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전쟁 50년의 점령 - 중동 테러리즘의 불씨를 지핀
아론 브레그먼 지음, 정회성 옮김 / 니케북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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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국 런던 킹스칼리지의 전쟁연구학과 교수로 있는 아론 브레크먼은 이스라엘 출신으로 중동 전쟁에 참전한 후, 제 1차 인티파다 발생 이후, 비롯된 이스라엘 정부와 군에 의한 팔레스타인들에 의한 가혹한 처우와 정책에 반대하여 이스라엘을 떠나 영국으로 이주한 이력이 있는 역사학자입니다. 이 책의 서두에서도 이와 관련한 개인사로 그의 이런 양심의 문제에 대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장인과의 관계 등이 언급되고 있는데요. 아마도 조국인 이스라엘을 떠나 외지에서 모국에 대한 역사와 중동 전쟁사를 연구 집필하며 현재까지 학자적 양심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바로 이 책도 그러한 결과의 산물일텐데요. 지난 2014년 Cursed Victory라는 원제로 출판되었고, 국내에는 2016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주를 포함한다면 약 630여페이지의 적지 않은 분량을 갖고 있습니다. 저도 책을 주문해서 받았을 때, 전부 소화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소요될지 아득했습니다만 짬짬이 틈을 내어 3일만에 정독을 마칠 수 있었는데요. 글의 전체적이 구성이 예상외로 꽤 명료하고 번역의 질 또한 나쁘지 않았습니다. 다만, 1948년부터 1967년 사이의 당시 이스라엘 정치와 외교사 및 전쟁사를 인지하고 있어야만 이 글의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제3차 중동전쟁 이후인 1967년 6월 이후, 이스라엘은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에 대한 선제 공격을 감행해 승리한 후, 의도하지 않은 전리품으로 요르단 강 서안, 지중해에 면한 가자 지구, 시리아의 골란고원,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획득하게 됩니다. 이것은 지난 제네바 협약에 반하는 명확히 불법적인 이스라엘의 점령화로 저자인 아론 브레크먼은 이러한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이들 점령지역에 대한 ‘영구점령화’에 대해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정치적 의도들이영구점령을 염두해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글을 써가고 있는데요. 이들 지역의 점령 초기에 이스라엘 당국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하긴 했지만 유대인 정착촌 문제와 특히 점령 이후 거주하고 있던 팔레스타인들을 요르단과 시리아 쪽으로 강제적으로 쫓아냈다는 점은 앞선 의심을 절로 갖게 하는 부분입니다.

사실 이 뿐만 아니라 저자가 짚어 내고 있는 이스라엘 당국이 주도한 중요한 정책들, 특히 광범위한 군정과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야간 통행 금지, 서안 지역에서 실시한 행정 및 경제적 강제 관리와 팔레스타인들 스스로를 위한 정치적 수단 행위를 사실상 금지한 것은 이들 지역에 대한 이스라엘의 식민지 통치 행위와 다를바가 없어 보였습니다. 이에 저자는 글의 말미에서 인도 등에 행해진 영국의 식민지 정책보다 훨씬 정치적으로 교묘했다고 평가하며, “이 책에 기술된 이스라엘의 40년 점령기를 두고 훗날의 역사는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역사에 크나큰 오점이었다는 평가를 내릴 것이라 믿는다”는 매우 겸허하면서 연구자적 양심에 의한 평가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스라엘 군에 의한 군사적 보복행위와 PLO나 하마스에 의한 테러 행위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수준의 문제이며, 국제 사회와 동맹국인 미국, 여러 유럽국가들이 이스라엘이 자행하고 있는 수많은 군사적 작전에 많은 우려와 중단을 요구했고 점령지 내에서 팔레스타인들에게 최소로 필요한 물과 전력과 같은 인간 생황의 기본적인 보장 또한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차단되어 왔다는 점은 지금도 자신들을 성공적인 개방된 민주주의 국가로 자임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심각한 괴리 현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런 현저히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부당한 정치적 현실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속내로 미국에 추진된 평화 협상은 작게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 크게는 중동국가들간의 관계 개선 및 평화 구축에 있었는데요. 여기 3부에는 이러한 노력들의 일환으로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과 그의 행정부가 이스라엘과 PLO를 상대로 중재 노력을 기울인 정치외교적 노력들이 서술되고 있습니다. 특히 노회한 아라파트 전 PLO의장과 에후드 바라크, 아리엘 샤론 전 이스라엘 총리들 간의 협상 내용들이 꽤 상세히 나와 있는데요. 특히. 동예루살렘의 중요한 이슬람 성소인 ‘하람 알샤라프’ 지위 및 주권 문제가 서로간에 해결될 수 없는 문제로 인식되며 협상의 공식적인 해결을 도외시한 조건이었습니다. 