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평점 :
책을 읽고 나서, 너무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감상을 바로 글로 정리하지 못할 때가 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감동을 글로 풀어내지 못하는 능력의 한계일 것이다. 라캉이 “기표가 기의에 닿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진다”고 한 것처럼 그저 텍스트만 읽었을 뿐인 독서를 할 때도 있다. 의미를 찾는 과정이 독서를 끝낸 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이 작품의 경우는 평행하는 여러 인물의 서사가 나에게서 생성되는 의미를 찾는 것이 어려웠다. 한마디로 적용의 문제가 어려웠고, 여전히 생각 중이다.
작가는 직접 화자(話者)가 되기도 하고, 또 다른 화자를 등장시키기도 한다. 이들 모두는 영국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고, 일부는 유대인이다. “이민자들은 타국에서도 주로 고향사람들과 어울린다.”(84p) 그들에게서 고향에서의 삶과 이주의 역사를 듣는다.
헨리 쎌윈 박사를 만나러 가는 화자(話者)를 따라 걸어간다. 머릿속에서 스케치하며, 잔디밭을 지나고 개암나무가 늘어선 통로를 지난다. 통로가 끝나는 지점에는 지금은 돌보지 않아 낡은 테니스장, 마치 젊음의 흔적만 남아있는 한 사람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몇 번의 만남 뒤에 그들은 자신의 삶을 이야기 한다. 유년시절과 헤어진 사람들, 이주와 이민자의 삶에 대해서. 나는 한 공간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 자서전을 써내려가듯 말하는 그 분위기에서 깊은 비애감을 느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향수병이 점점 더 심해진다고”(29p) 하던 나이든 이방인은 자살한다. 그리고 오래전 스위스 산악에서 실종되어 그에게 큰 상실감을 안겨줬던 그의 친구는 칠십 이 년 만에 빙하에서 발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사자들은 이렇게 되돌아온다. 때로는 칠십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얼음에서 빠져 나와, 반들반들해진 한줌의 뼛조각과 징이 박힌 신발 한 켤레로 빙퇴석 끝에 누워 있는 것이다.”(34p)
파울 베라이터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소식을 들은 화자(話者)는 파울 베라이터가 자신의 스승이던 S도시에서의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와의 첫 만남, 견학수업, 클라리넷을 연주하던 모습, 쾌활하고 즐거운 것 같았던 그가 오르간 연주를 듣고 흐느껴 울던 모습, 어떤 생각에 빠져들며 침울해지던 모습을 기억한다. 나중에 알게 된 그 슬픔의 원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반(半)유대인이었고, 1/4만 아리안의 피가 흐르던 그가 징집에 응하고, 1939년과 1945년에 다시 독일로 돌아간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독일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견딜 수 없는 일들을 목격했을 그, 비트겐슈타인, 벤야민, 츠바이크 등 자살한 작가들의 책을 읽고 기록하던 그, 알프스 아래 작은 마을에서 이민자로서 살다 끝을 낸 그에게서 처절한 고독을 본다.
화자(話者)의 여행은 그들의 흔적을 찾고 그 땅 어딘가에 뿌리가 있음을 확인하기 위함이었을까? 고향을 떠나 스위스와 프랑스로 그리고 영국으로 이주하는 일가의 역사를 듣고, 정신병원에서 죽어간 아델바르트 할아버지의 비망록에 적혀 있는 아름다운 여행기를 따라 되짚어간다. 그 비망록에 적힌 마지막 종착지였던 예루살렘의 풍경은 폐허와 같았고 병든 사람들만이 눈에 띈다.
맨체스터의 공장지대 아뜰리에에서 작업하고 있는 화가 페르버의 말에 가슴이 서늘하다.
“19세기 내내 독일인들과 유대인들이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도시가 바로 맨체스터였지. 그러니 나는 가출한다고 나섰다가 되려 집으로 돌아온 꼴이었네. 우리 시대 공업의 탄생지인 이 도시의 거무칙칙한 건물들 사이에서 사는 날이 길어질수록, 나는 나 역시 흔히 말하는 것처럼 굴뚝 아래에서 일하려고 이리로 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어(that I am here, as they used to say, to serve under the chimney).”(243p)
절멸 수용소의 굴뚝(chimney)을 바로 떠올렸다. 의도적으로 이중적 의미를 담기 위해 이 문장을 썼을까? 그리고 육필원고-그의 어머니가 1939년에서 1941년 사이에 슈테른바르트가의 집에서 적어놓은 것-를 건네준다. 그 기록은 한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고통스러운 독일 동화 같은, 가슴을 옥죄어오는 탁월한 글이다. 그녀의 어린 시절과 일상 풍경은 아름답기만 하다. 독일을 고향으로 생각하고 동화되어 살았었기에, 호른 연주자와의 사랑과 이별, 프리츠 페르버와의 결혼, 그와 함께 오른 산들, 슈테른바르트가의 집에서 시작한 신혼과 뮌헨 테레지엔비제 광장에 만들어진 스케이트장의 기억은 “온 세상이 파란빛으로 가득했던”(279p) 아름다운 기억이다.
1991년 루이자 란츠베르크의 기록을 따라 독일로 간 화자는 유대인들의 허물어져가는 공동묘지에서 그 흔적을 찾는다. 남편 프리츠와 루이자는 1941년 11월에 강제 수송된 뒤에 소식이 끊겼다고 적혀 있는 란츠베르크가 묘비를 발견한다. 여행에서 돌아와 폐허가 되어가는 맨체스터에서 페르버의 마지막과 한때는 유명했던 호텔의 퇴락한 모습을 마주한다.
어딘가에 속하려했던 인간의 모습. 그러나 배척의 대상이었고, 탈주자이며, 이민자였던 그들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이주한 곳에서도 번영의 흔적만 남아있는 타자들의 도시에 머문다. 그래서 그들은 더 있을 이유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끝내버린다. 삶의 경계 밖으로 내몰렸던 역사, 여전히 뿌리내릴 곳이 없는 이민자들의 실존적 상황은 처절한 고독으로 다가온다. 우리 안의 누군가는 이런 실존적 상황을 겪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끝없이 자신의 근원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그의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끝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기분”(185p), 그것이 그들의 실존 느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