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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철학의 풍경들
진동선 글.사진 / 문예중앙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카메라가 출현한 이래, 기술의 발달로 점점 그 보급이 확대되어 핸드폰의 카메라도, 카메라의 범주에 넣는다면 거의 1인 1카메라 시대에 도달한 지금, 사진을 찍는 행위는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 분명, 카메라의 보급은 사진이라는 매체가 일반인들도 '예술'의 영역에 다가설 수 있는 가능성을 넓혀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까 싶다. 차곡차곡 쌓이는 터치가 아닌, 프레임 수백만장 쌓이는 영화필름이 아닌, 단 한순간의 손짓으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진이라는 매체는, 분명 가장 보편화된, 그리고 큰 파급력과 필요성을 지닌 예술적, 기록적 재료임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DSLR의 보급은 '장비로써의' 전문가와의 차이를 거의 없게 만들었다. 사실상 전문가가 사용하는 물감과 붓을 쥐어준 것이나 다름없고, 35mm (영화용)필름카메라나 RED ONE(추노, 국가대표 등을 촬영한 디지털 영상 카메라) 같은 카메라를 쥐어준 것이나 다름 없다. 게다가 이제 DSLR로도 영화촬영이 가능한 시대다. 렌즈군과 기타 장비가 보편화되진 않았다고 해도, 기본적인 렌즈군으로도 심도를 조절하는 것이 가능한 DSLR 같은 경우는 전문가의 흉내를 내기 딱 좋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전문가로 부르진 않는다. DSLR 의 보급은, 기술적인 사진의 수준이 향상되는 길을 좀더 넓혀놨지만, 그렇다고 기술적 수준의 향상이, 질적, 미적으로 향상된 사진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처럼. 가능성이 조금 향상되었다고 해서 그 길이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이 된 것은 아니다. 솔직히 사진의 미덕중에 '우연'이라는 요소가 다른 매체보다 두드러지긴 하지만, 그것을 무기로 전문가가 될 수는 없듯이 말이다. 

결국, 장비가 다가 아니다..라는 진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놨다. 하지만, 솔직히 좋은 장비들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때로는 그 차이가 클 때도 있고, 미묘할 때도 있다. 사실 장비의 가치에 대한 허상, 허울 같은 얘기는, 필요성과 투자비용을 고려한 차이가 아니겠는가. 만약 동급 수준의 예술가들이 (사실 이런 가정은 터무니없긴 하지만) 큰 차이의 장비를 사용한다면, 결과 또한 다르지 않겠는가? 좀 바보같은 예이지만, 결국 하고싶은 얘기는, 더 좋은 장비는, 그 장비를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그만큼의 가치를 발휘한다는 당연한 얘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고가의 장비를 사용해서 잘찍는 사람과 못찍는 사람은 나뉠 수 있지만, 출중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저가의 장비를 쓰던 고가의 장비를 쓰던 분명 다른이들보다 뛰어난, 제 실력만큼 결과가 나오는 법이니깐. 

카메라 매커니즘의 이해는 사실 좋은 실력이 아니라, 일반적인 실력을 쌓기위한 코스일 뿐이다. 결국 좋은 실력, 좋은 사진을 위해서는 매커니즘을 뛰어넘는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사진철학의 풍경들>의 저자 진동선이 전하는 이야기다. 

"사진은 인접 시각매체들과 달리 이중의 모습으로 태어났다. 이성적이면서도 감각적이고, 사실적이면서도 추상적이고,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이다. 영원히 변함없을 양면성이다. (35p)  

저자인 진동선이 전하는 이야기는 사실 사진의 매커니즘, 혹은 기술적 스킬의 향상과는 직접적인 큰 관계가 없다고 보기에 무방할 정도다. 없다고 말하진 않지만, 그만큼 언급을 삼가한다. 아니, 그런 기술적 설명이 끼어들 틈이 없다. 기껏해야 빛, 어둠, 프레임, 구도 정도? 하지만 사진작가인 그에게 사진의 매커니즘, 스킬에 대한 지식을 의심할 정도로 심심한 독자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런 이야기는 살짝 뒤로 감쳐놨을 지라도 일련의 사유들 사이에서의 카메라 및 사진과 관련한 역사, 일화 등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많진 않다. 배경설명에 필요할때 언급하는 경우니깐). 분명한 것은, 이미 그것을 뛰어넘은 사진가가 하는, '결과물로서의 우수한 사진' 이 아닌, 피사체에 대한 인지부터, 찍는다는 행위에 대한 사유, 그리고 다시 또 인화된 사진을 바라보는 법에 이르기까지의 긴 호흡이 담겨있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는 매커니즘이 가진 규칙과 틀을 넘어서는, '정말로' 좋은 사진을 만들기위한 방법들을 '철학'을 통해서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사진은 만연한 사회적 실천이고 유희다. 철학이 없어도, 미학이 없어도,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 무언가를 찾고 간구하고 묻는다면 진리의 문 앞에 선 것이다." (234p) 

개인적으로는 사실, 저자의 사유에  푹 빠져서 페이지를 넘기느라 (실은 그냥 내 실력이 이정도이기에) 크게 인지하거나 신경쓰고 읽지는 않았지만, 순서를 보면, /인식의 풍경/ 사유의 풍경/ 표현의 풍경/ 감상의 풍경/ 마음의 풍경 에 이르른다. 크게 보자면, 어떤 사물을, 어떻게 인지할 것이지에 대한 판단에서 부터, 결과물이 된 사진을 넘어, 가장 이상적인 사진을 꿈꾸기 위한 사유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으로 보여진다. 분명 저자 또한 어느 행위의 단계에서 기본적으로 어떤 사유가 필요함을 구분하기 위해서 이런 순서를 정해놨을 테지만, 사실 그 순서라는 것이 '전원을 켜려면 / 전원 스위치를 돌려라' 처럼 A를 하기 위해 B라는 사유를 해야한다는 것이 '반드시'는 아니기에, 사진이라는 것의 시작과 끝에 전반적으로 모두 닿아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그의 철학적 지식을 보면, 그동안 그가 스스로에게, 또 사진을 향해 던졌을 질문들의 질량이 어마어마 했었을 것이란게 자명해보인다. 일반적으로 유명한 철학자부터, 사진작가부터, 조금은 알려지지 않은, 철학자까지, 현재의 그를 존재케하는 사진에 관한 온갖 철학들이, 그저 허투루 나온것이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온갖 철학자와 사진작가의 말과 행동이 인용되고, 그에 따른 그의 생각들이 합쳐지며 사진에 관한 철학이 하나씩 만들어질때마다 저자의 통찰력에 놀랄 따름이다. 게다가 물론 아주 어려운 개념들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타의 철학자, 사진작가들의 이론이나 사유들, 그리고 저자 자신의 사유들을 심플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본다고 하는 것은 감각의 작용이다. 모든 사진가들이 항상 어떻게 보는 것이 좋은지 갈등한다. 그러면서 이 갈등은 궁극적으로 사진이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알게된다. 갈등을 해결해줄 구세주가 사진이 아니라 철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130p) 