당시의 아라파트 의장은 이집트와 시리아 등의 아랍국가들의 심대한 압력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캠프데이비드와 프랑스 파리의 여러 협상에서 이 하람 알샤라프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 문제를 클린턴 대통령이 용인해달라고 요청하지만 결국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이슬람 율법에 의해 이 성소 문제는 해결 불가능한 문제로 만약 팔레스타인 국가가 용인받는다면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겠다는 주장과 함께 타협이 불가능한 부분이었습니다. 좋은게 좋은것이라는 취지의 클린턴 대통령의 설득과 외부의 한 서양 정치인의 시각이 얼마나 이 문제를 가볍게 생각한 것인지 알 수가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임기 말까지 중동 평화 해결을 위해 기울인 노력이 사적인 업적을 위해 기울인 것이라 할지라도 클린턴의 외교적 노력이 무조건 폄하되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이슬람이라는 유일무이한 종교가 수많은 개인들의 일상의 삶을 제어하고 관리하는 것은 계몽주의의 혜택을 받은 다른 시민들이 보기에는 이해하기란 어려분 문제입니다. 다만, 오늘날의 테러리즘과 관련해서 이 이슬람 율법의 폐쇄적이고 폭력적인 해석을 이슬람 종교인들이 나서서 관리하고 제거할 필요는 있지만, 이슬람 자체가 정치적 수단인 많은 중동 국가들에게 있어서 율법을 어떤식으로든 개조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 무고한 희생자들을 끊임없이 양산해 낼 수 있다는 점은 모두가 알다시피 매우 우려스러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 이 책을 통해 이스라엘 정치와 정치인들의 복잡한 셈법과 시종일관 비타협적인 유대주의와 평범한 팔레스타인들의 희망을 대변하지 못하는 전자와 동일한 노회하고 정략적인 종교정치인들의 실상을 목도할 수 있습니다. 과연 평화를 위해 정치적 협상을 할 의지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정치적 평화가 많은 일반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에 기여해야 한다는 이 정치도덕론적 원론이 거부되는 상황을 어떻게 봐야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을 보는 태도를 단순한 현실이 결여된 이상주의적 입장이라고 단언하기는 쉬우나 누구나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 권리에 대해 이들이 주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또한 뒤에 정치 세력들이 이것을 거의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숨은 의도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2005년에 반환된 가자지구에 대한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이스라엘 정부에 의한 교묘한 통제는 바로 이러한 점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안보와 생존권과 관련하여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다는 주의를 보여주고 있고 군사적으로도 ‘방어적 공격’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으며, 모사드에 의한 정치인 및 테러 지도자들의 암살과 관련해서도 정치적으로 필요하다면 무슨 짓이든 감행할 의지가 있는 국가로 여겨져 다소 복잡한 감상이 들었습니다. 미국에 대해 비재래식 군사력(자신들이 보유한 핵무기)과 관련하여 어떠한 개입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주장이나 미국 내에 수많은 유대인 단체를 움직여 여론을 환기시키고, 자신들의 정보 단체를 움직여 정보를 쥐어짜내는 모습은 마키아벨리가 희망했던 다수의 국민들을 위한 어떠한 도덕적 문제에 연연하지 않은 그야말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상적인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더불어 현재의 동맹외교와 관련해서 제3차 중동전쟁 이후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반환하면서 미국에게 자신들이 양보했으니 막대한 비밀 원조를 요구한 이스라엘의 소위 외교력에 대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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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타르드 컴북스 이론총서
유진현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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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사회학’으로 오늘날 재조명을 받고 있는 가브리엘 타르드의 얇은 소개서인 ‘가브리엘 타르드’를 읽었습니다. 이 책은 상명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인 유진현 교수가 썼습니다. 출판사인 커뮤니케이션북스에서 현대 사상가 시리즈물로 꾸준히 내고 있는데요. 과거에 한길사 로로로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시공사에서 펴낸 사상가 시리즈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런 기획들은 해당 인물의 주저를 읽기전에 훌륭하게 참고할 만한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선 저자인 유진현 선생은 글 서두에서 문학 전공인 자신이 어떻게 가브리엘 타르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에 그 소감을 먼저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1년 귀국해서 르 봉과 타르드의 저작을 번역해보고 싶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여의치가 않게 된 것을 아쉬워 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상률씨가 초역한 ‘모방의 법칙’, ‘여론과 군중’을 소개하고, 특히 동일한 역자가 번역한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를 다수의 번역판이 있는 가운데 가장 선호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저도 역시 이상률씨의 번역이 탁월하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에게 가브리엘 타르드는 많은 현대 사상 연구자들에 의해 ‘인터넷으로 연결된 현대사회를 분석하기에 적합한 이론의 틀을 가브리엘 타르드가 마련한 것으로 우선 해석’합니다. 