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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된 죽음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8
장-자크 피슈테르 지음, 최경란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왠지 나보다 모자란 사람은 찾기가 힘들다. 정확히는, 나보다 부족(하다고 생각되는)한 사람은 좀 더 쉽게 잊혀진다. 사람은, 노력하든 아니든 더 잘 살고 싶어하고 더 인정받고 싶어하는데, 자신이 그런 나은사람을 좇는것보다, 그 대상을 끌어내리는 일은 더 쉬워보이거니와, 더 매력있게(?) 보인다. (스스로가 한단계 더 올라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깐.) 이런 경쟁 혹은 경쟁심리는, 이미 탄생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애정과 질투가 함께 적절히 공존할 수 있는 마지노선은 사실, 내가 어느 한쪽에 (적어도)맨 뒤에, 맨 아래는 아니라는 인식이 밑받침 되었을 때다. 인생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인식은 얼마나 중요한가. 자신보다 열악한 상황의 타인을 보며 일말의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는 것은 이미 새로운 발견도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내 아래에 누군가 있다는 인지는 우리가 추락하지 않게하는 안전막과 같다. 모두가 내 위에 있다면(그렇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내 질식과 같은 경험을 할 것이다. 내 발 끝이, 침몰해가는 바닥이되고, 뜨겁게 달궈진 불구덩이가 된다. 그러면 올라가려 할 것이다. 누군가를 떨어뜨려서라도.
자신이 중간지점에 있다면 완벽히 만족할 수 있을까. 내 앞에서 달리는 그 누군가만이, 나의 앞을 막는 고유한 장애물이 되는 것만 같다. 그것만 사라진다면, 탄탄대로만 있을것만 같다. 그것이 결국 자신의 만족이라 하는것을 인지할지라도 그 생각을 멈추지 못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 유년의 열등감과 박탈감에서부터 키워온 복수를, 자신의 앞을 방해하는 누군가에 대한 복수를 30년 후에 이룩한-거룩한 남자가 있다. 생각을 끝내고, 행동한 사람.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는 행하지 않은 살인, 아슬아슬하게 피한 살육,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파괴적 증오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일 사람들이 꾹꾹 눌러 참는 그런 파괴적 증오심이 모두 행위를 통해 표출된다면, 남편을 죽인 양순한 아내, 주인의 목을 잘라버린 충성스러운 늙은 하인의 이야기는 너무나 진부하게 들리고 우리에게 아무런 충격도 주지 않을 것이다. (115)
애증이라는 말이 있듯, 인간이라면 타인에게 동경과 질투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안고 살아가는 일은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비슷하게 사는 와중에, 갖가지 이유들로 그것들의 경중이 갈린다. 극단으로 치닫은 시기와 질투, 그것들은 주체와 대상을 모두 벼랑끝으로 몰아넣는다. 그 설명할수 없는 감정이 계속해서 이들을 끝으로 내모는 순간, 인간은 한가지 선택을 한다. 필사적으로 함께 살던가, 혹은 내가 뛰어내리던가 아니면... 남을 밀던가. 에드워드는 남을 밀었을 뿐이다. (어쩌면) 그뿐이다.
이야기는, 니콜라가 프랑스 최고 문학상 공쿠르 상의 수상이 거의 유력시 되는 상황에서 시작한다. 그를 찾아가는 에드워드는 무언가 불만과 고민에 찬 듯 보인다. 니콜라는 에드워드와 오랜 시간을 알고지낸 친구이자, 작가와 편집자의 관계지만, 니콜라가 에드워드를 맞이하는 방식은 무언가 미묘한 어색함을 만든다. 니콜라가 그를 둘러싼 여러 출판관련 인사들과 공쿠르 상의 수상식으로 향하고, 덩그러니 남은 에드워드는 조용히, 자신이 조종하는 기계장치의 마지막 톱니를 꽂아넣는다.
에드워드의 유년은, 일반적인 어린아이의 활발함과는 비교되게, 조용하게 흘러갔다. 사교능력에 아무래도 재능이 없던 그이지만, 마음이 통하는 절친한 친구 둘과 문학동인지 [동방의 편지]를 편찬하며,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니콜라의 등장으로 그의 인생은 조금 다른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수려한 외모, 기막힌 사교술로 자신이 갖지 못한 외향적 요소를 완벽하게 지니고 있던 니콜라는, 에드워드에게 하나의 이상적인 인간의 표본이었다.