실제로 공간에 존재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진이기에 필수적인 '인식'에서부터 저자는 미술과 미학, 철학, 문학, 인문에 이르기까지 사진에 관한 사유가 과연 거기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까 싶은 부분까지 사진을 위한 철학으로 차용한다. 오히려 사진을 위한 말들 보다는, 존재에 대한, 인식에 대한, 시간에 대한 사유처럼 으레 사람들에게 사진과는 바로 연결되지 않았을법한 철학적 개념들도 모두 이곳에서 사진철학으로 탄생한다. 사진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셔터를 누르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인식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사유하는 것이라고 말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지배해온 그림의 영역을 벗어나, 가장 닮은 '재현' 의 영역의 탄생은 어쩌면 회화보다 더 복잡한 사유를 필요로 했던 것일까?  

"사진은 피사체를 발견하면서부터 시작하는 '발견된' 오브제 미학이다. 창조된 오브제 미학이 아니다."(62p)

작가는 사진이라는 매체를 상투적으로 칭찬하진 않는다. 겸허히 돌아본다. 얕보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애정과 확신, 의지는 어디에서건 느껴진다. 기록의 도구로써, 진실의 대변자이기도 한 반면에, 오히려 더 큰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처지로 전락하기도 했던 사진,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해 '빚진' 사진 등 이런저런 사진의 한계성을 스스로 인정하지만, 더불어 그 한계의 극복 가능성과, 또 그 한계의 이면이 지닌 다른 매체와 차별화된 가능성을 이야기 한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사진, 혹은 사진을 찍는 행위에 대한 깊은 반성과 성찰, 그리고 꺾이지 않는 의지가 서로 한데 뒤엉켜 각 순서의 말미엔 결국 한가지씩 사유를 내놓는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사진을 통해서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법, 사진을 통해서 세상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법, 사진을 통해서 세상을 사랑하는 법."(328p) 

이책은 마치 에세이를 읽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사진을 중심으로한 철학적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곧 삶과 연관되어 있기도 일쑤고, 문체 또한 부담없이 읽기 좋게 되어있다. 사진을 바라보는 전방위 적인 태도는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어떤 태도와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만큼 정교하고 끈질기다. 어쩌면, 너무 단(맛이 나는) 약이다. 그래서 오히려 에세이 같은 분야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나에게) 가장 큰 문제(?)는, 두가지였다. 첫번째는, '앞으로,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에는 전과 다른 어떤 중압감이 실릴 것이고' 두번째는 '더이상 사진에 대한 어떤 사유를 하더라도 이 책에서 읽고 느낀것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과 같은 걱정 아닌 걱정 이랄까. 물론 나는 이 책의 내용 또한 결국 망각속으로 던져버릴테지만, 작가가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 부딪혔던,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넓고 깊은 사유의 느낌은 쉬이 지울 수 없을 것 같다. 

사진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예술과, 삶과 많은 부분이 닮아 있었다. 어쩌면 실재와 가장 '닮은' 매체의 특징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갖가지 사유들은, 서로 떨어져 있지만 맞닿는 지점이 많았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그만큼 (표현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모호한 문제들도 있었고, 그만큼 계속해서 밀고나간 사유이기도 할 것이다.  

사진을 찍는 행위가, 자신의 일이 되지 않는 이상, 한장의 사진을 찍는데 이와 같은 사유들을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읽은 한가지만 곰곰히 생각해봐도 다행일거다. 취미로 하는 사진찍는 행위가 이와 같은 사유를 하는 것은 여전히 쉬운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조금이라도 달라지지 않을까. 앞으로 또다시,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이 움직이기 전 그러니깐,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는, 그 "찰나의 순간"이 지닌 가치가. 

"보고 새기고 마주하고 돌아보는 모든 것들은 전적으로 사진가의 몫이다. 때문에 한 장의 사진은 사진가의 모든 것이다. 지나온 삶의 시선이면서 그 순간 세상과 호흡했던 생의 감정, 세상을 바라본 거울과 창이다. (3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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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20세기에 들어와 우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유파와 양식과 언어를 갖게 됐다. 예전에는 하나의 양식이 종종 수세기 동안 유지되곤 했지만, '모던'시대에 들어와서는 예술의 양식들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공장의 기계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17)

 
'들어가기'에 적힌 이 말처럼, 몇일 밤이 지나면 우리를 유혹하는 새 상품들이 즐비하게 출시되듯, 20세기에 이르러서 실로 다양하고 복잡한 유파와 운동이 일어났다. 제 각각의 운동과 유파, 양식들은 각각 고유의 언어를 가졌지만, 서로 영향을 주며 이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충돌하기도 하면서 지금의 현대미술에 이르렀다. 특히, 그동안의 실제적인 표현과 원근법을 사용하던, 오래된 고전주의와 결별을 선언하다시피 하며, '재현'의 틀에서 벗어나 '순수예술'을 지향하게 된다. 그 재현의 디테일함으로 인해, '재현도'를 제일로 치던 시대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방가르드 운동의 흐름에 대해서, 여기서는 대략적으로만 이야기 하는것이 좋을 것 같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한번 읽은것으론 이것들을 완전히 습득했다고는 하기 어렵고, 또 그것들을 표현할 깜냥이 없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흐름의 경계나 평가가 엇갈리기도 하는데 하물며 이런 일반인이 설명해봤자 혼란만 부추길 뿐이니깐.