과거 에밀 뒤르켐과의 10여년간의 논쟁의 귀결로 그동안 그의 ‘심리사회학’이 사회학의 실증주의적 대세에 밀려 한동안 잊혀져 왔는데요. 미국에서 프랑스보다 질 들뢰즈 연구가 각광을 받으면서 ‘모방’과 관련된 가브리엘 타르드의 이론이 주목을 받게 되고 이러한 경향이 꾸준히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저는 개인적으로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이론보다 가브리엘 타르드의 군중과 공중 이론이 좀 더 면밀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오늘날 합리주의에 기반을 둔 사회학 이론이 직면한 한계로 새삼 가브리엘 타르드가 각광 받고 있는 이유로서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가 이제서야 다시 우리의 인식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앞서 언급한 과거 에밀 뒤르켐과의 논쟁에서 이론적으로 밀리게 되어 거의 그의 심리사회학이 오랫동안 퇴출된 역사 때문입니다. 타르드의 표현대로 일견 궤변론자이기까지 했던 당시 떠오르는 신예 에밀 뒤르켐의 사회학의 실증주의적 증명과 인간 행동 법칙의 합리적 개연성이라는 당시 프랑스 사회학의 주류에 심리적 관계, 관습적 요인, 심리 이동, 모방 등과 같은 다소 실증적 또는 합리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그의 이론이 그 특유의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쫓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한동안 타르드를 연구하는 하는 것을 꽤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인식되기까지 했죠.

오늘날 광범위한 인터넷 시대와 개인과 개인을 서로 물리적인 거리가 있음에도 순수한 온라인 상에서는 무한히 가깝게 만드는 이러한 초연결사회에 타르드는 여느 사회학자가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지 못하는 인간이 서로를 모방하고, 한편으론 이러한 방식이 일종의 문명화 과정으로 해석되는 시대상에 그의 사상이 관습적인 보편성을 갖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분명 우리가 목도하는 세계에서 반대의 합리주의적 수단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한계가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회 분석 수단이 한계에 봉착하면 또 다른 것으로 분석을 시도해 보는 것은 학문의 또다른 열린 강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18세기에 우리가 계몽의 문을 열었던 것처럼 이 점을 인지하고 좀 더 인간적인 사회학 및 현대철학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학문을 하는 자의 소명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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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사회학적 연구 국가란 무엇인가 4
프란츠 오펜하이머 지음, 이상률 옮김 / 이책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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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의 유대인으로 일찍이 의학을 공부하고 뒤이어 경제학 및 사회학의 학자로 세계 양차대전의 시기를 보내면서 ‘자유적 사회주의자’로 알려진 프란츠 오펜하이머의 플라톤의 국가론에 이어 널리 읽혀지고 연구되고 있는 ‘국가’를 일독했습니다. 이 글의 오펜하이머는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있게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요. 책의 소개글에서는 그가 2차대전시기에 독일에서 설 곳이 없어졌다고 완곡히 설명하고 있지만 아마도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독일을 피할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또한 이 글의 특이한 부분은 제3판의 머리말이자 1929년의 서문에서 저자인 오펜하이머가 밝히고 있듯이 그의 유명한 두 편의 주저, 국가 The State와 사회학 체계 system der soziologie 와 관련해서 번역된 이 글이 발췌본 내지는 편집본이라는 사실입니다. 원저에 비해 분량을 줄인 것은 860쪽 분량의 큰 판은 독서 대중에게 너무 무겁고, 독자들에게는 유감스럽게도 비싸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첨부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근사할지도 모르는 이 이유의 변에 개인적으로는 찬사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크더군요. ^^ 참고로, 거의 동시대의 핵물리학자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물론 착각하는 분들은 없으시겠지만요. 덧붙여 이 글은 번역출간한 출판사의 국가란 무엇인가 시리즈의 연작물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국가란 무엇인가’ 연작의 세번째 서평이기도 합니다.

