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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라쉬 브런치 - 번역하는 여자 윤미나의 동유럽 독서여행기
윤미나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3월
평점 :
체코 전통 스프인 '굴라쉬'. 굴라쉬는 얼큰해서 한국의 육개장 같아 입맛에 잘 맞다고 여행자는 말한다.
여행이란, 계획을 아무리 철저하게 짜놓아도 예상밖의 일이 터지거나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장소에서 늘 일어나지 않고는 못 베기는 모험과 마주해야 한다. [굴라쉬 브런치]가 여행서인가? 이 책을 따라 루트를 이행해볼만한 세세한 정보를 나열하지 않은 것을 보면 타 여행서만큼 실용여행서는 아닌듯하다. 그렇다면,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문화의 한 단편인 책과 영화를 떠올리는 주인공을 보니 요즘 잘 나가는 여러가지 책의 서평처럼 살아가면서 볼만한 읽을거리, 볼거리를 추천하는, 글쎄 이것을 어느 소속에 넣어야 할지 조금 막막한데,, 음. 인문계발쪽에 가까울 듯하다. 하지만 또 인문계발서쪽 치고는 너무 감상적이고 편안하다. 에세이형식의 시선을 밑바탕에 쫙 까라놓았기 때문일까.
아마도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제법 복합적인 장르로써 이 시대의 트렌드가 아닐까 싶다. 새로운 시도가 한창 진행중인 시대가 아닌가. 그러니 괜한 장르 논할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재미읽게 읽으면 그만인 것이다. 여행지사진을 보면 언제나 마음이 설레이고 그곳에 지금 당장 닿을 수 없는 안타까움과 먼저 간 자에겐 부러움이 물씬 들곤 했었다. 여행은 시간과 물질이 따르는 거라 이 두 가지가 제일 먼저 충전되지 않으면 떠날 수 없기에 항상 뒤로 날짜를 미뤘던 나는 이런 책을 볼때마다 다시금 불끈불끈 욕구가 솟아오른다. 언젠가 꼭 가고 마리라고. 사실 여행지에 가서 좀 시간을 지내다보면 주변의 것들이 익숙해지는 때가 있다.(자유여행은 아니었지만 딱 한번 낯선 나라로의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럼 이런 생각이 든다. 여기 내가 있는 곳과 저쪽에 내가 있었던 곳은 주변경치와 사람들, 문화, 시간대 말고는 그다지 틀린 점은 없다. 중요한 건 내가 어디에 있고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것을 느끼냐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도 나는 더 많은 놀라운 것을 보고 싶고 고향에서 볼 수 없었던 무지하게 낯선 것에 호기심을 느낀다. 설레이는 마음을 품고 본 수많은 장소의 사진을 보며 뭉클했던 것에 비해 고작 한 나라밖에 안 가봐놓고 하는 말이다.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한 신비함.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스펙타클하고 판타지한 모험(그렇다고 현실에서 이런 모험을 기대하진 않는다. 그냥 그런 로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죄가 되진 않으니까)은 아닐지라도 어쨌든 나름 각자의 모험을 하게 된다. 이 모험에서 아마도 내가 가지고 있던 두려움이 좀 해소되지 않을까. 더해지려나. 결과적으로 먼 곳으로의 여행을 좀 해본 사람들을 보면 당당함이 느껴진다. 세상 살아가기 무섭게 일에만 쫓긴 사람보다 주변을 살피면서 머리와 가슴에 자연의 에너지를 불어넣은 사람은 확실히 여유롭고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 강하다는 것을 느낀다. 자연과 어울리면 사람이 더 자연스러워지는 것일까.
사색에 잠기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낯선 곳. 외국에서의 여행은 그 나라의 문화에서 역사까지 살피는 계기가 된다. 프라하에서 여행자들은 카프카의 집을 살펴보고 그가 작품을 쓰면서 왔다갔다한 길목도 걸어보고 어느 식당 한군데에선 먹어보지 못한 그 나라 고유의 음식도 먹어본다. 역사의 저쪽편에 있었던 사람이 머물렀던 바로 그 장소에서 그의 발자취를 밟다보면 마치 현재의 이쪽편이 그쪽과 연결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면 괜시리 마음이 뿌듯해지고 찡해지는 느낌이 든다.
처음엔 글을 써나가는 여행자가 다소 까다로운 면이 느껴지기도 했다. 여행지에서 일어나는 돌발상황이나 불편스런 일들에 불평하고 새로운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너그럽지 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게 여자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더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글을 중반 넘어 읽어나가다보니 그녀의 여행기가 어딘가 톡 쏘는 맛이 있으면서도 매력적이란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가 들려주는 여러가지 이야기와 책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예전에는 호적 담당 관리들이 유대인에 대한 반감 때문에 아누스Anus 같은 모욕적인 성을 그들의 호적에 등재했다고 한다. 아누스anus는 항문이라는 뜻이다. 어느 유대인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이런 식으로 생색을 내기도 했다. "이것들아, 애비가 g자를 하나 끼워 넣느라고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알기나 해?" g를 끼워 넣으면 항문이 "양 羊'이 된다. Agnus Dei하면 신의 어린 양, 즉 예수를 뜻한다. - 미셸 투리니에의 [예찬] 중 - 89p
유대인에 관한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100편의 동화와 민담'이라는 부재를 가진 [세계의 동화]. 크리스치안 슈트리히 앤 타트야나 하우프만이 쓴 이 책은 삽화만 5년에 걸쳐 그렸다고 한다. 나는 바로 이 책을 인터넷서점에서 찾아보았다. 제법 비싼 책이었는데 평도 좋고 정말 흥미로운 책인 것 같아 바로 찜해놓았다.