한편으로는 그가 지닌 매력, 즉 그가 어떻게 행동하든 간에 모든 사람을 그의 주위로 끌어들이고 가까이에 잡아두는 그의 능력이 몹시도 부러웠다. (...) 자기는 천성적으로 매력과는 거리가 멀다거나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107)
니콜라는 문학적으로도 관심을 갖고, 겉으로는 [동방의 편지]의 가치에 대하여 진심으로 응원하는 듯 보였지만, 다른 목표를 갖고 있었다. 결국 잡지출간의 재정적 어려움을 니콜라에게 의존한 것을 빌미로, 친구들이 반대했던 니콜라의 작품을 싣게됨으로써, 에드워드는 니콜라를 제외한 (전부라고 할 수 있던) 두 친구를 잃게된다. 잡지 편찬의 주체자에서 밀려난 에드워드는 어설프게나마 잡지에 관여하고 있었지만, 니콜라를 위한 잡지로 변질된 그 문학잡지는 결국 발간이 중지된다. 수평적 관계가 아닌, 수직적 관계에 가까웠던 니콜라와의 관계는 에드워드에게 어떤 기댈 곳이 되지 못하고, 사금파리 언덕에 자리잡은 콤 엘 슈가파 지하묘지에서 잠적하는 횟수가 늘어난다. 에드워드는 우연히 야스미나를 만나게 되고, 이성에게 쑥맥이고 사교적 소양이 빵점이던 그는, 그녀와의 열정적인 사랑에서 진정한 안식처를 찾는다. 하지만 그 안식처 또한 오래가지 못하고, 그는 그 상처와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마치 내 안에 두개의 영혼이 있는 것처럼 부단한 나 자신과의 대립 속에 살아가고 있다. 하나는 남들과 어울려 살면서 사회적으로 뭔가 성취하고 논리적으로 사고하도록 해주는 영혼이고, 다른 하나는 결코 아물지 않는 상처를 핥으면서 잠재의식 깊은 곳에 웅크리고 숨어 벌벌 떨고 있는 영혼이다. (109)
표면적으로 복수를 테마로 한 이 작품은, 책장을 쉼없이 넘기게끔 하는 매력이 있다. 독자가 처음 복수의 톱니를 발견하는 순간부터, 주인공인 에드워드가 30년을 넘게 가져온 트라우마의 발견, 그리고 차곡차곡 쌓여갔던 그의 철저한 계획을 따라가고 있노라면 페이지를 넘기는데 거리낌이 없다. 특히 책과 관련한 여러가지 전문적 디테일(이라고 할만큼 깊게 묘사되는 것은 아니지만)과 치밀함은 독자를 '비블리오 미스터리'의 세계로 거침없이 빠져들게 해준다.
하지만 역시, 이 <편집된 죽음>의 진정한 묘미는 에드워드의 시점을 통해 바라보는 한 인간의 내밀한 심리일 것이다. 작가는 1인칭이 주는 이점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과 동시에,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며 에드워드라는 인물을 구축한다. 에드워드에게 있어, 복수란 것은 이미 그 자신이 철저한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그 자신도 인지하기 전에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다만 '언젠가'를 기다려 왔을 뿐이고, 니콜라가 스스로, 가까스로 봉인되었던 에드워드의 복수심을 불러낸 것이다. 실제 그 자신은 왜 그런일이 발생했는지도 모르는 체.
그 복수의 과정 중/후에 에드워드가 술회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예전에 봤던 사극(배우 정선경이 장희빈의 역할을 맡았던 S방송국 버전의 장희빈) 하나가 떠올랐다. 신당까지 차려서 인현왕후가 죽기를 기원했지만, 정작 인현왕후의 승하 소식을 듣고는 그 순간 눈물을 흘리던 장희빈의 모습이, (고증과 캐릭터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묘한 감정으로 떠올랐다. 권력다툼의 정점이었던 것과 한 인간의 유년기부터 흔들었던 인물에 대한 복수는 차원이 다른 문제긴 하지만, 복수의 진행중에 자신의 연민을 걱정하며 관리하는 에드워드의 모습에서 언뜻 그 장면이 떠올랐던 것이다. 물론 증오하는 인간이라도 몰락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느끼는 연민의 감정은 잠깐이었을 뿐이다. 에드워드는 결국 거기에 흔들리지 않았고, 거의 완벽에 가깝게 일을 진행시켰으니깐.
