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수영은 아내를 두들겨 패고 잃어버린 우산 걱정을 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란 노래가 있다. 100명의 위인들을 5분 남짓의 멜로디에 각 인물 별로 대략 한 줄 요약
정도로 총망라한 것인데, 작사가가 대단하다 싶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매국한 이완용이 위인이냐는 문제가 제기됐고, 노래 제목을
<한국을 빛낸 100명의 ‘사람’들>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었다(아직 제목이 ‘위인’인걸 보니 ‘안중근은 애국, 이완용은
매국’이라는 가사의 對句일 뿐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는 의견이 우세했나 보다).
이 노래를 유치원에서부터 가르치나 본데 어느 날 아들 녀석이 ‘말 목 자른 김유신’이 뭐냐고 물었다. 김해 김씨인 나는 조상님의 ‘행위’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제 갓 일곱 살 박이 아들에게 무어라 설명한단 말인가.
“응. 아빠가 술을 많이 먹고 집에 오는데 아빠 차가 곧장 집으로 오지 않고, 술집으로 새버려서 아빠가 차를 폐차해 버리는 거야.”
(아들은 고개를 약간 갸우뚱 하다가 추가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이렇듯 우리에게 ‘위인’이나 ‘위인전’은 엄숙주의에 다름 아니다. 김유신의 예처럼, 삼국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청년시절에 술
먹고 말 타지 않아야 하며,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다면 불굴의 의지로 말의 목을 베어야 하는 것이다(비단 김유신뿐 아니다. 어지간한 위인전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이런 에피소드가 하나쯤 없다면 병신이다).
하지만, 김유신의 이 행위가 과연 엄숙한 행위이고, 위인전의 단골 소재가 되며, 유치원 아이들까지 즐겨 부르는 동요에까지 나올만한
일이었을까? 나는 그저 홍상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질 뿐인데 말이다.
<찌질한 위인전>은 바로 이런 문제제기에서 출발한 책이다. 한마디로 위인들도 찌질한-‘지질’이 올바른 맞춤법인데, 책에는 어감의
차이로 ‘찌질’로 썼단다. 동의하는 바다.-행동을 자주 했고, 그 찌질함을 넘어 위인이 됐으니, 보통사람인 우리도 꿋꿋하게 살면 잘 풀릴 수
있다는 위안을 받자는 거다. 자, 이제 누가 누가 더 찌질한지 살펴보자.
한국 근대문학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김수영. 그는 그가 걸어온 길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6∙25전쟁이 터지자 인민군에 의해
강제로 의용군에 끌려갔다가 탈출하지만, 이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끌려가고,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에 찾아간 아내 김현경의 곁에는 동경 유학 생활
중에 자신을 의탁했던 이종구가 있었다.
남편의 생사를 모르는 비극적인 전쟁의 와중에 김현경의 선택은 비난 받을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김수영은 김현경의 손을 잡아 이끌지만,
거부당하고 만다. 1년이 지나고 김현경은 김수영에게 돌아오지만, 그의 자존심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버린 후다. 百聞이 不如一見이랬다. 그의 시를
살펴보자.
죄와 벌
(상략)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 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이 시속의 ‘그’는 바로 김수영 자신이다. 그는 술에 만취하면 1년에 두세 번씩 아내를 때리는 폭력적인 가장이었다(설마 한윤형이 김수영
코스프레를 한 건 아니겠지?).
그런데 이 슬프고도 아픈 현장을 묘사하는 게 가관이다. 만취한 사람이 40이라는 정확한 숫자를 기억하고, 잃어버린 우산을 아까워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만 보자면, 홍상수의 시나리오처럼 찌질하기 이를 데 없는 게 맞다. 그러나 폭력은 정당화할 수 없지만, 김수영 자신이 온갖 고초를 겪은
후에 찾은 아내는 이종구의 품에 있었고, 그 사건은 김수영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흉터를 남겨, 술만 마시면 아내를 구타했던 것이다.
<찌질한 위인전>의 저자 함현식은 김수영이 찌질함에도 위인인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때때로 사람의 일면을 보고 전체를 평가하는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
김수영의
시는 사실 무척 불끈적이다!
잘못된
현실에 대한 비판을 강하게 하는 작가로써 얼굴만 보아도 좀 신경질적이게 보이긴 한다.
그의
사생활면을 조금 들여다보면 아내를 때리는 남편이었다?
그
점은 비난받을 만한 일이었으며 비록 아내가 바람을 피웠을때 깔끔하게 헤어졌다면 오히려 그의 명예에 오점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김수영을 존경하는 사람들은 그의 사생활이 아니라 그가 사회에 드러낸 행적에 대해서였다.
그가
사회에 토해낸 사회비판적 시들이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드러냈다면 그는 사회적인 역할을 했을 따름이다.
아내에 대한 폭력적인 행동에 대한 대가는 그가 개인적으로 치뤄야할 비난이다. 그의 비윤리적인 행동은 그의 모순적인 인간의 양상을 보여주며 그의
사회적인 역할 또한 설득력이 없어진다. 그는 비윤리적이니 진실적이지 못한 사람이니까.
일단
김수영이 부르짖었던 건 궁극적으로 본다면야 사회적 정의실현이 아니었겠는가.
그런데
자기부터가 정의롭지 않은데 남에게 무슨 정의를 권할 수가 있단 말일까.
그의 사회적 단면을 본다면야 그는 존경받을만할지 모르겠으나,
사생활면에서의 단면을 본다면, 그는 그저 아내를 때리는 글쟁이로 전락되어 평가될수도 있다.
누군가는
그럼에도 김수영을 평가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러니까 김수영은.. 이렇게 평가할 것이다.
글쎄
어떻게든 김수영을 좋게만 봐왔던 사람에겐 실망스런 일일지도..