19세기 초부터 그리 길지않은 주기로 등장한 복잡하고 다양한, 일련의 아방가르드 운동은 어느 한 운동이 전의 운동을 대체하거나, 계승하거나 혹은 공존해왔다. 이 운동들을 기록한 순서를 보면 기본적으로는 연대기 순으로 배열되어 있지만, 몇가지는 시대적 순서에서 벗어난 것들도 있다. 한번 읽은 것만 으로는 이런 일련의 운동들의 개념과 특성에 대해서 습득하는 것만으로도 능력을 다 소진해 버렸으므로, 뚜렷하게 그 이유에 대해서 열거할 순 없지만, 아마 한 운동이 다른 운동을 계승하는 미학적 흐름을 고려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되는데 정확히는 설명하기 어렵다. 다만, 한두가지 운동의 배열이 그렇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큰 틀이 연대기적으로 이어져있고 각 운동과 유파를 설명하면서 전/후 운동 혹은 동시대의 운동의 흐름과 영향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기 때문에 특별히 난해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운동과 유파의 경계가 칼로 베듯 갈라지는게 아니기에, 큰 눈으로 숲을 바라보는 안목 또한 중요할 듯 보인다. 차례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소개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1장에서 4장까지는 '순수성의 추구', 즉 추상으로 향하는 운동을 살펴보게 된다. 5장과 6장은 '근원을 향한 열망', 즉 현대미술에 나타난 표현주의적 경향을 다루고, 7장과 8장에서는 현대미술에 나타난 표현주의적 경향을 다루고, 7장과 8장에서는 현대예술의 비합리주의적 흐름, 특히 광기와 부조리에 대한 현대예술의 관심을 다루게 된다. (후략 / 지은이의 말)"

"야수주의와 더불어 최초로 20세기의 예술운동이 시작된다 (...) 야수주의가 일으킨 이 색채의 해방이야말로 20세기 회화가 르네상스 이후 400년 동안 예술의 공리로 군림해왔던 재현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었다." (35p)

 
실로 의미심장하고, 위대한 발걸음의 시작이었던 야수주의의 도입부분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어느정도 용어적으로 친숙한, 보편적인 운동들이 있는 반면, 중간에 '신즉물주의' 처럼 조금은 생소한 일반인에게 보편적이지 않은 운동 또한 존재한다. 각 운동은 기본적으로 탄생의 배경과 멤버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더불어, 그 운동이 지향하는 점, 한계, 전/후 혹은 동시대의 다른 운동에 준 영향과 대표적인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용어의 의미를 어렴풋하게 알고있는 운동들은 그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계기로, 생소한 운동은 또 발견의 계기로 각각의 흥미를 준다. 사실 이런 여타의 예술저서들은 (인문학에는 못 미치얼지언정) 일상적이지 않은 단어나, 평소 애매하게 알고있는 단어들이 많이 등장하는게 특징(이라면 특징) 인데 어느정도 일반을 넘어선 단어들이 없진 않았지만 크게 어렵지는 않았던 것 같다. 특히 각 운동들의 특징과 더불어 그 한계와, 서로간의 영향들이 상세하고 잘 기술되어 있어서 흐름과 흥미를 쉽게 잃지 않았던 것 같다.


각 운동의 시작이나 전성기 때에 주요 멤버들의 포부나 선언문을 보면 으레 진취적으로 보이기 쉽다. 헌데, 내가 이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모더니즘> 편에서 느껴진 시선은, 그들의 운동들을 어떻게든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바라보려 하는 시선이었다.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편의 차례는 결과적으로 제들마이어의 분류와 대략 일치하게 됐다. (지은이의 말)


제들마이어를 여러차례 인용하고, 순서 또한 제들마이어와 일치하는 것으로 미루어본다면, 진중권의 견해는 어느정도 그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운동이나 유파자체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 창시자들의 선언과 실제 흐름과 성과들을 분석하며 중립적인 시선을 취한다고 보여진다. "여기에서는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대 중 하나였던 20세기 초반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의 역사를 다룬다."(지은이의 말) 고 시작부분에서 말하며 일련의 시대의 가치를 지은이도 인정하고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눈은 한계와 가능성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는 셈이다. 제들마이어 뿐만 아니라 많은 예술가들의 말이 언급되고, 또 특정운동이나 사상, 시대를 비판하는 예술가들의 대화가 진중권의 날카로운 해석과 맞물려서 말이다. 이런 시선들은, 항상 미술전시장 벽에 적힌 작가와 시대에 대한 칭찬일색인 글이 주는 좁은시선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시선으로 작품과 작가, 흐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아마 그렇게 된다면, 지식의 부족함을 꽁꽁 숨기며 칭찬에 급급했던 나날들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거기엔 그만큼의 공부가 '훨씬' 더 필요하겠지만)


"현대미술에 비판적인 이들이 그것에 우호적인 이들보다 외려 그것을 더 잘 이해한다는 역설.(중략) 역사상 가장 급진적이었던 예술운동의 본질은 외려 그것을 불편하게 느끼는 문화보수주의자의 눈에 더 뚜렷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17)
 

진취적으로, 위대하게 탄생했든 아니든, 모든 운동과 유파는 대부분 그 모순 혹은 한계를 지니거나, 한계에 다다랐다. 어떤 미학적 판단에 있어 절대불변의 법칙이란 없기때문아닐까. 대중의 인식과 수용은 느리면서 오래가지만, 신념이 곧 삶 자체가 되기도 하는 여타의 예술가들에게는 짧은 시간에도 많은 소용돌이가 일며 그들의 의식을 뒤집고 또 뒤집기도 한다. 그로인해 타인을, 다른 정신을 부정하면서 때로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각과 관념도 부정하기도 해왔으니깐. 

 
책을 덮었을 당시엔, 유파와 양식의 흐름을 좇다보니, 정작 미학으로서의 본질에 대해 소홀히 읽은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미학은 결국 이 아방가르드 시대를 바라보는 창일 뿐이며, 우리가 미학에 대해 인지했든 아니든, 우리는 그 창을 통해서 이 혼돈의 시대를 '잘' 짚어보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안일함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 한 유파나 양식 혹은 운동의 기원을 살피고 들어가면 곧, 그것에 대한 특성을 끈질기게 분석함과 동시에 자료사진들을 보고, 가능성과 한계를 통해 그 유파, 양식, 운동의 가치를 살폈으니, 그 끈질긴 집중의 통로가, (비록 언어로 이해하진 못했을지라도) 아름다움에 대한 갖가지 시각과 진행, 충돌들이 바로 미학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며.... 


