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단어 - 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우리를 침묵시키는가
르네 피스터 지음, 배명자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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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피스터는 독일의 언론인이자 작가로 현재 미국 워싱턴 DC에서 슈피겔의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독일 뮐하임의 마르크그래플러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뮌헨에 위치한 루트비히 막스밀리안 대학(LMU)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독일 엘리트 언론인의 산실이라고 불리는 독일 저널리즘 스쿨(DJS)에서 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는 DDP와 로이터를 거쳐, 2004년부터 독일의 세계적인 언론인 슈피겔(Der Spiegel)에서 기자로서의 경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2013년 10월, 미국 NSA에 의한 당시 독일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도청 사건을 폭로해, 독일과 미국의 위기가 촉발했고 이에 '독일 연방 의회 조사 위원회'에 출석하기도 했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그는 2012년에 독일 기자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Ein falsches Wort : Wie eine neue linke Ideologie aus Amerika unsere Meinungsfreiheit bedroht"로 지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3월에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피스터의 이 논저는 원칙적으로는 "좌파의 정체성 정치"가 '표현의 자유'와 맞물려, 현실 정치와 건전한 여론 형성에 사실상 위협이 되고 있다고 일관되게 평가합니다. 이는 글 서두에 "우파 포퓰리즘만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차별 반대, 평등, 소수자 보호라는 이름으로 표현의 자유,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이념, 누구도 피부색이나 성별로 차별받아선 안 된다는 헌법 등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무시하려는 독단적 좌파도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단호하게 이들 경직된 좌파를 비판하고 있는데요. 결국 이러한 맥락은 '좌파'마저도 사실상 민주주의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측면의 주장을 펼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일단 글을 쓰기에 앞서, 저는 앞선 '우파 포퓰리즘'을 '극우 포퓰리즘'으로 용어 변경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중 명사의 한 단어인,우파라는 단어는 저들의 범위를 너무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극우'로 고쳐 쓰는 것이 논지 확대와 설득력을 위해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다시 글로 돌아가, 저자는 이러한 좌파 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적 담론을 위해, 로빈 디안젤로의 '백인의 취약성'의 여론 몰이를 이 글의 여러 곳에서 다루면서 종국에는 미국 민주당 정치가 기존의 '노동자들의 정당'이 아니라, 높은 교육을 받고 소득이 높은 중산층의 정당으로 변화된 것이, 현재 미국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었다고 다시금 의미를 확장해, 비판적으로 논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책의 일독 이유는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체성 정치에 대한 소위 극단적인 반작용과 지속되고 있는 이러한 기묘한 현상을 미국인의 입장이 아니라, 외부인인 독일 언론인의 시점으로 이해하고 분석하는 점일 텐데요. 더욱이 피스터의 이 글은 전반적으로 '르포르타주'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주제에 대한 실질적 근거 예시를 포함하고 있다는 부분에서 충분히 설득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최근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났던 '미투 운동'이 초래한 비극적 결말인, 헌법상의 '무죄 추정의 원칙'과 전자를 의도적으로 무시해 벌어진 '인터넷에서의 마녀 사냥'이 여론에 있어서 새로운 경향성을 낳았다고 생각됩니다. 이에 대해 저자 역시 동의하는 바대로,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다른 말을 하게 될 경우, 무엇보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 우선적으로 적용되어야 하고, 나아가 이것의 시시비비는 법원이 객관적으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은 거의 명백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가해자 (남성)-피해자 (여성)의 극단적인 구도로 일련의 페미니즘 운동이 벌였던 '부정적 여론 몰이'가 특히나 무분별하게 인종 차별과 성차별주의에 물든 극우 운동에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부분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에서도 이미 여러 사례로 드러나고 있지만, 과거 또는 현재에 누군가의 인종 차별 발언이나 대중의 심기를 거스르는 부적절한 언사가 회사 내부에서 벌어질 경우, 그 기업의 CEO나 이사회는 손쉽게 꼬리 자르기를 시도하고, 그것을 그저 홍보 효과로 삼는다는 점에서, '표현의 자유'의 억압과는 또 다른 사회적 역효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이는 작게, 민주주의와 헌법에서 보장하는 개인의 권리와 행복 추구권에 위배되는 '사회적 매장'으로 이어지고, 동시에 그러한 언사를 내뱉은 사람의 사회에 대한 '영구 격리'에 준하는 (사회적 및 도덕적) 처벌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특히 좌파의 정체성 정치는 너무나 과도하게 '파시즘적 교만'으로 변질되었고, 앞선 일례처럼 페미니즘 또는 반인종차별을 어떠한 명확한 기준 없이 무분별하게 '비이성적 집단의 분노'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히 민주주의의 위협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과도한 '정체성 정치'는 그 주제에 대한 다른 접근 방식과 이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슈미트 식의 '피아 정치'로 몰고 가고, 이는 결국 트럼프 전 대통령의 극단적인 지지자들의 폭력적 지지와 극단 행동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저자는 우파 취소 문화(다른 말로 캔슬 컬처 cancle culture)를 등에 업고, 사회적 주목과 경제적 이익까지 챙긴 크리스토퍼 루포의 사례를 들며, "2021년 1월 6일 스티브 배넌의 부추김에 넘어가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의회 습격'에 성공한 사건에 대한 이 자의 망언인, "그 당시에 실제로 민주주의가 실제로 위기에 처하지는 않았다"가 회자되기에 이릅니다. 이슬람 혐오와 인종차별주의 그리고 성차별에 공감하는 이들 극우 포퓰리즘이 기존의 여론 무대에서 이렇게 활보를 하게 된 연유에는 미국 내부의 경직된 정체성 정치를 주장했던 좌파들에게도 이처럼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 것인데요. 물론 미국의 진보적 언론인인 크리스 헤지스의 말마따나 미국 정치에서 진정한 좌파가 존재하는 것 인지에 대한 의문을 차치 하더라도 말입니다.

일찍이 철학자인 리처드 J. 번스타인은 "기존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오판으로 드러났을 경우, 이를 마땅히 수정해야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언급했었는데요. 저는 앞선 그의 주장이 우리 민주주의의 가치와 확실히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저자인 피스터 역시, 글 후반부에서, "자유주의는 진리의 독점권을 한 인종, 한 종교, 한 계층에 주지 않고 토론과 더 나은 주장의 힘을 믿는다."고 자유주의적 맥락을 강조하며,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 이러한 관용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데요. 이 자유주의는 인류의 역사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인간과 그 사회의 진보를 탄생 시킨 큰 조류였음은 분명합니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시켰고, 인간이 다른 어떤 것에 억압 받지 않고, 마땅히 인간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큰 틀에서의 대의'를 주지 시켰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산을 익히 알고 더 나아가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지금의 정치가 극단주의적 발언에 숨이 막혀, 하버마스가 주장했던 '공론장의 토론'이 거의 상실된 현실은 어떻게 보면 정치 스스로의 크나큰 비극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끝으로 제게는 앞선 디안젤로의 '백인의 취약성'이라는 논저가 어느 정도는 미국의 인종 문제와 흑백 간의 인종적 간극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물론 교육 받은 백인 중산층에 대한 적대적 함의를 여론 몰이에 이용해, 자신의 이익에 소모했다는 피스터의 의견에 쉽게 동의할 수는 없지만 분명 "거스를 수 없고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비타협"의 반인종차별주의의 경직성을 공고히 한 점에 디안젤로의 앞선 논저가 그 책임이 전혀 없다고 개인적으로는 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최근에 미국 영화인의 축제인 아카데미 시상식을 통해 드러난 사건으로 인해, 평범한 미국인들의 인종 차별에 대한 인식이 아직도 전근대적이라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을 불식시키는데 있어 무엇보다 진보 좌파가 건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은 아주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기도 한 '표현의 자유'와 다시금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노골적으로 이익화에 매몰된 오늘날의 자본주의와 이를 바탕으로 배타적 사회 건설을 추종하는 극우 포퓰리즘 내지는 극단주의 정치를 좀 더 개혁하는데, '완고한 정체성 정치'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욱이 맹렬한 신념화 단계에 빠진 극우주의자들을 어떻게 하면 상식선의 기준으로 다시 되돌릴 수 있을지, 그러한 방안에 대해 모색하는 것이 지금의 정치에서 더욱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단순히 케케 묵은 도덕성 정치 만으로는 이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 대화와 토론이 필요하며 이것을 선결하는 것이, 어느 누구보다 좌파의 의무임을 더 늦더라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진보 좌파의 재건'은 시급히 필요하지 않나 글 말미에 떠올려 봅니다.



