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둘이 같은 반이 되면서 미주는 진희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갈 수있었다. 미주가 보기에 진희는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었는데 겉으로는오히려 둔감해 보였다. 자기 감정만큼이나 타인의 감정에도 예민해서그런 것 같았다. ‘나 예민한 사람이니까 너희가 조심해야 돼‘라는 식이 아니라, 네 마음이 편하다면 내가 불편해져도 상관없다는 식으로자신의 예민함을 숨기려고 했다. 대수롭지 않은 척 상대의 얘길 들으면서도 얼굴이 붉어지고 입술을 물어뜯던 진희의 모습을 미주는 기억한다.
- P195

진희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을 때,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볼펜을 이리저리 돌릴 때 미주는 자신이 진희를 안다고 생각했다. 넌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그때가 미주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미주의 행복은진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진희가 어떤 고통을 받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으므로 미주는 그 착각의 크기만큼 행복할 수 있었다.
- P196

난 항상 열심히 살았어.
하민은 종종 그 말을 했다. 나는 ‘살다‘라는 동사에 ‘열심히‘라는 부사가 붙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hard‘는 보통 부정적인 느낌으로 쓰이는 말 아닌가. hardworking‘ 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사는 게 일하는 건 아니니까. 나는 하민이 어떤 맥락에서 그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자기를 몰아붙이듯이 살았다는 것인지, 별다른 재미 없이 살았다는 것인지, 열심히 산다는 게 그녀에겐 올바르다는 가치의문제라는 것인지, 삶의 조건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는 것인지 말이다.
그녀가 그 말을 할 때, 그래서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 P265

내가 할 수 있었던 일, 세 시간 동안 샤워하기, 돌아와 다시 두 시간동안 샤워하기.
그뒤로 내가 할 수 있었던 일. 먹지도 자지도 않고 열여섯 시간 동안 텔레비전 보기.
한심하게 사는구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심하게라도 살기까지 얼마나 힘을 내야 했는지, 마침내 배가 고프고몸을 움직일 수 있고 밖으로 나갈 힘이 생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일이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천둥은 하늘이 아니라 땅이 우는 소리 같았다.
- P261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08-26 00: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렇게 그레이스님이 발췌해주신 문자을 다시 읽어 보니 진희의 모습, 미주의 착각이 보이네요 ^ㅅ^

그레이스 2021-08-26 05:20   좋아요 2 | URL
우리는 항상 타인에 대해 착각하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