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 나 정말 상처받았어! - 교사 이호철이 응어리진 아이들 가슴에서 끌어낸 목소리 살아있는 교육 14
이호철 지음 / 보리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흔히 아이들을 '도화지'에 잘 비유한다. 아직 어떤 주제로 어떻게 밑그림을 그리고 무슨 색을 칠할지 정하지 않은 상태. 그것을 결정하는 건 자기 자신이 제일 메인이지만, 영향을 주는 요인 중에서는 가장 큰 게 바로 부모일 것이다.

 

여기 아이들 가슴에서 끌어낸 응어리진 목소리들이 고스란이 담겼다. 이런저런 이유로 상처받은 아이들. 들여다보면 그 이유도 제각각이다. 표현을 가로막아서, 매를 맞아서, 엄마아빠가 싸워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컴플렉스 때문에 놀림 받아서, 어른들이 거짓말해서, 어리다고 업신여겨서, 학교 성적 때문에 야단 맞아서, 성추행을 당해서 등 하나같이 비상식적이고 납득하기 어렵다. 이런 부모들이 진짜로 많이 있는가 보다.

 

문제는 어릴 때의 상처가 그 때 잠깐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도화지에 검은색을 칠했는데 그 검은색이 완전히 지워지기란 어렵다. 이미 흰 바탕에 검은색이 들어갔으니 더 이상 흰 것이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하나의 인격체라면, 생각하고 느낄 줄 아는 존재라면 몸이 기억하고 마음이 간직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더욱 배려하고 존중해주는 게 필요하다. 먼저 아이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같이 이야기해보는 게 제일 좋겠다. 그게 힘들면 정기적으로 시간을 정해서 가족회의를 한다든지 가족규칙을 정한다든지 하는 방법도 효과적일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은 특히 더 소중하다. 그래서 나도 아이들을 위한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려고 하고. 상처받는 아이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비록 책 안의 글들이 해법을 제시해주지는 못하지만, 아이들도 얘기할 줄 알고 자기만의 생각이 있다는 걸 먼저 아는게 중요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00인의 책마을 - 책세이와 책수다로 만난 439권의 책
김용찬.김보일 외 지음 / 리더스가이드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기 어렵듯이, 타자의 삶과 생각이 녹아든 글에 대해 평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무심코 말을 내뱉거나 손가락질 할 수는 있어도, 책의 깊이와 바라는 뜻까지 파고들기란 글쎄.. 그 누가 자신있어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있게(?) 또는 무모하게(?) 자신이 읽은 책을 짚어보고 그 책을 벗삼아 자신을 드러낸 이들이 있으니, 그들의 이야기를 엮어낸 또 하나의 책이 바로 <100인의 책마을>이다. 한 권의 책을 통해 만나는 439권에 대한 반가움, 기존 작가가 아닌 새로운 필진에 대한 기대감, 책으로 이야기하는 맛깔스런 입담에 대한 즐거움이 이 작품에 고스란이 녹아있다.

 

달리기는 앞으로 몸을 움직이는 행위다. 그것은 미래로 나아가는 행위이지 과거 속으로 퇴행하는 행위가 아니다. 달리기에서 모든 움직임은 현재에 있다. 호흡도, 맥박도, 고통도, 즐거움도 모두 현재에 있다. 조금 과장되게 말한다면 달리기는 온통 현재만 있는 움직임이다. 나는 그것이 좋았다. 과거는 회한을 불러오고 미래는 불안을 불러온다. 그러나 현재는 무無의 공간, 자유의 공간이었다. 달리는 순간 나는 나 혼자있다. 집을 나서는 순간은 곧 시스템으로부터 몸을 빼내는 순간이다. 가족이라는 시스템, 직장이라는 시스템, 국가라는 시스템, 달리는 시간은 그런 시스템에게 굿바이를 외치는 시간이다. (p.23)

 

글은 단순히 독서평을 넘어선다. 책을 통해 만나는 자기 모습, 책으로 시작해 삶으로 갈무리되는 살맛나는 이야기가 겹쳐질 때 독서평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언어로 덧씌워진다. 그러고보면 누구나 책을 '읽고 싶어한다'. 비록 읽지 못하는 환경이나 읽을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우리 마음은 항상 알게 모르게 책에도 맞닿아 있는 것 같다.