-글을 읽다 떠오른 생각은 우리가 언론에게 흔히 요구하는 '기계적 중립'에 대해 논할 때, 미국에서는 이 기계적 중립보다 대립되는 두 가치나 주장에 대해 판단을 언론이 요구 받는다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단순한 옳고 그름이 아니라 각각의 주장에 있어 잘잘못을 판단해주는 것이 언론의 기본 의무로 판단하는 듯 읽혔습니다. 이 부분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지 않나 싶습니다. 

-얼마 전에 서평을 쓴 "내전, 대중 혐오, 법치"에서도 이들 공저자들이, 좌파 답지 않은 좌파를 여실히 비판한 바가 있었는데요. 실로 지금 사회의 문제들의 가장 큰 원인이 사실상 '변질된 좌파들들" 때문이 아닌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왜곡된 사회에 대한 자정 능력과 그 의지를 상실한 좌파들이 얼마나 해로운지는 이번 논저를 통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화당이 지배하는 여러 연방주가 그사이 선거법을 개정했다. 목표는 명확하다. 공화당이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더라도, 2025년에 트럼프나 다른 우파 포퓰리스트를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 입성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몇몇 미투 운동은 어떻게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법치주의의 초석을 흔들 수 있었을까?

그러나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좌파 정치 세력의 변질 역시 날카로운 눈으로 지켜봐야 한다.

결과가 두려워 일부 국민이 표현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을 문제로 여기는 미국인이 84퍼센트나 되었다.

"그냥 하는 비교가 아니라, 정말이지 바이마르공화국을 약간 닮았습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나치를 싫어했지만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더 증오했어요. 오늘날에는 나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사방에서 공격받고 있습니다. 트럼에게서 그리고 독단적 좌파들에게서, 이는 민주주의를 위협합니다."

벨은 이전 글들에서 백인이 흑인 차별을 반대하게 하는 힘은 도덕과 양심이 아니라 명확한 자기 이익에서 나온다는 견해를 이미 드러냈다.

표현의 자유는 특정 상황에서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데, 사이드먼은 이 발전을 재산 불평등의 수정과 "인종, 국적, 성별, 계층, 성적 지양 같은 특성을 기반으로 하는 권력 구조의 폐지"로 보았다.

흑인 여성 최초로 외무장관이 된 콘돌리자 라이스는 러트거스대학 연사로 초청받았지만, 학생들이 이라크 전쟁에서 그녀가 한 역할을 지적하며 분노했기 때문에 강단에 설 수 없었다.

미국의 수많은 대학에서 학생들이 자기들의 세계관과 맞지 않는 견해를 격하게 공격하는 동시에, 정신적 안정을 위협받지 않게 자기들을 보호해달라고 요구했다.

후쿠야마는 1980년대에도 이미 인종차별을 주제로 토론 수업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객관적 토론이 가능했다. 반면 지금은 모든 문제의 근원이 기본적으로 인종차별에 있다고 보는 매우 단순한 관점이 지배한다고 한다.

로워리는 분명 ‘도덕적 명료성‘이 공상주의나 이슬람 테러에 맞선 투쟁에 필요한 결단력이 부족하다며 미국 우파가 좌파를 공격하는 데 수십 년 넘게 사용한 용어라는 점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을 터다.

언론에서 편파성은 필연적으로 실수로 이어진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중국 실험실의 사고로 전 세계에 퍼졌을 가능성을 가장 먼저 얘기한 사람이 공화당 의원 코튼이었다.

트럼프는 거짓말과 언사로 나라를 약극화했지만 좌파의 독단주의도 나라를 다시 합치기 힘들게 하는 데 일조했다.

과거에 미국인이 중도좌파를 선택한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사람들의 삶을 물질적으로 개선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쇼어의 사례는 갈등에 대한 도덕적 비난이 객관적 기준에서 잘못한 것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서 어떻게 직업을 박탈할 수 있는지를 표본처럼 보여준다.

나의 핵심 주장은 다음과 같다. 좌파의 정체성 정치는 특히 중도층과 고학력 계층에게 해롭다. 정체성 정치는 스스로를 위안하고, 자기 의견을 강화하고, 더 높은 도덕성을 장착하는 특정 정치집단에게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이런 작은 버블 속의 독단과 신념은 무엇보다 성별과 피부색에 무관하게 유권자 과반에 거부감을 줄 정도로 너무 견고하다.

자유주의는 진리의 독점권을 한 인종, 한 종교, 한 계층에게 주지 않고 토론과 더 나은 주장의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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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4-03-17 23: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엄지척입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베터라이프 2024-03-17 23:05   좋아요 2 | URL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추풍오장원님~ 스포일러 땜에 글에서 보인 논증을 다 담지를 못했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챕터는 꽤 좋았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시면 한번 일독해보시길요 ^^