“모순은 여기에 있다. 아는 사람이 볼까 부끄러운 자신의 행동, 숨기고 싶은 자신의 모습. 그런데 그걸 시로 써서 발표했다? 그가 아내를
구타한 사건은 물론이거니와 그런 후에 아는 사람이 봤을까 걱정했다는 사실과 두고 온 우산이 먼저 생각났다는 속마음까지 그의 시를 본 모두가
알아버렸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 김수영을 위인이게 하는 이유가 있다.”
한마디로 김수영이 張三李四들의 시선을 아웃 오브 안중 해버리는 대인배의 면모를 과시한다는 것인데, 한국적인 정서로 볼 때 김수영은 스티브
잡스에 비하면 양반이다.
스티브 잡스의 존재감과 영향력은 월터 아이작슨이 쓴 자서전, 애쉬튼 커쳐가 주연한 영화, 심지어 ‘잡스’라는
단어가 들어간 자기계발서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의 존재감이나 영향력만큼이나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 결여, 자기애성 인격장애도
회자되곤 하는데, 그러한 잡스의 장애는 궁극의 찌질함을 낳는다. 바로 딸 리사의 경우다.
위인들도 피해갈 수 없는 찌질함
20대 초반의 잡스는 크리스앤 브레넌과 동거했고 ‘리사’라는 딸을 출산했다. 하지만, 잡스는 리사의 임신과 출산과정에서 ‘무시’로
일관했으며, 브레넌이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했을거라 믿었다.
결국 양육비 소송 등 법적 분쟁으로 이어진 이 싸움에서 잡스는 브레넌이 바람피운 증거를 잡기 위해 혈안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자신의 딸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리사’라는 이름을 같이 지었다는 사실이다. 마침내 리사가 태어나고 1년이 지난 뒤 DNA검사를 하게 되는데, 리사가 잡스의
딸일 확률은 94.41%였다.
과연 잡스는 승복했을까. 잡스는 한 인터뷰에서 통계적으로 미국 남성의 28%가 리사의 아버지일 수 있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까지 펼쳤다.
잡스는 시간이 지나면서 리사의 일을 후회한다고 했지만, 이미 호사가들은 잡스도 입양아였음을 지적하며 조롱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딸에 대한 애정은 있었는지 1978년 리사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GUI) 기반의 개인용 컴퓨터를 설계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리사는 매킨토시보다 훨씬 더 고급사양이었는데 가격도 훨씬 더 비싸서 무려 5000만달러를 쏟아붓고도 10년 동안 10만대도
채 팔리지 않은 것으로 추산된다. 이래저래 잡스와 리사는 인연이 없었던 모양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잡스의 심리 상태를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고 추진하는 것을 가리키는 ‘현실 왜곡장(reality
distortion field)’으로 분석하기도 하는데, 기한 내에 도저히 처리할 수 없는 양의 일을 지시하는 잡스를 보며, 애플의 엔지니어
버드 트리블이 영화 <스타 트렉>에 나온 용어를 떠올리며 차용했다고 한다(역시 잡스는 뭔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스티브잡스.
마지막 가는 길엔 그래도 지난 날의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지.
그나마
스티브잡스는 위인이라기 보다는 현대의 대단한 부자 이야기에 가까운 인물이다.
존경의
대상이라기 보단 동경의 대상이라,
그의
사생활면에선 사람들의 평가가 관대한 편일수 있다.
스티브잡스가 정의실현을 목표로 두진 않았으니까.
<찌질한 위인전>에는 위의 두 사람 외에도 동생 테오를 영원한 물주로 삼은 빈센트 반 고흐, 철없는 가난뱅이 이중섭, 자기
합리화의 달인 리처드 파인만, 하늘이 낸 괴물 허균, 의외의 보수주의자 마하트마 간디, 만들어진 영웅 넬슨 만델라, 공적 부풀리기 대마왕
어니스트 허밍웨이 등 11명의 찌질한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저자 함현식에 따르면, ‘우리 자신만의 대체 불가능함에 대한 믿음,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믿음과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단다. 지당한
말씀이다. 지나온 우리 삶의 찌질함은 잊어버리자. 앞으로 남은 삶이 중요한 게다. 혹시 아는가. <한국을 빛낸 ‘200’명의 위인들>
가사에 당신이 들어가게 될지.
이
밖에 어떤 찌질한 위인들의 맨얼굴이 까발려져있는지 그 안이 궁금해진다.
분명 얼마 전에 서프라이즈에서 보았던 아인슈타인도 있을듯.
아인슈타인은
자기 아내가 쓴 논문을 자기 껄로 만들어 노벨상을 탔다지..
그리고 다른 여자와 바람나서 아내와 처자식들을 버리고 자기만 띵가띵가 잘 살았다는.
새롭게
밝혀지는 원래 알았던 위인들에 대한 다른 모습을 알게 되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오히려
밝혀지지 않은 사람들중에 위인이 될만한 사람도 적지 않게 있어서 그런 사람들의 업적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가끔 안타까울때가
많다.
고로, 인생은 위인전에 실린 사람들을 보면서 그 사람들을 존경하며 배워가며 부러워하며 산다기보단 그 스토리의 알멩이를 배워서 나의 진면목에
충전해서 두루두루 살아가면 좋지 않을까.
정말
신화처럼 대단한 사람도 없고 올라가지 못할 나무도 없으며 내가 만들어가는 삶에 집중한다면야.
굳이
위인들이 사실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네.. 할지라도 큰 실망감으로 허탈해하지 않을지도...
뭐든 적당한 것이 좋은 듯.
적당히
믿고 적당히 속고 적당히 알아서 훑어 듣고 보는 것이.
그게
아니면 사는 게 무척 고달퍼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