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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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이하는 인간. 이처럼 놀이를 문화의 전 방면에 대입하여 정의하는 책은 처음 본 것 같다. 저자 '하위징아'의 말에 의하면 모든 문화의 행동원리에 놀이하는 인간이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언어적으로 살펴본 놀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구조는 여러 문화권과 다양한 나라를 예로 살펴보기도 한다.

 
 '[호모 루덴스]의 언어로 말해 보자면 진지함의 세계에서 벗어나 놀이의 세계로 들어갈 때 문화가 더욱 강력하게 추진된다는 것이다.' -14p

 놀이와 경기(아곤)의 관계. 이 둘의 경계가 확실하다고 말하는 주장에 대한 반론을 하위징아는 매우 세부적으로 낱낱히 파헤친다. 논리적으로 이 둘의 차이점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며 어느 영역에서든지 놀이로써의 조건이 떨어지는 근거를 찾아 하나하나 따져든다. 그런 그의 글을 눈으로 따라잡는 다는 건 제법 흥미로운 일이면서도 복잡한 일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리 쉽게 읽힐 수 있는 책이라곤 말하지 않겠다.

 '문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아곤의 기능은 고대 시대에 이르러 가장 아름다운 형태, 가장 뚜렷한 형태의 아곤적 기능을 획득했다. 문명이 더 복잡해지고, 더 다양해지고, 더 과부하가 걸리면서, 또 생산 기술과 사회 생활 그 자체가 더욱 정교하게 조직되면서, 오래된 문화적 토양은 서서히 아이디어들, 사상과 지식의 체계, 교리, 규칙과 규정, 도덕과 관습 등의 무게에 눌려 질식하게 되었다. 사실 이런 체계들은 놀이와의 연계를 잃어버린 것들이었다. 뭐라고 할까, 문명은 좀 더 진지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놀이하기에는 부차적 지위밖에는 부여하지 않았다. 영웅의 시대는 끝났고 아곤의 단계 또한 과거의 것이 되어 버린 듯하다.' - 155p


 하위징아는 논리적으로 이 문제를 이해해선 안된다고 말했지만 그가 설명하는 방법은 논리적인 방법이었다. 그는 놀이하는 인간과 인간의 전 문명에 대한 관계를 파고 들었는데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는 부분에선 모든 것이 납득할 만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특히 전쟁에 관한 부분에서 그가 전쟁 또한 놀이의 일부분이라고 했지만, 그리고 그 전쟁이 놀이라는 행위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존중하에 예의적으로 원칙을 세우고 싸우는 것이라 하였지만 지금까지 역사속에서의 긴 전쟁 중에 그런 전쟁이 과연 얼마나 되었단 말인가. 또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에 따라 예의 바르게 싸우기 시작하였다 하더라도 이성을 잃는 순간 그 원칙은 무너진다. 인간은 화가 나면 이성을 잃기 마련이고 원칙은 그렇게 쉽게 지켜지지 못한다. 이 부분에서는 이론으로써 보다는 경험으로써 시각에 무게를 두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교에 관한 부분에선 조심스러운 저자의 접근이 보였다. 거기에 관한 부분은 '하위징아'의 주장을 흥미롭게 읽었다. 그 외에도 그는 법률, 지식의 수단이 되는 놀이, 시, 문학, 의인화, 철학, 예술, 서양 문명, 현대 문명 등 살펴볼 수 있는 모든 부분을 아울러 놀이와의 관계와 관점을 살펴본다. 수수께끼 같은 호기심을 자극해 놀이에 참여하게 만들어 지식을 익힐 수 하는 것으로 현재 각종 퀴즈쇼와 스도쿠 같은 것들을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놀이 문화로써의 레고 또한 창조력과 이미지, 즉 상상력을 일깨워 주어 '하위징아'의 의견과 부합될 듯 하다.