추풍오장원 2024-03-18 18:36   좋아요 2 | URL
바로 주문해서 읽을 생각입니다 ㅎㅎ
정체성 정치나 정치적 올바름(사실상 양자는 동일합니다)은 정치의 탈을 쓰고 정치를 삭제해 버린다는 치명적인 해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해로움이지요. 정치가 삭제된 자리에는 소위 형식적 법치주의가 강고히 자리잡게 되지요....진보를 말한다는 사람들이 사법 엘리트에게 권력을 상납하는 꼴입니다. 대한민국도 비슷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해부
고이즈미 유 지음, 김영배 옮김 / 허클베리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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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유(小泉悠)는 일본 지바현 출신으로 현재 군사 평론가이자 저명한 러시아 전문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와세다 대학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에서 정치학 석사 과정을 수료합니다. 오래전부터 그는 러시아의 군사 동향과 군에 대한 연구를 하고 싶었지만 군사력 전반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국제 관계, 국제 질서론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을두지 않았는데요. 그래서 대학에 남아 연구자의 길을 걷는 것은 중도에 포기하고 군사 잡지에 글을 기고하거나 일본 국립 국회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 등을 전전하게 됩니다. 그러다 2009년 영국과 유사한 일본 외무성의 정보 조직인 국제정보통괄관조직(国際情報統括官組織)의 전문분석원이 됩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부터 2011년에 걸쳐 러시아에 체제 방문, 러시아 측의 연구자와 정부 관료들과 인맥을 구축합니다. 그러다 러시아 대학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있던 지금의 러시아인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고, 현재는 도쿄대의 첨단과학기술연구센터의 준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ウクライナ戦争"로 2022년 12월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9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국제 정치학자나 순수한 정치학자가 아닌 군사 전문가가 바라 보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무엇인가에 대해 궁금해하다 발견한 글이 바로 고이즈미 유의 이 논저였습니다. 저자인 그가 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사실상 개전 시기는 글 서두에 언급되듯이, '2021년 봄'이었습니다. 2014년 돈바스 전쟁의 정전 협정이기도 한 '민스크 협정'의 불안한 정치적 산물은 결국 양국 간의 전쟁으로 치달았다 볼 수 있겠는데요. 앞서 지목한 2021년 봄, 러시아 군은 훈련을 핑계로 우크라이나 주변에 병력을 산개시키고, 이는 결국 서방 첩보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저자는 푸틴의 러시아-우크라이나 관계에 대한 장황한 논문을 인용하면서, 그의 전쟁 의도가 결국은 우크라이나 속국화 내지는 우크라이나 내의 친러시아 핸들러들을 투입, 정치적으로 러시아에 유리한 국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는 러시아 내에서의 푸틴의 입김으로 불리게 되는 소위 "특별군사작전"에서의 중요 목표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인 젤렌스키의 조기 제거에 있었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앞의 주장과 대략 일맥상통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푸틴과 러시아 정보 당국은 개전 초기나 그 이전의 상황에서 젤렌스키를 국제 정치에 무지하고 멍청하며, 아둔한 인물로 이해했으나 결국 이러한 분석은 오판임이 드러납니다. 이보다 저 개인적으로는 '우크라이나어를 할 줄 모르는'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이끌고 나가게 되었다는 사실이 뭔가 역사의 아이러니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사석이든 공적인 자리이든 푸틴을 '대머리 악마'로 지칭한 젤렌스키는 그의 힐난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전쟁 개전에 이르는 순간까지 그 주도권은 푸틴이 갖고 있었습니다. 제2차 민스크 합의를 위해 당시 독일 외무장관인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의 이름을 따 작성한 '슈타인마이어' 방식의 협상안이 최종 결렬, 그것을 타결시키기 위한 의지와 노력이 다소 불명확하게 보였던 젤렌스키의 우크라이나는 결국 러시아와의 전쟁을 맞이하게 됩니다. 과거 전쟁으로 잃은 돈바스와 크림 반도를(정치적이든 개인적인 바람이든 간에) 회복하고 싶어했던 젤렌스키는 우선 우크라이나 내의 대표적 친러 정치인이자 자신의 정적인 메드베드추크를 정치적으로 제거하기에 이르는데요. 특히 메드베드추크는 푸틴과 아주 긴밀한 관계라는 추측이 있었습니다. 저자인 고이즈미 유는 바로 이 메드베트추크의 제거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내의 친러파들을 배제하기 시작했을 시기와 2021년, 양국 간의 군사적 위기가 묘하게 겹친다고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이 글의 4부에서 드러나지만 전쟁 이전에도 러시아 FSB가 주도하는 '우크라이나 간첩 작전'이 실행되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겠는데요. 미국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불법적으로 침공하기 이전부터 러시아가 군사적 진공 뿐만 아니라 온라인 공격 및 우크라이나 내의 러시아 첩자들을 이용해 일종의 사보타지를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했던 바가 있겠는데요. 이점은 개전 전에 이미 서방의 첩보 당국들이 우크라이나-러시아 국경의 군사 이동 첩보는 물론, 다양한 인적, 물적 정보를 취합해 어느 정도 결론에 이르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결국 전쟁의 초기 양상은 바이든 대통령의 예상대로 흘러갔고, 동시에 푸틴 역시 젤렌스키를 빠르게 제거하려고 했던 것으로 그 전개를 십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러시아의 푸틴이 가장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은 우크라이나 군의 끈질긴 저항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러시아 군의 무능도 한몫 하기도 했는데요. 영국 외교 당국이 개전 초기, 우크라이나의 운명이 48시간 내에 결정될 것으로 추측했지만 그 추측은 완전히 빗나가게 됩니다. 개전 초기 재블린 미사일을 비롯한 보병 전술 수준에서 사용할 수 있는 휴대용 무기들을 지원했던 미국과 서방은 의외로 러시아의 기갑 전력을 이들 무기로 우크라이나 군이 효과적으로 견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또한 우크라이나 군의 전투력이 예상 외로 뛰어났다고 분석이 되는데요. 반대로 러시아 군은 잦은 사령관 교체와 그런 군부를 미덥지 않게 여긴 건지, 아니면 과거 KGB 시절에 자신이 모든 걸 해냈던 경험으로 인해, 지지부진한 전쟁 상황을 타개하고자 직접 개입하기 시작한 푸틴의 소위, " 마이크로 매니지먼트"는 사실상 그의 잘못된 선택으로 판가름이 납니다.

이미 여러 언론을 통해 잘 알려진 미국이 지원한 하이마스의 성과는 이 글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는데요. 정밀 타격에 능한 하이마스가 우크라이나 군의 유능한 사용으로 인해, 러시아 군의 보급이 지지부진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고 저자는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서방 측의 군사 위성이 수집한 적진 정보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러시아 군의 100여개 넘는 거점을 정밀 타격했다고 확인되는데요. 하지만 이러한 우크라이나 군의 빛나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부차에서 발생한 러시아 군의 참혹한 전쟁 범죄는 반대로 전쟁의 지독한 참상으로 대두되었습니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 군의 기강이 아주 형편없었다는 점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손이 뒤로 묶인 고문 흔적 투성이의 시신"."성폭력을 당한 것으로 보이는 여성의 벌거벗은 시신","하수구에 던져진 시신"등 거리는 비참한 시신으로 가득했고, 중심부와 교회 및 마을 변두리는 집단 묘지가 조성되어 있었다고 저자는 거듭 밝히고 있었습니다. 이는 2015년 시리아의 개입을 통해 러시아 항공군의 잔혹한 폭격으로 이미 드러난 바가 있는데요. 이 초토화 작전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우크라이나에서도 역시나 자행 되었으며, 이 민간인 학살이라는 전쟁 범죄는 이것에 관련된 모든 자들이 그 죄에 맞는 법의 처벌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저자는 최근에 나토에 가입한 핀란드와 스웨덴에 대한 러시아의 전쟁 확대 가능성을 살펴보면서 왜 하필이면 우크라이나에 이러한 비극이 초래되었는지를 다시금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는 1994년 12월에 교환된 '부다페스트 메모랜덤'이 얼마나 외교적 허상에 지나지 않았는지를 돌아보고 있는데요. 우크라이나에 이 안보 보장은 당시 주우크라이나 미국 대사인 스티븐 바이퍼가 미국이 보증한 것은 안전 '보증 assurance'이며 실제로 군대를 파견하는 것을 의미하는 '보장 guarrantee'은 아니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의 본질을 고찰해 보면서, 과거 한국 전쟁의 직접적 원인 중 하나라고 여겨졌던 '애치슨 라인'의 결과물 또한, 본인과 그의 부인이 수차례 입장을 전하긴 했지만 어쩌면 고도로 집약된 교묘한 외교적 수사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래서 한 국가의 안전 보장이라는 것은 스스로가 자위권을 발동할 수 있을 정도로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자원을 가진 이후에, 국제 외교든 담판 외교든 추후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판단해 보는데요. 물론 나토 가입이라는 조건에서 우크라이나 정부의 세련되지 않은 일처리와 서방을 너무 과신한 우크리아나 내의 정치 세력들의 순진함이 러시아의 직접적인 침략 원인이 되긴 했지만 이로써 국제 정치는 쉽게 판단하거나 재단하지 않는 것이 외교에 있어 가장 필요하지 않나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논저의 가장 중요한 분석은 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이후, 우크라이나가 복수의 국가로부터 안전 보장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13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바이든의 생각은 트럼프와 완전히 달랐다. 제1차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미국 부통령이었던 바이든은 크림 강제 합병과 돈바스에 대한 군사 개입을 인정할 리 없었다.

푸틴은 러시아를 방문한 존 케리 국무장관에게 주러시아 미국 대사가 자신을 쫓아내려는 세력을 지원하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말한 적도 있다고 한다.

여기서 젤렌스키가 제안한 것은 2015년과 2016년에 각각 한 번씩 열렸던독일, 프랑스, 러시아, 우크라이나 4자 협의체, 이른바 ‘노르망디 4N4‘에 미국과 영국을 추가한 확대 회담을 열자는 것이었다.

메드베트추크는 푸틴과도 깊은 관계인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메드베드추크의 딸에게 세례명을 지어 준 사람이 푸틴이라는 것만 보아도 두 사람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바이든 대통령이 러시아가 2월 16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이라는 판단을 동맹국들에게 통지하고 미국인들에게 24시간에서 48시간 이내에 우크라이나를 떠나도록 한 사실이었다.

마지막으로 2월 15일에는 또 다른 중요한 움직임이 있었다. 러시아 하원이 우크라이나의 친러파 무장세력(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다)의 독립을 승인하도록 푸틴에게 요청하는 결의안을 가결한 것이다.

개전 직전에 바이든이 ‘제트 전투기, 전차, 탄도미사일, 사이버 공격 등으로 폭넓게 편성한‘공격 형태라고 예언한 내용이 완벽하게 들어맞았으며 이는 미국 정부가 상당히 깊숙한 정보원을 러시아 정부 내에 갖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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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4-03-14 18: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베터라이프님 덕분에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지 알 수 있어 유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별이 왜 세 개인지 궁금하네요.

