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컬링 (양장) - 2011 제5회 블루픽션상 수상작
최상희 지음 / 비룡소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완전 웃기잖아!
난 배를 잡고 소리 없이 웃기 시작했다. 진지하기 그지없는 비질이 맹렬해질수록 내 어깨는 더욱 크게 출렁거렸다. 이건 올림픽 중계일 리가 없다. 올림픽을 패러디한 쇼라면 몰라도. 올림픽은 그거 아니냐. 더 높이, 더 빠르게, 더 강하게, 한계에 도전하는 인간 의지가 캐치프레이즈 아닌가? 하지만 이건 뭐. 시종일관 던지고, 쓸고, 닦는 것뿐. 파이팅 할 의지를 한순간의 비질로 말끔히 없애 버린다. 보면 볼수록 힘이 쪽쪽 빠진다. 이것의 정체는 뭘까. 세계 시민의 대축제, 인류의 대화합을 이루고자 하는 올림픽 정신에 정면으로 저항하고 있는 어떤 집단의 몸부림, 지구인을 한순간에 바보집단으로 만들고자 하는 외계인의 음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던 순간.」 28p
올림픽 정신은 더 높이 더 빠르게 더 강하게 아닌가? 그런데 이건 뭐지? 하는 주인공 차을하의 어리둥절해 하는 생각이 재미있다. 항상 ‘이것은 이래’하고 생각했던 것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낯설게 다가올 때의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마주침은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고정관념에 갇혀있었는가를 알려준다.

「가열찬 비질이 끝나자 맷돌은 원 안으로 쏙 들어갔다. 쾅!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맷돌은 원 안에 들어 있던 다른 색 맷돌을 힘차게 튕겨 버렸다. 볼링 핀이 스트라이크로 쓰러질 때처럼 상쾌했다. 중년 남자는 엄지손가락을 쓱 들어 보였다. 중년 여자는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환하게 웃고 젊은 남녀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나는 아빠 얼굴을 힐끗 쳐다봤다. 아빠는 소파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어쩐지 다른 세계로 진입한 것 같았다. 다른 밀도로 적용되고 있는 중력에 의해 몸이 둥실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주위는 달 착륙의 순간처럼 고요했지만 내 가슴은 옥토끼가 방아를 찧듯 콩닥거렸다.」 29p
비웃듯이 보고 있던 경기에 의외로 빠져들어 세 게임을 연속해서 보게 하는 그 무엇.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는 순간이고 세상의 낯섦을 발견하는 순간일 것이다. 이것을 발견하고 나를 둘러싼 규칙이 허물어 질 때 나는 무방비 상태가 되고 새로운 것이 어느새 자신의 삶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며루치와 산적이 그리고 컬링이 주인공의 삶에 마구 쳐들어 온 것처럼…. 달의 반대편처럼 내가 생각지 못한 삶의 이면이 있고 다른 방식이 있다는 것 주인공에게는 충격과 함께 매력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컬링을 처음 만났을 때 세게임을 연속으로 보고, 컬링동호회에 계속 나갔던 것 아닐까?

주인공이 살았던 세계의 규칙과 방식은 무엇일까?
「˝그러니까 대회에 나갈 계획이다. 이 말이지?˝
˝그래, 실컷 말했는데 이제야 알아들었구나? 소년, 너도 파이팅의 기쁨을 누려 보라고.˝
˝뭐, 국가 대표라도 될 셈이냐?˝
“어, 너 국가 대표가 꿈이냐? 열심히 하면 될 수도 있지.˝
며루치가 벌쭉 웃었다. ……
˝그럼, 뭐냐? 혹시 체육 특기자 같은 걸로 대학 가려는 거냐?”
˝무슨 벌써 대학씩이나? 겨우 고1인데 벌써 인생을 결정하기에는 좀 이르지 않냐?“
짐작대로다. 이 녀석은 마이너다. 일군 뒤에 물러나 마냥 벤치에 앉아 있는 이군 선수 같은 녀석들, 교실에도 일군과 이군은 엄연히 존재한다. 인생을 결정한다기보다는 슬슬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 빠른 집단, 그 세계라면 나도 살짝 한 발 담그고 있는 터라 모르지는 않는다.
˝그럼 뭐냐? 대학도, 국가 대표도 아니면 컬링은 왜 하는거냐?˝
˝너 은근히 따지는 스타일이다? 네 세상은 대학과 국가 대표 두 개뿐이냐? 참 지루한 인생을 살아왔군, 소년, 그러니까 일단 한번 해 봐. 백날 말해 봤자 입만 아프지. 너도 하고 나면 알게 될 거야.”
“……”
“뭐, 우리가 그렇다고 막 급하고 그런 건 아니야. 어디까지나 취미로 하는 거니까.”
“취미?”
“그래, 취미. 약간 그런 느낌이니. 동호회 같은 거.”」 32~33p

