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과 군중 - SNS는 군중의 세계인가 공중의 세계인가? 지성의 향연 1
가브리엘 타르드 지음, 이상률 옮김 / 이책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에밀 뒤르켐과 함께 19세기 말 프랑스 사회학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나 뒤르켐과의 논쟁(확실한 정보를 찾을 수 없어 관련 책을 따로 주문했습니다)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가브리엘 타르드의 여론과 군중을 일독했습니다. 이 책은 2013년에 나왔던 구판의 개정판인데요. 아마도 이번 판은 프랑스에서 출간된 1989년판을 참고해 다시 출판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뒤르켐은 물론 베르그송, 들뢰즈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타르드도 역시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데요. 역자인 이상률씨도 뒤의 해설에서 이와 비슷한 의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타르드의 이 책을 먼저 읽고,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를 읽는 것이 두 저서의 이해를 서로 돕는데 유익할 것으로 생각되네요.

이 책은 크게 3장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은 공중과 군중에 대한 해석을, 2장은 여론,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론과 욕망 전체의 의지라는 측면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이 여론을 만드는데 일조하는 대화에 대해 그 기원적 분석과 놀라울 정도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해석의 연계’를 보여주며, 3장은 군중, 특히 범죄 집단과 다름없는 악마적 형태와 과거 프랑스 역사에서 나오는 이 집단들의 분석을 통해 좀 더 면밀한 이해를 수반하고 있습니다.

서평을 쓰기에 앞서, 저는 예전에 이 곳을 통해 일전에 쓴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를 잠시 살펴봤습니다. 당시에는 집단지성에 관심이 있었던 시기라 앞선 군중심리를 유심히 보게 되었는데요. 현재 민주주의 체제에서 앞으로 대중의 역할과 관련된 사전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만, 군중심리를 다루고 있는 타르드의 이 책은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 보다는 좀 더 본질적이고 상세한 이해를 제공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특히 군중을 양가적 입장에서 그리고 어쩌면 가류주의적 태도와 관련있다고 볼 수 있는 ‘공중’의 의미와 서로 연계하여 꽤 설득력이 있는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역자의 번역도 나무랄데가 없어서 정독인데도 책을 받자마자 거의 몇시간 만에 읽을정도로 호흡이 매우 빨랐습니다.

