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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엘리아데 - 종교와 신화 ㅣ 살림지식총서 40
정진홍 지음 / 살림 / 2003년 10월
평점 :
종교는 매우 민감하고 어려운 주제이다. 사실 우리나라 만큼 다양한 종교가 번성하고 있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종교의 본질은 뭘까? 아마도 유한한 인간의 ‘우주의 기원’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하거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영원한 삶에 대한 염원’ 때문일 테이지만, 난 아직도 뚜렷한 종교가 없다. 그렇다고 무신론자는 아니다. 그러면, 신을 믿는가? 가끔씩 있나 싶기고 하다.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마침 부처님 오신날(석가탄신일)이 다가오는데 아마도 나의 종교적 지향은 굳이 말한다면 불교에 조금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
가끔씩 아내와 함께 등산을 하다가 절이나 아담한 암자가 있으면 들어가 둘러보다 불상이나 기타 상징물에게 운동삼아 절을 하기도 한다. 가끔씩 대웅전에 들어가 복전함에 천원짜리 몇장을 넣고, 아내가 108배를 시작하면 나도 따라서 55배 또는 33배정도를 한다.(무릎 때문에 갈수록 힘들다!) 종교에 대해 나와 비슷한 입장인 아내에게 "절하면서 무엇을 기원했는가" 물으니 가족의 건강과 행복이라 대답한다. ㅎㅎ 아무 생각없이 절 운동을 하다가 어느 순간 나도 그러게 된다. 그러고 보니 모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기복신앙에 근거하는 것 같고, 그런 면에서 나도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이다.
내가 절을 좋아하는 이유는 적요감이라 할까? 산에 둘러싸인 절의 고적하면서 안온한 풍경이 좋고, 마음이 편안하기 때문이다.(바람에 따라 가끔씩 울리는 처마의 풍경소리도 기분을 좋게 한다.) 물론, 기독교 못지 않게 불교도 갈수록 상업화 되어가고 있다. 종종 절에 들를 때 마다 “기와 불사를 하면 후손이 집없는 설움을 면할 수 있습니다”라는 플랭카드가 걸려 있다.
후손까지 갈 필요 없이 쉰이 넘은 나이에 난 아직까지 집이 없는데(여기서, ‘집이 없다’는 말은 소유의 개념을 말한다. 전셋집은 있다.) 그렇다면, 독실한 불교 신자인(였던) 부모님이 기와불사를 하지 않아서 였을까? 웃기는 얘기다. 비록 난 집이 없어도 그 때문에 설움을 겪은적은 없다. 물론, 집주인이 전세값을 올려 달라해서 이사해 본 적은 있지만, 조금 불편할 뿐이다.(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요즘은 체념하며 산다.)
독후감을 쓰는 자리인데 얘기가 많이 옆으로 샜다. 이 책은 현대 종교학의 대가 엘리아데에 대한 우리나라의 종교학의 대가라 할 수 있는 정진홍 교수의 입문서라 할 수 있다. 살림 지식 총서 40번째 책으로 엘리아데에 대한, 또 종교학에 대한 얇지만, 아주 효율적인 소개서인 셈이다.(겨우 87쪽 밖에 안된다. 하지만 주제가 주제인 만큼 결코 쉬운 책은 아니다. <성(聖)과 속(俗)>이 엘리아데의 대표작이라 하는데 읽어보진 않았지만 엄청 어려울 것 같다. 맛보기라 할 수 있는 이 소책자도 이 정도니...(엘리아데가 바라보는 종교의 본질문제와 관련하여 상징체계, 신화와 제의 등의 개념들이 언급된다.)
일단 미르체아 엘리아데(1907~1986)에 대한 기본적 설명이 나와 있는데, 종교학의 비조라고 평가 되는 막스 뮐러(1823~1900)가 종교에 대한 인식을 도모하는 새로운 학문을 처음으로 ‘종교학’이라고 부른 이래 엘리아데는 다른 종교학자가 도저히 따라올수 없는 근본적이고 광범위한 주제와 문제제기, 의미 해석 등 종교인식의 방법론이나 (창조적) 해석학을 통해 현대 종교학의 최고봉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그는 루마니아의 부카레스트에서 태어나 미국 시카고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인도의 요가에서부터 호주 원주민의 종교에 이르기까지, 신화와 역사, 연금술과 성년의례 등 종교문화 전반에 대한 학술적 저술뿐만 아니라 여러 권의 소설과 희곡까지 쓴 보기드문 천재라고 할 수 있다.(66,67쪽을 보면 엘리아데는 특히 시인을 높이 평가하는 데 시적 창조란 시간의 소거 - 언어안에 응집된 역사의 소거-를 함축하며 시인은 마치 우주창생의 순간에, 곧 창조의 첫날과 동시에 자기가 있었던 것처럼 여겨지는 그러한 세계를 발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엘리아데가 크게 평가받는 이유는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종교를 실재하는 본질로 전제하는 데 반하여 ‘사람들이 무엇을 일컬어 종교라 하는가?’]라는 시점전환. 다시말해, [형이상학적인 전제의 부정으로 특징지어지는 이러한 물음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는 소박한 관찰부터 시작한다.]에서 시작해서 ‘사람들이 무엇을 일컬어 종교라 하는가?’라는 물음을 넘어 [‘종교라고 일컬어지는 현상’을 삶속에서 드러내며 살아가는 사람살이에 대하여 총체적인 관심을 기울려 인간의 삶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는 하는 물음에 가 닿는데 여기서 엘리아데는 인간의 삶이 지닌 중층성또는 중첩성을 발견하는 것이다.](17,18쪽 발췌) 라는 점에서 인 것 같다.