‘세상이 대학과 국가대표 뿐이냐는 질문과 참 지루한 인생을 살아 왔군’ 하는 며루치의 말에서 반박하는 데 머뭇거린다. 고 1인데 아직 진로를 결정하지 않은 것은 마이너라는 증거. 주인공이 살고 있는 세계의 규칙이다. 이 대화에서 십대들이 달려가는 방향을 보게 된다. 대학과 성공. 일부는 치열하고 일부는 무기력하게 줄을 지어 달려간다. 무기력한 쪽이 지루할까? 아니 한곳만 바라보는 치열함에도 지루함이 있다. 방향표지판만 보고 달리는 고속도로처럼. 주인공이 강산에게 왜 나를 컬링동호회에 데려갔냐고 질문하자 강산은 “너 진짜 살기 싫은 표정이었으니까”라는 대답을 한다. 담담하고 시니컬한 말투와 생각때문에 놓쳤던 주인공의 무기력감을 강산의 말로 알려준다. 이것을 알아본 것은 강산이 야구를 그만두게 되었을 때 경험했던 감정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유력한 주니어 야구선수로서 성공을 위해 달려가다가 그만두게 되었을 때의 사라진 세상. 자신이 경험한 것이었기에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에게는 숨통을 트일 수 것이 필요했다. 그것이 한 단어로 표현된다.
‘그냥’

왜 세상에는 그냥 할 수 있는 일은 없는가?
항상 목적이 있어야 할까?
‘그냥’ 이란 단어에 대학이나 성공이란 의미는 없다. 바로 그 그냥이 아이들의 숨통이 툭 트이도록 해주는 것이다.

「“왜 하는 거냐, 컬링?”
“그게 …… 중요하냐?”
“듣고 싶다. 왜냐?”
“그냥.”
“그. 냥.”
“숨통이 툭 트이더라. 왠지 모르지만, 그냥.” 」 276p

주인공은 초등학교 1학년 때 바지에 똥을 싼 기억을 자신이 혼자서 무엇을 하는 아이가 되게 한 계기로 기억한다. 화장실에서 기다려도 엄마와 선생님은 오지 않고 혼자서 차가운 물에 뒤처리를 했다고 한다. 자신이 제법 의젓하게 바지를 빨고 뒤처리를 했다고 말하는 주인공. 이후 매순간 혼자서 무엇을 하는 아이가 되었던 외로운 아이.

나는 화장실에서 홀로 일처리를 하는 주인공을 그려보며,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1학년을 어떻게 지냈을까? 하고 생각해 봤다. 혹시 미처 나의 눈과 손이 닿지 않아 외롭게 내버려둔 시간이 있었을까? 학교라는 새롭고 두려운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아이가 겪을 두려움에 대해 당시 나는 조금 무지하거나 무감했던 것은 아닐까? 주인공과 같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열이 난다는 연락을 받고 뛰어갔던 일, 실내화를 잃어버려서 맨발로 다녔다는 이야기들이 오버랩 되며 나를 기다렸던 짧은 시간동안 아이는 기분이 어땠을까를 생각하며 마음이 먹먹해졌다. 다행히 아이들은 잊어버린 듯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겪은 기다림과 불안했던 기억은 어딘가에 기억으로 남아 있겠지! 갑자기 학교라는 새로운 공간은 아이들에게 무시무시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잘 자라주어 감사하다는 생각과 함께….

외롭고 무기력한 주인공에게 함께 할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딜 수 있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마이너의 세계에서 그냥의 세계로……^^. 얼마나 다행이고 행복해 보이는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전혀 중요치 않은 일이다. 그래도 우리는 하고 있다. 컬링. 이 어둠 속, 혼자가 아니라서 좋다. 달려간다. 함께하기 위해서. 아마도 그래서 하는 것이다. 컬링, 우리는 하고 있다. 」 279p

아이들 숨통이 트이게 해주는 컬링. 함께 하는 친구들. 목적이 없어도 그냥 할 수 있어서 행복한 아이들. 이 책을 읽으면 내 숨통도 트이는 것 같고 내가 그냥 함께 하는 독서친구들이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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