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투스 세계문학의 천재들 7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지음, 정창 옮김 / 들녘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것이든 막론하고 소설 리뷰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지키지도 못할 약속의 증거인 두번째의 그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은 따로 서평은 쓰지 않았지만 몇년전에 ‘차가운 피부’를 인상깊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차가운 피부’ 또한 판이 바뀌어 국내에 꽤 많은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판매량이 작품 수준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책의 저자인 피뇰은 충분히 좋은 평가를 받을만한 작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소개할 이 책의 제목은 저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약간 변형한 것인데요. 특히 ‘바르셀로나’를 지칭해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 작품의 배경은 1701년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의 카탈루냐와 바르셀로나를 삼고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스페인의 올바른 국호는 에스파냐라고 생각해왔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이 에스파냐라는 국호는‘카스티야’에 한정된 것이었습니다. 카탈루냐인들은 아마도 오늘날까지도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하여튼 바르셀로나 출신의 작가가 얘기하는 카탈루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글의 장점이라 지칭해도 무방할 것인데요. 갑자기 드는 생각은 지금 스페인의 카탈루냐와 바르셀로나는 이를테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와 같은 입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만큼 양자가 이질적이라는 것입니다.

주인공 마르티 수바리아는 꽤 흥미로운 이력을 쌓게 됩니다. 전혀 종래의 귀족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프랑스의 귀족 보방에게 공병에 대한 교육 뿐만 아니라 당시 평민으로서 받을 수 없는 여러 혜택과 호의를 얻게 됩니다. 속세의 틀에 박힌 관념과 거리를 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귀족의 상이 바로 이 보방일텐데요. 마르티는 이 처음의 스승에게 영혼에 새겨진 고마움을 간직하게 됩니다. 뒤이어 프랑스 군에 복무하게 되고 모종의 사건으로 다시 아버지와 자신의 모태라 볼 수 있는 바르셀로나로 돌아오게 되는데요. 주인공 못지 않은 비중을 갖고 있는 바예스테르와의 인연을 미리 암시하기 위해 좀 더 뒤이어 나타나는 주인공의 행적과 사뭇 이해하기 힘든 사건을 피뇰은 안배하는데요. 어쩌면 속세와 탈속이 크게 의미없다는 식의 설정이든지 아니면 반대로 다 수렴한 인물상을 만들기 위해서인지는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판단하기는 어렵군요. 그리고 이 바예스테르는 1918년 카탈루냐 독립파들이 사용하는 분리주의 깃발 ‘에스테랄다’를 도안한 비센스 알베르트 바예스테르와 묘하게 연관있어 보이는데요. 주인공 수바리아와 바예스테르는 둘 다 현실적 인식에 저항하지 못하다가 결국 그것을 극복하는 공통의 인물로 바라봐도 될 것 같습니다.

카탈루냐인들에게는 자신들의 불행한 역사인 이 에스파냐 왕위 계승전쟁을 같은 바르셀로나인인 피뇰이 끄집어 내왔다는 점에서 이것을 다룬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덜 표면적인 진정성이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왕정에 예속되고 자신들의 권리를 빼앗긴 채 이후 운명의 바깥에서 소모되어 왔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일 겁니다. 지금도 독립은 커녕 자치정부 마저 스페인 정부로부터 타도되었으니까요. 한 가지 더 충격적인 점은 이 때의 영국은 ‘세력균형’이라는 미명하에 여기저기 물타기를 했고 끝내 바르셀로나를 방치했는데요. 자구력이 존재하지 않는 민족에게는 냉엄하고 가차없는 국제 정세가 기다리고 있다는 점은 정말 뼈아픈 교훈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지저기에서도 이 왕위 계승의 진정한 승자는 영국이라고 모두 손꼽고 있습니다. 참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자들이죠.