 나는 문학을 좋아하므로 가장 문학적인 요소가 짙은 놀이와 시와 예술에 관한 부분은 나름 재미나게 보았다. 고대 시인의 진정한 명칭은 바테스(vates)라고 하는 데 이는 홀린 자, 신에게 매혹된 자,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라는 뜻이다. 이런 자질은 그가 비범한 지식의 소유자임을 암시했다. 그는 지식인, 즉 아랍 사람들이 말한 샤이르(sha'ir)였다. 에다의 신화에서는 시인이 되기 위해 꿀술을 마셔야만 했다. 꿀술은 현자 크바시르의 피로 준비되었는데 이 현자는 그 어떤 질문을 받아도 대답하지 못하는 법이 없는 모든 인간 중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 점차적으로 시인 - 예언자는 예언자, 성직자, 점쟁이, 비법 전수자,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시인의 형태로 분화되었으며 심지어 철학자, 입법자, 연설가, 선동자, 소피스트, 수사학자도 원시적 복합체인 바테스로부터 나왔다.(234p참조) 이러한 특성들은 성스러움과 문학성을 동시에 수행했던 고대 시인들의 기능을 잘 말해준다. 성스러운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 시인의 기능은 항상 놀이 형태에 근거를 두고 있다.

 놀이라고 하면 내 생각으론 가장 먼저 당사자가 재미를 느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문화의 전 방면에 놀이라는 원리로 작용한 문명이 만들어졌다면 인간은 이런 문화를 창조하면서 먼저 재미로 시작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후에 문화가 만들어낸 부정적인 것은 미처 상상해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호모 루덴스]는 저자의 방대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저자 또한 아직 충분히 연구되지 못한 부분에 침투하다 보니 하나의 사실적 연구라기 보다는 이론에 가까운 것이긴 하지만 학문적 효과로써 매우 만족할만한 책이다. 이 한권만 읽어도 언어와 예술, 종교, 철학, 문명에 관한 여러 가지 지식을 흡수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분명 놀이하는 인간에 의해서 창조되고 그에 의해서만 즐기는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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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 청년 김원영의 과감한 사랑과 합당한 분노에 관하여
김원영 지음 / 푸른숲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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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이 많은 시장에 가면 가끔 보곤 했던 게 누워서 혹은 앉아서 리어카를 끌고 가며 물건을 파는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가끔 좁은 길에서 빽빽한 사람들 사이들 사이로 리어카를 돌리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도록 끼이기도 했다. 그러면 이리저리 돌려가며 리어카를 빼려고 용을 쓰곤 했는데 무심한 사람들 사이에서 도와주려고 했더니 극구 사양하며 혼자서 해결하고 돌아갔다.

 그런 모습이 왠지 안타깝고 안쓰러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그 아저씨를 위해 마음속으로 응원하는 일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아저씨의 모습이 비굴하거나 무례한 점은 전혀 없었다. 그저 남에게 피해 안주고 스스로 해결하려는 아저씨의 모습이 내 마음의 딱딱한 곳을 건드렸다고 할까. 그 아저씨는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도 했다.

 어릴 때 내가 살던 동네는 아픈 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고 전체적으로 궁핍함의 향기가 곳곳에 스며있는 곳이었다. 집에서 조금 걸어 나오면 일명 '또랑가'라고 불리던 썩은 물이 흐르는 얕은 시내가 저 아래에서 흐르곤 했었는데 거기에는 박쥐떼도 있었다. 덕분에 나는 박쥐와 동거동락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또랑가 위의 다리를 건너면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불퉁불퉁하고 양 볼에 혹이 달린 빨간 얼굴의 혹부리 아저씨가 살고 있었고 그 근처 어딘가에는 다리 없는 아저씨가 살고 있었다. 두 다리가 없는 아저씨는 가끔 허전한 자리에 고무로 된 무언가를 끼우고 엎드려서 고무 슬리퍼를 손에 끼우고 밖을 나다니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저씨는 가족도 없었던 것 같고 휠체어를 살만한 형편도 안 되었기에 그렇게 누워서 다녔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 반에는 몸에 화상을 입었고 얼굴이 조금 이상하게 생긴 여자 아이가 있었다. 나는 그 시절 그 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우리와 조금 다르게 생겼고 좀 못생긴 편이라 남자아이들이 그 아이를 괴롭히거나 그 아이에게 친구가 없다고 생각했다. 여자 아이 이름은 '은지'였다. 나는 다른 아이들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 아이 이름은 결코 잊지 못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은지 같은 아이들이 제법 있었다. 내가 아는 아이들로는 10명정도였던 것 같다. 그런데 같은 반이 아닌데도 나는 그 아이들을 알고 있었고 다른 아이들도 그랬던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은지'와 비슷한 '형주'라는 아이와 같은 반이었는데 이 둘을 알고 있는 아이들은 '은지'와 '형주'가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고 놀리기도 했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놀린 적은 없었다. 단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을 뿐이었다.

