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만다는 것은 소설의 경우, 상당히 비효율성이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이번에도 작년에 읽다만 줄리언 반스의 이 책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끝까지 마저 읽었다. 사실 결말부분의 반전 때문에 다시 처음부터 읽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기도 하던데 예상보다 힘들게 읽었기 때문에 그러고 싶지는 않다.(이 독후감을 쓰기위해 다시 뒤적 거리기는 했다.)
이 작품으로 2011년 줄리언 반스가 노벨상, 공쿠르상과 더불어 세계3대 문학상이라 불리는 맨부커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2부로 구성된 짧은 장편임에도 철학, 역사, 문학에 대한 작가의 방대한 지식과 심오한 사고가 담겨있어 이 상의 권위에 값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또한 작가의 경력을 보니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편찬한 적이 있는데 확실히 언어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
이 소설의 전체적인 느낌은 작가의 치밀한 의도였는지 아니면 쓰다보니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독자로 하여금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처음부터 다시 읽게 하거나 한동안 다시 생각하게 하는데 그럼에도 속시원한 결론을 찾을 수 없어 답답하다. 기껏해야 아마도 그럴 것이다 또는 그러지 않았을까? 정도여서 뭔가 여전히 찝찝하다. 결국 축적된 기억(그 기억이라는 것도 왜곡과 편집으로 조각난 것이다.)으로 이루어진 우리네 인생... 진실과 정답이 없을지라도 이 거대한 혼란 속에서 자유에 따른 책임을 지면서 성찰적 삶을 살자는 철학적 얘기를 한 것 같기도 하다.
[아무 이유도 목적의식도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후, 죽음만을 유일한 필연으로 맞이하게 되는 것이 인간존재의 조건이다. 자유란 어쩌면 이런 인간 운명의 비극적인 필연을 성찰할 줄 아는 능력을 일컫는 다른 말인지도 모른다.](265쪽, 옮긴이의 말)
주인공 토니 웹스터는 60대 노년에 접어 든, 대머리의 이혼남으로 1인칭 화자시점에서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과거를 회고하는데, 1부에서는 40여년전의 치기어린 학창 시절과 연인이었던 베로니카와의 사랑얘기 그리고 헤어진 여친 베로니카와 사귀다 갑작스럽게 자살한 절친 에이드리언의 죽음이 큰 줄기를 이룬다. 작가는 한 개인이 겪는 사건(롭슨의 자살)과 그에 대한 기억을 사회적 의미에서 ‘역사’와 빗대서 에이드리언의 말로 표현하는데 아마도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일 것이 분명한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 빚어지는 확신’입니다.](34쪽)
E.H.Carr 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얘기 한 역사는‘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말은 과거의 사건에 대해 현재의 시점에서 역사가가 자신의 가치관과 방법론을 통해 해석한다는 의미일 텐데, 역사성 여부와 관계없이 의미를 확장한다면,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로 그가 죽은 후 남겨진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각자의 내면적 기준에 따라 평가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문제는 그 기억이라는 것이 살아남은 주인공 토니 웹스터조차도 정확한 진실이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살아남았다. ‘그는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했다.’후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101쪽)
그래서 2부에서 작가는 현재 시점의 토니의 시각에서 이 문제를 더 깊이 파고 들어가는데 여기에는 베로니카의 어머니인 사라 포드여사의 유산문제가 가장 큰 축으로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도대체 이 여인은 죽으면서 왜 토니에게 500 파운드와 자살한 에이드리언의 일기를 남겼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독자들에게 책을 덮지 못하게 하는데 그 궁금증은 끝까지 해소되지 않는다. 어차피 인생은 그런 거야 하는 식으로, 소설을 마무리 하지 못해 두루뭉술하게 처리한 것인지, 작가의 의도에 따른 열린 결말인지 여전히 궁금하다.(여기서 책을 사이에 두고 저자의 의도와 독자의 해석문제가 대두되는데 이 역시 ‘역사’와 ‘기억’에 대한 문제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토니의 시기와 저주에 가득찬 예감이 틀리지 않아 비극을 불러온 것에 대한 보복인가? 역사는 우연의 반복이며 사소한 편지 한 장으로도 다른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바뀔 수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기 위한 고도의 트릭인가? 아무리 그렇다하더라도 40여년이나 지나 죽으면서 하는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황당무계하여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햇볕이 내리쬐는 등나무 아래에서 팔을 수평으로 뻗으면 비밀스러운 제스처를 취하던 그녀가 죽기 전 사실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너, 토니였어!’라는 의미를 함축한 것이라면, ‘추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세상을 떠나기 전에 보낸 마지막 몇 달 동안 에이드리언은 행복했다고 생각해’라는 편지는 죽어가면서까지 토니의 질투심을 유발하려는 술책이었다는 얘긴가?
또한, 딸을 질투한 어머니가 딸의 남자친구를 가로채 관계를 갖고 아이까지 낳는다는 충격적인 내용에다가 에이드리언의 이성적 판단에 따른 자살. 게다가 에이드리언의 지성미 돋보이는 b,a,s,v라는 정수가 포함된 축적을 표현한 공식은 뭔가? 번역이 잘못되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마지막에 토니는 ‘이제야 뜻이 명확해졌다’고 단언하고 있는데 나는 아직까지도 이해가 되지 않아 이게 도대체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인가 싶다.
그런데 이 ‘엉큼한’ 작가는 여기에서도 언어가 갖고 있는 권능 또는 한계문제까지 은근슬쩍 드러낸다. 토니가 ‘수제’ 감자칩을 주문하는데 “저희업소에선 손으로 안썰어요. 미리 썰어놓은 것을 배달해 쓰죠”라고 대답하는 바텐더.“그렇다면 ‘수제 감자칩’이란 말은 사실 다른데서 썰었다는 것이고, 십중팔구 기계로 썬 것이겠네요?
‘수제’라는 말뜻이 ‘반드시 손으로 직접 썰었다’는 게 아니라 ‘통통하다’인지는 꿈에도 몰라서 그랬지”(248,249쪽 발췌) 라며 응수하는 토니.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이는 토니의 말을 나도 이쯤에서 꼭 하고 싶다.
“미안해요, 그냥 이해가 안가서 그랬어요.”
(우리도 술집에서 간혹 ‘가오리회’인줄 알면서 ‘홍어회’라고 말하고, 쓰기도 한다.)
어쨌든, 요즘 소설이나 영화의 대세인 ‘반전’을 지나치게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펼치다보니 열린 결말이라는 미명하에 애매하고, 어정쩡하게 마무리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나와 같이 무능한 독자의 몰이해를 탓한다면, 작가가 나서서 책임있게 해명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소설의 반전이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틀리지 않듯이 이에 대해 철학적이고, 위트있는 언어를 맘대로 부리며 맨부커상을 수상한 작가, 줄리언 반스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 역시 틀리지 않을 것이다.(이 잡글의 마무리가 쉽지 않아 서둘러 끝맺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면서 나의 이 궁금증을 해소해줄 독자 제현의 고견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