"미학은 어떤 사안이나 문제를 다른 시각으로 보는 법을 배울 수 있는 학문이에요. (후략) "


다만, 한때 거금을 들여샀던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가 온데간데 사라진 지금 비교할 대상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 아쉽다. 그것이라도 있었다면 이 책이 다른 서양미술사와의 차별성, 혹은 공통성을 더 깊게 설명할 수 있을텐데. 아마, 미학에 대해 더 나은 개념의식을 갖추고, '고전예술' 편부터 순서대로 다시 읽어보며, 다른 서양예술사 책까지 몇권 더 읽어본다면, 혹은 그랬었다면 좀 더 분명한 시각을 가질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솔직하게 말하면, 아직까진 완벽하게 '그래 이래서 진중권의 서양미술사야!' 라는 생각까지 드는것은 아니니깐.


어쨌든, 소설만큼 술술 읽혔다고 할순 없지만, 유별나게 어렵게 표현되지도 않은 책이었다. 많은 서양미술사 들의 책이 있겠지만, 이후에 출간될 이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3권과 이전에 출시된 1권에 대한 기대가 생긴것도 사실이다. 마냥 어렵게만 느껴졌던, 혹은 항상 헷갈리던 아방가르드 시대의 양식에 관련한 용어들이 이제 (나름) 조금은 가까워진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적절히, 흥미를 잃지 않으며 읽어올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미학에 대한 좀 더 깊은 안목을 갖고 언젠가 한번 다시 읽어보고 싶기도 하다. (물론 그런날이 쉽게 오진, 그런책이 한두권도 아니긴 하지만..)


"현대예술은 사회와 소통을 거부하기 위해 끝없는 혁신 속에서 한없이 난해해진다. 하지만 이는 사회를 버리기 위함이 아니다. 외려 더 높은 차원에서 사회와 다시 화해하기 위한 제스처다. "역설적이지만 예술은 비화해적인 것을 증언해야 하며 동시에 그것을 화해시키려는 경향을 가져야 한다." (36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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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된 죽음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8
장-자크 피슈테르 지음, 최경란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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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나보다 모자란 사람은 찾기가 힘들다. 정확히는, 나보다 부족(하다고 생각되는)한 사람은 좀 더 쉽게 잊혀진다. 사람은, 노력하든 아니든 더 잘 살고 싶어하고 더 인정받고 싶어하는데, 자신이 그런 나은사람을 좇는것보다, 그 대상을 끌어내리는 일은 더 쉬워보이거니와, 더 매력있게(?) 보인다. (스스로가 한단계 더 올라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깐.) 이런 경쟁 혹은 경쟁심리는, 이미 탄생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애정과 질투가 함께 적절히 공존할 수 있는 마지노선은 사실, 내가 어느 한쪽에 (적어도)맨 뒤에, 맨 아래는 아니라는 인식이 밑받침 되었을 때다. 인생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인식은 얼마나 중요한가. 자신보다 열악한 상황의 타인을 보며 일말의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는 것은 이미 새로운 발견도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내 아래에 누군가 있다는 인지는 우리가 추락하지 않게하는 안전막과 같다. 모두가 내 위에 있다면(그렇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내 질식과 같은 경험을 할 것이다. 내 발 끝이, 침몰해가는 바닥이되고, 뜨겁게 달궈진 불구덩이가 된다. 그러면 올라가려 할 것이다. 누군가를 떨어뜨려서라도.


자신이 중간지점에 있다면 완벽히 만족할 수 있을까. 내 앞에서 달리는 그 누군가만이, 나의 앞을 막는 고유한 장애물이 되는 것만 같다. 그것만 사라진다면, 탄탄대로만 있을것만 같다. 그것이 결국 자신의 만족이라 하는것을 인지할지라도 그 생각을 멈추지 못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 유년의 열등감과 박탈감에서부터 키워온 복수를, 자신의 앞을 방해하는 누군가에 대한 복수를 30년 후에 이룩한-거룩한 남자가 있다. 생각을 끝내고, 행동한 사람.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는 행하지 않은 살인, 아슬아슬하게 피한 살육,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파괴적 증오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일 사람들이 꾹꾹 눌러 참는 그런 파괴적 증오심이 모두 행위를 통해 표출된다면, 남편을 죽인 양순한 아내, 주인의 목을 잘라버린 충성스러운 늙은 하인의 이야기는 너무나 진부하게 들리고 우리에게 아무런 충격도 주지 않을 것이다. (115) 


애증이라는 말이 있듯, 인간이라면 타인에게 동경과 질투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안고 살아가는 일은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비슷하게 사는 와중에, 갖가지 이유들로 그것들의 경중이 갈린다. 극단으로 치닫은 시기와 질투, 그것들은 주체와 대상을 모두 벼랑끝으로 몰아넣는다. 그 설명할수 없는 감정이 계속해서 이들을 끝으로 내모는 순간, 인간은 한가지 선택을 한다. 필사적으로 함께 살던가, 혹은 내가 뛰어내리던가 아니면... 남을 밀던가. 에드워드는 남을 밀었을 뿐이다. (어쩌면) 그뿐이다. 

 
이야기는, 니콜라가 프랑스 최고 문학상 공쿠르 상의 수상이 거의 유력시 되는 상황에서 시작한다. 그를 찾아가는 에드워드는 무언가 불만과 고민에 찬 듯 보인다. 니콜라는 에드워드와 오랜 시간을 알고지낸 친구이자, 작가와 편집자의 관계지만, 니콜라가 에드워드를 맞이하는 방식은 무언가 미묘한 어색함을 만든다. 니콜라가 그를 둘러싼 여러 출판관련 인사들과 공쿠르 상의 수상식으로 향하고, 덩그러니 남은 에드워드는 조용히, 자신이 조종하는 기계장치의 마지막 톱니를 꽂아넣는다. 

 
에드워드의 유년은, 일반적인 어린아이의 활발함과는 비교되게, 조용하게 흘러갔다. 사교능력에 아무래도 재능이 없던 그이지만, 마음이 통하는 절친한 친구 둘과 문학동인지 [동방의 편지]를 편찬하며,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니콜라의 등장으로 그의 인생은 조금 다른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수려한 외모, 기막힌 사교술로 자신이 갖지 못한 외향적 요소를 완벽하게 지니고 있던 니콜라는, 에드워드에게 하나의 이상적인 인간의 표본이었다. 