 중학교땐 내 학년 위로 난쟁이 언니가 학교를 다녔는데 이 언니는 분위기가 조금 어두웠던 것 같다. 나야 같은 학년도 아니었기에 그저 스쳐 지나치다가 마주치기만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 언니의 얼굴은 무서우리만큼 어둡고 모든 사람을 경계했다. 내가 아는 정도는 그 정도랄까.

 생각해보면 내가 살아온 학교, 길, 동네에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늘 함께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어느 곳에서든 장애인 이야기가 나오면 마치 먼 사람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졌을까. 내 앞에 있는 삶의 무게 때문에 나보다 더 큰 삶의 무게를 가진 사람을 쳐다보지 못해서. 그럴려고 생각도 안해서?

 가끔 뉴스에는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장애를 가진 사람을 이용해 자기 실속을 챙기거나 심하면 장애인들을 멋대로 부리기도 하는 장면이 목격된다. 여자일 경우는 성폭행 사건도 조용치 않게 보도되곤 한다. 그런 걸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썩었고 나쁜 가에 대해 치를 떨기도 하지만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모르겠다. 그저 그런 소식을 들으면 분노를 터뜨리지만 다시 일상의 무관심한 생활로 돌아간다. 그런 건 무능한 정부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제법 긴 문장의 제목이지만 왠지 내 마음이 뜨끔해지는 문구이기도 하다. 책을 읽어보면 장애를 가진 삶이란 무엇인지 어떤 형태로 세상을 보는 눈이 열려있으며 세상은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 여태까지 마음속에 담아두고 펼쳐놓지 못한 저자 '김원영'씨의 심경을 알 수 있다. 내가 그의 삶을 공감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 있다면 거짓말일까. 솔직히 겉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항상 내겐 어려운 숙제같다. 내 속에도 장애가 있다. 그러니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게 위선이 된다면. 나는 어떤 말로도 그들을 이해시키지 못할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어릴 때 가난함과 궁핌함속에서 살았고 고통의 깊은 맛이 무엇인지 아니 당신을 이해할 가능성이 더 많다고 하면 어떨까.

 어찌보면 수필이라고 볼 수도 있는 이 책은 그의 경험을 통해 이 세상에 당연히 있어야 할 권리에 대한 외침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직은 많이 꼬여 있고 복잡해서 어려운 문제는 풀려고 하는 사람만 있다면 언제나 시간을 두고 해결되게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열정이 더해지는 만큼 다른 사람에게 그 뜨거움이 전해질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가 책을 쓰면서 가진 열정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 열정이 식지 않아 계속해서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워갈 수 있도록 힘을 보내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그에게 응원을 보내주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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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사회>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폭력사회 - 폭력은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볼프강 조프스키 지음, 이한우 옮김 / 푸른숲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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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자는 권총의 총신을 희생자의 관자놀이나 가슴 혹은 아랫배에 갖다 댄다. 살해자는 희생자의 사지를 칼로 도려내고, 뼈와 두개골을 돌덩어리나 우연히 손에 들린 몽둥이 혹은 부서진 의자 다리 따위로 박살 낸다.' - 264p

 아무 페이지나 넘겨 읽어도 위에 같이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다른 책에서 자주 보이는 인용구나 전문가의 의견 없이도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으로 '폭력 사회'를 정의하고 이론을 정리해가는 특이한 구성을 가진 이 책은 다소 빨리 지루해질 염려가 있다.

 질서와 폭력, 폭력과 격정, 고문, 구경꾼, 사형 집행, 전투, 사냥과 도주, 학살, 사물들의 파괴. 이 책의 구성 제목들이다. 처음에 제목들을 보고는 역사에서 현대까지 일어난 사건을 짚어가며 가해자와 피해자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것인지 알았다. 그들을 통해 폭력사회의 단면을 살피고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을 각 사회의 특징에서 살피는 것이라고.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의 서술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곤 피비린내 나는 살육현장과 무참히 짓밟히는 희생자가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마지막장까지 책을 읽기 전에는 그것이 '문명 비판'이라는 것을 알기에도 제법 어수선하다. 다행히 번역자가 이 책의 후기를 달아줌으로써 내가 삼천포로 빠져서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번역자 역시도 이 책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을 비슷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공포의 방에는 이런 계통의 선조들을 모셔둔다. 이 방에는 타살자, 강도 살인범, 암살자, 식인 살인자 등이 모두 모여 있다. 폭력의 관행은 다양한 (살인) 형태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늘 그런 관행을 각인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문화이다. 본성(자연)이 아니라 문화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고 지금도 그렇게 만들고 있다." - 322p 