끝으로 출판사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리고 싶은 것은 이 8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글을 나눠서 몇권으로 내놓지 않고 오로지 한 권으로 출판한 점입니다. 요즘 같은 도서정가제 시대에 한 권으로 퉁친 것은 독자들에게 정말 매우 이로운 혜택이라 생각됩니다. ㅋㅋ (초성체는 안쓰려고 했지만 이번만큼은 삽입해야겠군요) 토요일과 일요일에 걸쳐 이 책을 붙잡고 있었는데 저자의 글로써만이 아니라 번역의 질도 좋아서 매우 수월하게 읽혀졌던 것 같습니다. 곳곳의 글 분위기는 문득 카잔차키스가 생각나서 더욱 좋았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느낌이죠. 그리고 판타지 소설을 쓰려고 하는 분들은 이 책을 꼭 읽어보시길 권유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의 여러 전쟁 방법들과 전략전술적인 측면의 소개들이 적잖게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저자인 피뇰이 많은 사료와 당시 전쟁 자료들을 참고한 것이기 때문일텐데요. 특히 주인공이 공병 교육을 받는 1부와 본격적인 바르셀로나 공격전이 벌어지는 3부는 동일한 측면으로 큰 도움을 받으실 것 같습니다. 소설이어서 어떠면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가급적 최소한으로 스토리 라인의 소개를 한정시켰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부분 역사적으로 실존했는데 피뇰은 이들에게 매우 생생한 입체적 분석을 시도했습니다. 전형적인 틀로 이뤄지는 인물묘사 아니어서 읽는 내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르겠군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응과 저항을 넘어서 - 이승만과 박정희의 대미정책
신욱희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한미관계 및 미국과의 외교에 있어서 권위를 갖고 있는 이삼성 교수와 한중관계에 천착하고 있는 성균관대 이희옥 교수, 주재우 교수와 더불어 국내 국제정치학계에서 의미있는 연구와 후학을 가르치고 있는 서울대 신욱희 선생의 과거 우리의 독재 권력이었던 이승만과 박정희 시기의 한미 외교 관계 분석이라고 봐도 무방한 이 ‘순응과 저항을 넘어서’를 일독했습니다. 신욱희 선생의 글은 번역한 책까지 포함하면 이번이 3번째 서평인것 같은데요. 신 교수의 번역은 최근에 리뷰한 베리 부잔의 ‘국제 안보론’입니다.

요즘 국제정치학계에서 많이 인용되는 학자들로는 월츠와 월트, 코헤인 정도가 될텐데요. 아시겠지만 위의 학자들 뿐만 아니라 많은 국제정치학 관련 학자들의 유명한 주저들이 국내에 번역이 안되고 있습니다. 전공자들은 원서를 구입해서 직접 일독하거나 과거 지도 교수들이나 관련 국내 학자들의 논문들을 찾아보는 것이 일반적일텐데요. 이런 측면에서 저와 같은 일반 독자는 전반적인 접근의 문제가 있습니다. 모쪼록 국내에 이들 도서의 번역 출판이 이루어졌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소개해 드릴 이 책은 총 4장의 분량으로 되어 있고 2장과 3장이 주요 네용이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장은 한미 동맹과 같은 대표적인 비대칭 동맹 관계에서 양자 관계가 어떻게 순응과 저항이라는 매개로 한국과 미국의 외교 관계를 분석하고 이에 따른 학자들의 몇가지 이론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코헤인의 비대칭 동맹 연구라든지 후견-피후견 관계, 동맹의 무임승차론 등의 한미동맹 초기부터 대체 한국에 있어서 이 한미동맹은 어떠한 의미이고, 정치외교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현실적 분석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우리는 한국 전쟁을 치루고 냉전이 심화되는 시기에 안보적 불안을 갖고 있던 상황에서 한국의 후견국 역할까지 도맡아야 했던 미국과 그 이 한미 동맹 관계를 여러 방면에서 이용 및 차용했던 약소국 한국의 입장을 이승만 독재 시기부터 상세히 논하고 있습니다.