베터라이프 2024-03-14 18:30   좋아요 2 | URL
안녕하세요 건수하님 ^^
너무나 후하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ㅡㅜ 제가 왠만하게 읽어볼 만한 글에 3개의 별을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평가한지 벌써 8년이 되었네요. 그외 4개와 5개는 저의 아주 개인적인 평가가 담겨 있습니다 ^^; 사실 제가 혹평이나 하려고 3개를 주는 건 아닙니다. 그만큼 서평을 진지하게 쓰려고 항상 노력중입니다 ㅠㅠ 하여튼 댓글 남겨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건수하 2024-03-14 19:07   좋아요 1 | URL
바로 이전 리뷰에는 별이 4개길래 여쭤봤습니다.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
 
내전, 대중 혐오, 법치 -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피에르 소베트르 지음, 정기헌 옮김, 장석준 해제 / 원더박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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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공저자 중 한 명인 피에르 다르도는 크리스티앙 라발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공통된 주제를 연구하는 철학자이자 지식인입니다. 그는 1988년 파리 낭테르 대학에서 자크 비데의 지도 하에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특히 다르도는 마르크스 연구에 대한 평생의 헌신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다음 크리스티앙 라발은 파리 낭테르 대학의 철학 및 사회학 연구자로 공리주의의 역사과 고전 사회학에서의 역사 및 교육 시스템에 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라발은 다르도와 함께,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전략과 그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지속하고 있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피에르 소베트르는 파리 정치 대학에서 정치학, 사회학, 철학 박사를 취득하고 현재 파리 낭테르 대학의 소이파폴 연구소의 일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 게강은 프랑스 국립 예술 공예원의 철학 교수이자, 신자유주의적 주체화 방식과 피에르 부르디외 및 정의 사회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는 학자로 그녀 역시, 현재 파리 낭테르 대학의 소피아폴 연구소의 일원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집필에 참여한 이 책은, 원제 "Le Choix De La Guerre Civile"로 지난 2021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저는 이 논저를 "신자유주의에 대한 알파와 오메가이자, 그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이라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미 신자유주의화가 완료된 미국과 영국을 비롯, 유럽 일부 국가들과 더불어 우리나라는 어느 정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비판은 물론 신자유주의 자체를 토론의 대상으로 입에 담는 것조차, 경우에 따라 상대로부터 상당히 자극적인 언설까지, 감내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를 8장 이후에 드러나는 '신자유주의적 교조화'에 단편적으로 연결시킬 필요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반동적 우파 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시장 자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이행 부분에서 여실히 결탁했던 점을 인지하고 받아들인다면 이런 교조화의 개연성이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947년의 몽펠르랭 소사이어티의 출범과 그 이전의 '이데올로기 투사인 하이에크'에 의해 비로소 시작된 신자유주의는 이 글의 8장 이후의 논증과 개인적으로는 그동안의 독서를 통해 알게 되었던 핵심이기도 한, 과거 전통적 자유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자 가치임을 명백히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자유주의의 계승자이면서 권위주의와 사회주의에 맞서 싸웠고, 이를 좀 더 과장하여 소위 "문명의 수호자"로 스스로를 각색하기도 합니다. 8장에서 공저자들에 의해 분석되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자유란, "자연법, 인민주권, 인권, 의회정치, 인민의 자결권"과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초기 하이에크와 같은 신자유주의자들이 단순히 사회주의 영역의 확장에 맞서, 서구 문명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희생적 투사로서 사회를 개변시키기 위한 숭고한 목적이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대부분의 신자유주의자들은 '개인 선택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정부의 역할을 축소하고 그것을 위한 헌법의 개조, 더 나아가 1970년대 칠레와 같은 국가에서는 민주주의 정부를 붕괴시키는 불법적인 군사 쿠데타까지 지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미제스와 하이에크 뿐만 아니라 기존의 엘리트 지배 세력 역시, 대중이 주역이 된 민주주의에 대해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많은 시민들은 신자유주의가 "그럴 리가 없다"고 항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이 글의 2장에서, 대중 민주주의에 대한 엘리트 세력의 공포, 그 이전의 오르테가 이 가세트와 귀스타브 르 봉의 가히 적대적인 논저들은 파시즘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자들에게도 큰 사상적 영감을 제공했습니다. 세금 경감과 사회적 비용 절감이라는 미명하에, 정부의 사회적 복지 철폐가 현재에 이르러서는 많은 시민들이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사회 부조가 붕괴된 시점에 '민간 보험'을 통해 스스로 자구책을 찾는 것을 '신자유주의의 유일한 성과'라고 비꼬는 저자들의 언급은 그만큼 민주주의의 축소로 읽힙니다. 하이에크는 이미 '사회적 정의'따위는 필요없다고 강조한 바가 있는데요. 일전에 낸시 프레이저에 의해 증명된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가 추동했던 비정상적인 능력주의도 마땅히 초래될 수밖에 없던 '경제적 불평등'을 개인적 차원에서 겸허히 받아들이고, 심지어 직업 선택의 이익으로 작용하는 유용한 사회적 정보들이 보다 돈이 많은 계층에게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목놓아 외쳤던 '유토피아'에 대한 언설이 얼마나 하등 쓸모가 없었는지 이 글의 여러 논증들에서도 분명히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미 대니 로드릭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따른 민주주의의 축소를 예견한 바가 있습니다. 로버트 커트너 역시 이에 동조하는 의견을 거듭 개진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아예 노골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기만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 자유 지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가 시장을 통제하는 것에 아예 기를 쓰고 반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3장에서부터 이어지는 진술이기도 한, "신자유주의가 시장에 대한 민주주의의 통제를 격멸하기 위해, 심지어 권위주의적인 폭력"까지 서슴치 않았던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특히 칠레의 사례는 여러 면에서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당시 CIA의 불법적인 작전은 물론 제임스 뷰캐넌으로 이어지는 엘리트 지식인들의 개입, 피노체트에 의한 신자유주의화의 완료 이후, 이에 대한 언급을 기피했던 하이에크의 일화는 대체로 이들 거의 모두가 반민주주의에 가깝다는 결론에 저는 이르렀는데요. 여기에 "교육 받은 노동자들의 출현"을 반기지 않았던 이들의 입장을 고려해 본다면, 결국 신자유주의자들이 바라는 정치 형태는 시민들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소수 권력자들의 임명에 국한된 제한적인 민주주의이거나, 극단적으로 소수의 엘리트 지배 세력이 정치를 이끄는 철저하게 융합된 과두제를 추종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후반부에서 더 보충되기에 이릅니다.

여러분 모두 민주주의 정치에서 헌법의 기능과 그 의미가 얼마나 막중한지 다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현재의 민주주의 체제는 헌법의 정당성을 통해, 각 사회에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은근히 바라는 바대로, 극단적인 권위주의 통치를 재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고 시장에 대한 민주주의의 통제는 견실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헌법을 통해 작용하는 만큼 헌법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고치는 것이 그들의 중대한 목표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크나큰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인물이 바로 카를 슈미트입니다. 마크 릴라에 의하면 슈미트는 죽을 때까지, 나치에 부역한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은 거의 반동적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바이마르 시대의 자유주의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갖고 있었고, 소위 대통령이라는 강력한 권력과 같이, 헌법을 초월한 계엄이라는 비상식적인 '예외 상태'를 인정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런 자를 추종하고 자신의 사상적 단초를 거듭 발견했던 이가 바로 하이에크였습니다.