 문명이 만들어지면서 다음 세대로 이어짐에 따라 전 시대의 폭력을 문화를 통해 다시 각인되어 반복한다. 결과적으론 이런 뜻인것 같다. 그렇다면 이 작가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글쎄. 그건 오리무중이다. 사물에 관한 지식을 논리적인 연관에 의하여 하나의 체계로 이루어 놓은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 이론이라는 것에 약간 애매해 그 뜻에 대해 한 번 찾아 보았다.

 네이버 백과사전을 참고했다.
 
 - 학문이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이론이 있다. 일단 이론이 형성되면 그 이론의 논리적인 결론을 끌어냄으로써 미지(未知)의 영역에 관해서도 효과있는 예상을 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러나 사물에 관한 새로운 지식으로 인하여 이론 적용에 한계가 생기는 수가 있다. 이런 경우 이론에 구애되어 사실을 무시하는 일이 허다하나 이것은 큰 잘못이다.

이론 중에서 근본적인 전제가 있는 것, 또는 자료(資料)에 관한 보고 사항 중에서 그대로 인정해야 할 것은 공리(公理)가 된다. 다음의 명제는 공리로부터 연역(演繹)되는 정리(定理)가 된다. 이와 같은 논리적인 연결을 철저히 정리하면 공리론(公理論)을 얻게 된다. 여기서 이를 논리기호(論理記號)로 표시하면 형식화(形式化)된 이론이 형성된다.

여기까지 정리하면 동일한 이론이 전혀 다른 복수의 사상(事象)에 적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는 경우가 있다. 이론이 적용되는 현상(現象) 또는 그 구조를 논리학이나 수학에서는 그 이론의 모델이라고 한다. 그러나 경험과학(經驗科學)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하나의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을 그 현상의 모델이라고 할 때가 많다. 학문 연구 과정에서 논리적 전개에 치중하는 것을 이론면(理論面), 사상(事象)과의 대결에 치중하는 것을 실험면(實驗面)에 관한 연구라 하여 구별한다. -

 어째, 어느 면에서는 확실해진 것 같기도 하나 어떤 면에선 더 애매해진 기분이다. [폭력 사회]는 내 스타일의 책은 아니었던 것 같다는 게 지금까진 내가 내린 결론이다. 좀 더 인문 시각을 넓혀야 할 필요성을 갖게 해준 책이다.

 '폭력은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답은 결코 멀쩡하지 않은 세계로 이끌어 모두가 혼란속에 빠진다는 대답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다. 가장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점은 폭력은 절대 해결을 부르지 않으며 인간으로 태어나 느끼는 감정 중 가장 끔찍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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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의 동행
미치 앨봄 지음, 이수경 옮김 / 살림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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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아, 내게 가르쳐 다오. ]

 

  나는 신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그리고 신의 자녀로써 일한다는 사람도 많이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 속에 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믿은 적은 별로 없었다. 아쉽게도 나는 그런 면에서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본 이 책의 주인공처럼 운이 좋은 편은 못되었다. 신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중에는 신을 팔아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사람을 더 많이 보았고, 신을 자녀로써 일한다는 사람중에는 신을 내세워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사람이 더 많았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내면이 자비와 사랑으로 가득차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은 권력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려 하지도, 과하게 물질적 욕심을 취하는 것도 안된다고 말이다. 지금의 나는 무신론자나 회의론자에 가깝긴 하지만 다양한 종교들에 대해서 관대한 편이고 호기심도 있다. 사실 종교 그 자체보다는 사람이 종교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니까.

 

 누군가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신은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는 시대에서 착한 종교인으로써 현명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책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인물이었다. 내게 힘든 일이 너무 많아서, 바빠서, 신이 있다고 믿기에는 세상은 너무 험악해져 있어 마음에 믿음을 둘 곳이 없었다. 마치 못된 사람은 더 잘 살고 행복해하는 것 같고 착한 사람은 못 살고 더 불행해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착한 사람은 더 빨리 죽는 것 같았다. 이래저래 마음이 심란했다. 어느 순간은 믿을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사람중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일반인보다 더 교활한 사람이 많았고 남에게 피해를 주기도 했으며 절에서는 음흉한 마음을 품은 땡중이 표나게 돈을 요구하며 성불하라고도 했다. 모든 종교에서는 돈을 요구하며 건물과 자기네들의 배만 채우는 일이 잦아졌다.