3장은 바로 그 역사와 사례를 살펴본 부분인데요. 트루먼 행정부 이후 아이젠하워가 집권하면서 미국의 국외 정책이 시시각각 변화되면서 ‘제국의 변방에 속해 있는 위성국과 같은 위치에 있던 한국의 상황’과 그 위성국의 통치자였던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그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기 보다는 냉전체제에 있어 자유진영의 지도자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었고” 또한 ‘북진통일론’ 수시로 언급하는 일종의 예측불가의 갈등 소지자로 한미 동맹 자체가 현실주의적 시각에 기반하는 동맹 이론과 한미 동맹 자체의 특수성이라는 양자의 상충적인 측면을 안고 있는 것에서 꽤 양국에게 불안요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승만의 국내적인 상황은 차치하더라도 전쟁 이후, 자국의 안보 상황에 기초해 일본에 더 집중하려는 미국과 한국에 주둔하던 주한미군을 감축시키려는 시도 자체를 외교 관계 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에 있어서도 불리했던 것은 확실해보입니다. 더군다나 경제적 측면에서 한국이 일본과 수교를 하거나 그에 버금가는 진전되는 회담을 바랬던 미국의 입장으로서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탐탁치 않았던 이승만 정권은 면밀한 관리대상이었겠죠. 한가지 이해가 안되는 점은 이승만 스스로가 친일파 및 친일부역자의 지지로 탄생한 독재 정권인데,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는 부정적이었다는 입장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군요. 과거 하와이나 미국 본토에서의 독립 운동 및 상해 임시 정부에서의 정치 활동은 이미 드러난 사료가 많아서 이승만 스스로가 과연 정말 패망한 조국의 독립이 목적이었는지는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습니다.

4.19 이후 전면적인 경제 발전 정책을 요구했던 미국은 이 때 탄생한 장면 정부가 박정희에 의한 군사 쿠데타로 붕괴되고 이후 박정희 독재 정권 또한 이승만 정권과 유사한 대미 외교 체계를 보이게 됩니다. 주한 미군을 정권의 안정을 위한 담보로 여기고 국내 정치적으로는 반공 독재 체제를 강화하여 미중간에 데탕트의 분위기가 고조되지만 당시 박정희 정권은 북한과의 대화를 거의 전면적으로 거부, 공산진영인 중국과의 관계에서 유연한 대처를 하고 있던 닉슨 행정부와 키신저의 다소간의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닉슨 독트린 발표 이후 주한 미국 감축과 관련된 불안을 불식시키고자 미국은 제스처를 보내지만 박정희 정권도 마찬가지로 주한미군 감축을 용납할 수는 없어서 결국 핵개발과 같은 무리수를 두게 되죠. 1970년 당시 “미국은 이미 북한과의 직접적 협상을 꺼리는 한국 정부의 입장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고” 어떻게 보면 북한의 통미봉남 술책에 이 시기에는 자초한 경향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국 측은 북한의 김일성이 단독으로 남침을 다시 시도하기란 어렵다고 봤으나, 이미 김일성은 두 차례나 중국 측에 남침을 할 때라고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독재 정권이었던 박정희 시기의 대미 관계 및 관련된 외교 정책들이 너무나 미국 의존적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1973년 이후 차츰 남한의 국력이 북한을 초월하기 시작해 한국 스스로 북한에 대한 자위 능력에 대한 자신감과 미국산 무기를 비롯한 막대한 미국의 군사 지원 등이 수행되면서 한미 동맹 자체가 변화해 왔습니다. 앞서 이 글의 도입부에서 한미 동맹 자체가 대표적인 비대칭동맹이어서 양자가 방기와 연루의 위협에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한국 전쟁 이후 두 나라의 외교 관계가 이를 증명하는 과정이었다고 여겨집니다. 특히 우리에게 있어서 미국에 대한 의존성이 심화되었고 이런 상태가 북한과의 종합적인 관계에 있어서 스스로 능력을 제한하게 되는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네요. 오늘날의 시점에서도 국격의 상당한 상향을 달성했지만 한미 관계에 있어서는 아직도 비대칭적인 동맹 관계이기도 합니다. 워싱턴은 한국의 번영을 미국의 시스템하에서 이룩한 훌륭한 업적이라고 자부하기도 합니다. 분명 이것은 일정 부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고 앞으로 당면한 북한 핵문제와 중국의 대두 시점에서 우리의 한미 동맹이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될지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리라 여겨집니다.

