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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평점 :
토니 모리슨의 5번째 작품으로 풀리처상 수상작이라 한다. 흑인 노예의 비참한 삶과 말 못할 고통의 역사, 기억을 통해 노예제의 잔인성을 폭로하는 이 책에서(도) 토니모리슨의 역설적 작명법은 빛을 발한 듯 한데 가혹한 노예 농장은 '스위트 홈(Sweet Home)'으로, 사랑받지 못하는 흑인 노예는 '빌러비드(Beloved)' 즉 ‘사랑받는 자’로 표현되는 것이다.
읽은 책은 도서출판 들녘에서 2005년 3월 초판7쇄 발행일로 되어 있고, 번역은 김선형 이란 분이 맡았다. 굳이 이를 언급한 이유는 아무래도 번역이 문제인지 아니면 토니 모리슨의 문체나 소설작법을 제대로 이해 못한 독해력 때문인지 매끄럽게 읽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출판사의 번역본을 읽어보지 못해 비교할 수도 없으나, 이 책을 완독하는데 꽤나 힘들었다.
일단 번역문제와 관련해서 주인공 이름 ‘Sethe’를 다른 곳에서는 ‘세드’라고 표기하던데, 이 책에서는 ‘시이드’라고 번역되어 있다.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에 대해 어떻게 표기하는냐의 문제는 원음에 가깝게 번역한다는 원칙에 따라 그런다고는 하지만 번역에서의 항상 마주치는 직역과 의역의 정도 문제는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물론, 의역이라도 ‘작가의 의도와 작품성을 해치지 않는다’는 범위의 한계가 설정되어 있겠지만 이것 역시 번역자의 주관적 판단일 수 밖에 없어 시대배경과 언어와 문화 등을 포함해서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외국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참으로 괴롭고도 어려울 일 일 것이다.
예를 들어 352쪽의 ‘저는 몰랐지만 아무튼 그 덕분에 치즈가 더 단단해진 거예요.’라는 문장을 보면, 토니 모리슨이 은유적으로 표현한 건지, 관용어를 사용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확신이 깊어졌다는 뜻’ 이라고 굳이 각주 처리한 점을 보면 직역과 의역을 상황에 따라 어떻게 적절하게 처리하느냐의 문제는 번역자의 가장 큰 능력이자 미덕이 아닐까 싶다.
한편, 내용으로 들어가서 이 소설 자체가 비인간적인 노예제 고발, 지모신의 모성애를 통한 인간구원과 영혼의 치유라는 묵직한 주제를 은유적인 문체, 교차적 시점에 의한 사건의 재구성, 귀신과 주술적 요소를 가미한 환상적 리얼리즘 기법 등을 혼용한 서술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쉽게 읽혀지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통스럽게 읽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강조된 소설이라면, 그만큼 번역의 난이도도 높았을 것으로 짐작은 된다.
이 소설은 형식상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부의 첫 문장 들은 토니 모리슨이 아마도 자주 쓰는 또는 특유한 소설 작법이 아닐까 싶게 반복적인 문장구조를 통해 인상적으로 꾸며졌다. 1부(하나)의 첫 문장 ‘124번지는 원한이 서려 있었다. 아기가 뿜어내는 독기가 충천했다.’는 2부(둘)의 첫 문장 ‘124번지는 시끄러웠다.’로 이어지고, 마지막 3부에서는 ‘124번지는 고요했다.’로 첫 문장이 시작되는 것이다.(사건의 발단과 전개, 위기와 절정을 거쳐 갈등의 해소를 통한 결말에 이르는 이야기 구조와 관련된 듯하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랄 수 있는 2부(둘)에서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생각해 어린 딸 빌러비드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시이드와 죽은 언니 빌러비드의 존재를 느끼는 동생 덴버의 시각에서 그려진 각 장의 마지막에 각각 [그애가 내게 돌아왔어요, 내 딸이. 그애는 내 거예요](345쪽), [언니는 내 거예요. 빌러비드. 언니는 내 거예요.](354쪽)라는 끝 문장과 뒤이어 어머니 시이드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았던 빌러비드의 시각에서 구성된 장의 첫 문장 [나는 빌러비드, 엄마는 내 거야.](355쪽), [나는 빌러비드, 그녀는 내거다.](361쪽)과 수미쌍관적 대구를 이룬다. 어머니 시이드와 죽은 딸 빌러비드, 그리고 살아남은 딸 덴버. 이렇게 흑인 3모녀는 ‘서로가 서로에게 내 것’인 한 몸인 것이다. 이러한 몸의 순환은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이나 봄·여름·가을·겨울 계절의 바뀜과 같이 자연의 순환을 닮았다.
이 소설에서 ‘젖’으로 표현되는 모성은 만물의 생명을 키워내는 대지를 상징하면서 살고자 하는 본능처럼 매우 자연스러운 것인데 노예사냥꾼에 발각된 상황에서 어린 딸 빌러비드를 자신의 손으로 죽여버렸던 시이드의 야만적이고 잔인한 행동(‘피’로 상징됨)에 대해 해명의 의미를 담고 있다.
[내 자식은 절대 안돼. 네가 내 거라는 얘기는, 나도 네 것이라는 말이란다. 내 자식들 없이는 절대 숨을 쉬지 못할 거야.~ 내 계획은 너희들을 전부 다 데리고 저승으로 떠나려는 것이었지.](343쪽) 폴 디가 시이드를 떠나면서 한 “당신 사랑은 너무 짙어 숨막혀.”(281쪽)라는 말 은 시이드의 이 지독한 모성애를 설명하는 위와 같은 진술을 통해 ‘살아서 노예의 삶을 사느니 죽어서 자유를 얻는다.’라는 명제로 변환, 역설적으로 재해석되는 것이다.
흑인노예의 비참한 삶과 고통스러운 그들의 역사를 새삼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나 이 소설을 읽다보면, 백인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흑인노예의 원한을 우리의 씻김굿(또는 오구굿)으로 풀어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또한 여기에 그려지는 흑인 공동체 문화와 124번지에 살아가는 한 흑인 가정의 풍경은 우리 민족의 신산스러운 삶, 특히 ‘한’의 정서를 떠올리게도 한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사는게 힘들어 그리고 배가 고파서, 시장바닥에서 복어내장을 구해와 온 가족이 끓여먹고 죽을려고 했다는 어머니. 입을 덜기위해 어린나이에 식모로 간 누이. 군대에 가서야 사람이 하루 세끼를 먹는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형님. 우리 이웃들의 이런 얘기를 듣고 자라면서 나는 새삼, 사람이 세상에 나서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정신적·신체적 자유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경제적 여유는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 지옥 같은 직장에서 노예 같은 삶을 이렇게 꾸역꾸역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