 
한편으로는 그가 지닌 매력, 즉 그가 어떻게 행동하든 간에 모든 사람을 그의 주위로 끌어들이고 가까이에 잡아두는 그의 능력이 몹시도 부러웠다. (...) 자기는 천성적으로 매력과는 거리가 멀다거나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107)


니콜라는 문학적으로도 관심을 갖고, 겉으로는 [동방의 편지]의 가치에 대하여 진심으로 응원하는 듯 보였지만, 다른 목표를 갖고 있었다. 결국 잡지출간의 재정적 어려움을 니콜라에게 의존한 것을 빌미로, 친구들이 반대했던 니콜라의 작품을 싣게됨으로써, 에드워드는 니콜라를 제외한 (전부라고 할 수 있던) 두 친구를 잃게된다. 잡지 편찬의 주체자에서 밀려난 에드워드는 어설프게나마 잡지에 관여하고 있었지만, 니콜라를 위한 잡지로 변질된 그 문학잡지는 결국 발간이 중지된다. 수평적 관계가 아닌, 수직적 관계에 가까웠던 니콜라와의 관계는 에드워드에게 어떤 기댈 곳이 되지 못하고, 사금파리 언덕에 자리잡은 콤 엘 슈가파 지하묘지에서 잠적하는 횟수가 늘어난다. 에드워드는 우연히 야스미나를 만나게 되고, 이성에게 쑥맥이고 사교적 소양이 빵점이던 그는, 그녀와의 열정적인 사랑에서 진정한 안식처를 찾는다. 하지만 그 안식처 또한 오래가지 못하고, 그는 그 상처와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마치 내 안에 두개의 영혼이 있는 것처럼 부단한 나 자신과의 대립 속에 살아가고 있다. 하나는 남들과 어울려 살면서 사회적으로 뭔가 성취하고 논리적으로 사고하도록 해주는 영혼이고, 다른 하나는 결코 아물지 않는 상처를 핥으면서 잠재의식 깊은 곳에 웅크리고 숨어 벌벌 떨고 있는 영혼이다. (109)

 
표면적으로 복수를 테마로 한 이 작품은, 책장을 쉼없이 넘기게끔 하는 매력이 있다. 독자가 처음 복수의 톱니를 발견하는 순간부터, 주인공인 에드워드가 30년을 넘게 가져온 트라우마의 발견, 그리고 차곡차곡 쌓여갔던 그의 철저한 계획을 따라가고 있노라면 페이지를 넘기는데 거리낌이 없다. 특히 책과 관련한 여러가지 전문적 디테일(이라고 할만큼 깊게 묘사되는 것은 아니지만)과 치밀함은 독자를 '비블리오 미스터리'의 세계로 거침없이 빠져들게 해준다. 

 
하지만 역시, 이 <편집된 죽음>의 진정한 묘미는 에드워드의 시점을 통해 바라보는 한 인간의 내밀한 심리일 것이다. 작가는 1인칭이 주는 이점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과 동시에,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며 에드워드라는 인물을 구축한다. 에드워드에게 있어, 복수란 것은 이미 그 자신이 철저한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그 자신도 인지하기 전에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다만 '언젠가'를 기다려 왔을 뿐이고, 니콜라가 스스로, 가까스로 봉인되었던 에드워드의 복수심을 불러낸 것이다. 실제 그 자신은 왜 그런일이 발생했는지도 모르는 체.

 
그 복수의 과정 중/후에 에드워드가 술회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예전에 봤던 사극(배우 정선경이 장희빈의 역할을 맡았던 S방송국 버전의 장희빈) 하나가 떠올랐다. 신당까지 차려서 인현왕후가 죽기를 기원했지만, 정작 인현왕후의 승하 소식을 듣고는 그 순간 눈물을 흘리던 장희빈의 모습이, (고증과 캐릭터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묘한 감정으로 떠올랐다. 권력다툼의 정점이었던 것과 한 인간의 유년기부터 흔들었던 인물에 대한 복수는 차원이 다른 문제긴 하지만, 복수의 진행중에 자신의 연민을 걱정하며 관리하는 에드워드의 모습에서 언뜻 그 장면이 떠올랐던 것이다. 물론 증오하는 인간이라도 몰락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느끼는 연민의 감정은 잠깐이었을 뿐이다. 에드워드는 결국 거기에 흔들리지 않았고, 거의 완벽에 가깝게 일을 진행시켰으니깐.


에드워드에 매료된 독자, 에드워드의 열등감을 짐짓 이해할 수 있는 독자라면, 그의 복수의 과정이 마치 나, 우리를 열등하게 하는 모든 인간에 대한 통렬한 복수로 여겨지기도 할 뿐더러, (에드워드의 묘사에 따라) 니콜라에 대해서 부정적 시각을 갖는것은 어렵지 않다. 사실 니콜라는 그리 선(善)하거나, 이해심있거나 배려심이 있는 인간으로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유년시절부터, 에드워드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니콜라의 뒤에서 존재할 뿐이었고, 그와 나란히 동등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 (혹은 그 자신이 그렇게 느꼈다)  항상 자신보다 나은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 동경의 마음으로 다가가려 했던 누군가에게, 자신의 원하는 만큼 인정받지 못하고, 유일하게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 것 마저 빼앗겼던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부정적 선택은 매우 처절한 모습으로 철저했다. 하지만 에드워드에게 그것은 단순한 동경과 질투의 문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사랑했던 여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탓이 아닌, 니콜라의 탓이었다는 사실의 발견은, 에드워드는 그간 자신을 건드려왔던 감정들을 더욱 날카롭게 상기하게끔 만들어버렸을 것이다. 자신 스스로의 존재적 가치를 가장 충만하게 해주었던 누군가를 잃어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은, 인생의 올가미였을 것이 자명하다. 30년동안 줄곧 간직해온, 그래서 정상적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더 힘들게 만들었던 상처-죄책감에 대한 진실은 큰 줄기가 되어, 유년시절부터 이어져온 동경과 그 반대의 열등감, 존재에 대한 몰인정의 가지와 함께 가시덤불이 되어버린 것이다.그래서 그는 죄책감에서 해방되는 동시에, 근원적인 박탈의 이유가 되는 니콜라와 그로 인해 무너진 자신의 존재에 대한 추궁을 시작하는 것이다. 어쨌든, 복수는 그에게 있어 어쩌면 불가피한, 앞으로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최선, 최고, 최후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 복수가 근원에 연인의 죽음만이 관계되었다고 하기는 다소 힘들지 않나 생각한다. 잃어버린 자신의 사랑에 대한, 죄책감에 대한 복수만큼이나 강렬한 욕구는, 항상 음지에서 니콜라를 뒷받침하던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 아니었을까.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복수가 통렬했을지언정, 그것은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더불어, 그것이 에드워드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이유였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구분할 수 없을지라도, 그가 나아가려 했던 방향을 보면, 결국 자신의 존재가 니콜라에게 가려졌다는 끊임없는 패배감과 질투의 요소요소 속에, 야스미나가 있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되는 것이다. 자신을 이끌었던 도화선은 그가 유년시절의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복수에 있지만, 뇌관은 죄책감을 통해 일그러진 자신의 현재의 모습과도 상통하는, 존재의 불인정 아니었을까. 어쨌든 연인의 죽음에 대한 복수, 30년을 안고 살아온 죄책감에 대한 복수, 일그러진 삶, 그리고 빼앗겼다고 생각되는 문학적 재능 모두 에드워드 자신마저도 섞어놓았던 이유들 이었음은 분명하다. 물론 그 모든 열등, 패배, 박탈감의 원인이 연인의 상실감과 (그로인한 죄책감 때문에) 망가진 자신의 삶이라고 생각하기에도 무리는 없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작가는 좀더 포괄적인,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질 수 있는 어떤 복잡한 애증과 열등의 관계까지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신의 세계에 속하고 요정들에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내 요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내 십자가를 지고 나의 길을 걸었고 나의 하루하루는 수난이나 다름 없었다. 활기가 배제된 영혼의 수난이었다. (108)