약간의 논외로 이제 북한의 핵개발 문제는 트럼프 행정부의 의지로 첫 삽을 뜨긴 했는데요. 이 시기 역시 한국 정부의 냉정하고 현실적인 대응이 요청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북대화는 매우 필요하고 적대관계 해소 또한 민족적 당위성입니다만 정확한 상황 인식은 전제되어야 하지 않나 싶군요. 이런 상황에서는 미국 측 또한 한미 동맹이 매우 중요하며, 북한의 핵문제 나아가서는 중국의 노골적인 지역 패권국 지위 획득 시도에 우리의 한미 관계가 매우 중요한 문제로 여겨집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터라이프 2018-08-30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우 기간 중 배송 업체의 문제로 인해 주문한지 7일만에 책을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혹시 구매하실 분들이 계신다면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인터넷 자유 투쟁
레베카 매키넌 지음, 김양욱 외 옮김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인 레베카 매키넌은 현재 뉴아메리카재단의 선임 연구원으로 인터넷 정책, 인권, 그리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분야를 맡고 있는데요. 과거 CNN의 베이징과 도쿄 지사장을 맡기도 했고 이후 하버드 대학에서 중국의 인터넷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다가 언론계로 돌아가지 않고 앞서 말한 분야의 연구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책은 지난 2013년 골드스미스북어워즈 (Goldsmith Book Prize) 를 수상한 작품인데요. 골드스미스북어워즈는 일종의 문학상으로 언론학과 정치학, 공공정책학과 관련된 분야를 다루고 있습니다.

초기 기술적인 월드와이드웹 기반의 인터넷이 이후 수십년간 전세계에 가공할 만한 파급효과를 일으켜 특히 정보 기술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민주주의와 자유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감들이 전문가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중국과 같은 권위주의 국가들은 이러한 열린 인터넷 광장에 의해 차츰 민주화가 실현될 것이라 봤고 이 부분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있어왔죠. 하지만 오늘날의 중국은 거대한 검열 프로그램과 방화벽을 이용하여 반정부적인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고 중국 국민들이 ‘해로운 정보’라는 미명하여 선별적인 정보 차단과 제한된 서비스의 구축을 성공적으로 함으로써 이제는 이 ‘권위주의 정부’가 더욱 현실 민주화와 멀어졌음을 인정하게 되었는데요. 이와 관련해서 저자인 매키넌은 “인터넷 시대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미래가 밝지 않을 것 같다” 며 조심스런 전망과 같은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권위주의 정부들 뿐만 아니라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에게서도 이러한 인터넷에 대한 검열과 제한이 이뤄지고 있고, 무분별한 시민들에 대한 정부 수집은 대표적으로 오늘날 미국내에서 나타나고 있어서 매우 우려할 만한 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이 엄밀한 현실이라면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이러한 인터넷 세계에서 보장하기 위한 움직임이 터무니 없는 이상주의적 의견으로 파행되고 있는 것 자체에 대한 저자의 우려섞인 진단은 우리가 새겨들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매키넌의 여기 글에서는 달갑지 않은 우리나라의 사례가 등장하는데요. 이른바 ‘미네르바 사건’이라 불리우는 박대성씨의 기소와 후에 무죄 방면된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요.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에 의해 추진된 이러한 법적인 해결 방안을 한국에서 정치 경제적인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의 위험하다고 판단했을 때 표현의 자유를 목조르는데 결국 사용되었다”고 이 사건에 대한 평가를 저자는 내리고 있습니다. 즉 평범한 시민들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권력이 힘쓰기보다는 경제적 엘리트들의 경제적 이익이 침해 당할때 미네르바와 같은 사례로 개인의 의견 피력의 자유를 제어하게 만든 매우 대표적인 사건으로 자리매김 했다고 여겨집니다. 사실 이것보다도 헐리우드의 집단적 이익을 위해 저작권을 지키기 위한 많은 시도에 있어서 ‘무죄 추정의 원칙’을 수호하기 보다는 오로지 저작권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정치인들과 사법관료들에 대한 비판은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북미와 유럽의 선진 IT기업들이 ‘북미산 및 유럽산 검열 프로그램’을 중국을 비롯한 이집트, 튀니지와 같은 권위주의 정부에 팔아왔으며, 구글과 야후와 같은 거대 인터넷 기반 기업들도 중국 정부에 일정 부분 양보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제적 이익이 최소한의 시민들에 대한 보장을 추월함으로써 발생하는 일들은 이제 이러한 인터넷 기반이 우리 민주주의에 도움이 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의 중국의 사례는 시 타오와 왕 샤오닝과 같은 반체제 인사들의 무차별적인 중국 당국의 검열과 수색을 불러왔고 당과 정부의 체제 안정을 위해 효율적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점에서 매키넌의 전체적인 판단과 더불어 이는 앞으로의 진행이 모두가 두려워할 만한 결과를 나을 수 있다고 보는데요. 이것은 샤머니즘과 같은 허무맹랑한 예측이 아닙니다.