 

 그런데 웃긴 건 가장 힘든 일이 있을 때 마음 속으로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는 거냐고. 신에게 원망하고 있거나 무언가 결과가 나오기 전에 떨리는 마음을 안고 제발, 제발 꼭 되게 해달라고 신에게 빌고 있다는 것이다. 달리 무언가 의지할 상대가 없어서이기도 했고 나를 전적으로 자비와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상대는 신밖에 없다는 생각이 어쩌면 무의식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생각보다 약하다. 특히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거나 무언가를 잃었을 때는. 그때는 무언가라도 붙잡고 싶은 것이 인간이며 신이 없다고 하기에는 삶이 너무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러니 신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인간에게는 위안이 되는 게 사실이다.

 

 [8년의 동행]이라는 책을 보고 느낀 점은 종교인에 관해서 나의 시선이 달라진 것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회의론자이다. 그러나 렙과 헨리의 삶의 형태는 내 마음 속에 있는 무언가를 물컹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믿음을 통해서 인간에 대한 선과 희망을 볼 수 있었다. 매일같이 몇번이나 실망하게 만드는 인간들에게서 과연 희망을 확인할 수 있을까.하는 마음이 들때도 있지만 렙과 헨리의 모습에서 한 가지 답은 찾을 수 있었다. 극히 소수이긴 하지만 렙과 헨리같은 사람도 있다고. 그러니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고 힘을 내자고. 어쩌면 내 삶의 일부분도 조금이나마 세상에 빛을 보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왕이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서로를 도와가며 생을 사는 게 고루고루 좋지 않을까. 지옥과 천국의 다른 점이 서로 돕고 안 돕고의 차이라고 본문 어느 부분에도 나오지 않았나. 렙의 삶을 들여다보면 어떻게 사는 삶이 마지막 순간에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는지 느끼게 해준다.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믿음을 가지는 것이 결코 소홀하고 헛된 일이 아님을. 많은 사람들이 삶을 살면서 공허감을 느끼는 것은 이 셋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못해서가 아닐까.

 

 어쩌면 자본주의라는 물질시대에서 이 책이 조금 진부한 스토리를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진부한 것이 가장 진실이며 아름다운 것이다. 꼬집어 뜯는 코미디로 각본,감독을 잘하는 우디 앨런의 말이기도 하다.     


 지난 몇년 간 읽은 신과 믿음에 관한 책으로 가장 생각나는 게 윌리엄 폴 영의 [오두막]과 닐 도날드 월시의 [신과 집으로]다. 그들 책에선 나름대로 선과 악이 내재되어 있는 삶의 모순에 대한 궁금증을 신의 대답이라면 어떻게 설명해줄 수 있을지 작가들 나름의 견해로 밝히고 있다. 책을 읽을 당시에는 그들의 말들이 매우 감동스럽게 가슴에 남긴 하지만 사실 그보다는 실질적으로 내가 부대끼며 살고 있는 인간에게서 희망을 찾고 싶은 게 솔직한 나의 소망이다.

 

 [8년의 동행]에서 저자는 각기 다른 두 종교인을 보며 믿음과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간다. 헨리는 역사적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미션]에서 나왔던 죄를 지었으나 더 독실한 믿음을 지니고 사랑과 자비를 위해 옳은 일을 하게 되는 로버트 드니로가 맡은 역할 '로드리고 멘도자'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제레미 아이언스가 맡았던 '가브리엘 신부'를 빼놓기가 서운하겠지. 말할 필요도 없이 내게 감동을 주었던 인물이었다. 그를 보면서 모든 종교인들이 가브리엘 신부(렙 또한 마찬가지) 정도였다면 세상은 지금 180도정도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영화를 보고 드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8년의 동행]에서 렙이 말하던 '성스러운 공동체'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바른 길로 가는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고 했나. 헨리은 옛날에 렙이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나는 기쁨과 함께 일 마일을 걸었네
 그녀는 내내 이야기를 재잘댔네
 하지만 나는 조금도 더 지혜로워지지 않았네
 그 모든 말을 다 듣고 나서도.