에드워드에 매료된 독자, 에드워드의 열등감을 짐짓 이해할 수 있는 독자라면, 그의 복수의 과정이 마치 나, 우리를 열등하게 하는 모든 인간에 대한 통렬한 복수로 여겨지기도 할 뿐더러, (에드워드의 묘사에 따라) 니콜라에 대해서 부정적 시각을 갖는것은 어렵지 않다. 사실 니콜라는 그리 선(善)하거나, 이해심있거나 배려심이 있는 인간으로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유년시절부터, 에드워드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니콜라의 뒤에서 존재할 뿐이었고, 그와 나란히 동등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 (혹은 그 자신이 그렇게 느꼈다) 항상 자신보다 나은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 동경의 마음으로 다가가려 했던 누군가에게, 자신의 원하는 만큼 인정받지 못하고, 유일하게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 것 마저 빼앗겼던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부정적 선택은 매우 처절한 모습으로 철저했다. 하지만 에드워드에게 그것은 단순한 동경과 질투의 문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사랑했던 여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탓이 아닌, 니콜라의 탓이었다는 사실의 발견은, 에드워드는 그간 자신을 건드려왔던 감정들을 더욱 날카롭게 상기하게끔 만들어버렸을 것이다. 자신 스스로의 존재적 가치를 가장 충만하게 해주었던 누군가를 잃어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은, 인생의 올가미였을 것이 자명하다. 30년동안 줄곧 간직해온, 그래서 정상적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더 힘들게 만들었던 상처-죄책감에 대한 진실은 큰 줄기가 되어, 유년시절부터 이어져온 동경과 그 반대의 열등감, 존재에 대한 몰인정의 가지와 함께 가시덤불이 되어버린 것이다.그래서 그는 죄책감에서 해방되는 동시에, 근원적인 박탈의 이유가 되는 니콜라와 그로 인해 무너진 자신의 존재에 대한 추궁을 시작하는 것이다. 어쨌든, 복수는 그에게 있어 어쩌면 불가피한, 앞으로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최선, 최고, 최후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 복수가 근원에 연인의 죽음만이 관계되었다고 하기는 다소 힘들지 않나 생각한다. 잃어버린 자신의 사랑에 대한, 죄책감에 대한 복수만큼이나 강렬한 욕구는, 항상 음지에서 니콜라를 뒷받침하던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 아니었을까.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복수가 통렬했을지언정, 그것은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더불어, 그것이 에드워드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이유였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구분할 수 없을지라도, 그가 나아가려 했던 방향을 보면, 결국 자신의 존재가 니콜라에게 가려졌다는 끊임없는 패배감과 질투의 요소요소 속에, 야스미나가 있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되는 것이다. 자신을 이끌었던 도화선은 그가 유년시절의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복수에 있지만, 뇌관은 죄책감을 통해 일그러진 자신의 현재의 모습과도 상통하는, 존재의 불인정 아니었을까. 어쨌든 연인의 죽음에 대한 복수, 30년을 안고 살아온 죄책감에 대한 복수, 일그러진 삶, 그리고 빼앗겼다고 생각되는 문학적 재능 모두 에드워드 자신마저도 섞어놓았던 이유들 이었음은 분명하다. 물론 그 모든 열등, 패배, 박탈감의 원인이 연인의 상실감과 (그로인한 죄책감 때문에) 망가진 자신의 삶이라고 생각하기에도 무리는 없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작가는 좀더 포괄적인,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질 수 있는 어떤 복잡한 애증과 열등의 관계까지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신의 세계에 속하고 요정들에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내 요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내 십자가를 지고 나의 길을 걸었고 나의 하루하루는 수난이나 다름 없었다. 활기가 배제된 영혼의 수난이었다. (108)
열등감의 대상을 소멸시키는 것으로 그가 그 대상의 자리에 대신 만족스럽게 올라 설 수 있는지, 그것이 진정, 목적에 부합하는 정확한 방법이었나 라는 일말의 의문을 남겨두지만 결과적으로 에드워드의 삶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에드워드는, 야스미나의 박탈감, 죄책감과 그에 따른 분노, 그간 자신을 옥죄어왔던 열등감과 질투심이 막아놓았던 혈을, 복수라는 방법으로 뚫어버림으로써, 그가 찾아 헤매던 낙원으로 향했으니깐.