 

길지 않은 남미 여행 중에도 내가 책을 가져가서 읽으려 했던 게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비록 여정의 무거움에 한 권은 채 읽지 못하고 놓고 왔지만, 이 책만큼은 손에 쥐고 발악하며 어느 정도 소화했냈고 이렇게 서평까지 쓰게 되니 감개무량하다. 여행 중 읽은 작품이라 그 특별함이 더한 것도 같다.

 

세상의 엄마들은 생긴 모습은 다를지언정 모두 엄마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리고 자식이라는 존재들은 오늘도 또 날카롭고 긴 못을 엄마들의 가슴에 박아 넣고 있을 것이다. 못 박히고 박는 관계, 어쩌면 이것이 피할 수 없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일지도 모른다. (p.71)

 

책에서 다루지 못하는 것이 뭐가 있으랴. 마음 가는 대로 뜻이 통하는 대로 그려나간 인생길에서 그것이 굳이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우리 삶과 뗄레야 뗄 수 없음을 누구나 잘 아는 것일 터인데. 곡진히 써내려간 글 그 어딘가에서 우린 멈추고, 생각하고, 뒤돌아본다. 그리고 그 순간 글은 우리 삶에 깊이 박힌다.

 

여행 중에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내가 여행을 온 이유, 앞으로 하고 싶은 일/할 수 있는 일/해야할 일에 대한 마음가짐 등.. 순간 이 책을 읽다가 그 답을 발견한 것 같아 마지막으로 적어본다.

 

나는 모든 대안적 문화가 느림에서 나온다고 믿고 있다. 느림에서 돌봄이 나오고, 나눔이 나오며, 더불어 살기가 나온다. 돌봄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이고, 뭇 생명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이다. 나눔은 전 지구적 차원의 생태 문제를 인지하게 하여, 스스로 선택한 가난한 삶을 도모하게 한다. 그리고 더불어 살기는 스스로 선택한 가난에서 비롯한다. 그러니까 느림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위한 처음이자 끝이다. 느림이 미래로 가는 문이다.
-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이문재, 204~20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털없는 원숭이 - 동물학적 인간론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김석희 옮김 / 문예춘추(네모북)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진화론. 그리고 창조론. 물과 기름 같이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관계지만, 어찌보면 또 엄마 아빠 같이 함께 해야만 완벽한 존재. 이처럼 모순적인 개념이 또 있을까.

 

두 이론은 저마다의 논리와 증거를 내세워 인류의 역사 내내 논쟁을 이어왔다. 인간 이전의 세계를 다루다보니 누가 옳고 그르다고 잘라 말할 수 없는 가운데, 결국엔 개인의 관점과 신념이 개입될 수 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해묵은 다툼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가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와 같다.

 

여기 대놓고 진화론의 입장에서 인간을 '털 없는 원숭이'에 비유한 책이 있다. 창조론자 및 일부 기독교인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 만무했음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는 <털 없는 원숭이>가 판매 금지되었고, 교회는 이 책을 몰수해 불태웠다. 인간 진화론은 조롱거리가 되었으며, 이 책은 소름 끼치는 악취미의 농담으로 여겨졌다. 태도를 바꾸라고 요구하는 종교적 선전물이 홍수처럼 저자에게 쏟아져 들어왔다.'는 책소개가 이상하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진화론을 거부하게 만들었을까. 왜 종교인들은 창조론을 목숨 같이 여길까. 작가는 어떤 생각으로 진화론도 모자라 인간을 원숭이 및 다른 동물과 비교했을까. 이런 생각으로 자연스레 작품을 마주하게 되었고, 답은 찾지 못했지만 고개는 계속 주억거리게 만들었다.

 

짝짓기, 기르기, 모험심, 싸움, 먹기, 몸손질 모두 인간이 여타 동물들과 다를 바 없이 하는 것들이며 인생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다. 짝짓기는 자손의 번성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육체적 흥분을 위해 필수적이며, 그렇게 해서 나은 아이를 기르는 것도 동물적 본성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모험심(네오필리아)과 싸움은 인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기술이 되었고, 영장류의 입맛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며, 몸손질은 털손질을 대신하는 원시적 욕구 표현이라는 점이 참 인상적이다.

 

게다가 책은 진화론과 창조론을 넘나든다.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역사 속 예를 들면서 나오는 것들이 창조론에서 주장하는 에덴 동산, 무화과 따먹기, 수치심을 느껴 옷으로 성기 가리기 등인 것이다. 이 무슨 막돼먹은 장난인가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으로써 창조론자도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는 매력을 잘 살린다. 위트도 있고.