일찍이 플라톤은 그의 국가론에서 전통적인 민주주의 형태의 정치체를 혐오하고 주민들에 대한 강제와 개입을 지지한 바가 있습니다. 물론 오펜하이머는 플라톤과는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는 보론으로 삽입된 국가의 우상숭배라는 짧은 글에서 “국민들이 해야 할 과제는 남은 원초적인 폭력의 산물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중간계급 혁명이라는 과업을 완수해 진정한 자유가 생겨나게 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실로 자유적 사회주의자라는 말이 실감나는 주장입니다. 다시 본래 글로 돌아와서 우선 저자는 그 이전의 여러 사상가들의 국가론들을 돌아보면서 고대 수렵시기의 인간들의 생활상을 살펴보면서 이 시기에도 경제계급과 경제적 측면의 이익이 존재했다는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잉여 자원과 관련된 익히 알려진 기본적인 자본주의적 경제 개념을 따로 논하지는 않고, 한정된 자원을 소위 약탈하기 위한 부족주의적 초기 국가 형태의 양상을 꽤 자세히 1장과 2장을 통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 권력구조와 관련해 군장 내지는 부족장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이 어쩌면 자원 배분과 관련된 인센티브와 유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들 초기 부족적 사회에 노예를 자본적 재산으로 포함할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약탈시도와 혹은 반대의 자위권의 시도로 발생된 단순한 자연발생적 부산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오펜하이머는 전자에 가깝게 해석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러한 “원시 정복국가의 권력이 미치는 지역이 넓을수록, 이 국가에 지배받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리고 이들이 밀집해 살수록, 경제 분업이 더 많이 전개되고 또 항상 새로운 욕구와 충족 수단이 더 많이 생겨난다”고 정의하며 농경지의 농민 국가에 비해 수렵을 목적으로 삼는 광범위한 목축민들의 목축 국가가 그 초기 사회 발달 과정에서 경제적 요인을 더 추동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이 원시 국가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목축민들의 기질과 성향, 확장성 등을 기반으로 이들의 인류 역사적 영향에 대한 부분과 유사하게 전개시키고 있는데요. 꽤 설득력이 있기도 합니다. 또한 이들 초기 사회에 대한 발달 단계적 해석도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

이어 3장의 해양국가에서는 전통적인 육지국가들과 비교하여 “육지국가는 물물교환 경제 상태에 매우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지만, 반면에 해양 국가는 매우 빨리 화폐 경제로 넘어갔다”고 그는 분석합니다. 이것은 초기 유럽의 대항해시대의 포르투갈과 스페인, 후에 지중해 상권을 부흥시킨 이탈리아와 이슬람 상인들 및 영국의 발전을 예로 삼을 수 있으며, 이 화폐 상업의 발전은 국가의 형태마저 바뀌게 만든 중요한 인류사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 점은 초기 자본주의적 형태이거나,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상품과 관련하여 “인간은 노동력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논리에 가장 부합되는 과정의 실례라고 판단됩니다. 특히 초기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노예 시장 및 노예 거래의 초기에 비인간적 가치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부와 관련된 혁신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바다를 통한 무역과 상업 거래들이 유럽의 봉건 시기에 토지를 둘러싼 다툼에도 이는 별개의 과정으로 발전했고, 다만 육지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해양국가에서도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동일하게 통치했다”는 유사성 또한 보이고 있습니다. 결국 육지국가에서 해양국가로의 이행 과정은 전통주의적 고정된 복종 관계를 더욱 더 느슨하게 만들었고 어쩌면 이를 기반으로 뒤이어 입헌 국가의 가능성을 열게 된 것이 아닌가 판단해봅니다.

5장과 6장의 입헌 국가에서는 앞선 화폐 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이 해방되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숙명적인 이원화가 외형적으로 고착화 됩니다. 봉건주의 시대에 자유민과 평민들간의 갈등, 이 시기의 자유민들이 결국 자유민이 아니게 되는 봉건 영주들의 교묘한 개입 및 납세의 의무를 설명하고 있는데요. 이 입헌국가의 시기에는 피지배층들이 더욱 ‘자연법주의 및 자연법 사상’에 기대게 됨으로써 단순히 정치적 지배-피지배 관계를 후에 벗어나게 되는 원동력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과 프랑스 혁명은 바로 이러한 사상에 기반하고 있고, 근대를 다른 이전 시기들과 다르게 명백하게 설명해주는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시대의 지배계급은 획득한 통치권이 자신들의 손에 쥐어준 모든 수단을 이용해 투쟁했으며, 종래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특히 사회계급적 및 정치적인 실질적 행위로써 피지배계급의 계몽주의적 각성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혁명의 실패 이후 구체제에 대한 회귀와 귀족 계급의 특권, 단순한 경제자산적 차이 뿐만 아니라 교육과 사회진출이라는 측면에서도 동일했습니다. 