 

 나는 슬픔과 일 마일을 걸었네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네
 하지만, 아, 나는 그녀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네
 슬픔이 나와 동행했을 때


 

                             - 로버트 브라우닝 해밀턴 -


 이 시를 보고 나면 내 삶에서도 배우는 것이 있으니 그래도 그리 절망적이진 않은 것 같다. 종교에 대한 믿음을 말하고 있지만 나는 종교보다는 종교인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이 책을 보았다. 솔직히 신에 대한 것이라면 누구도 정확하게 알고 있진 않으니까 믿는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사람에 관해서라면 그 사람의 생애, 언어, 감각, 사상을 통해서 무언가를 깨달을 수도 있고 그를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 내 생각엔 렙이 저자에게 추도사를 부탁해서 깨달음을 얻은 것은 미치 뿐만이 아닌 것 같다. 렙 또한 미치를 통해 자신의 믿음을 확인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 아닐까. 더욱 더 믿음을 굳힐 수 있었고 말이다. 렙은 죽었지만 책을 통해 그의 정신은 영원히 살아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유머감각과 음악감각을 잊지 못할 것 같다. 헨리 또한 종교인이지만 개인적으로 애착이 가는 인물이다. 몇번이나 인간의 나약한 면에 유혹 당했지만 결국 평범한 사람들보다 바른 길로 접어들은 그의 모습이 왠지 더 공감이 된다고나 할까. 해봤으니 그것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알고, 당해봤으니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아니 그는 불쌍한 사람들을 더 가슴 깊이 공감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헨리가 더 편하고 그에게서 희망을 찾는다.

 

 책이니까 이런 인물이 있지.하고 약간 실망스럽다면 이들이 실화 속 인물이라는 것을 기억해두리라. 그리고 나와 같은 시대를 살기도 했던 사람들이라고. 세계시민을 꿈꾸는 나이니 언젠가 여행 중에 그들이 살았던 곳을 스쳐갈지도 모르리라. 어두운 것을 보면 계속 어두운 것들만 생각나듯이 밝은 것을 보면 점점 밝은 것들이 생각난다. 아예 희망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하나씩 사소한 일에서라도 희망을 찾아봄이 어떨지 떠올려보며 잘 여물은 책 하나 덮어 품속에 안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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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라쉬 브런치 - 번역하는 여자 윤미나의 동유럽 독서여행기
윤미나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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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코 전통 스프인 '굴라쉬'. 굴라쉬는 얼큰해서 한국의 육개장 같아 입맛에 잘 맞다고 여행자는 말한다. 
 

  여행이란, 계획을 아무리 철저하게 짜놓아도 예상밖의 일이 터지거나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장소에서 늘 일어나지 않고는 못 베기는 모험과 마주해야 한다. [굴라쉬 브런치]가 여행서인가? 이 책을 따라 루트를 이행해볼만한 세세한 정보를 나열하지 않은 것을 보면 타 여행서만큼 실용여행서는 아닌듯하다. 그렇다면,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문화의 한 단편인 책과 영화를 떠올리는 주인공을 보니 요즘 잘 나가는 여러가지 책의 서평처럼 살아가면서 볼만한 읽을거리, 볼거리를 추천하는, 글쎄 이것을 어느 소속에 넣어야 할지 조금 막막한데,, 음. 인문계발쪽에 가까울 듯하다. 하지만 또 인문계발서쪽 치고는 너무 감상적이고 편안하다. 에세이형식의 시선을 밑바탕에 쫙 까라놓았기 때문일까.

