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ㅣ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8
최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올해도 5.18 이 다가와 최윤의 중편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1988)를 다시 읽었다. 매번 읽기가 고통스럽다. 80년 광주...까까머리 중 1때 겪었던 5.18. 시들어가던 아카시아 알싸한 꽃향기... 빨리 집에 가라던 담임선생님... 맞춰 놓았던 여름 하복을 찾아가야 되는데...
"아야, 너 아즉까정 안 갔냐? 시내 난리 나부렀단다. 니것은 안됏응게 암거나 갖고, 얼릉 집에 가야 쓴다." 도로를 막고서 쭉 깔린 군인아저씨들...
" 학생, 여기로 가면 안돼. 돌아갓! " 군인아저씨들...
흰 빤스만 입은채 피흘리고 있는 형들... 체념한 듯 고개숙인 형들을 몽둥이로 또 내리치던 군인아저씨들...
해마다 위문편지를 보내드렸던 국군장병 아저씨들이 왜?
두근 두근 쿵쿵...미칠듯이 뛰는 심장, 피돌이가 빨라진다. 꿈속을 달리듯 떨어지지 않은 다리...
날은 어두워 지고, 까닭없이 흐르던 코피... 돌아돌아 얼마나 달렸을까?... 드디어 골목초입.
"엄마, 왜 밖에 나와 있는가?"
"아이고, 이눔아! 왜 인자 오냐? 넘들은 폴쎄 다 왔단디...이 에미가 월매나 애간장이 보타졌는지 아냐? 시방 시내에는 공수부대가 눈이 삘게 갖꼬 중학생이고, 여고생이고 무담씨 때리고, 볼바분단디... 왜 인자사 왓냐 . 아이고, 내새끼... "
날 보자마자 와락 껴안고, 악을 쓰며 울던 어머니... 가위눌린 듯, 고통스러운 기억들...
저기 소리없이 꽃잎은 지고...이렇게 속절없이 봄날은 간다.
[여자애는 바닥에서 깨진 시멘트 조각 하나를 집어들었다. 남자가 말릴 틈도 없이, 설령 남자의 손아귀에 잡혔다 해도 어디서 솟는지 모를 힘으로 그것에서 빠져나오면서, 빠른 동작으로 경련적인 리듬에 사로잡힌 것처럼 집어든 돌 조각으로 몸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돌 조각의 날카로운 이빨이 허벅지에 뱃가죽에 등허리에 종아리에 마구잡이로 가로 세로 붉은 선들을 긁어내기 시작했다.](213쪽)
[우리엄마. 구멍 나버린 엄마. 내가 조금 더 빨리 뛰어나왔다면, 나를 휘어잡는 팔을 빼내는데 걸린 시간이 없었다면.... 모든 일이 바뀔 수 있었을까.~ 우리는 왜 거기 있었을까. 엄마. 허수아비처럼 휘둘려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헉하고 고꾸라지던 엄마. 내가 뛰어나갔을때는 이미 벌어진 눈자위를 되잡을 시간도 없이 상처가 공중으로 몇 변 튀다가 밀어닥치고 밀려가던 사람들 틈에 쓰러지던 엄마. 엄마랑 나는 그날 왜 거기 있었을까.](216쪽)
[자면 안돼. 자 꼬집어볼까. 잠을 깨야지. 내 살은 꼬집어도 아프지도 않아. 이렇게 비틀어도 살점하나 부르트지도 않아. 손가락에 힘이 없으니 꼬집어 지지도 않고... 정말 잠이 들면 안 되는데.... 오빠를 찾아야 돼. 오빠 무덤이라도 찾아야 돼. 오빠가 얼마나 놀랄까. 엄마 소식을 물으면...뭐라고 대답해야 될까. 나 혼자만 살아서 먼 길을 왔다고 오빠가 돌아누워버리면 어떡하지.](222쪽)
[새벽 빛이 점점 더 푸르게 길 저편에서 부터 퍼져 왔고 나는 몸둘 바를 모르고 그 속을 걸어가기 시작했지. 밤새도록 기다렸던 새벽 빛 인데, 그 빛이 부드럽게 내 몸을 감싸는 것이 죄스럽고 무서웠어. 나는 그때 어디에쯤 있었을까.](233,234쪽)
[얼마나 먼 길을 여기까지 왔나. 몇 밤이나 지났나. 그날이 꼭 어제 같은데, 아무리 멀리, 오랫동안 도망쳐도 내 뒤에 꼭 붙어 따라오는 그날, 조금만 뒤돌아 보아도 사방 어디에서나 번쩍 눈앞에 마주서는 그 날.](261쪽)
그 날
- 정민경
나가 자전거 끌고 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뒤에 올라 타불더라고. 난 뉘요 했더니, 고 어린 놈이 같이 쫌 갑시다 허잖어. 가잔깨 갔제.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제.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 거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 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그때 나가 떤 건지 나 옷자락 붙은 고놈이 떤 건지 암튼 겁나 떨려불데. 고놈이 목이 다 쇠갖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 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 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얘 갖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 가고, 난 뒤도 안 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제.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 있데. 어린 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 보고야, 라지오도 안 틀었시야. 근디 멧날 메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위 시는 2007년 5.18기념 청소년 백일장에서 장원한 작품으로 여고생이 쓴것으로 알려졌다.
(5.18을 겪은 친척어르신의 회상을 토대로 구성하였다고 하는데, 지켜주지 못한 어린학생에 대한 미안함과 걱정스러운 마음을 사투리를 통해 현장감 있게 전달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계절의 여왕이자 가정의 달이라는 5월은 슬픈 일이 많이 일어난 달이기도 하다. 5.18이 일어났고, 평생 잊지못할 그 이름 인간‘노무현’을 잃었다. 그 생생한 상처를 결코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사랑하는 친구, 우리를 먼저 떠나버린 친구의 누이동생의 흔적은 이미 상실해버린 꿈처럼 우리의 빈곤한 일상의 갈피에서 매 순간 생생한 상처로 되살아 났다.](227쪽)
살아남은 자의 슬픔인가? 비도 오고, 막걸리를 한잔해서인지 감상적인 글을 쓰게 되었다. 이 소설의 주절주절한 이 독후감은 김병익 선생이 해설에 적어 놓은 말로 서둘러 마무리 한다.
“역사적·현실적 왜곡과 잘못을 반성하며 실제의 참모습을 확인하되 당당하게 그것들과 맞설 수 있을 때 진정한 화해의 심정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