이처럼 헌법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이 추종하는 '경제적 헌법론'은 시장을 위해, 헌법을 개조할 필요가 있다고 받아들인 것인데요. 하이에크에게 영향을 받은 이들이 강력하게 추종한 개념이 바로 카를 슈미트의 '결단주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결단주의와 일반적인 헌법은 매우 상충되는 측면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신자유주의자들은 외형적으로는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인정하지만 그들의 속내는 '명백히 개조된 민주주의'입니다. 시장이 알아서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다는 관념 체계를 여기에서 다시금 비판적으로 분석해 볼 수도 있지만 이러한 문제는 이미 과거 여러 사례를 통해 허구로 밝혀진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이는 여전히 확실하고 견고한 이들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으로 8장 이후 드러나는 신자유주의의 비열하고 노골적인 사회적 작업들의 근간이 바로 이러한 주장들에 우선적으로 결부되어 있기도 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하이에크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사법(私法)의 개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저자들은 이에 대한 분석으로 "사법(상법과 형법을 포함한)의 규칙들이 헌법의 위치로 격상되는 것"을 골자로 한 소위 '시장의 입헌주의'라는 용어로 보충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뒤이어 이어지는 하이에크식으로 해석해 본다면 여기에 민주주의를 대입해, "민주주의의 남용을 방지하는 헌법을 고안"하는 일종의 사법의 형성 혹은 확대를 추인하는 동시에 이 자체는 신자유주의에 있어 중요하고도 새로운 헌법적 맥락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전통적으로 도덕적 가치나 도덕주의에 회의를 갖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신보수주의자들과 손을 맞잡은 것은 단순히 원칙과 이에 대한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하더라도 기술적으로는 목적을 위해 무엇이든 이용하는 이들의 저열한 습성을 여실히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헌법이 무력화되었던 파시즘을 다수의 신자유주의자들이 경멸했으면서도 외부 정치에 대한 쿠데타는 물론, 권위주의적 방식의 폭력적 방법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도 바로 이들 신자유주의자들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여기의 공저자들은 파시즘과 신자유주의를 명백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정치 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정당적 절차와 토론 없이 막후에서 시민의 동의는 배제하고 '예외 상태'로 해결할 수 있다는 그런 관념 자체가 얼마나 헌법을 포함한 민주주의 자체에 해악이 되는지에 대해 다시금 이 자리에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더욱이 파시즘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인식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권위주의 방식의 국가 권력 동원을 용인하고, 심지어 하이에크는 과거 파시즘과 나치즘의 부상이 사회주의적 경향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바로 그 경향에서 비롯된 결과였다고 역설한 측면은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넘어 국가 권력을 대하는 이들의 전형적인 이중성을 드러낸다고 판단됩니다. 따라서 다시금 강조하지만 민주주의가 시민 다수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정치 체제인 만큼, 반대로 신자유주의가 '공익'과 '공리주의' 내지는 '시민의 권리'에 웃는 외양을 한 채, 속으로 얼마나 치를 떨었는지 시민들 모두는 이를 유념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본격적으로 논증이 이뤄지는 글 중간에, "신자유주의가 진행되었거나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국가에서 복지를 공격하면서도 이 사회적 부조를 완벽하게 제거할 수는 없다"는 논평 내지는 분석은 실로 저에게 처참한 감상을 느끼게 했는데요. 이는 그야말로 현재의 민주주의가 제한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동시에, 신자유주의 자체를 효과적으로 제어하는 것만이 정치의 건전성을 답보하는 가장 중요한 과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는 제가 최근에 일독한 앤드루 갬블의 여러 제안들과 일맥상통한 부분이기도 했는데요. 더욱이 역사학자인 딘 베이커가 과거 신자유주의적 흐름 속에, 미국의 리버럴 정치인들이 신자유주의에 투신한 사례를 강도 높게 비판했듯이, 진보 좌파의 기형적인 정치적 변화와 더불어, 전반적인 이들의 궤멸은 신자유주의의 오판을 최종적으로 막아내지 못한 근본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비판은 이 책에서도 드러나고 있었는데요. 진보주의 세력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선명성을 유지하고 이를 통해 권력 바깥의 시민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야 했지만 현실은 68혁명 이후, 급격하게 붕괴되어 왔습니다. 과거 68혁명 자체에 지독한 거부감을 갖고 있던 극단적 보수 세력과 신자유주의의 결탁은 심하게 말하면 진보 세력의 목숨 줄을 끊어 놓은 결과로 이어졌고, 심지어 독일을 비롯한 사회 민주주의 세력에 대한 불신과 만연된 억측의 상황을 초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일관된 사실과 증거가 명백함에도 소수의 부유층과 엘리트 지배 세력에 봉사한 신자유주의를 여전히 현대적 금융 자본주의를 선도한 무슨 경제적 사조 쯤으로 이해하고 있는 시민들이 적지 않은 상황은 흡사 아이러니하다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서 분명한 것은 현재의 신자유주의자들이 허버트 스펜서를 비롯한 사회진화론과 은연중 인종주의를 신봉하고, 서구 유럽에 의한 전세계 문명의 선도와 과거 귀스타브 르 봉의 유산이기도 했던 대중 민주주의의 혐오에 기반한, 거의 체제 반동적인 성격의 세력이라 여겨집니다. 더욱이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을 통해, 민주주의의 운명이 해가 갈수록 불확실하다는 부분, 그리고 2008년 이후 신자유주의가 전혀 수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 시민이 포함된 일반적인 미래는 다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앞으로 몇 세대 동안은 진정 암울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새로운 자유주의가 구축한 세계가 얼마나 바람직하지 않은지 이제부터라도 시민 모두가 고찰해 봐야 되지 않을까, 글 말미에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 책에서 언급된 몽펠르랭 소사이어티의 멤버들이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대해 보인 호의와 관심은 이들이 기반이 된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민주주의를 증오하는지 잘 드러내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저 개인적으로는 이 논저를 통해, 카를 슈미트의 '정치적 낭만주의'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데요. 결국 슈미트는 전통적 자유주의를 혐오하는 동시에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겉으로 드러내지 않게 경멸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문제의 본질은 민주주의가 자유 시장에 가하는 ‘경제의 정치화‘ 위협이다.

헌편, 신자유주의적 폭력은 국가의 외부자로 지목된 공동체에 대항해 정동을 동원할지언정 그들에게 파시스트적 폭력을 가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중 모든 신자유주의자가 첫째로 꼽는 것은 개인-소비자의 주권 보장을 전제로 한 경쟁이다.

군사 정권의 권력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스만은 카를 슈미트가 고안한 ‘제헌 권력(pouvoir constituant)‘ 개념을 동원했다.

몽펠르랭 협회 회원들이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보인 호의는, 평등과 사회 정의를 요구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과 증오를 너무도 잘 드러내는 예시다.

그런데 이를 ‘법 앞의 평등‘으로 재해석하는 걸 자발적으로 소득과 재산의 분배를 바로잡으려는 모든 시도를 저지하는 데 목적이 있다.

신자유주의를 이해하려면, 산업혁명이 낳은 엄청난 불평등과 그로 인한 여러 형태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보험을 비롯한 재분배 메커니즘이 도입되던 시기를 살펴야 한다.

이들의 도덕적 이상에 따르면, 존경을 받아야 할 이들은 자본을 축적함으로써 가족과 사업의 미래를 살피는 신중한 사람, 좋은 가장과 공급자이다.

대처는 일찍이 가부장적 가족에서부터 국가에 이르는, 전통과 관련된 모든 보수주의적 주제들을 시장의 회귀와 정치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역사적으로 독특한 위치를 점했다.

서구의 우월함에 대한 믿음과 위협에 처한 정체성에 대한 편집증적 방어를 결합한 이 새로운 ‘자유‘정신은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우파와 반동적 우파가 공공의 자유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 행위를 정당화하는 자양분이 되어주고 있다.

좌파의 변신은 신자유주의의 지배를 제한하거나 분쇄할 수 있는 모든 정치적 대안을 향한 길을 장기적으로 봉쇄해버렸다.