이러한 많은 시도들을 ‘디지털 보나파르티즘’이라고 저자는 명명하며 1984의 조지 오웰과 같은 전면적인 ‘빅 브라더’로 볼 수는 없지만 마이크로소프트의 불법 복제 프로그램을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시민들에 대한 단속에 나선 중국 공안들의 임의적인 법해석은 이른바 저작권과 같은 것이 어떤식으로 왜곡되어 집행될 수 있는지에 대한 사례로 이 책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인터넷에 대한 엄정한 ‘망 중립성’과 시민들이 중심이 된 ‘인터넷 거버넌스’ 확립, 그리고 뭐가 우선이 되어야 하는지 먼저 깊이 성찰을 해야 하는 각국의 정치권과 사법 관료들의 행동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이 책의 제목만 놓고 봤을 때는 주로 기술적인 측면의 글로 여겨졌습니다. 이를테면 인터넷 기반의 발전을 위해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류의 전형적인 글로 여겨졌는데요. 막상 페이지를 넘기다보니 우리가 이 웹 상의 자유와 인권을 어떤식으로 보호하고 거대한 시스템적인 간섭과 제재들로부터 어떻게 공감대를 마련할 것인가에 대한 현명한 방안과 그동안의 실제적인 충분한 사례들이 이 글에 포함되어 사실 꽤 일독이 즐거웠습니다. ‘인터넷은 매우 당연하게도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저자의 화두는 과거 존 로크가 말한대로 ‘통치 받는 자들의 동의’를 정부에 요구하고 정부는 마땅히 시민들의 안전과 기본권을 보장하는 역할을 등한시 않게 만드는 것이 우리가 스스로 해야 되는 일임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구 평화론 - 하나의 철학적 기획, 개정판
임마누엘 칸트 지음, 이한구 옮김 / 서광사 / 200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계 철학계에 큰 획을 그은 임마누엘 칸트는 이성과 관련된 형이상학을 당시에 전무했던 고유한 사유체계로서 정립해 그의 이론을 변형해 이론을 받아들인 수많은 사상가들을 고려한다면 참으로 인류 역사에 대단한 사람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의 이 책인 ‘영구 평화론은’ 프랑스 혁명 이후 맺어진 바젤 강화 협약을 배경으로 정치와 철학, 역사가 망라된 칸트의 고유한 사고가 여실히 잘 드러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전세계에 영구적 평화가 가능한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관대한 마음을 갖고 읽는다면 의외로 칸트의 여럿의 선견지명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지 않나 감히 평가해봅니다.

칸트는 여기에서 전쟁이란 각 국가가 폭력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자연 상태 (이 경우 적법한 판결을 내릴 수 있는 법률 기간은 없다) 라고 밝힙니다. 전쟁 상태에 이르거나 그것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전제 군주정일 경우에 단지 유희나 재미만으로도 이 전쟁이 발생 할 수 있으며 다만 온전한 공화제여야만 영구적 평화를 비롯한 전쟁이 없는 상황애까지 이를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일종의 간기와도 같은 단기 평화에 대해서는 칸트가 따로 언급은 하고 있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국가의 실질적 정체가 다소 불확실하더라도 평화를 이루는 여러가지 조건과 수단들을 잘 구성해서 독자들에게 인식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있습니다. 이 책이 나왔던 1796년과 지금의 시점은 꽤 현실의 간극과 체제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칸트가 왜 시대를 앞서는 사상가였는지 여실히 드러납니다.

국가를 구성하고 이를 주도하는 권력 체제에 있어서 이 국가권력을 쥐는 사람의 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 대의성은 커지며, 그 체제는 공화정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있다고 칸트는 전제합니다. 이러한 민주제에선 폭력 혁명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그 체제가 유지되고 이러한 것이 각 국가들간의 평화를 위한 선결 조건임을 밝히는데요. 평화와 공화제와의 관계는 오늘날에도 꽤 의미심장합니다. 어쩌면 ‘민주평화론’이 칸트의 이 글에서 시작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약간 비약일 수도 있지만요. 그리고 뒤이어 국내법, 국제법, 세계 시민법이라 열거하는 이른바 ‘공법’이 국가들간의 행동 논리의 기준과 목적이 되고 개인에게 보편적 의지가 있다는 것을 굳게 인지한다면 세계 시민법에 의거해 많은 이들이 보편적인 우호로 나아갈 것이라는 체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자연 상태의 인간이 보편적 의지와 이기심을 동시에 갖고 있다면 확실히 여기에는 법의 필요성이 요청되는 것이겠죠.

