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함락 1945 걸작 논픽션 26
앤터니 비버 지음, 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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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들여다본다는 것의 서글픔은 역사가들이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보이지 않는 심연이 있다"는 사실이고, "그 심연 앞에서 역사가의 언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발 없는 새의 주인공 워이커씽은 말한다. 문학이나 예술 작품 역시 같은 한계를 갖고 있을 수 있다.

 

유년 시절, 아버지와 함께 봤던 드라마 'COMBAT'-미군 소대원들의 노르망디부터 베를린까지 이르는 전투 여정을 그린-을 기억한다. 대부분 승리로 끝나는 그들의 전투에서 느끼는 안도감과 희열 때문에 다음 회()를 기다렸던 어린 나이의 무지를 떠올렸다.

 

전쟁사 역시 이런 한계를 갖고 있다. 연대와 시간으로, 지리적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이 그 당시 그 안에 존재했던 한 사람의 고통을 표현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런 책들이 출판되고 있다. ‘2차 세계 대전이후의 기록물에는 전쟁에 대한 낭만주의적 회고, 또는 이상주의적 논리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에는 전쟁의 현실을 정확하게 감각적으로 묘사하여 환멸을 갖도록 한다.

 

이 책의 차별점은 전쟁 막바지에 벌어진 인간 비극을 관련국의 지도자와 사령부뿐 아니라 일반 병사들과 점령 지역의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물리적 심리적 고통을 동시에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저자는 공식 기록물뿐 아니라, 신문, 일기와 비망록, 서신 등을 참고하고 소개한다. 이 글을 읽는 동안 나는 경험해보지 않은 그들의 고통을 상상해보아야 했고, 인간 비극의 심연을 들여다보아야 했다. 선과 악의 경계가 없어지는 전쟁의 막바지 기록을 대하며, 인간은 왜 이런 비극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반복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하게 된다.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사진, 1945330일 슐레지엔 전투에 참여 중인 유겐트 대원들의 얼굴에서 독일의 운명이 보인다. 지친 얼굴의 그들은 패전이 확실하다는 걸 알면서도 이 전쟁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이어지는 사진들에서 서쪽으로 탈출하는 독일 여성들, 숲에서 너도밤나무 열매를 줍는 피난민들의 모습, 엘베 강의 파괴된 철교를 건너 미국 점령지로 탈출하는 민간인들. 오데르 강에 다리를 놓기 위해 허리까지 물속에 잠겨 있는 소련 공병(工兵)의 모습들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처칠, 히틀러, 괴벨스, 힘러, 스탈린 등이 등장하는 사진들 보다 이런 광경에 더 시선이 가는 이유는 이것이 바로 전쟁의 실상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1944년의 베를린은 전쟁을 시작할 당시와는 아주 다른 분위기다. 부족한 배급과 스트레스로 인해 베를린 시민들은 초췌한 모습이다. 도시에 가득한 패배주의를 없애기 위한 선동과 감시는 소용이 없다. 소련군이 오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을 베를린 시민들의 공포는 그들을 서쪽으로 향하게 한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 모두가 떠날 수 없을 뿐더러, 국가사회주의 정부는 그들을 떠나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통제하고 처벌한다. 함락 이후,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에서 자행되었다고 들었던 강간과 약탈에 대한 소문은 현실이 되었고, 베를린 시민 특히 여성들은 재앙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도생의 길을 찾는다. 심지어 그녀들은 점령군 중 한 병사에게 몸을 주고 자신을 다른 군인들로부터 지켜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한다.

 

들이닥칠 군인들에 대한 두려움은 몸이 더럽혀짐으로 인한 수치심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존엄이 짓밟히고 파괴되는 상황에 대한 근원적 공포다. 그녀들의 모습은 마치 원형경기장 안에서 사자에 쫓겨 이리저리 흩어지는 무리처럼 느껴진다. 인간이란 정체성을 주장할 수 없는.

 

동프로이센에서 베를린에 이르기까지 붉은 군대가 약탈과 강간을 지속적으로 자행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먼저 폴란드 수도가 파괴된 모습을 목격한 후에 붉은 군대 내의 폴란드 부대들이 자비심을 잃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눈에 덮인 폐허와 잿더미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88p)”고 제3충격군의 클로치코프 상위는 기록하고 있다. 종군기자 바실리 그로스만 역시 유대인 거주 구역 폐허 아래 몇 구의 시체가 묻혀 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고 기록한다. 아우슈비츠의 참상은 그들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을 것이다.