신자유주의 국가는 사회복지를 축소함으로써, 국민을 불안정한 상태로 몰아넣는 동시에 국민을 계속해서 보호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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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 영역의 확장 블루 컬렉션
미셸 우엘벡 지음, 용경식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미셸 우엘벡은 1956년에 스키 강사이자 산악 가이드인 부친과 의사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곳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고향으로도 유명한 프랑스 레위니옹인 코르시카 섬입니다. 여기서 그를 대표하게 된 우엘벡이라는 필명은 자신의 할머니가 결혼 전 쓰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그의 작품들 가운데 필히 관통하는 주제는 자유 시장을 옹호하는 사회에서 이러한 사랑을 위한 경쟁이 어떤 식으로 개인들을 더 인간의 근본적인 측면이기도 사랑과 멀어지게 되었는가에 대해 천착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투쟁 영역의 확장'이 이런 그의 작품 세계에 있어 두드러진 주제 의식을 보이고 있는데요. 이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는 그간의 세계에 있어 미덕으로 이어져 내려온 인간 본연의 온 관계와 인간성 자체를 붕괴시켜 왔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런 인식에서 가장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작가가 아마도 여기 미셸 우엘벡이 아닐까 싶습니다. 약간의 논외로 그의 작품 세계 이외에 사회정치적인 측면에서 민주주의 체제의 버팀목이라 볼 수 있는 사법에서 판사들을 국민의 투표로 뽑아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전반적으로 엘리트 지배 체제와 기득권 정치를 비판하고 있지만 이러한 아이디어는 꽤 의외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Extension du domaine de la lutte"로 지난 199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3년 1월에 초도 번역되었고, 제가 읽은 이번 판은 열린책들의 '블루 컬렉션'으로 2017년에 재번역이 이뤄졌습니다. 현재 이 번역판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현대 산업의 맹아라고 볼 수 있는 정보 기술을 전공한 이 작품의 주인공 '나'는 우엘벡의 여느 남자 주인공 인물 조성 답게 시니컬하고 매사 의욕을 잃은 사람입니다. 저자는 다른 화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서술하고 있듯이 주인공의 내면은 꽤나 독특한 편입니다. 직접 최신의 기법을 다루면서도 기술 만능에 빠져 있지 않은, 그러면서 동물을 소재로 독특한 소설을 쓰고 있는 취미를 갖고 있는데요.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대목은 초반부에 주인공의 입을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의미를 잃어가는 시대'에 그나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그나마 끊임없는 독서 뿐이라는 언급은 제게도 뭔가 마음의 공명이 되었습니다. 이미 주인공은 인간 관계 그리고 사회 전반에 대해 극심한 회의주의를 갖고 있는데요. 자신을 포함한 대다수의 남자들에게 그럴듯한 삶이 주어지지 않기에 이런 세상에서 독서가 그나마 의미가 될 수 있겠다는 체념 아닌 체념을 하고 있는 것이겠죠. 이러한 주인공의 우울한 회색빛 사고는 이어지는 2부에서 사랑이 인간의 근원적인 부분이라고 거듭 강조하면서도 섹스를 포함한 애정과 감정이라는 양가적인 정보의 교류와 이에 제외되어 있는 다른 남성들을 에둘러 언급하는 듯 보입니다. 특히 십대를 지나 젊음의 상징처럼 열정에 빠지게 되는 섹스 자체를 좀 더 노골적으로 해석한다면 '남성이 경험해야 할 권리'로도 읽히게 됩니다. 이는 경우에 따라 꽤나 지나치게 보이는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엘벡이 섹스에 대한 지나친 의미 부여와 적나라한 묘사를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여러 상징들과 복잡한 복선의 의미를 고려해 봤을 때, 엘리엇 로저와 같은 소위 인셀 Incel의 아류와 같은 것으로 그의 이 작품을 취급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인 '그'는 일 때문에 부득이하게 출장으로 방문한 루앙에 대해 무질서한 도시 전반을 언급하며 저렇게 사람들이 모였던 옛 광장에서 성녀 잔다르크를 화형에 처하게 했던 뼈아픈 역사적 사실을 끄집어 냅니다. 지난날 루앙의 이 비극적 연대기는 바로 그런 도시에 삶을 뿌리내리고 있는 어쩌면 사람들에 대한 비꼼으로 이해되기도 하는데요. 또한 혁명으로 왕정을 무너뜨리고 루소의 공화주의적 맥락을 현실로 옮긴 지난 역사에서 마찬가지로 '무정부주의'를 언급하는 우엘벡의 상당한 거친 도발은 마치 작금의 민주주의가 '시장 자유'의 손아귀에 있는 것으로도 읽히는데요. 더욱이 급격한 서사와 전개에 따라 막다른 길로 치닫는 3부에서, 오로지 경제적인 이유로 다리를 다친 노인을 진정제로 안락사에 이르게 하는 '의사들'의 존재와 오로지 돈만 밝히는 듯한 치과 의사들의 행태 또한 현실에서 드러나는 신자유주의의 그림자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간접적으로 사회가 이렇게 비굴해지는데도 어떠한 문제 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다수의 사람들을 향해 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바로 이런 충격과 다름없는 굴절된 사회의 단면을 자신의 오랜 친구이기도 한 가톨릭 신부에게 '고해 성사'와 같은 진배없는 고백으로 접하는 부분은 프랑스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 점을 달리 말하자면 현시대의 사회가 맘편히 대화도 나눌 수 없고, 과거에 숱하게 기록되었던 애정의 기억들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소실된 것과 유사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작가인 우엘벡이 주인공의 회의주의적인 시각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거의 명백합니다. 자유 시장주의, 즉 신자유주의가 앞서 잠시 언급한 대로 인간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사랑마저도 쟁탈의 방식인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내몰았다는 점입니다. 남자가 여자의 구애를 얻기 위해서는 실질적으로 돈과 지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과 이처럼 물질적 허영을 충족시킬 수 있는 실질적 조건 자체가 과거의 연애 담론과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소위 현대의 사랑일겁니다. 이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도태된 평범한 남자들은 인간의 본질로써 작용하는 연애와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요. 전반적으로 이러한 원인과 그것의 책임이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만 국한 될 수 없다는 것이 우엘벡의 일관된 주장이기도 합니다. 만약 우엘벡의 서사대로 사랑이 예전 자유주의 시대의 낭만적인 소산이라면 지금과 같은 시장 자유의 시대에서는 그런 과거의 법칙과 여유를 더 이상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해 보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러한 문제적 인식 하에 저자는 이 '완전 자유 섹스 체계'가 본질적으로 사랑이 가미된 인간의 관계를 '자유 시장주의'가 요구하는 물질적 조건과 인간성이 결여된 경쟁으로 비판하고 있는데요. 이는 마찬가지로 체제 비판의 성격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엘벡이 지난 언론 인터뷰에서 이슬람 교를 신랄하게 비난했던 것처럼 일견 스스로 오해를 사는 듯한 여성의 몸에 대한 정돈되지 않은 표현과 섹스를 남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는 점은 여전히 수용하기가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일반적인 남자들은 단순히 말하자면 여성의 몸에 관심이 많고 남녀 간의 육체적 관계에 대해 열망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아무리 앞선 인식을 기본 바탕으로 잡고 주인공을끊임없이 이해해보려고 해봐도 여전히 한계는 노출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후반부에 예견되는 몰그의 락을 위해, 동료인 라파엘 티스랑을 추한 외모와 공감할 수 없는 인물로 설정해, 비극적인 죽음으로 모는 장면은 아무리 봐도 섬뜩했는데요. 그의 죽음에 절반쯤 관여했다고 봐야 하는 극단적인 주인공의 행태와 그 상황 묘사는 계속 곱씹어 봐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는 사르트르의 언급대로 어떤 한 사람의 파멸을 누군가 직접적으로 겪는 것은 그것 자체로 인간성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주인공은 자신이 지극히 냉소할 수밖에 없는 현실과 관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쳐도 스스로 공감할 능력을 상실한 소시오패스의 전형과 같은 모습과 언행을 수차례 보이고 있는 점은 그가 속한 사회에서 한발 물러서서 현실을 비웃고, 평범한 인간 관계조차 거듭 회피하고자 하는 그 자체로 굴절된 인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과 같은 시대와 사회에서 평범한 인간이 때에 따라 마음의 병을 얻을 수밖에 없다는 비참한 분석과 더불어, 그러한 수많은 삶들의 비틀어지는 그 근본적 원인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우엘벡은 특유의 시선으로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원제와 한국어 제목은 의미상 상당한 차이가 있기도 한 데요. 역자의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2부에 언급되는 "자유주의 경제는 투쟁 영역의 확장이다"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소 집중해서 읽지는 못했지만 우엘벡 특유의 귀납법 방식의 서술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번역된 제목이 저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차츰 불가능해지고, 그런 만큼 인생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줄어 간다. 온갖 화려한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고 있다. 21세기가 어떨지 뻔하다.

