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땅속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면? 실은 내가 더 무서워하는 건 삼촌이 그날 살해되지 않고 북쪽 어딘가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었다. 삼촌의 성품이나 행적으로봐서 그럴 개연성은 충분했다. 남편이 법조계에 몸담고 승진도 순조로울 때는 세상이 요새보다 훨씬 경직돼 있을 때여서,
처가라도 이북과 연관이 있는 가족이 있으면 승진이나 출세는물론 해외여행에도 지장을 받을 때였다. 남편은 나에게 그런삼촌이 있는 것도 몰랐다. 나는 그 살해 현장을 단지 목격만한 게 아니라 공범자였던 것이다. 나의 시골집 마당은 아직도흙바닥이지만 양회 바닥처럼 단단하다. 내 친구의 어머니 시신까지 하룻밤 사이에 동해바다로 토해낸 폭우도 우리 마당의견고함을 범하진 못했다. 나의 입과 우리 마당은 동일하다. 둘다 폭력을 삼켰다. 폭력을 삼킨 몸은 목석같이 단단한 것 같지만 자주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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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3-09 17: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제목은 들어본 책이지만, 잘 몰라서 찾아봤는데, 박완서 선생님 돌아가시고 1년 지나서 나온 책이네요.
생각해보니, 지난해가 벌써 10주기였어요. 시간이 정말 빨리갑니다.
그레이스님, 오늘 휴일 잘 보내고 계신가요.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3-09 18:54   좋아요 2 | URL

맞아요
이미 알고 있던 내용도 있구요
여전히 감동인 지점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