 

113일 동프로이센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을 때, 정치장교들은 표지판을 세웠다. “제군들이여, 여러분은 지금 파시스트 짐승의 소굴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90p)” 최종공세를 앞두고 정치장교들은 복수점수라는 것을 만든다. “각 연대에서 병사와 장교들을 면담해 히틀러의 짐승들이 저지를 잔혹행위와 약탈과 폭력과 관련된 사실들을 규명했다. ‘현재 우리는 살해당한 친척 775, 독일에 노예로 끌려간 친척 999, 불탄 집 478, 파괴된 농가 303채에 대한 복수를 하고 있다……[1 벨라루스] 전선군의 모든 연대에서 복수 회의가 열렸고 엄청난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우리 전선군의 병사들 뿐 아니라 붉은 군대 전체의 병사들이 파시스트 점령군의 극악무도한 만행과 악행을 벌하는 고귀한 복수자들이다.(293p)”

이러한 선전들은 복수심과 증오를 자아내어 병사들을 분발시키는 목적 외에, 그들이 벌이는 약탈과 강간에 대한 면죄부를 주었다. 연합군의 약탈 역시 독일 국경을 건너기도 전에 시작되었다.(324p)”

 

베를린 함락은 소련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깨고 1941년 스탈린그라드를 침공했던 독일에 대한 복수이자, 슬라브인들을 열등 인종으로 취급하며 만행을 저지른 나치에 대한 복수다. 소련에게는 한 가지 숨은 목적이 있다. 미국의 맨하탄 프로젝트에 대항해 원자폭탄을 생산할 우라늄과 핵물리학자를 확보하는 것이다.

 

베를린 함락이 독일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그 시점에 히틀러의 벙커로 모인 사람들과 그 도시를 탈출하려는 시민들의 대조에서 알 수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히틀러와 성욕으로 광란의 밤을 보내는 그들에게서 이 전쟁의 성격을 보게 된다. 이성의 작동은 찾아볼 수 없다. 남아있는 것은 육체의 욕망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곧 닥쳐올 최후는 죽음 외에는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들의 성적 광란은 강간을 피해 숨어 다니는 베를린 시민의 모습과 대조된다.

 

베를린 시민들은 혼란스런 감정을 느꼈다. 베를린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던 당시, 집 앞에 걸린 흰 깃발이 이 혼란을 대변한다. “1933년에 그렇게 법과 질서를 원했던 이 나라는 역사상 가장 범죄적이고 무책임한 나라 중 하나가 됐다. 그 결과는 그 국민, 무엇보다 동프로이센의 여자와 아이들이 독일이 폴란드와 민간인들에게 가했던 고통과 비슷한 고통에 직면했다는 것이다.(666p)”

 

선악의 경계가 모호하고 승자와 패자가 없는 전쟁이 계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적이 아닌 지도층의 어이없는 판단 실수로 목숨을 잃은 병사들을 보며, 전쟁은 정의나 선의 편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2차 대전 이후로는 전쟁에 대한 환멸 경험담이 주로 쓰여 왔다.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유물론적 반전주의자들은 빛나는 정신적 허울을 벗기고 전쟁의 현실을 아주 정확하게 감각적으로 묘사하기만 하면, 인간이 더 이상 전쟁에 참여하길 원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극한의 경험473p)” 그러나 여전히 정신적 사기에 의해 정의를 위한 전쟁은 계속된다.

 

저자가 인용한 개인의 기록을 통해서도 들여다볼 수 없는 심연은 존재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런 전쟁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가 전쟁을 한다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나는 전쟁 국가의 일원이 된다. 독일 국가사회주의당이 탄생하고 상상할 수 없는 범죄를 벌이게 되기까지, 합리주의와 이성을 강조했던 당시 지식인들은 침묵했다. 갈등과 문제를 전쟁으로 해결하려는 의도는 항상 있어왔다. 전쟁사를 읽는 것은 침묵을 깨고 그에 동의할 수 없음을 말하는 주체가 되기 위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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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0-05 1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이 매우 인상깊습니다!

그레이스 2023-10-06 10:03   좋아요 0 | URL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