앞서 언급한 이 가류주의는 리처드 번스타인의 ‘악의 남용’을 통해 소개된 일종의 주지주의인데요. 즉, “자신의 주장이나 학설이나 언제나 논박당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항시적으로) 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수정할 수 있는 주의 내지는 이념”입니다. 이것은 군중과 공중을 연계해서 구분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겨졌습니다. 더불어 여기에서 군중과 공중이 극명하게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군중의 양가적 측면’ 그러니까 받아들일 만한 점과 이해될만한 점 그리고 마땅히 제거해야 하는 요소 등을 함께 서술하고 있는 점도 타르도 스스로 나름의 객관적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에 군중은 ‘정신이 지배하는 국민의 큰 불관용적인 측면’이 보이며 이것은 페쇄적이고 봉쇄적이다 라고 분석합니다. 공중도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집합체로서 각각의 공중은 군중보다는 훨씬 동질적이라고 서술합니다. 이러한 동질의 상태의 공중은 바로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데, 반대로 군중이 여론을 형성하는 것에는 원천적으로 타르도는 부정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군중은 선동되고, 많은 반론이 봉쇄됨으로써 양자가 서로 구분되지만, “공중이나 군중은 질투심과 증오심에서 선동당하는 매우 유감스러운 경향이 있다”고 밝히고, ”신념을 지닌 이상주의적 군중은 열정적이며 수선스러운 군중에 비하면 얼마되지 않는다”는 첨언도 곁들이고 있습니다. 사실 군중의 분류 자체에도 경제군중 및 산업군중이 농민군중과 그 동질성이 다를바 없다는 평가에서처럼, 공중과 군중의 구분은 대체로 상대적이면서 동일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공중과 군중의 핵심은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느냐의 차이이며, 군중은 공중보다 곧잘 선동된다는 측면으로 구분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3장에서 나타나는 이 군중의 악의 측면은 어떻게 보면 프랑스 혁명 시기의 ‘상퀼로트’를 꼭집어서 설명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프랑스 혁명과 짧은 파리 코뮌의 시기에 이 상퀼로트들의 역할이 지대했는데요. 이들을 무정부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과 동일한 잣대로 해석하는 것이 과연 정확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억압적인 전제 정치를 시민의 힘으로 타도한 것이 프랑스 혁명의 이념이라고 봤을 때, 로비에스피에르와 같은 자코뱅주의자들이 혁명을 심대하게 왜곡시킨 것은 혁명을 일으킨 다수의 억압받는 사람들, 그들의 진정성과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타르드의 해석대로 이들이 선동되었느냐 아니냐의 관점의 문제가 존재하는데 이 억압받는 자들이 선동되었다는 것으로 몰아가는 것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공화주의를 왜곡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마 많은 정치사회학자들도 바로 이런 전자의 왜곡 인식에 반대할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는 그 ‘군중심리학’의 개론을 차치하더라도 대체로 부정적이고 체제의 위협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군중 정치 자체가 오늘날에는 우파 포퓰리즘적 정치와 맞닿아 있고 앞에서 언급한대로 군중의 대부분의 매우 폐쇄적이고 어떤 왜곡된 주제에 대해 자신들의 주장을 정상적으로 번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이것은 결국 선동하는 선동정치가의 언설에 더욱 왜곡되고 이끌릴 가능성이 있어 집단지성이 태동하는 지금의 시기에도 매우 위험한 요소일 수도 있습니다. “군중이, 그리고 일반적으로 조직되어 있지도 않고 규율도 없는 집합체들이 그 대부분의 구성원들보다 얼마나 더 변덕스럽고 더 잘 잊으며 더 잘 믿고 잔인할지는 언제나 상상하기 어렵지만 증거는 넘쳐난다”고 타르드는 이 3장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가 현재의 유럽에서 솟아나고 있는 우파 포퓰리즘과 그것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자들을 어떻게 바라볼지 매우 궁금합니다. 희화적으로 바라볼지, 디스토피아적 감상에 젖어들지 말입니다.

2장은 따로 떼어 다른 주제로 내놔도 될정도로 ‘여론과 대화’에 대한 탁월한 근원적 분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문을 통한 저널리즘의 발전이 여타 살롱을 비롯한 계층들의 대화의 확대에 일조했고, 점차 상류층의 격식있는 대화를 복제하려는 그 밑의 여러 계층들의 수용을 독특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상류층의 자기 권력적 대화 행위와 미국인들이 유럽인들과 달리 토크빌의 말대로 더 조밀한 평등체제에 의한 다른 대화 방법 내지는 여론 형성이 있었다는 것은 절로 숙고에 빠져들게 합니다. “권력의 진화는 여론의 진화로, 여론의 진화 자체는 대화의 진화로 설명된다”는 인식 또한 그가 여론과 대화를 얼마나 밀접하게 여기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끝으로 타르드는 글 중간에 ‘공공정신’에 대해 짧게 언급하는데요. 지도층과 엘리트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 공공정신이 당시 사회 형성에 큰 역할을 했고, 그것은 전파되는 여론 형성에서도 어느 정도 기여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평등한 시민들의 집단지성이 이 공공정신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차별적인 계층 교육에 따른 전반적인 교양 여부에 따라 아마도 권력계층이 이러한 공공정신을 펼쳐내는데 자연적으로 주도했으리라 파악됩니다. 글 전체적으로 딱 한가지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타르드가 글에서 다소 여성차별적인 인식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당시에 타르드와 같은 사회학자들이 이러한 면이 있었다는 것은 사회구조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지금의 역사가 진보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타르드를 비롯한 당시의 권위있는 남성 지식인들을 옹호하고자 넣은 구절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싶군요.

그리고 개인적인 약간의 감상이랄까요. 짓궂은 장난기 때문일까요. 글중에서 “로비에스피에르가 루소를 계속 읽어 궁극적으로 그가 루소와 동일시되었다”는 취지의 해석에 얼마간 크게 웃고 말았습니다. 문득 로비에스피에르의 공과 패착은 장 자크 루소의 한길로 비롯된 것인가 하는 다소 막연한 한줄과 함께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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