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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요일의 기록 - 10년차 카피라이터가 붙잡은 삶의 순간들
김민철 지음 / 북라이프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같은 구절을 수백 번 읽어도 고스란히 잊어버리는 능력,
글쓴이는 이것이 과장이 아니라고, 자신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한 곡도 못 따라 부르는 팬이라고 살짝 고백한다.
이런 프롤로그를 읽으며 순간 풋.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오해하지는 말자. 이건 비웃음이 아니라 마치 내 얘기를 써 내려간 것 같아 동질감에서 나왔던 웃음이니까.
김민철.
남자 이름이지만 엄연히 여자. 카피 한 줄 못 외우지만 엄연히 카피라이터.
나 역시도 글쓴이처럼 책을 읽고 주인공 이름이나 줄거리를 잘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글쓴이의 이름을 힘주어 읽어 본다.
내 몸 어딘가에 그녀처럼, 그녀가 쓴 이 책에 대한 느낌을 기록하기 위해서.
그럼 팀장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그렇다. 위에 언급한 사람들 모두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끈질기게도. 나는 이미 나를 포기했는데 말이다) 그 부분을 책에서 찾아 보여주시지만,
역시나 나는 곤란하다. 내게 그 책은 '어떤' 부분이 좋았던 책이라는 것만 기억날 뿐이다.
그러니까 '어떤'이 구체적으로 기억나는 것이 아니라, 막연하게, 희뿌연 구름처럼, 뭔가,
어딘가, 좋았던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는 느낌만 남아 있는 것이다. (p.18)
그녀에게는 대표적인 책 친구 두 명이 있는데 바로 남편과 팀장님이다.
책을 읽다 좋은 부분이 나오면 꼭 그녀에게 읽어주는 남편.
서로 책을 읽고 좋았던 부분을 정리해서 교환하고 있는 팀장님.
자신은 이미 본인을 포기했는데 주변에서는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한다.
‘끈질기게도’라는 글씨가 유독 강조되어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어쩐지 귀여운 투정처럼 느껴진다. 싫지는 않지만 마냥 좋지도 않아 곤란함이 살짝 묻어나는 어투.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글쓴이가 읽었던 그 책 제목이 무엇인지, 어떤 내용인지 모르더라도 상관없다고 말이다.
정말 별로 상관없는 기분이다.
그녀가 느꼈던 마음의 기록만큼은 고스란히 문장으로 잘 전해지기에 덩달아 두근거리고,
덩달아 즐거워진다고나 할까.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있지만 그중 그녀가 이모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던 일화가 기억에 남는다.
다짜고짜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부분을 읽어주신 이모.
그러나 그녀는 딱히 와 닿는 부분이 없기에 별다른 반응을 못했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이모는 마흔이 넘어 다시 읽으니 진짜 좋다며, 넌 어려서 모르겠지라고 말한다.
그 뒤 작가의 깨달음이 이어지는데 이것은 나에게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 자신은 과연 지금까지 읽었던 책을 ‘읽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책과 교감을 잘해왔었나. 조금 흠칫 놀라게 되었다.
나는 셰익스피어를 읽었다,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셰익스피어에 대해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읽었다는 사실만 기억한다. 그건 읽은 것일까?
마흔이 넘어 내게도 셰익스피어의 시간이 올까? 간절히 오기를 바랄 뿐이다. (p.32)
이미 거쳐 간 책들도 모두 자신의 시간을 숨죽여 다시 기다리고 있다. 그 책의 시간은 언제일까.
알 수 없다. 다만 사람과 책의 관계에도 때와 환경과 감정의 궁합이 맞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p.33)
한편 인상 깊었고 여운이 오래갔던 에피소드도 있었다.
<피아노가 멈추던 순간>. 이건 여름밤 야외의 고대 로마극장에서 키스 자렛 트리오의 재즈 연주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글쓴이의 경험이기에 독자인 나는 완전히 이해된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머릿속에는 자연스레 그 광경이 펼쳐지는 듯했다.
숨죽인 사람들로 인해 연주만이 가득한데 어느 순간 거기에 새소리가 더해지고,
피아노가 잠시 멈추고, 키스 자렛은 새소리에 집중하고, 관객들도 자연스레 그것에 집중하고,
그렇게 이어지는 자연의 소리. 바람이 불고, 노을이 지고, 새들이 운다.
그렇게 한참의 침묵 후 키스 자렛은 몇 개의 음으로 연주를 마무리한다.
난 그 연주를 듣지도 않았고 그곳에 있지도 않았지만 어쩐지 마음 저 깊은 곳이 울컥해지는 기분이다.
모두가 한 호흡이었고, 그 호흡에서 깨어나 박수로 갈무리하는 것, 감동, 벅찬 마음이
글에서 오롯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글만으로도 충분히 울컥해졌다.
[읽다, 듣다, 찍다, 배우다, 쓰다]의 구성 속에서 그녀의 글은 물 흐르듯 읽는 사람의 마음으로 흘러 들어온다.
지금 여기서 일상을 살아간다는 게 어떤 건지, 이곳이 자신의 지중해임을 안다는 게 어떤 건지...
글쓴이 덕분에 여러 가지를 새롭게 느끼고 바라보게 되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또 다른 기록들을 책으로 내주었으면 좋겠다.
그녀의 글은 읽을수록 더 읽고 싶어지는 매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