 
열등감의 대상을 소멸시키는 것으로 그가 그 대상의 자리에 대신 만족스럽게 올라 설 수 있는지, 그것이 진정, 목적에 부합하는 정확한 방법이었나 라는 일말의 의문을 남겨두지만 결과적으로 에드워드의 삶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에드워드는, 야스미나의 박탈감, 죄책감과 그에 따른 분노, 그간 자신을 옥죄어왔던 열등감과 질투심이 막아놓았던 혈을, 복수라는 방법으로 뚫어버림으로써, 그가 찾아 헤매던 낙원으로 향했으니깐.


다만, 야스미나의 존재를, 여전히 도화선으로 인지한다면, 어쩌면 그가, 자신이 빼앗긴 길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레일의 경쟁자를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트랙을 넓힌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에드워드는 글의 편집능력과 더불어, 군 복무시절부터 위조와 조작능력에도 일가견을 보였다. 그런 그는 본래부터 창조자가 아닌, 정리와 개선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전면에 나서는 것이 아닌, 뒤에서 뒷받침하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앞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를 버리지 못했다. 에드워드 자신은 차라리 정보부같은 음지에서 하는 일에 어울릴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했으니깐. (군복무 시절에도 파일럿으로서 전훈을 세운 니콜라와 정보부의 자신을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꼈었다) 자신의 성격과 능력에 맞는다고 해서, 그 자신이 반드시 그것을 원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에드워드와 니콜라가 걷는 길이 가져다주는 상반된 위치는, 에드워드의 감정을 부채질 했을만 하다. 대중은 스타를 기억할 뿐이니깐. (다만, 에드워드와 니콜라가 각각 다른 종목으로 계속 승부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스토리를 진행하지 말잔 얘긴가!?;;) 

 
또 한가지 신중해지는 점은, 에드워드에게 니콜라 라는 존재가 진짜 피해였는지, 아니면 그 자신에게 피해의식에 불과한 것이었는지 하는 문제다. 에드워드는 나름 편협하지 않은 사고를 가지려 했지만, 그의 의식은 결국 니콜라 라는 존재를 전방위적인 암적 존재로 인식했다. 물론 에드워드의 묘사를 따라가면서 떠올리는 니콜라의 모습은 어쨌든 '피해'그 자체였음이 분명하다. 뭐 어쩌면, 여기서 애드워드가 행하는 복수에 대한 정당성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복수란 남에게 인정받기위한 것이 아니니깐. 하지만 결국 1인칭이 보여주는 심리묘사야 말로, 복수가 결국 그 '자신'에게 '가장' 설득력있을 수 있다는 것의 상징이 되기도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 해본다. 에드워드 자신이 묘사하는 자신과, 에드워드 자신이 묘사하는 니콜라는 '가장 있는 그대로'에 가까울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며 말이다. 에드워드는 니콜라의 죽음 뿐만 아니라, 복수에 대한 근거까지도 편집한 것 아닐까? 모든 요소들이 복수라는 결말을 향해 거리낌없이 달려가게끔, 자신의 인식조차도 편집한 것 아닐까? 군 시절에 배운 위조능력과 치밀함이, 그 자신의 의식마저 편집하지 않았는가 하는... (편집(edit)에 관한, 편집증(paranoid)적 의심이라고나 할까.)


복수의 성공 후에, 자신의 문학적 능력을 반문하면서도, 그가 부활시킨 어윈 브라운의 소설의 부족한 부분들을 편집하는데 즐거움을 느끼는 에드워드, 그의 출판업 또한 성공가도를 달릴 듯 하고, 내면적으로도 해방된 듯 싶다. 그는 낙원이라 말했다. 그렇게 씌여있으니 그렇게 믿을 뿐이다. 하지만, 과연 그가 진정한 문학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그 길이 진정 그에게 맞는 길이었을까. 이것은 부정도 긍정도 아닌 조용한 질문일 뿐이다. (시원하게 읽으면 되기도 할 소설을 왜 이맇 어렵게 꽈서 읽는지 본인도 모르겠음;) 다만 에드워드의 훗날이 궁금해질 뿐이다. 자신의 앞을 막았던 것이 정말 타인 '뿐'이었는지, 타인'도' 있었는지는 제쳐두고, 에드워드에게는 어쨌든 그 타인이 문제였던 것이다. 


나만이 지닌 고유한 독창성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자폐적 영혼 속에 묻혀 있는 것 같았다. (...) 매혹과 질투가 엇갈린 감정을 품은 채 니콜라가 내게서 빼앗아간 능력을 어떻게 남용하며 가지고 노는지 주시할 따름이었다. (109)


실없는 소리 하나 또 하자면, 레이싱을 소재로 한 만화나 영화를 보면, 불공평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앞선 차량을 추월하려면 코너링을 통해서 극복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렇지 않고 앞서려는 순간, 앞의 차와 충돌하여 모두 탈락 할 뿐이다. 나보다 앞선 누군가 있다고 한다면, (사실 그런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그 길이 1차선의 외길이 될 것인지, 아닐것인지는 전적으로 선택에 달려있다. 앞의 누군가를 걸고 넘어뜨려서 앞으로 향하던지, 그 옆에서 계속 달려볼지... 인간은 지구에서 사는 이상 결국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하고, 지면을 딛고 살아가지만, 실제로 세상의 가장 밑바닥을 딛는 최후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판단이 불가한 문제니깐. 단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런 생각은 얼마나 간편한지..