사실 저는 엘리트 정치와 기득권 정치는 엄밀하게 구분해야된다는 입장인데요. 마찬가지로 오펜하이머의 말대로 절대주의와 전제정치는 엄격한 구분법이 필요하고, 앞서 언급한 부분과 관련해서도 여기에 소개된 계급 이해적 산물인 계급사법 즉, 상위 계층에게 휘둘려지는 법의 칼날은 하위 계층에게 향하는 것이 상이하게 적용된 것은 과연 어떠했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또한 이 ‘계급사법’이 유감스럽지만 현재에도 법치주의적 기반으로 탄생된 수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에게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국가와 역사적 연대기적 서술을 마무리하면서 오펜하이머는 근대 이후 비로소 과거의 자본주의적 노예 상태가 종식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제 국가의 의미와 본질과 관련해서 단순한 야경 국가로 한정시키고자 하는 이들과 더불어 단순하게 개인의 안전 국가로 축소되고 있는 경향의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 즉 시민의 환경이 전후를 거쳐나가기 바로 이전 시기를 살았던 사회학자인 저자에게 다소 생경한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고민해봅니다. 그는 국가를 통해 인간 자유의 점진적 보장을 원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 자유의 보장이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와 결합하여 다소 복잡한 국가의 모습에 의해 시민들의 삶 전반이 변화게 된 것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몹시 궁금하기도 합니다. 맨처음 이 글에서 제가 언급한 그의 ‘중간계급’의 혁명으로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기를 바란 것이 우리에게 실현되었는지는 곰곰히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끝으로 역자인 이상률씨의 번역은 이 자리에서 따로 언급하고 싶을 정도로 매우 뛰어나다고 생각하는데요. 심지어 역자의 팬이 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겨날 정도네요. 열일하시는 번역가에게 자리를 빌어 감사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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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과 군중 - SNS는 군중의 세계인가 공중의 세계인가? 지성의 향연 1
가브리엘 타르드 지음, 이상률 옮김 / 이책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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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뒤르켐과 함께 19세기 말 프랑스 사회학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나 뒤르켐과의 논쟁(확실한 정보를 찾을 수 없어 관련 책을 따로 주문했습니다)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가브리엘 타르드의 여론과 군중을 일독했습니다. 이 책은 2013년에 나왔던 구판의 개정판인데요. 아마도 이번 판은 프랑스에서 출간된 1989년판을 참고해 다시 출판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뒤르켐은 물론 베르그송, 들뢰즈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타르드도 역시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데요. 역자인 이상률씨도 뒤의 해설에서 이와 비슷한 의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타르드의 이 책을 먼저 읽고,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를 읽는 것이 두 저서의 이해를 서로 돕는데 유익할 것으로 생각되네요.

이 책은 크게 3장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은 공중과 군중에 대한 해석을, 2장은 여론,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론과 욕망 전체의 의지라는 측면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이 여론을 만드는데 일조하는 대화에 대해 그 기원적 분석과 놀라울 정도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해석의 연계’를 보여주며, 3장은 군중, 특히 범죄 집단과 다름없는 악마적 형태와 과거 프랑스 역사에서 나오는 이 집단들의 분석을 통해 좀 더 면밀한 이해를 수반하고 있습니다.

서평을 쓰기에 앞서, 저는 예전에 이 곳을 통해 일전에 쓴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를 잠시 살펴봤습니다. 당시에는 집단지성에 관심이 있었던 시기라 앞선 군중심리를 유심히 보게 되었는데요. 현재 민주주의 체제에서 앞으로 대중의 역할과 관련된 사전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만, 군중심리를 다루고 있는 타르드의 이 책은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 보다는 좀 더 본질적이고 상세한 이해를 제공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특히 군중을 양가적 입장에서 그리고 어쩌면 가류주의적 태도와 관련있다고 볼 수 있는 ‘공중’의 의미와 서로 연계하여 꽤 설득력이 있는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역자의 번역도 나무랄데가 없어서 정독인데도 책을 받자마자 거의 몇시간 만에 읽을정도로 호흡이 매우 빨랐습니다.