 

50여년 전에 출간된 책이라 현대와는 맞지 않거나 어색한 부분이 더러 있기는 하다. 동성애를 유전적으로 보거나 생물학적으로 건전하지 못하다고 한다거나, 출산율을 줄여야 사회문제가 해결된다는 단순한 발상, 인간은 정해진 식사 횟수에 따라 다양한 음식을 섭취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으나 점점 늘어나는 채식주의자/반식주의자들, 인류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 영장류인 침팬지/원숭이라는 조사 결과(지금은 분명 개,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일 것이다.) 등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또한 사실과 추론의 나열 속에 정작 필자가 하고 싶은 결론은 마지막에야 나온다는 부분이 조금은 맥 빠진다.

 

그래도 주장은 명확하다. '인간의 본성과 한계를 인정하자'고. (대부분 창조론자들이 더 그런 것 같지만) 인류가 다른 동물보다 위에 있다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동물학대, 유린, 멸종 위기 동물 포획 및 식용/장식용으로 사용하는 등의 행위는 죄악에 가깝다. 창조론으로 봤을 때도 신은 인간을 그런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 우주 만물에서 인간의 위치는 어디인가, 역할은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가장 위약하지만 가장 위험한 동물, 인간은 그래도 좀 더 현명하게 진화할 것이라 믿는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 2014-04-18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화론이 거짓인 과학적 이유입니다.

http://gospel79.tistory.com/12
 
소유냐 존재냐 까치글방 114
에리히 프롬 지음, 차경아 옮김 / 까치 / 199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소유냐 존재냐의 양자택일이 있을 수 없다. 우리의 눈에는 소유한다는 것이 삶에 포함된 극히 정상적인 행위이다. 살기 위해서 우리는 사물을 당연히 소유한다. 그뿐이랴, 사물을 즐기기 위해서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오히려 존재의 본질이 바로 소유하는 것에 있어서,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여겨지는 실정이다. (p.33)

 

그렇다. 우선 우리가 생각하기에 소유의 반대말은 '무소유'이고, 존재와 대비되는 단어는 '비존재'이다. 그러나 작가는 현대 인간에게 있어서 두 가지 개념이 대립각에 있다고 선을 긋는다. 거기에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여겨진다는 비판까지.

 

이에 대한 반박을 하기 전에, 자신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본인을 소개하고 어떤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지 되돌아보자.

 

집은 어디이구요 / 결혼은 언제 했구요 / 아들·딸은 몇명이구요 /

얼마 모았어요 / 그거 되게 신기하다 / 나도 니가 가진거 갖고 싶어

 

이런 게 바로 보통 사람의 자기 소개와 대화 형태 아닐는지. 자기 존재에 대한 특성보다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더 드러내고, 자기 삶에 만족하기보다 더 가진 자의 삶을 따라가려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게 지금 우리 시대 자화상이다.

 

"소유적 인간"은 자기가 가진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적 인간"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 기탄없이 응답할 용기만 지니면 새로운 무엇이 탄생하리라는 사실에 자신을 맡긴다. 그는 자기가 가진 것을 고수하려고 전전긍긍하느라 거리끼는 일이 없기 때문에 대화에 활기를 가지고 임한다. 그의 활기가 전염되어 대화의 상대방도 흔히 자기 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p.59)

 

자, 다시 물어보자. 당신은 상대방에게, 또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가. "인간시장"에 진열된 상품으로서 자신의 인품과 인맥을 활용하여 그것을 돈과 명예로 바꾸고 싶은가? (p.210~212) 아니면 베풀고 나누고 희생하려는 소망을 가지고 좀 더 나은 삶을 함께 누리기 위해 노력하고 싶은가? (p.155) 선택은 자기 몫이지만, 한번쯤은 정말 고민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한편 필자의 견해나 바람과는 어긋나게, 40여년이 지난 지금 현대인은 폐해를 목격하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자본주의 경제의 실상을 뼈저리 체험하고 있다. 그 누구도 병든 인간을 제물로 하고서 그 건강을 부지하는 오늘날의 경제적 상황에 종지부를 찍지 못하는 지금(p.253), 오히려 경제는 '민주주의'라는 날개를 달고 정치와 엮이며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그 누가 세계 경제 위기를 예상했겠는가. 극심한 빈부 격차, 민영화 가속화, 지속적인 FTA체결 등은 결국 '너 죽고 나 살자. 너보다 내가 더 많이 가지자'는 소유욕에 다름 아니다.