 아마도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제법 복합적인 장르로써 이 시대의 트렌드가 아닐까 싶다. 새로운 시도가 한창 진행중인 시대가 아닌가. 그러니 괜한 장르 논할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재미읽게 읽으면 그만인 것이다. 여행지사진을 보면 언제나 마음이 설레이고  그곳에 지금 당장 닿을 수 없는 안타까움과 먼저 간 자에겐 부러움이 물씬 들곤 했었다. 여행은 시간과 물질이 따르는 거라 이 두 가지가 제일 먼저 충전되지 않으면 떠날 수 없기에 항상 뒤로 날짜를 미뤘던 나는 이런 책을 볼때마다 다시금 불끈불끈 욕구가 솟아오른다. 언젠가 꼭 가고 마리라고. 사실 여행지에 가서 좀 시간을 지내다보면 주변의 것들이 익숙해지는 때가 있다.(자유여행은 아니었지만 딱 한번 낯선 나라로의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럼 이런 생각이 든다. 여기 내가 있는 곳과 저쪽에 내가 있었던 곳은 주변경치와 사람들, 문화, 시간대 말고는 그다지 틀린 점은 없다. 중요한 건 내가 어디에 있고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것을 느끼냐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도 나는 더 많은 놀라운 것을 보고 싶고 고향에서 볼 수 없었던 무지하게 낯선 것에 호기심을 느낀다. 설레이는 마음을 품고 본 수많은 장소의 사진을 보며 뭉클했던 것에 비해 고작 한 나라밖에 안 가봐놓고 하는 말이다.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한 신비함.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스펙타클하고 판타지한 모험(그렇다고 현실에서 이런 모험을 기대하진 않는다. 그냥 그런 로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죄가 되진 않으니까)은 아닐지라도 어쨌든 나름 각자의 모험을 하게 된다. 이 모험에서 아마도 내가 가지고 있던 두려움이 좀 해소되지 않을까. 더해지려나. 결과적으로 먼 곳으로의 여행을 좀 해본 사람들을 보면 당당함이 느껴진다. 세상 살아가기 무섭게 일에만 쫓긴 사람보다 주변을 살피면서 머리와 가슴에 자연의 에너지를 불어넣은 사람은 확실히 여유롭고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 강하다는 것을 느낀다. 자연과 어울리면 사람이 더 자연스러워지는 것일까.

 사색에 잠기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낯선 곳. 외국에서의 여행은 그 나라의 문화에서 역사까지 살피는 계기가 된다. 프라하에서 여행자들은 카프카의 집을 살펴보고 그가 작품을 쓰면서 왔다갔다한 길목도 걸어보고 어느 식당 한군데에선 먹어보지 못한 그 나라 고유의 음식도 먹어본다. 역사의 저쪽편에 있었던 사람이 머물렀던 바로 그 장소에서 그의 발자취를 밟다보면 마치 현재의 이쪽편이 그쪽과 연결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면 괜시리 마음이 뿌듯해지고 찡해지는 느낌이 든다.  

 처음엔 글을 써나가는 여행자가 다소 까다로운 면이 느껴지기도 했다. 여행지에서 일어나는 돌발상황이나 불편스런 일들에 불평하고 새로운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너그럽지 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게 여자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더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글을 중반 넘어 읽어나가다보니 그녀의 여행기가 어딘가 톡 쏘는 맛이 있으면서도 매력적이란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가 들려주는 여러가지 이야기와 책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예전에는 호적 담당 관리들이 유대인에 대한 반감 때문에 아누스Anus 같은 모욕적인 성을 그들의 호적에 등재했다고 한다. 아누스anus는 항문이라는 뜻이다. 어느 유대인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이런 식으로 생색을 내기도 했다. "이것들아, 애비가 g자를 하나 끼워 넣느라고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알기나 해?" g를 끼워 넣으면 항문이 "양 羊'이 된다. Agnus Dei하면 신의 어린 양, 즉 예수를 뜻한다. - 미셸 투리니에의 [예찬] 중 - 89p

 유대인에 관한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100편의 동화와 민담'이라는 부재를 가진 [세계의 동화]. 크리스치안 슈트리히 앤 타트야나 하우프만이 쓴 이 책은 삽화만 5년에 걸쳐 그렸다고 한다. 나는 바로 이 책을 인터넷서점에서 찾아보았다. 제법 비싼 책이었는데 평도 좋고 정말 흥미로운 책인 것 같아 바로 찜해놓았다.

 또 하나 흥미로운 책을 더하자면 지젝에 관한 책이었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라는 쉽고 친절한 지젝 입문서를 쓴 토니 마이어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젝은 끊임없이 놀라는 사람,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철학자, 진실의 '구멍'을 드러내는 부정어법 구사자, 할리우드 영화광, 프랑스 철학통, 오늘날 활동하는 가장 탁월한 사상가이다. 지젝에 대해 알고 싶거나 그의 세계에 입문하고 싶은 사람에게 적당한 책이라고 권하는 저자는 이 책에 대해 말한다. 재미있고 유익하다. 무엇보다 알파카 코트처럼 가뿐하다. -198p

 표현 한번 절묘하지 않는가. 지젝이 어떤 사람인지는 책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또 하나 찜.

 저자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다면 이 부분을 눈여겨 봐둘 것. 
 