앞서 언급한 이 가류주의는 리처드 번스타인의 ‘악의 남용’을 통해 소개된 일종의 주지주의인데요. 즉, “자신의 주장이나 학설이나 언제나 논박당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항시적으로) 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수정할 수 있는 주의 내지는 이념”입니다. 이것은 군중과 공중을 연계해서 구분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겨졌습니다. 더불어 여기에서 군중과 공중이 극명하게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군중의 양가적 측면’ 그러니까 받아들일 만한 점과 이해될만한 점 그리고 마땅히 제거해야 하는 요소 등을 함께 서술하고 있는 점도 타르도 스스로 나름의 객관적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에 군중은 ‘정신이 지배하는 국민의 큰 불관용적인 측면’이 보이며 이것은 페쇄적이고 봉쇄적이다 라고 분석합니다. 공중도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집합체로서 각각의 공중은 군중보다는 훨씬 동질적이라고 서술합니다. 이러한 동질의 상태의 공중은 바로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데, 반대로 군중이 여론을 형성하는 것에는 원천적으로 타르도는 부정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군중은 선동되고, 많은 반론이 봉쇄됨으로써 양자가 서로 구분되지만, “공중이나 군중은 질투심과 증오심에서 선동당하는 매우 유감스러운 경향이 있다”고 밝히고, ”신념을 지닌 이상주의적 군중은 열정적이며 수선스러운 군중에 비하면 얼마되지 않는다”는 첨언도 곁들이고 있습니다. 사실 군중의 분류 자체에도 경제군중 및 산업군중이 농민군중과 그 동질성이 다를바 없다는 평가에서처럼, 공중과 군중의 구분은 대체로 상대적이면서 동일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공중과 군중의 핵심은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느냐의 차이이며, 군중은 공중보다 곧잘 선동된다는 측면으로 구분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3장에서 나타나는 이 군중의 악의 측면은 어떻게 보면 프랑스 혁명 시기의 ‘상퀼로트’를 꼭집어서 설명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프랑스 혁명과 짧은 파리 코뮌의 시기에 이 상퀼로트들의 역할이 지대했는데요. 이들을 무정부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과 동일한 잣대로 해석하는 것이 과연 정확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억압적인 전제 정치를 시민의 힘으로 타도한 것이 프랑스 혁명의 이념이라고 봤을 때, 로비에스피에르와 같은 자코뱅주의자들이 혁명을 심대하게 왜곡시킨 것은 혁명을 일으킨 다수의 억압받는 사람들, 그들의 진정성과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타르드의 해석대로 이들이 선동되었느냐 아니냐의 관점의 문제가 존재하는데 이 억압받는 자들이 선동되었다는 것으로 몰아가는 것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공화주의를 왜곡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마 많은 정치사회학자들도 바로 이런 전자의 왜곡 인식에 반대할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는 그 ‘군중심리학’의 개론을 차치하더라도 대체로 부정적이고 체제의 위협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군중 정치 자체가 오늘날에는 우파 포퓰리즘적 정치와 맞닿아 있고 앞에서 언급한대로 군중의 대부분의 매우 폐쇄적이고 어떤 왜곡된 주제에 대해 자신들의 주장을 정상적으로 번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이것은 결국 선동하는 선동정치가의 언설에 더욱 왜곡되고 이끌릴 가능성이 있어 집단지성이 태동하는 지금의 시기에도 매우 위험한 요소일 수도 있습니다. “군중이, 그리고 일반적으로 조직되어 있지도 않고 규율도 없는 집합체들이 그 대부분의 구성원들보다 얼마나 더 변덕스럽고 더 잘 잊으며 더 잘 믿고 잔인할지는 언제나 상상하기 어렵지만 증거는 넘쳐난다”고 타르드는 이 3장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가 현재의 유럽에서 솟아나고 있는 우파 포퓰리즘과 그것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자들을 어떻게 바라볼지 매우 궁금합니다. 희화적으로 바라볼지, 디스토피아적 감상에 젖어들지 말입니다.

2장은 따로 떼어 다른 주제로 내놔도 될정도로 ‘여론과 대화’에 대한 탁월한 근원적 분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문을 통한 저널리즘의 발전이 여타 살롱을 비롯한 계층들의 대화의 확대에 일조했고, 점차 상류층의 격식있는 대화를 복제하려는 그 밑의 여러 계층들의 수용을 독특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상류층의 자기 권력적 대화 행위와 미국인들이 유럽인들과 달리 토크빌의 말대로 더 조밀한 평등체제에 의한 다른 대화 방법 내지는 여론 형성이 있었다는 것은 절로 숙고에 빠져들게 합니다. “권력의 진화는 여론의 진화로, 여론의 진화 자체는 대화의 진화로 설명된다”는 인식 또한 그가 여론과 대화를 얼마나 밀접하게 여기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끝으로 타르드는 글 중간에 ‘공공정신’에 대해 짧게 언급하는데요. 지도층과 엘리트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 공공정신이 당시 사회 형성에 큰 역할을 했고, 그것은 전파되는 여론 형성에서도 어느 정도 기여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평등한 시민들의 집단지성이 이 공공정신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차별적인 계층 교육에 따른 전반적인 교양 여부에 따라 아마도 권력계층이 이러한 공공정신을 펼쳐내는데 자연적으로 주도했으리라 파악됩니다. 글 전체적으로 딱 한가지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타르드가 글에서 다소 여성차별적인 인식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당시에 타르드와 같은 사회학자들이 이러한 면이 있었다는 것은 사회구조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지금의 역사가 진보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타르드를 비롯한 당시의 권위있는 남성 지식인들을 옹호하고자 넣은 구절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싶군요.