인간에게 사랑에 대한 욕망은 근원적인 것이다. 그 욕망은 놀랍도록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많은 잔뿌리들이 마음이라는 물질 속으로 파고든다.

사랑이라는 개념은 그 존재론적인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힘의 속성들을 가져왔고, 또 지금도 가지고 있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는 분명히 섹스도 차별화의 또 다른 체계를 보여준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돈과는 전혀 무관한 문제이다. 그것은 또한 냉혹한 차별 체계인 것이다.

정신분석가들의 손에 맡겨진 여자는 결국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이 된다는 것을 나는 여러 차례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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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는 살아남을 수 있는가 (양장)
앤드루 갬블 지음, 박형신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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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갬블은 영국의 정치학자로 케임브리지에서 학사 과정을 마치고, 영국의 공립 연구 대학인 더럼 대학에서 정치 이론과 관련해 석사를, 이후 모교인 케임브리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갬블은 2007년부터 2014년까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이자 퀸즈 칼리지에서 연구 교수로 일했는데요. 그는 2003년에 자신의 논저인 "유럽과 미국 사이"가 그해 정치학 분야 최고의 책으로, W. J. M 매킨지 상을 수상하고, 2년 뒤인, 2005년에는 PSA로부터 평생 정치 연구에 기여한 공로로 이사야 벌린 상을 받습니다. 이런 갬블의 최근 주요 연구 주제는 자산 기반의 복지 제도와 국제 관계로서의 영미 관계입니다. 특히 그는 근래 경기 침체와 그에 따른 자본주의적 정치의 위기에도 큰 관심을 두고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Can the Welfare State Survive?"로 지난 201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12월 번역되었습니다.

미국과 더불어 철저한 신자유주의 국가로 읽히는 영국에서 저자와 같은 강단 지식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꽤 흥미로운 부분인데요. 물론 저자인 갬블이 본래 정치학자이기 때문에 오늘날 전혀 퇴로가 보이지 않는 '자본주의의 일상적 폐해'에 양심 상 입을 닫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런 자본주의에 있어 오래된 해결책으로 이해되는 복지 혹은 복지 시스템은 20세기 유럽으로부터 시작된 그야말로 사회적 유산에 가깝습니다. 바로 이 책의 서론은 복지의 그와 같은 연원을 다루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조금 이른 결론이지만 갬블의 이 글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기도 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왜 시민들에게 복지를 제공해야만 하는가"에 대해 우리 스스로 그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명확히 고찰해 봐야 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1929년에 전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 준 뉴욕 증시 발 대폭락은 바로 대공황의 시발점이었습니다.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을 비롯, 소위 '뉴딜 엘리트'들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해법을 국민들에게 제공하는 동시에, 다수 시민들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중첩된 복지 프로그램'을 자본가들의 동의와 폭넓은 공감대를 우선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물론 그 시대의 자본가들이 매번 이러한 요구에 동의했던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손익에 있어 무엇보다 체제 안정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식했던 점인데요. 특히나 서구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 과정에서 과거로부터 심각하게 분열된 계급 사회를 이미 경험한 일반 시민들 그리고 자본가들이자 보수주의자들은 "모든 시민을 위한 관대한 복지 국가가 있어야만 한다"는 일종의 당위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을 전통적인 사회적 합의로 봐야 할지는 의문이 듭니다만 설사 그것이 루즈벨트 대통령의 치밀한 계획이라 할지라도 이들도 보편적 공익에 동의했던 것이 아닐까 순진한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물론 보편적인 사회주의자들 역시 이 '양보'에 마땅히 동의했습니다만 1930년대 이후, 조직된 노동 계급의 스스로 삶을 통제하기 위한 자기 방어 기제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직된 힘'이 서서히 무력화 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요. 제가 갬블의 이 글을 통해 그저 과거를 엿본 것이지만 동시에 자본가들과 이에 결탁한 보수주의자들이 정치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겠다는 '최종 결론'에 이르렀던 점도 거의 진실로도 읽혔습니다.


저자는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광범위한 복지 제도와 관련해, 특유의 정치학자 답게 민주주의 하에서 시장의 매커니즘으로 이익을 창출하는 자본주의는 원칙적으로 시민을 위한 사회 부조를 거부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민권과 관련된 리처드 벨러미의 논증과도 매우 유사한 점인데요. 즉, 복지 국가에서 시민은 자신이 이룩해 온 성과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시민권에 근거해 부여되는 불가침의 사회적 권리를 갖는다는 당위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나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적지 않은 수의 신자유주의자들 역시, 시장의 지속적인 이익을 위해 무엇보다 사회 체제가 안정되어야만 한다고 강조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일전에 데이빗 코츠의 언급대로 신자유주의자들의 순진한 생각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이 신자유주의자들을 무턱대고 저열한 음모론자들로 취급할 수는 없지만 이들이 다소 일관되지 않은 화법으로 시민들에게 혼란을 끼친 부분은 사실로 밝혀졌는데요. 결과론적이지만 이러한 문제는 저자의 분석대로 신자유주의가 단일한 교의가 아니었다는 점에도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복지와 대립되는 신자유주의적 기법을 분석하는 논증 가운데, 이를 명확하게 "시장 자유지상주의"로 다루고 있었는데요. 이것은 하이에크와 더불어 강고한 신자유주의자로 알려진 그들 세계의 석학, 밀턴 프리드먼을 시장 자유지상주의자로 해석하는 것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와는 약간 별개로 사회학에서 자유지상주의는 어느 정도 철지난 멸칭으로 취급되고 있지만, 앞선 프리드먼에 대한 저자의 이 같은 의도는 과연 무엇일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대다수 신자유주의들이 주장하는 시장 자유주의적 발상과 노골적인 사적 이익 추구, 이를 통한 강고한 개인주의화는 단순히 복지 담론을 넘어, 사회에 당면한 문제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저 도식적으로 공리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러한 사적 이익화를 필두로 시민을 파편에 이르게 했던 개인주의에 대한 맹신은 특히 신자유주의자들을 포함한 이 시장 자유지상주의자들의 흔들리지 않는 교리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저자의 논증을 통해 다시금 밝혀지고 있지만 이 양자가 공통되게 수용하는 부분은 바로 시장 자유 하에 '사회 정의'는 필요 없다는 인식입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시민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가 안전하고 무엇보다 누구에게나 정의롭기를 바랍니다. 사유 재산에 관련된 부분, 사적 이익화에 대한 부분을 여기에서 다 다룰 수는 없지만 이미 인간성이 결여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그동안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었는지는 거의 명백합니다. 그래서 복지는 바로 그런 정의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이는 미국과 같은 완벽한 신자유주의 국가가 자신들의 국민을 위한 사회 부조를 완벽히 철회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것의 수사가 어떤 식으로든 본질적 의미를 왜곡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발견된 자본주의적 폐해를 단순히 일원적으로 분석할 수 없듯이, 오늘날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맥락은 저자의 말마따나 정치경제학적으로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시장의 이익을 위해 국가와 시장을 비롯, 전지구적 생물권이 이에 동원되고 있고, 이러한 일관된 전개 과정은 보편 타당한 복지 시스템 없이 평범한 시민이 과연 자신의 삶을 지켜낼 수 있을지 의문을 들게 하는데요.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복지 전반은 큰 틀에서 우리 민주주의를 위해 요청되는 것이고 작게는 시민 각자의 삶이 폭력적인 자본주의적 불평등에서 일상을 보전하기 위한 최소한의 보장책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리버럴의 항복과 더불어, 정치 엘리트들과 경제 엘리들이 신자유주의적 교의에 표면적으로는 함께하게 되면서 반대의 큰 국가론에 맞섰고 이와 동시에 복지 비용까지 큰 폭으로 삭감하며 이런 사활적 문제를 그저 개인의 책임으로만 국한시키는 사회적 작업에 온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이는 지난날 아이젠하워 행정부 이후, 노동 조합이 신자본가들이 추동한 사회경제적 압박에 의해 급격히 힘을 잃어 갔고, 결과론적인 측면에서 시민의 도태와 분리 그리고 계급화가 더 맹목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금융 규제를 철폐하고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제한하여, 기업과 경제 주체의 이익을 극대화 하는 그런 단편적인 작업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위한 소위 사회 개조가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데요. 앞선 리버럴 정치인들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적극적 편입과 더불어 유럽을 비롯한 진보 좌파의 몰락은 바로 이러한 일방적 이행을 부추겨 왔습니다. 

