왕절개이든, 어쨋든 자신의 일생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어떤 것 하나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완전히 수동적인 상황에서 태어나지게 될 뿐이다.
당연히 태어나고 나서야, 밥달라고 울 수도 있고, 주는 밥을 안먹겠다고 도리질을할 수도 있지만, 최소한 출생 자체는 자신의 의지도, 선택도 완벽하게 외면당한체, 그야말로, 완벽한 수동적인 행위, 혹은 운명인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나름대로 선택이 가능한 것인가 ?
우선 죽음 자체는 출생과 마찬 가지로 선택의 여지가 전혀없다. 죽음을 피할 수있는 방법은 현시점에서는 없으며, 냉동인간이나 뇌의 복사를 통한 삶은 아직 현실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인정한다면, 현실적으로 인간은 모두 죽는 다는 것은, 최소한 현재로서는 피할 수없는 정해진 숙명으로 받아드려야 할 듯하다. 즉 인간은, 말할 필요도 없이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선택할 수 없다.
그렇다면 죽는 방법이나 시간은 최소한 선택할 수있는가 ?
현대 사회에서 죽음의 원인으로 거론되는 암과, 심장병 등은 발병 자체를 현실적으로 예측하기는 어렵다. 담배를 피우는사람은 폐암에 걸려 죽고, 혈압이 높으면 심장병으로 사망할 확율이 높은 것은 사실이나, 담배를 피우는 사람중에서도 폐암에 걸려 사망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이고, 고혈압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누가 어떤 병으로 언제쯤 사망할 것인지를 예측하는 것은 아직은 과학과 논리,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따라서 최소한 죽음 자체는 거부할 수없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이어서 선택이 불가능하고, 누구에게나 이미 선택된 일이다. 즉 죽음은 이미 주어진 상황이고, 거부할 방법이 없다.
한편 사람들은 여러가지 형태로 죽음을 맞이한다.
문병사회에서 노화와 질병, 비행기나 자동차 등의 사고등에 의하여 , 예기치 않게 예기치않은 장소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전쟁 상황이라면, 지금도 전쟁을 하는 곳이 있다, 급작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폭탄과 총알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물론 예정된 죽음도있다.
예를 든다면, 사형수라면, 사실상 예정된 죽음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자신이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어쨋든 예정된 죽음일라고 할 수있다. 나찌가 유태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도 사실상 예정된 죽음의 하나의 예라고 할 수도 있다.
자신이 직접 선택한 죽음도 있다.
이시간에도 매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자신이 정한 장소와 시간에 자신이 결정한 방법으로 생을 마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미 오랜동안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더불어 이미, 지구상의 여러곳에서, 네덜란드가 2002년에 합법화한 이후로, 안락사 혹은 의사 조력 자살의 형태로, 죽음의 시기와 방법을 선택가능하도록 하고있다. 앞으로 좋든 싫든, 안락사와 의사조력 자살은 점차 확산되는 추세이다. 안락사의 합법화가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판단하기는 너무 이르다.
죽음은 미루어 질 수 있는가 ?
종합병원의, 중 환자실에는 , 의식이 없는 상태로 수개월에서 수년간혹은 수십년까지도, 인공 영양과 의료진의 도움으로 살아있는 환자들을 보게된다. 이들 중 일부는 뇌사 혹은 식물 상태이다. 이들은 뇌의 기능 상태에 따라서, 뇌사라고 판정되기도하고, 식물 상태로 판정 받기도 한다 .
이들은 죽음이 미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있는가 ?