그리고 개인적인 약간의 감상이랄까요. 짓궂은 장난기 때문일까요. 글중에서 “로비에스피에르가 루소를 계속 읽어 궁극적으로 그가 루소와 동일시되었다”는 취지의 해석에 얼마간 크게 웃고 말았습니다. 문득 로비에스피에르의 공과 패착은 장 자크 루소의 한길로 비롯된 것인가 하는 다소 막연한 한줄과 함께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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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길을 가다 - 실천적 사회학자 장 지글러의 인문학적 자서전
장 지글러 지음, 모명숙 옮김 / 갈라파고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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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출신으로 제네바 대학과 소르본 대학의 사회학 교수를 역임하고 한때 스위스 연방 의회의 의원으로 재직하는 등의 우리에게 실천적 사회학자로 이름을 높인 장 지글러의 ‘인간의 길을 가다’를 일독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 ‘유엔을 말하다’ 에 이어 지글러의 3번째 서평이 되는데요. 그의 여러 일화중에 가장 인상이 깊은 것은 스위스 은행의 갖가지 탈법, 불법 운영과 관련된 학자적 양심으로 쓴 글,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로 겪은 법정 투쟁과 그로인한 경제적 곤란을 겪은 일입니다. “지식인의 양심은 저절로 탄생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은 우리가 끊임없이 살펴볼 ‘지식인’인 장 지글러에게 명백하게 잘 들어맞는 표현이 아닌가 합니다. 원제는 지난 2014년 독일어로 출판된 “Andere die Welt”이며, 국내에는 위의 번역 제목으로 2016년 출간되었습니다. 사실 이 책의 구입은 작년 여름쯤이었는데요. 중간에 읽다가 중단하고 이제서야 완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국내 번역된 출판사가 임의로 만든 부제인 ‘장 지글러의 인문학적 자서전’에 거의 들어맞는 주제와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불평등한 세계의 모습과, 이데올로기의 악의 측면, 자유 시장론에 의한 인간의 소외, 국민, 국가 권력 등을 각 주제에 맞는 현실 사례와 여러 사상가들의 주장을 연계시켜 스스로가 사회학자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는데요. 뿐만 아니라 역사 및 철학과 같은 인문학적 인용도 적잖이 소개되어 있어서 근래 세계화와 국민주의, 국가 권력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분들이라면 책을 통해 익히 좋은 결과를 얻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의 서두에서 지글러는 “사회학자의 임무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이해관계를 밝히는 것”이라 표명하며, 사회학 자체가 인간을 해방시키기도 하지만 억압하기도 한다는 이 양가적 측면의 판단을 앞의 인식과 함께 우리 인간 사회에 사회학과 사회학자가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그 당위성을 먼저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학의 쓸모를 더욱더 한정시키는 이 불평등이라는 악과 관련하여 ‘악의 중요한 근원은 불평등이다’는 장 자크 루소의 말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안전을 위해 수용한 사회의 쳬계가 시장의 ‘자연적 상태’를 계속 중시함에 따라 경제적 불평등에 의한 전반적인 정치사회적 계급 불평등이 심화 되어 왔고, 오히려 이런 상황을 각각의 시민들이 받아들이고 체념함으로써 특히 지식인들이 이러한 모습을 비판하지 않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책 3장의 주장인 이데올로기의 두 얼굴이 즉, 이데올로기가 악의를 증명하는 경우로서 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세계화의 강요’에 따른 시민 계급의 이 이데올로기 수용을 당연시했으며, 여기에서 도태되는 많은 시민들을 지그문트 바우만의 입을 빌려 ‘인간쓰레기들 (바우만의 부정적 인식이 아니라 이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기득권과 권력이 자신들의 입으로 말하는)’ 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글러의 표현대로 “선별과 인식적, 사회적 위계구조의 재생산은 논박되어야 하며, 인권의 가치는 결코 논박되거나 비판받아서는 안된다”고 밝혀집니다. 마찬가지로 5장의 인간 소외의 목적은 바로 “인간을 순전히 상품사회에 기능하는 것으로 축소하는 것”으로 해석되게 합니다.