 언어와 국적을 초월하여, 첫눈에 알아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우스꽝스러운 포비아를 몇 개쯤 가지고 있고 부끄러운 습작 노트 혹은 스케치북을 가져본 적이 있고 피카소보다 자코메티를 좋아하고 담배와 연필에 대해서 나름의 소회를 밝힐 수 있고 바게트 빵을 보면 모딜리아니가 사랑한 여인의 얼굴이 떠오른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박쥐들의 초음파처럼 내게도 그런 기똥찬 의사소통 수단이 있어서 나와 같은 종을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248p

 이 책을 내고 난 후 저자는 아마 자신과 같은 종의 독자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물위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한 여인을 보며 생각한다.

 평생 단 한 번도 제대로 익사해보지 못한 내 삶은 그녀 앞에서 한없이 초라하다. 모든 허영과 가식, 생존을 위한 찌꺼기를 바다 속 깊은 바닥에 전부 가라앉히고 해초처럼 가벼워진 몸으로 둥둥 떠다니고 싶다. 딱 한번만이라도 황홀하게 익사하고 싶다. - 147p

 어째, 어구 자체는 약간 으시시하지만, 속뜻은 그게 아니다. 참말로 자유로운 순간 정도엔 동참하고프다. 

  "걷는 게 고역일 때 길이란, 해치워야 할 '거리'일 뿐이다.
  사는 게 노역일 때 삶이, 해치워야 할 '시간'일 뿐이듯"
                 - 황인숙 [세상의 모든 비탈]

                                                 ㅣ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될 때마다 함께 배치되어 있는 -> 위와 같은감상 어린 '문장' 이 책을 더 감칠맛나게 만드는 구성 요소다. 김밥에 단무지가 안 들어있으면 허전하듯이, 시작할 때마다 문장들과 함께 시작하지 않았다면 민민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사르트르의 여인 '보부아르'는 그녀의 연인이 되고자 하는 이가 가장 기본적으로 함께 칸트를 논할 수 있어야 상대해 줬다고 하는데 저자 또한 만만치않을 것 같다.


 켄터기 옛집에 햇빛 비치어 여름날 검둥이 시절
 저 새는 긴 날을 노래 부를 때 옥수수는 벌써 익었다
 마루를 구르며 노는 어린 것 세상을 모르고 노나
 어려운 시절이 닥쳐오리니 잘 쉬어라 켄터키 옛집

 

  낯선 여행지 보힌 호수의 한적한 산길에서 노래 부르는 저자와 그녀의 동반자 비노 양. 긴 거리를 걷느라 다리가 아파 고통을 잊고자 부르는 노래 가사를 더듬어보면 제법 슬프다. 흑인인 어머니가 천진난만하게 노는 어린 자식을 보는 모습. 어린 자식이 자라면 자신과 마찬가지로 노예가 될테다. 그런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들에 대한 그런 안쓰러운 마음이 노래에 담겨져 있다. 이 노래를 어릴 때 들어본 적이 있는데 음이 생각나지 않아 찾아보았다. 음이 얼마나 더 분위기와 매치될까 궁금해서였다.  http://blog.naver.com/ymchoe/80055161292  검색 중에 이 노래가 있는 블로그를 찾았다. 합창인데 구슬픈 가락이 느껴진다.

 
  진실은 작가불명이고,
  오로지 오류만이 개인적인 소산이다  - 폴 벤느
  


 두브로브니크 맥주 Pivo를 홀짝이고  '후알라'(슬로베니아어. 고맙다는 뜻.)를 외치는 재미있는 여행자. 그녀를 통해 몇가지를 배웠다. 몇권의 추천책, 두브로브니크에서의 666계단, 사람을 제치고 가는 고양이 행렬, 트램에선 표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그러나 그녀는 꼭 표를 사라고 했다. 불시에 확인할지 모른다고.), 조안의 무례한 형, 슬로베니아의 깨끗한 거리(명심할것- 아홉시 후에는 술을 팔지 않음),몇편의 눈에 익거나 인상깊은 영화, 한국에서 맛볼 수 없는 기똥차게 맛있는 본토 흑맥주, 그리고 굴라쉬 브런치! 

 다음에 내가 여행자가 됐을 땐 기억해둔 그녀의 충고들이 무척 유용하리라.    
 [굴라쉬 브런치]는 여행과 책이야기, 영화이야기 삼박자가 고루 잘 버무려진 맛깔스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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