 

건전한 인간을 위한 건전한 사회는 그렇게 계속 멀어져만 간다. 그렇다고 계속 우리는 우리 탓만 할 수 없다.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움직이자. 나서자. 행동하자. 존재를 보여주자. 언론을 장악하고 사찰을 일삼는 정부, 그릇된 이익을 위해 국민을 바보로 여기는 정치인들에게 일침을 가할 수 있도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 - 평범하지 않지만 평범한 소수자들의 이야기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1
인권운동사랑방 엮음 / 오월의봄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6월의 어느날, 뜻밖의 편지를 받았다. 자신을 무기수라고 소개한 그는, 나의 글이 실린 책을 보고는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펜을 들었노라고, 어디에도 말할길 없는 답답함을 알리고 싶어 마음을 담아 편지를 보낸다고 했다. 그 편지를 읽고서, 나는 반가움과 함께 희망을 발견하였다. 누군가가 고이 엮어낸 삶의 이야기가, 때로는 다른 누군가에게 잔잔한 파동으로 다가가 큰 울림을 자아낼 수 있다는 것에.

 

그/녀의 이야기, 곧 나/우리의 이야기

 

작품 속 주인공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며 그네들 삶의 자락을 펼쳐내는 이야기는 곧 나/우리의 그것과 연결된다. 그것은 곧 '정체성'이라는 개념으로 대변되는데, 이야기속 인물들처럼 한 사람의 본질이자 가치관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그 정체성이 주류와 다를때, 그/녀는 본의 아니게도 곧 소수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면서 만들어진 인생은 다수가 쳐놓은 울타리 밖에서 맴돌게 되고, 때로는 아픔과 상처를 겪으며 더욱 단단해지거나 무참히 꺾여버린다.  

 

일반적으로 평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그들의 삶을 접하면서 느낀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에 좌절하거나 소외된 마음에 슬퍼하는 모습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세상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도 꿋꿋이 자기 위치에서 제 몫을 다하는 이들도 있고, 그 누구의 말보다도 자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하는 친구들도 찾을 수 있었다. 결국에는 주어진 인생을 적극적으로 개척하고 좀 더 나은 삶을 바라며 정진하는 장면들이, 굳이 활자를 갖다붙이지 않더라도 생생한 그림으로 벅차게 다가온 것이다.

 

차별은 남의 일이 아니다

 

비단 책에서 접한 힘겨운 상황이나 소외되어 서글픈 다양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지 않더라도, 차별은 우리 삶 곳곳에 담겨있다. 가까이는 타고난 신체적 차이에서 오는 차별부터 멀리보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관계에 의한 을의 반란까지, 차별의 모습과 폐해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인간 군상 속에서, 내가 먼저 차별하지 않으면 되레 차별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은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야기에 우리는 어떤 덧칠을 입혀 더 나은 삶을 꿈꿀 것인가. 먼저는 자신의 삶에 대한 확신과 애정, 그에 따른 부단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다음은 그것이 나만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도록 서로의 손을 잡는 것이며, 나아가 한 목소리로 반차별을 노래할 수 있도록 뜻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 그다지 상관없는 상대방의 정체성, 나와는 별개의 문제로 본질을 마주하기보다는, 그/녀의 간절함이 헛된게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관심과 지지가 이어질 때 비로소 변화를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귀 기울이기. 응답하기. 연대하기.

 

본인에게는 뚜벅뚜벅 자욱을 남기는 이번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깊숙이 뇌리에 박혔다. 내가 보기에는 특이할 것도 없고 유별날 것도 없음에도, 그토록 다양한 삶에서 베어나온 차별들이 그려낸 풍경은 참 아찔하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오롯이 자신의 인생을 풀어내는 것이야말로, 그 전에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어떠한 형태로든 응답하는 것이야말로 나/우리가 할 수 있는 작지만 최선의 행동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분명 갈길은 아직 멀다. 차별금지법은 몇년째 표류 중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차별들도 스물스물 올라오고 있는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결코 지치지 말고 응원하자. 더 많은 이야기가 울려퍼지고 더 깊은 신뢰가 쌓일수록 더 큰 힘이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하지 않는가, 헌법 제10조와 제11조 1항에 명시된 것처럼.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