또 하나 흥미로운 책을 더하자면 지젝에 관한 책이었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라는 쉽고 친절한 지젝 입문서를 쓴 토니 마이어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젝은 끊임없이 놀라는 사람,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철학자, 진실의 '구멍'을 드러내는 부정어법 구사자, 할리우드 영화광, 프랑스 철학통, 오늘날 활동하는 가장 탁월한 사상가이다. 지젝에 대해 알고 싶거나 그의 세계에 입문하고 싶은 사람에게 적당한 책이라고 권하는 저자는 이 책에 대해 말한다. 재미있고 유익하다. 무엇보다 알파카 코트처럼 가뿐하다. -198p
표현 한번 절묘하지 않는가. 지젝이 어떤 사람인지는 책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또 하나 찜.
저자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다면 이 부분을 눈여겨 봐둘 것.
언어와 국적을 초월하여, 첫눈에 알아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우스꽝스러운 포비아를 몇 개쯤 가지고 있고 부끄러운 습작 노트 혹은 스케치북을 가져본 적이 있고 피카소보다 자코메티를 좋아하고 담배와 연필에 대해서 나름의 소회를 밝힐 수 있고 바게트 빵을 보면 모딜리아니가 사랑한 여인의 얼굴이 떠오른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박쥐들의 초음파처럼 내게도 그런 기똥찬 의사소통 수단이 있어서 나와 같은 종을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248p
이 책을 내고 난 후 저자는 아마 자신과 같은 종의 독자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물위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한 여인을 보며 생각한다.
평생 단 한 번도 제대로 익사해보지 못한 내 삶은 그녀 앞에서 한없이 초라하다. 모든 허영과 가식, 생존을 위한 찌꺼기를 바다 속 깊은 바닥에 전부 가라앉히고 해초처럼 가벼워진 몸으로 둥둥 떠다니고 싶다. 딱 한번만이라도 황홀하게 익사하고 싶다. - 147p
어째, 어구 자체는 약간 으시시하지만, 속뜻은 그게 아니다. 참말로 자유로운 순간 정도엔 동참하고프다.
"걷는 게 고역일 때 길이란, 해치워야 할 '거리'일 뿐이다.
사는 게 노역일 때 삶이, 해치워야 할 '시간'일 뿐이듯"
- 황인숙 [세상의 모든 비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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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될 때마다 함께 배치되어 있는 -> 위와 같은감상 어린 '문장' 이 책을 더 감칠맛나게 만드는 구성 요소다. 김밥에 단무지가 안 들어있으면 허전하듯이, 시작할 때마다 문장들과 함께 시작하지 않았다면 민민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사르트르의 여인 '보부아르'는 그녀의 연인이 되고자 하는 이가 가장 기본적으로 함께 칸트를 논할 수 있어야 상대해 줬다고 하는데 저자 또한 만만치않을 것 같다.
켄터기 옛집에 햇빛 비치어 여름날 검둥이 시절
저 새는 긴 날을 노래 부를 때 옥수수는 벌써 익었다
마루를 구르며 노는 어린 것 세상을 모르고 노나
어려운 시절이 닥쳐오리니 잘 쉬어라 켄터키 옛집
낯선 여행지 보힌 호수의 한적한 산길에서 노래 부르는 저자와 그녀의 동반자 비노 양. 긴 거리를 걷느라 다리가 아파 고통을 잊고자 부르는 노래 가사를 더듬어보면 제법 슬프다. 흑인인 어머니가 천진난만하게 노는 어린 자식을 보는 모습. 어린 자식이 자라면 자신과 마찬가지로 노예가 될테다. 그런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들에 대한 그런 안쓰러운 마음이 노래에 담겨져 있다. 이 노래를 어릴 때 들어본 적이 있는데 음이 생각나지 않아 찾아보았다. 음이 얼마나 더 분위기와 매치될까 궁금해서였다. http://blog.naver.com/ymchoe/80055161292 검색 중에 이 노래가 있는 블로그를 찾았다. 합창인데 구슬픈 가락이 느껴진다.
진실은 작가불명이고,
오로지 오류만이 개인적인 소산이다 - 폴 벤느
두브로브니크 맥주 Pivo를 홀짝이고 '후알라'(슬로베니아어. 고맙다는 뜻.)를 외치는 재미있는 여행자. 그녀를 통해 몇가지를 배웠다. 몇권의 추천책, 두브로브니크에서의 666계단, 사람을 제치고 가는 고양이 행렬, 트램에선 표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그러나 그녀는 꼭 표를 사라고 했다. 불시에 확인할지 모른다고.), 조안의 무례한 형, 슬로베니아의 깨끗한 거리(명심할것- 아홉시 후에는 술을 팔지 않음),몇편의 눈에 익거나 인상깊은 영화, 한국에서 맛볼 수 없는 기똥차게 맛있는 본토 흑맥주, 그리고 굴라쉬 브런치!
다음에 내가 여행자가 됐을 땐 기억해둔 그녀의 충고들이 무척 유용하리라.
[굴라쉬 브런치]는 여행과 책이야기, 영화이야기 삼박자가 고루 잘 버무려진 맛깔스런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