자본주의 시스템하에서 인간이 노동을 제공하여 바라는 것은 자유이며, 일정 소득으로 인한 그 결과는 인간 기본적 삶의 보장과 그로인한 삶의 자유일 겁니다. 이런 토대를 뒤흔드는 것은 점차 확대되고 고착화되고 있는 인간 불평등의 심화이며, 이것은 작게는 각각의 사회 문제로서 크게는 대륙별로 발생하는 차별과 극심한 빈곤의 문제로까지 연결됩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국가의 노력은 더욱 강조되고 있으나, 6장에서 밝히듯이 중세시대 이전의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로 작용했던 국가가, 프랑스 혁명 이후 공화주의와 국민국가 개념을 덧붙이면서 정교 분리와 삼권 분립과 같은 권력으로부터 인간 자유를 보장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자리잡혔지만, 일전의 이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와 그와 관련된 이데올로기는 ‘선출되지 않는 기득권’ 개념으로 옮아가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이와 관련해 “사회가 기득권에 의해 그 계급 구조가 고착화 되는 것은 실로 시민의 자유에 해를 끼치는 것”으로 주장했고, 이런 기득권 장치나 기득권 이해관계를 교묘히 언설하는 것은 그것의 의도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 우리 스스로가 되짚어 봐야 하는 문제입니다. 다만, 지글러는 6장에서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 전쟁에 대한 괴테의 인용을 앞세워 약간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요. 유럽의 민족국가개념과 전제정치에 대한 반대급부로 변혁을 일으킨 점은 크게 인정할 만하나, 나폴레옹 자신이 과연 그러한 것을 염두해 두고 대륙 전쟁에 나섰는지는 곰곰히 살펴봐야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7장은 근대의 국민이야 말로 기적이라 불릴만하며, 이와 반대로 오늘날 인종주의적 주장을 하고 있는 정치 세력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인종주의는 무조건 범죄이고, 증오의 최고 형태이며, 국민을 형성하는 것을 최종적으로 거부하는 것”으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세계의 민영화에 방치된 국민은 소멸할 우려가 있다”고 동시에 진단합니다. 일찍이 에릭 홉스봄은 “자발적으로 가장 중요한 공공 서비스를 축소하고, 일반적 이해 관계에서 생기는 과제를 사적 영역으로 옮김으로써 이윤의 최대화라는 법칙에 굴복한 국가는 파탄 국가 Failed State” 라고 언급했습니다. 자본의 이익에 민감한 이 신자유주의화를 계속 이론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은 시민들에 자유와 권리에 과연 도움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조금이라도 숙고해본다면 그 답은 명확한 것이죠. 신자유주의의 숨겨진 의도는 바로 지글러의 소름끼치는 표현 즉, ‘의식의 균질화’로 모든 사회를 신자유주의적 멸균 상태로 만들어 얻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과 동일합니다. 레이건과 대처가 주장했던 소위 낙수효과가 어떻게 판명났는지는 그 결과가 명확하지 않던가요.

끝으로 지글러는 앞으로 세계의 시급한 문제로 세계 금융 자본의 활개와 악랄한 독재 체제를 이어가고 있는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의 독재 정권을 꼽고 있습니다. 후자와 관련하여 지글러는 자원에 대한 개입으로 아프리카 독재 국가에 대한 프랑스와 벨기에의 용병 지원 등을 언급하고, 또한 극도의 굶주림 상태에 놓여 있는 아프리카 국민들에 대한 설명을 적잖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라늄과 같은 희소 자원의 안정적인 관리라는 미명하에 전세계 독재 정권을 지원하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비도덕적 개입은 여러 경로를 통해 익히 알려진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비인간성의 현실일텐데요. 전세계의 진정한 민주주의화는 이 상황을 어떻게 개선시켜 나갈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에 의한 권력 위임을 정치인 스스로 자임한다면, 그렇지 않은 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지식인들 뿐만 아니라 정치인들이 나서서 불식시켜야 합니다만 이해관계가 달려있는 정치인들에게는 아마도 꿈같은 일이겠죠. 즉, 이러한 분위기의 진정한 해결책은 서로 인류애로 가득찬 ‘거부전선’의 행동으로 달성될 수 있다고 지글러는 보는 듯 한데요. 스스로 사회학자의 소명을 인지하고 있는 저자가 결국에는 이상주의적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은 뭔가 마음이 아립니다. 동시에 시민적 계몽주의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지만, 이렇게 ‘강요된 불의의 시대’를 개인의 삶과 인생으로서 건너가야 문제도 결코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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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라이프 2019-01-06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구입과 관련된 약간의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린다면, 저는 작년 여름쯤에 이 책을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구입을 했는데요. 구입할 당시 모르고 있다가 얼마전에 책 앞장에 출판사 이름이 도장으로 찍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무료로 기증된 책에 찍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 책을 구입해 다시 되파는 것은 조금 문제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알라딘 중고 서점 직원분들의 좀 더 꼼꼼한 검수를 부탁드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