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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4월
평점 :
"서로 연관이 없는 듯한 시구들이 점차로 하나의 고백을 이루었다. .. 거기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고.. 중략.. 빛이 바랜 자동차와 오자로 가득한 때 묻은 메뉴판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말하자면 장작더미였고, 데스는 그 위에 자기 삶을 통째로 올려놓았다. 이게 바로 그가 그토록 순수해 보이는 이유였다. 그는 모든 것을 바쳤던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거짓말을 했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의 시는 고매한 비탄이었다. 그 속에는 과거에 가졌던 것, 앞으로도 언제나 기억할 것, 그러나 다시는 가질 수 없는 것이 흐르고 있다. " <포기 中>
나는 이야기마다 그에 맞는 목소리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어젯밤'은 제임스 설터의 10가지 단편 중 하나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작품이다. 10가지 단편이 각각의 주제를 담고 있지만 마치 한 가지의 내용을 읽은 것처럼 단편들은 모두 닮아있다. 다양한 사람의 다른 이야기들이 닮아 있는 것은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아무리 부귀영화한들, 아무리 초라한들, 젊음에서 늙음으로 사랑, 배신, 무기력, 염증, 허무함은 어느 인간이든 겪을 수 있으며 결국은 삶을 밟아가는 단계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특별해서, 놀랍고 낯설어서 호기심이 일게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설터의 단편들은 일상적인, 너무나 일상적인 이야기들에 적절한 단어를 배합하고 버무려서 멋진 문장으로 완성시켰다는 점에서 가장 감탄스러웠는데 번역가 또한 이 점을 느꼈던 듯 하다. '다른 사람이 '체리'라고 하는 것과 설터가 '체리'라고 하는 것은 느낌이 전혀 달랐다. 세잔의 <생빅 투아르 산>의 붓질처럼 단어 하나하나가 눈에 와서 맺혔다.' 이처럼 설터는 말년의 인생에서 이전의 삶을 조망하듯 언어 자체에서 그 노련미와 비유의 정밀성을 부여하여 문장에 농축시켜 놓았다. 아마도 그 점이 설터의 단편들이 빛을 발하는 이유일 것이다.
'아궁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유명한 인사의 '아주 궁금한 이야기'들을 풀어놓으며 게스트들이 사적에서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한다. 그렇다고 정말로 사적에서 하는 것처럼 편안하게 모든 걸 풀어놓지는 않는다. 이런 이야기들을 사적인 자리에서 하게 되면 이야기가 한층 불을 지펴놓은 듯 뜨거워질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그냥 뒷담화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글로 잘 입힌다면 일상적인 삶의 일부가 좀 더 점잖아진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상상력을 입히고 단어와 문장의 힘을 알고 특징을 간파한 노련한 작가들은 이야기 자체를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설터는 장 르누아르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당신이 기억하는 것들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행복했던 일들, 기뻤던 일들 보다는 상처 받았던 일들, 충격이었던 일들은 더 크게 다가오고 기억되기 마련이고 무의식에 남은 트라우마는 인생의 많은 부분에서 예기치 않게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생각보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우리 생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인간이란 얼마나 단편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것이다. 죽기 전에 필름처럼 지나간다는 과거의 수많은 단편들. 거기에는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수많은 단편 조각들이 떠다니며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닌 가벼운 것들, 좋아하고 관심 있었던 음식, 물건, 존재......거기에 어릴때 두려워하던 거미나 벌레나 나타날 수도 있을 일이고 여태까지 잊고 있었던 어릴때 자신을 괴롭혔던 존재가 지나갈지도 모를 일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내가 산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산다. 외모가 뛰어난 아름다운 여배우 혹은 남자배우의 삶, 엄청난 부와 권력을 누리는 삶, 또는 예술가의 삶, 과학자, 대통령, 여행자, 감독, 장인의 삶...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호기심과 무한한 상상은 가지지 못하는 것을 갈구하는 것을 알면서도 거기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희망하며 꿈꾼다. 하지만 어떤 삶을 살아도 어느 정도 살고 나면 삶에 대한 공통적인 부분이 찾아온다는 것은 다 똑같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아니 인정을 하면서도 갈구하고 욕망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여러 사람들의 인생의 단편 단편들을 마치 아주 높은 곳에서 아래를 조망하며 제 3자의 눈으로 스쳐가듯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펼쳐놓는 설터의 글은 특별한 이야기가 없는 데도 주목하게 되고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잔잔한 호수 밑에 격렬하게 몰아치는 소용돌이같이 받아들이게 되는 이야기가 주는 한오라기들은 괜스레 깊은 밤 잠 못 이루게 만든다.
설터와 함께 영화 <다운힐 레이서>를 작업했던 로버트 레드포드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그때 설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나뭇잎을 들어 올려 햇빛에 비추어 보면 잎맥이 보이는데, 그는 다른 건 다 버리고 그 잎맥 같은 글을 쓰고 싶다고." 바로 이것이다. 이 잎맥 같은 글 때문에 너무나도 낱낱함을 느낀 탓일테다. 뭔가 너무 농축된 것을 들이마셔서 속이 시린 그런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