생물학적으로는, 혹은 법적으로는, 이들은 인위적으로 죽음의 시기를 미룬 것으로 볼 수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이 삶은, 대부분의 경우에는, 소위 “ 살았어도 죽은거나 다름없는 삶”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탄생이, 비교적 명확하게, 엄마로 부터 분리된 순간, 규정되는 것과 달리,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뇌사의 경우에는 뇌의 기능이 정지된것을 기준으로 판정하기도하고, 혹은 심장의 기능 정지를 기준으로 판정하기도 한다, 물론 여러 장기중에[서 유독 뇌와 심장을 기준으로 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다,” 라는 말은 없지만, “죽은 거나 다름 없다”는 말은 일상생황에서도 흔히 쓰이는 말이다. 결국 죽음이란 것은 절대적으로는 피할 수없는 숙명이지만, 실제로 실생활에서 쓰이는 죽음에 대한 정의 조차도, 대단히 가변적이며, 아마도 시간이 지나고, 사회가 복잡해질 수록, 혹은 의학과 과학이 더 발달 할 수록, 더 죽음의 의미와 기준을 포함하여 방법도 다양해질 것이다.
죽음은 미리 예견된 것이다. 즉 인간은 모두 죽음이라는 숙명을 갗고 태어난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에게 죽음은 시기나 방법도 피할 수없다.
비행기사고로 죽기도 하고, 전쟁에서 총탄에 쓰러지기도 하고, 암과 질명으로 죽은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죽음은 실제적인 의미에서 선택이 불가능하다.
죽음을 선택 할 수 없는 이유는 명확하다. 죽음은 삶의영역 바깥이다. 즉 인간의 선택으로 결정할 수있는 성질의것이 아니다. 인간이 직접 선택한 죽음은,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상당한 사회적 논란과 과오,실수를 피할 수도 없다.
통과된 존엄사법은 죽음의 시기와 방법을 선택하기 위하여 만들어지 법이 아니다. 존엄한 죽음을 위해서는 존엄사법에 따라 죽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존엄사 법에 따른다면, 본인의 명시적인 의사표시와 함께, 2인 이상의 의사와 가족이 찬성해야 존엄사가 실시될 수있다. 물론 이법에 의하여 존엄사를 시행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게는 있을 것이나, 결코 많을 수는 없다.
누군가의 죽음이 법에 의하여 시행된다는 것은 대단히 부자연스럽고, 고통스럽기만 한것이아니라, 사실상 매우 두려운 것이다. 왜냐면, 인간의 행위은 언제나, 예외없이 치명적인 오류를 법할 가능성이, 매우 많을 수도 있다, 있기 때문이다. .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선택이 불가능한 영역이고, 그대로 남겨두어야 한다. 선택이 불가능한 것을 선택하는 것으로 만들었을때 ,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있다고 믿어버리면, 고통스럽다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해결책이 있을 것으로 무조건 믿어버리면, 인간 의지는 무슨일이든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느 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 지 걱정스럽다.
죽음에 임박하여, 불치의 병으로, 고통을 받는 환자라면, 어떤방법으로든지 해결을 하고자 하는 노력은 필요하다. 그렇나 좋은 해결책이 없다고해서,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위험하다.
존엄사법은 존엄한 죽음을 담보하는 해결책은 전혀 아니다. 존엄사법은 지켜야 하는 법도아니고, 그렇다고 지키지못했을 때 벌을 가할 수있는 법도 아니다. 누가 누구의 허락을 받아서 존엄하게 죽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존엄사법에 미덕이 있다면, 선언적인 의미이다.
이제 마냥 죽음을 억지도 미루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한것이 존엄사법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다. 그냥 법적으로 혹은 의학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삶이 더 중요하다는 선언으로 받아드려져야 한다.
가을에 낙엽이 지듯이, 죽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피할 수도없고 피해서도 안되고, 미루거나 연기할 수도, 또 연기해서도 안되는 것이 죽음이다. 인간의 탄생과 마찮가지로 죽음도 선택할 수없으며, 선택할 필요도 없다. 탄생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방법, 시기, 장소도 피할 수없다고, 또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필요할 듯 하다.
달나라에 쉽게 갈 수있는 방법이 없는데도, 갈 수있을 것이라고 ,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 믿어버리면, 결국은 주술과 미신에 의지하게된다. 두렵고 어두운 세상이 될 가능성을 배제 할 수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