 
에드워드를 피해의식에 빠진 가련한 인간만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복수가 시원한면이 있음도 사실이다. 그가 극복하지 못한 자신의 트라우마는, 자신 스스로 고립시킨 것인지, 혹은 신의 뜻인지는 몰라도 비극이었음 또한 분명하다. 하지만 그 또한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했을 테고, 충분히 인생을 열심히 살아온 흔적을 간과할 순 없을 것이다. 어쩌면 독자는, 이 복수의 이야기를 통해 슬쩍 즐거워하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왠지,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대체, 나의 자존감은 누구에 의해 편집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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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대중문화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펜톤> 주제적으로 확, 매우 끌리는 책이다. 색이란 것은 자연적으로 이미 존재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가장 이상적인 색을 발견하고, 발명하기 위해 또 노력해왔다. 색은, 심미안적으로 표현하거나 리얼함을 나타내기 위해 구성되는 것을 넘어 얼마나 많은 상징과 의도를 갖고 있는가. 더욱이 이 책은, 색 분류의 기준을 제시한 펜톤 컬러를 통해 색의 역사뿐만이 아니라 그것에서 파생된 여러 역사를 기술하고 있으니, 조금 어렵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멀리 치워둔 채, 기대감이 무척이나 충만해지는 책이다.   

 

 <좋은 시나리오의 법칙> 시나리오 작법서를 보면, 저자의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이렇게 쓰라며, 군데군데 영화의 설명을 곁들이며 설명한다. 하지만 그 책의 목적은 대부분, 어떻게 써야한다는 설명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기에, 예시의 영화에 대한 소개는 그리 길지 않다. 그렇지만 이 책은 50여편씩이나 골라서 이야기 해준단다. 단순히, 시나리오를 이렇게 써라! 하는 책이 아닐것이라 판단 된다는 것. 좋은 시나리오를 보는 눈을 길러주는 것은, 시나리오를 쓰는 능력 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는 깊고 다양한 시각을 길러주는 것이다. 좋은게 왜 좋고, 그저 그런게 왜 그저 그렇고, 나쁜게 왜 나쁜지 알게 된다면,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창조하는 많은 작가 지망생들, 더불어 일반 관객에 까지 좋은 지침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이 단순히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만을 위한 책이 아니리란 판단에 추천신간에 넣어본다.  

 

 <This is Art> 제목 참 당돌하면서도 마음에 든다. '디스 이즈 스파르타!'.. 가 아닌 아트다. 다른 미술서적과 차별화되면서 기대되는 점은, 1100여점 이르는 풍부한 도판과, 서양미술도, 동양미술도 아닌, 세계미술을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 거기다 선사시대부터 시작해서 회화뿐만 아니라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다루며 시대적 흐름, 상호간의 관계가 조망되니, 예술전반에 걸친 개괄적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진다. 

  

 

  <영화 속 미술관> 책 소개 페이지의, "자신의 생각보다 작가나 감독의 뜻을 과도하게 헤아리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힘으로 감상할 수 있는 법을 안내한다." 라는 이유만으로도 아주 가치를 지닐만한 책이다. 요즘은, 아예 팝콘과 함께 덤으로 보는 영상이거나, 완전 철학적 해부의 대상이거나 하는 것이 영화이니깐.(물론 당연히 이 책은 어떤 영화보는 법보다는, 미술적 영향을 중심으로 할 것이다) 영화는 종래의 모든 표현양식을 담은, 예술의 한 분야이다. (영화를 예술로써 부정하지 않는다면) 거기서 미술이라 함은, 영화의 근원이 되는 가장 기본적인 예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화를 구성하는, 혹은 영화 안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예술이기도 하다. 예전에 회화와 영화를 연결지은 책을 봤었는데, 그때의 나는 그 그림들과 영화 모두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책은 더 나아가, 고전적 회화뿐만 아니라, 현대의 개념미술까지 담아냄으로써, 그 기대가 더욱 큰 바이다.  

 

 <골목안 풍경 전집> 맑고 아름다운 사진들을 보는게 너무나 손쉬운 세상이다. 거기서 빛의, 구도의 아름다움을 좇고, 더러는 사람의 모습들도 있다. 그것과 이 김기천 작가의 사진들 중 어느것이 더 낫다 하는 것은, 어차피 개인의 취향이지만, 남들이 더 멋진 사진만을 추구할때 이처럼 뚝심있게 우리네 골목길 생활상을 그려낸 사진은 분명 들여다볼수록 그 가치를 발휘할 것이다. 이제는 대부분 콘크리트로 덮힌 옛 골목길, 그리고 거기서 살아갔던 옛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사진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람을 발견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든다. 
 

 

 <예술가처럼 자아를 확장하는 법> 아 뭘까 이책은.. 책 소개에서도 그렇듯, 묘하게 자기계발서를 닮아있다. 그런데다가, 잘먹고 잘살고 잘버는 법도 아닌, 예술가가 되기위한 자아라니. 거의 '이렇게 하면 망한다' 라고 말해주는 자기계발서 아닌가? (반조크 반진심) 근데 왠지 끌린다... 예술가의 자아를 주제로, 특히 현대미술의 한획을 그은 아주 문제 예술가들을 비롯한 주요 예술가들을 따라 나서고, 또 거기서 배우는 '에고 트립'은 무척이나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약장수 약 사는 기분이기도 하지만, 끌리는 맘은 어쩔수 없다.  

 

<검은 미술관> 그러고보니 그동안 너무나 당연한듯 '밝은 미술'만을 중심으로 보아왔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름답다고 여겼고, 또 궁극적으로 일상을 밝게 해줄 예술들 이었으니깐. 하지만 미술이 본래 그런것이 아니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그 '밝은 미술'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괴롭고 우울한 소설은 으레 읽어대면서, 그만큼 괴롭고 어두운 것이 전면으로 드러나는 미술들은 왜 이렇게 꼭꼭 숨어 있을까. 인간이 그다지 반기지 않는, '검은 미술'들 세계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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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7
제러미 시프먼 지음, 김형수 옮김 / 포노(PHONO)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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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소형트럭이 후진할 때 들리는, 겨우 최소한의 음 구분만 가능했던 그 '음악' 이 아니더라도 지금껏 얼마나 많은 클래식을 접해왔을까. 사람들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클래식을 들을까. 하지만 으레 일반인이라면 이번주에 나온 신곡과 가수의 동향, 가십거리는 꿰고 있어도, 한 세기를 훌쩍 넘기는 시간을 살아낸 음악과 음악가에 대한 관심은 너무 소홀했던 것은 아닌지. 