다만, 야스미나의 존재를, 여전히 도화선으로 인지한다면, 어쩌면 그가, 자신이 빼앗긴 길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레일의 경쟁자를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트랙을 넓힌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에드워드는 글의 편집능력과 더불어, 군 복무시절부터 위조와 조작능력에도 일가견을 보였다. 그런 그는 본래부터 창조자가 아닌, 정리와 개선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전면에 나서는 것이 아닌, 뒤에서 뒷받침하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앞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를 버리지 못했다. 에드워드 자신은 차라리 정보부같은 음지에서 하는 일에 어울릴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했으니깐. (군복무 시절에도 파일럿으로서 전훈을 세운 니콜라와 정보부의 자신을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꼈었다) 자신의 성격과 능력에 맞는다고 해서, 그 자신이 반드시 그것을 원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에드워드와 니콜라가 걷는 길이 가져다주는 상반된 위치는, 에드워드의 감정을 부채질 했을만 하다. 대중은 스타를 기억할 뿐이니깐. (다만, 에드워드와 니콜라가 각각 다른 종목으로 계속 승부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스토리를 진행하지 말잔 얘긴가!?;;)
또 한가지 신중해지는 점은, 에드워드에게 니콜라 라는 존재가 진짜 피해였는지, 아니면 그 자신에게 피해의식에 불과한 것이었는지 하는 문제다. 에드워드는 나름 편협하지 않은 사고를 가지려 했지만, 그의 의식은 결국 니콜라 라는 존재를 전방위적인 암적 존재로 인식했다. 물론 에드워드의 묘사를 따라가면서 떠올리는 니콜라의 모습은 어쨌든 '피해'그 자체였음이 분명하다. 뭐 어쩌면, 여기서 애드워드가 행하는 복수에 대한 정당성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복수란 남에게 인정받기위한 것이 아니니깐. 하지만 결국 1인칭이 보여주는 심리묘사야 말로, 복수가 결국 그 '자신'에게 '가장' 설득력있을 수 있다는 것의 상징이 되기도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 해본다. 에드워드 자신이 묘사하는 자신과, 에드워드 자신이 묘사하는 니콜라는 '가장 있는 그대로'에 가까울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며 말이다. 에드워드는 니콜라의 죽음 뿐만 아니라, 복수에 대한 근거까지도 편집한 것 아닐까? 모든 요소들이 복수라는 결말을 향해 거리낌없이 달려가게끔, 자신의 인식조차도 편집한 것 아닐까? 군 시절에 배운 위조능력과 치밀함이, 그 자신의 의식마저 편집하지 않았는가 하는... (편집(edit)에 관한, 편집증(paranoid)적 의심이라고나 할까.)
복수의 성공 후에, 자신의 문학적 능력을 반문하면서도, 그가 부활시킨 어윈 브라운의 소설의 부족한 부분들을 편집하는데 즐거움을 느끼는 에드워드, 그의 출판업 또한 성공가도를 달릴 듯 하고, 내면적으로도 해방된 듯 싶다. 그는 낙원이라 말했다. 그렇게 씌여있으니 그렇게 믿을 뿐이다. 하지만, 과연 그가 진정한 문학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그 길이 진정 그에게 맞는 길이었을까. 이것은 부정도 긍정도 아닌 조용한 질문일 뿐이다. (시원하게 읽으면 되기도 할 소설을 왜 이맇 어렵게 꽈서 읽는지 본인도 모르겠음;) 다만 에드워드의 훗날이 궁금해질 뿐이다. 자신의 앞을 막았던 것이 정말 타인 '뿐'이었는지, 타인'도' 있었는지는 제쳐두고, 에드워드에게는 어쨌든 그 타인이 문제였던 것이다.
나만이 지닌 고유한 독창성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자폐적 영혼 속에 묻혀 있는 것 같았다. (...) 매혹과 질투가 엇갈린 감정을 품은 채 니콜라가 내게서 빼앗아간 능력을 어떻게 남용하며 가지고 노는지 주시할 따름이었다. (109)
실없는 소리 하나 또 하자면, 레이싱을 소재로 한 만화나 영화를 보면, 불공평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앞선 차량을 추월하려면 코너링을 통해서 극복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렇지 않고 앞서려는 순간, 앞의 차와 충돌하여 모두 탈락 할 뿐이다. 나보다 앞선 누군가 있다고 한다면, (사실 그런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그 길이 1차선의 외길이 될 것인지, 아닐것인지는 전적으로 선택에 달려있다. 앞의 누군가를 걸고 넘어뜨려서 앞으로 향하던지, 그 옆에서 계속 달려볼지... 인간은 지구에서 사는 이상 결국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하고, 지면을 딛고 살아가지만, 실제로 세상의 가장 밑바닥을 딛는 최후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판단이 불가한 문제니깐. 단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런 생각은 얼마나 간편한지..
에드워드를 피해의식에 빠진 가련한 인간만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복수가 시원한면이 있음도 사실이다. 그가 극복하지 못한 자신의 트라우마는, 자신 스스로 고립시킨 것인지, 혹은 신의 뜻인지는 몰라도 비극이었음 또한 분명하다. 하지만 그 또한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했을 테고, 충분히 인생을 열심히 살아온 흔적을 간과할 순 없을 것이다. 어쩌면 독자는, 이 복수의 이야기를 통해 슬쩍 즐거워하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왠지,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대체, 나의 자존감은 누구에 의해 편집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