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이 될 거라는 소문이 동네에 돌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 봄품이었다. 소문이 구체화될수록 동네의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져갔다. 부모님은 우리가 살던 동네가 하루빨리 허물어져버리길 바랐고, 그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부모님은 골목을 쓸었고, 골목에서 누군가를 마주치면 묵례를 했다. 나는 우리 중학고 졸업생 중 소수만 진학할 수 있었던, 강 건너의 사립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말수가 조금 더 줄었다. 우리 동네까지는 스쿨버스가 오지 않아서 다른 아이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 스쿨버스가 다니는 곳까지 일반 버스를 타고 가야만 했는데, 그래서 나는 몇 배나더 피곤했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친 뒤 버스를 갈아타고 밤늦게집에 오는 날들이 많았기 때문에 해지와 만날 수 있는 시간도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간혹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조퇴를 하기도 했지만 그럴 때는 해지가 집에 없기 일쑤였다. 그렇게 일찍 집에 돌아와봤자 혼자 있게 되는 날들에는 처음 이사왔던 날 아버지가 내게 아파트 단지를 보여주었던 옥상에 쭈그려앉아, 사라져가는 태양의 빛줄기가 쇠락한 골목과 남루한 벽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풍경을 바라보았다. 마치 검버섯 핀 노인의 얼굴을 쓰다듬듯이..
그러면 그 손길을 따라, 동네는 쪽잠을 청하는 고단한 노인처럼 - P93

주름이 깊게 팬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다. 해가 지고 나면 대기에남아 있던 온기도 노인의 마지막 숨결처럼 느리게 흩어져갔다. 몸에 한기가 깃들어 더이상 앉아 있기가 힘들어지면 그제야 나는 쭈그렸던 다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라한 골목이 어째서 해가 지기 직전의 그 잠시 동안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워지는지, 그때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는동안 내 안에 깃드는 적요가, 영문을 알 수 없는 고독이 달콤하고또 괴로워 울고 싶었을 뿐.
- P94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21-07-18 1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누구 문장이 이렇게 좋은가 검색해 봤더니 백수린 작이군요. 어느 소설집에서 그의 단편을 읽을 적이 있어요. 우울한 사춘기 시절이 느껴지는군요. 때로는 달콤하고 때로는 쓴 맛이 느껴지는...
누구나 느껴봤음직한.

그레이스 2021-07-18 15:20   좋아요 1 | URL
여기 작품 다 좋아요
그 중에도 <시간의 궤적>이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