어떤 예술이든, 판단하고 느끼는 것은 개개인의 몫이고 권한이지만, 그에 관련된 배경을 접했을 때 또, 새로이 느끼는 감흥은 분명 적지 않다. 특히나 자신이 제멋대로 이해하고 있던 것에 대해서, 그 예술가의 생애를 알고 그 시대적 배경을 알게되면 더 넓은 것이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것들을 싫어하던 아니던 말이다) 이 차이콥스키의 전기를 읽기전의 느낌은 딱 그런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백조의 호수>나 <호두까기 인형>같은 너무 유명한 곡만 알고있다가, 가끔, 어딘가에서 듣게되고, 작곡가의 이름을 들었을때야 비로소 '오-' 하게 되는 현상이 조금이나마 타파되리라 기대하며. (물론 그 이상의 낯설음과 두려움은 말할 것도 없었겠지만, 생략하겠다)  

대중적이고, 위대한 음악가의 생애를 토막식으로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느 음악가는 '신이 불러주는 대로 썼다'라고 하거나, 장애를 가진 아이가 바로 누구 였다던가 하는. 한 음악가에 대해서 깊게 알기란 분명 음악에 대한 깊은 애착이 필요한데, 지금껏 그런 것은 어디있었던 것일까. 

어쨌든, 이 책은 차이콥스키의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꽤 일목요연하게 다루고 있다. 부유하게 자란 가정환경에서 부터, 그런 가정의 위기, 법학을 공부하게 됨으로써 어머니와 떨어지는 것에 대한 극도의 공포가 있던 유년기부터, 그가 동성애적 성향을 갖게 되고, 법무부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다소 늦은나이에 본격적인 음악을 시작하고,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받으며 많은 곡들을 써내고, 때로는 찬사에 대한 기쁨을, 때로는 비판에 대한 좌절을 느끼기도 했던 그의 생에 말이다. 

무엇보다 그는, (그의) 음악이 필요로했던 절대적인 감성의 변화를 갖고 있지는 않았나 생각된다. 유년기부터 극도로 예민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했던 그의 기질은, 나이가 듦에 따라 조금 나아지는 듯 싶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변화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천성에서 나오는 친절함과 상냥함은 또 그가 사람들을 끌어당기기도 하는 하나의 본능이었다. 하지만 그 자신도 때로는 다른 음악가나 그 당시 관심을 갖던 악기의 분야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기도 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 자신이 자만심에 똘똘뭉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여느 비평가나, 하나의 관객처럼 평가했을 뿐이다. 이 책에서 차이콥스키의 생애를 복원하는데에 그의 편지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것들을 통해 (그 자신도 썼듯이 편지가 완벽히 진실될수는 없을지라도,) 그가 충분히 자신에 대해서 겸손하고 반성적인 자세를 취했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전기에서 특히 두드리지게 느껴지는 점은, 주변인들의 영향이 적지 않았단 것이다. 사실 내가 깊게 기억하는 부분은, 그의 감정이 늘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일반사람들에 비해선 매우 불안정하게 기복이 심했고, 거기에는 (매번은 아니지만) 그 주변인들의 영향이 컸다는 점이다. 여러 우정들을 통해서 그가 일어서기도 했고 좌절하기도 했지만, 특히 흥미로웠던 점은, 아내 안토니나 와의 불화와 폰 메크 부인과의 후원관계이다. 그 조차도 원치않게 시작했던 결혼생활은 결국 서로가 끔찍한 정신적 고통을 받았고, 폰 메크 부인과는 우정과 사랑의 미묘한 줄다기를 하며 끝끝내 편지로만 왕래하며(실제로 두번인가 마주쳤음에도 말을 나눴다고 하지 않는다) 후원을 받기도 하다가, 불현듯 끊어지게 되는 점 이었다. 실제적으로 그의 아내가 그에게 도대체 어떻게 했는지는 이해할만큼 언급되진 않아서 다 알순 없지만, 그때의 차이콥스키의 아내가 주는 정신적 고통과 폰 메크 부인과의 정신적 교감(전적인 사랑이라고 보긴 힘들었다.)은 매우 상반되고 지점임은 확실하다. 

그의 인생이 굉장히 파란만장했다고 까지는 못하겠지만, 그의 감정이 매우 파란만장 했던것만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혹은 그래서인지) 그는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고, 좌절하지도 않았다. 자신에 대해서 겸손했지만, 또 타인에 대해서는 냉정한 평가를 했다. (사교와는 별개의 문제) 그에게 벌어진 여러 관계와 사건들은 차곡차곡 그의 음악을 만들었을 것이고, 그가 감명받은 문학작품과 자연에서도 많은 것을 얻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변덕스럽지만) 풍부한 감성이 만든 음악은 오래도록 우리에게 남아있고, 또 남아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가 남긴 위대하고 황홀한 음악이 아니라 그 이면에 존재했던, 감정이 (지나치게) 풍부했지만, 열정적이었던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는 일은 매우 인상적이었고 유익한 일 이었다. 완성된 음악만을 듣게되기 일쑤인 일상에서, 세기를 넘어 들려지는 음악에, 음악가에 관한 이야기는 (역설적이게도) 위대한 음악가 이상의, 한 인간이 희노애락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종국엔 다시 음악가로서의 그를 떠올렸다. 곁에 있었음에도, 조금은 어려웠던 그의 음악을 조금 더 가깝게 느끼면서...

"그가 늘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실패했을 때도 작품에 대한 열정이 부족했던 적은 없다. 그는 자신이 쓴 최고의 음악을 통해서 계속 살아있을 것이다." (219) 

물론 이 책 한권으로 차이콥스키의 생애에 대해 완벽히 알았다고 할 순 없을것이다. 이 책은 전기로 치자면 매우 얇고, 그의 작품들을 모두 설명하기에도 짧은 분량이니깐. 하지만 책에 언급되는 주요 음악들에 대해서 시디를 포함, 웹사이트를 활용할 수 있게 했고, 일대기 와는 별개의 페이지를 파트마다 배치해서 그의 생애와 음악을 따로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주고, 여타의 음악용어나 시대적 배경의 설명들은, 그의 삶과 작품, 그리고 시대와 음악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기에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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