단순히 자본가 계급에 의한 비용 문제로 백안시 되는 복지 문제가 '어른이 된 시민'에게는 그저 불필요하다는 주장과 신자유주의가 맹신하는 능력주의 체제에서 밀려난 자들은 당연히 도태되어야 한다는 소위 과거 허버트 스펜서류의 사회 진화론자들과 같은 주장들에 대다수 시민들이 이에 동의하고 있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경제적 침체 시기에 시민들을 위한 복지 비용을 충원하기 위해, 다방면의 정치적 토론은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 하에서는 분명 필요한 부분입니다. 또한 19세기 자유주의 시대를 거쳐 끈질기게 우리가 옹호해 온 이 복지 제도와 그것을 보장한 복지 국가 자체는 어떻게 보면 홉스가 부정해 온 현실에 맞서, 우리 인류가 지켜온 유산이기도 한 데요. 더욱이 일전에 피터 플레밍과 같은 학자들이 분석했던 바대로, 부유층들이 자신의 부와 권력을 일관되게 무리 없이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대다수 시민 계급의 경제적 안정이 무엇보다 - 그것의 맥락이 일견 모욕적이긴 하지만 - 시급한 것입니다. 다만, 지금의 금융 자본주의적 헤게모니에서 자본주의와 더욱더 멀어진 인간성을 어떻게 하면 회복할 수 있겠는가를 정치철학적으로 고민하는 것보다 시민 사회가 기존의 기회의 균등, 평등, 시민의 자유, 사상의 자율성을 답보하기 위해서라도 국가의 의무 자체가 바로 우리의 세금으로 가용된다는 점을 우선 잊지 말아야 됩니다. 이런 인식은 무엇보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에 대해 소극적인 권력 관계가 아님을 시민들에게 주지시키는 것인데요. 결국 복지 프로그램은 누구에게 얼마간의 돈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자유주의가 그동안 옹호해 온 자유와 평등 그리고 공동선에 기반한 가치를 최소한으로 유지하기 위한 원천적 수단이 아닌가 싶습니다.    

끝으로 곳곳에 보이는 저자의 신랄한 논증을 통해, 시장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엄연히 이 사회에 실존하고 있으며, 이들이 사회 각 분야에 뿌리 내리고 있다는 점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는데요. 이것은 그동안 보수 우파들이 신자유주의는 실체가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주장들과 간혹 맞물려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더불어, 현재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보수주의자들이 우리가 알고 있던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이 아님을 저자를 통해서, 다시금 여실히 깨닫게 되었는데요. 모두가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기 불편한 지난날의 '신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결탁', 이러한 결합 형태가 저자가 밝히는 복지에 대한 이들의 근본적인 거부감 뿐만 아니라, 이들이 다른 모든 형태의 타협 불가능한 주장들에 비해서, 사실상 민주주의를 자본주의의 시녀쯤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추정하건대, 과거 루퍼트 머독과 같은 언론계의 보수주의자가 마거릿 대처와 같은 정치인들과 자신들의 국가와 사회를 위해 논의했던 바는 거의 분명해 보이기까지 하는데요. 결국 국가는 시민들의 보모가 아니라는 것이었겠죠. 이러한 연장선 상 가운데, 개인주의와 능력주의 그리고 심각한 불평등이 이렇게 신자유주의적 이행 초반에 필연적으로 잉태되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글의 4장에 복지를 설명한 저자의 문장 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왔는데요. 글 말미에 이 문구를 따로 남기고자 합니다. 


"복지국가는 다양한 수준의 불평등과 양립할 수 있으며, 불평등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결코 복지국가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다. 그러나 복지 국가를 구축하는 이유 중 하나는 삶의 기회를 보다 평등하게 만들고, 사회적 최소한도를 제공하고, 모든 사람이 시민적 권리, 정치적 권리, 사회적 권리를 누리는 공동의 시민권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간 복지 체제의 핵심 교의 중 하나였다." 


그러나 2008년 금융 붕괴와 그것이 초래한 심각한 여파로 인해 복지국가는 축소와 긴축의 새로운 시대에 직면해야만 했다.

많은 시장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당신은 복지국가가 살아남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도, 복지국가를 해체하는 데에는 정치적 장애물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복지 국가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우울하게 결론 내릴 수도 있다.

금융 붕괴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사상은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대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전략에는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통해 의회의 과반수를 확보하고 국가 관료제의 기존 기구를 장악함으로써 정치권력을 획득하여 자신들의 강령을 실행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브레턴우즈 고정환율 체제 Bretton Woods fixesd exchange rate regime가 해체된 이후 훨씬 더 개방적이 된 세계 경제에서 자국 경제는 국제금융시장으로부터 덜 보호받았고, 자본통제 종식, 규제 완화, 민영화, 소득과 부에 대한 세금 인하, 그리고 고용권 및 노동조합의 약화를 통한 유연한 노동시장 창출 등 일련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많은 나라에 도입되었다.

복지국가가 그간 표명해 온 약속은 모든 시민은 자신이 시장에서 이룬 성과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시민권에 근거하여 부여되는 불가침의 사회적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국가를 이용하는 것의 실질적인 이점이 명백해지자, 사회주의자들은 민주주의가 국가를 변화시켜 왔고 자신들이 국가를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무엇인가로 만들었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시대에 일부 보수주의자들이 시장 자유지상주의자 및 다른 신자유주의자들과 제휴하여 고도 집산주의 시대 - 복지국가가 미래의 물결일 것처럼 보였던 시대 - 의 혜택을 일부러 줄이고자 했던 이유이다.

시장 자유지상주의자들에 따르면, 개인은 자녀의 교육에 대한 비용을 스스로 지불해야 하며, 건강상의 위험이나 실업 또는 장애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

20세기 대부분 동안의 도덕적 논쟁에서는 국가의 복지 제공을 확대하고 개인이 삶에서 직면하는 위험과 불확실성을 줄이는 것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승리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재정 긴축에서 앵글로-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질서-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모두가 채무불이행에 대해 취한 입장은 세금이 아닌 지출을 줄이는 것이었고, 그리스와 몇몇 다른 질서-자유주의적 국가에서 이것은 핵심 프로그램에 대한 지출의 삭감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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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4-02-23 1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민주주의를 자본주의의 시녀쯤으로 여긴다‘는 부분에
씁쓸하게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복지국가라는 북유럽 나라들에
의외로 노숙자가 많다는데 유일하게 핀란드는 그 수를
줄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방관할 경우 사회적 비용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닫고 아예 살곳을
마련해주었대요. 물론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었지만요. 길에서 폭력,마약,도둑질..등 문제를 일으킬때보다 훨씬 적은 비용이 들었고 다시 사회로 복귀할 기회도 높였다네요.

우리나라도 극도로 보수적이다보니 복지가 퍼주기라는 인식이 만연한데
세세하게 따져보고 복지에
대한 인식을 바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알아야할게 너무 많은것 같고요. 덕분에 이부분에 대한 생각을 한번
정리해볼 기회가 되었네요.
베터님 잘읽었습니다^^

베터라이프 2024-02-24 06:46   좋아요 2 | URL
복지국가 시스템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해당 시민들이 사회 민주주의적 개념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복지 자체가 예전 자유주의적 소산임을 인식한다면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과거 자유주의와 상이한 차이가 있는지
변질된 보수주의 정치와 연계해서 개념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민주주의 정치 기반에서는 말이죠

소위 ‘퍼주기 복지‘와 관련해서도 과거 레이건 행정부 때
당시 신자유주의자들이 저런 식으로 포커스를 맞춰
사회 부조에 대한 혐오감을 시민들에게 안겨줬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실 구조적으로 정치공학이 관여해 왜곡된 기본 인식들이
제가 알기로는 전통적인 보수정치의 연원은 아님은 분명합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신자유주의 국가에 보수를 자처하는 대다수의
정치 세력들은 기득권 세력이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영국도 그런 부분에서 많이 변질 되었죠

항상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미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