결국 존재론과 인식론의 문제로 귀결되는 건가? 아리송 하기만 한데 정진홍 교수가 예시하는 [인간은, 예를 들면 한그루의 나무를 ‘봅니다.’ 이때 본다는 사실은 ‘나무’에 갇히지 않은, ‘나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 나무를 통해 내 삶의 현실 속에서 펼쳐지는 것입니다.]라는 말은 선불교에서의 참선 화두같기도 해서 더욱더 헷갈린다.
그러면서 “나무는 나무이되 나무이지 않고, 나무이지 않되 나무입니다.” 라는 진술은 ‘일상성과 비일상성의 중첩성’을 뜻하며 엘리아데는 ‘종교라고 일컬어지는 문화가 바로 이 일상과 비 일상의 틈새에서 빚어진 삶의 경험을 드러내는 현상’이라는 건데 이를 두고 정진홍 교수는 이 책에서 ‘성(聖)과 속(俗)의 변증법’이라 이름 붙인다. 다시 말해, 엘리아데의 ‘성과 속’은 분리되거나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은 인간의 존재양태의 다른 두 측면이라는 것이다.(성만으로 있는 성도 없고, 속만으로 있는 속도 없다.) 어렵다!
그리하여 종교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나 라는 인간, 그리고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명확한 해석’과 상통한다는 점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종교의 이해는 인간의 이해, 세계의 이해, 우주의 이해로 무한히 퍼져나가는 근원적인 주제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플라톤을 비롯한 그리스 철학자의 우주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현대 물리학의 빅뱅이론에 이르기까지 우주와 세계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지만) 과학적, 합리주의적인 가치관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우주의 카오스가 인간의 로고스(이성)를 통해 질서 있는 코스모스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으로 정의 할 수 있을려나. 이게 진정한 우주와 세계 이해인가? 글쎄...
게다가 프로이트란 작자는 종교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인간이 충족시키지 못하는 욕망들을 충족시켜 주는 기제’고, 또 신이란 것은 ‘인간이 어린 시절에 아버지와 맺는 관계(보살피고, 심판하는)에서 아버지라는 개념을 신으로 높인 것’ 에 불과하다고 주장(신의 존재증명을 할수 없으니 반박하기도 어렵다.) 했다고 하고, 맑스는 종교가 ‘현실의 불행으로 고뇌하는 민중의 한숨이자 아편’이라고 정의한다는데, 이게 인간과 종교에 대한 진실된 이해인가? 모르겠다!
신 없는 종교도 가능하냐?는 물음에 당연히 가능하고, 그 예로 불교가 그렇다고 하기도 하던데(하지만,불교는 다신론에 가깝다는 반박이 유력하다.), 존재의 근원자로서의 신이라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이 떠오른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있다면, 과연 하나님은 선하고 정의로운가? 주위에서 착한 사람이 사고를 당하고, 벌 받는 것도 열 받는 일이지만, 악한 놈이 복 받는 꼴을 보면 화가 나 거의 환장할 지경이다. 내세의 심판을 들먹이지 말지어다. 현실의 단순한 ‘정의 관념’에 반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크게 벌 받는 적도 없고, 복 받은 적도 없어 다행이다.(앞으로는 모르겠다. 부디 하나님의 너그러운 사랑을 소망한다.)
나이를 먹어 가면서 종교(학)에 관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나 지력의 한계를 느끼는 이 좌절감은 어찌할거나? 죽기전에 신비체험이라도 해봤으면 좋겠다. 종교, 앎의 영역인가? 믿음의 영역인가? 깨달음의 영역인가? 하는 의문은 ‘성과 속’의 변증법처럼 분리되어 있는 서로 다른 영역이 아니라 "알고, 믿으며, 깨달아 가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정리해 본다. 나 자신의 무지를 다시 한번 자각하게 됐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알고,느끼며, 깨닫기 위해 계속 용맹정진할 것을 다짐한다는 각오를 밝히며 이쯤에서 접기로 하자. 이번에 오시는 부처님께서는 제발 관할구역을 따지지 말고, 북한과 시리아를 포함하여 온누리에 자비를 베풀어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