뒤이어 추가조항이과 부록에서는 영구 평화의 보중과 영구 평화를 위한 비밀 조항에서는 정치와 법과 정치와 도덕을 바탕으로 정치와 철학의 측면에서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자연 상태의 인간’ , ‘섭리’, ‘공화적 체제’ 등에 평화에 이를 수 있는 배경적 이론을 강화하고자 하는데요. 자연에게 부여받은 인간이 생활하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 자연의 의지가 담긴 섭리, 궁극적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는 평화에 이로운 공화 체제를 결국 국제법에 귀결시키면서 우리의 이해를 돕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더불어 도덕과 정치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도 없지만, 주관적으로는 특유의 이기적 성향으로 인해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고 보고 이것은 또한 양자 사이에 존속할 수 있고, 존속해도 좋다고 칸트는 말합니다. 약간 무의미한 동어반복이라고 느끼실 수도 있는데요. 결국 이것은 정치와 도덕간의 갈등이 인간이 진보하는데 숫돌과 같은 역할로 도움이 되리라고 여기는 칸트의 중요한 의미 부여입니다. 마찬가지로 정치와 정략을 구분하고 앞에서 “별다른 저의 없이 공개적으로 표현되고 과감하게 제시된 정치 이론가의 의견이 국가에 어떤 해독을 끼치지 않을까 의심해서도 안된다”라는 언급이 바로 이런 취지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물론 이것은 어떠한 악의적인 해석이 개입되지 않기를 바라는 칸트의 바람이지만 정치가 평화에 이르는 길을 닦을 수 있다는 어떤 희망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네요.

결국 이런 영구적 평화의 마지막 길에는 세계 연맹을 비롯한 세계 국가의 필요성이 요청된다고 결론내는데요. 이 이론적 토대들이 현재의 국제 정치에 써먹을 수 있는지는 대충 보더라도 불확실해 보입니다만 막연한 평화주의로서 구호에 이르기보다는 “이성은 인간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야한다”고 중요하게 여겼던 칸트의 사상이 철학과 역사, 정치 등을 포함하는 진실로 ‘영구 평화가 달성될 수 있다’고 봤던 것 같습니다.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여러 정치적 불안정성을 내포하며 시작된 1790년대에 칸트는 어쩌면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를 예견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양측 모두를 파괴하고 일체의 정의마저 파괴할 수 있는 섬멸전은 영구 평화를 한낱 인류의 거대한 묘지속에서나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칸트의 외침은 거대한 인류의 죽음에서만 비로소 평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의미와 함께 바로 우리의 시대가 인류 멸절의 무기로 무장된 시대임을 에둘러 표현한 것 같은 기시감을 안겨준다고 해야할까요. 그가 이 인류 멸절의 무기를 예상했을리는 없지만 지금의 이 세계의 평화는 더할나위 없이 영구적인 것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edman 2022-03-22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칸트가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는지, 또 있다면 뭐라고 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베터라이프 2022-03-22 18:3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김민우님 ^^ 일단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인용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국가간의 전쟁 상태와 관련해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칸트의 이해가 어느 정도는 배경이 되었을 수도 있는데 내용이 드문드문 기억 날 뿐입니다 ㅠㅠ 일단 제가 귀가해서 다시 한번 일독을 해보겠습니다. 그래서 알려드리도록 할게요 ^^ 감사합니다. 그리고 유튜버 헬마우스님이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리뷰 영상을 올린적이 있는데 논란 가능성이 있긴하지만 그냥 가볍게 보셔도 될 듯한데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Redman 2022-03-22 19:1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베터라이프님!! 헬마우스라는 유투버도 있었군요 ㅋㅋ

베터라이프 2022-03-22 20:28   좋아요 0 | URL
참고로 헬마우스라는 분이 정치색이 있으신 분이라 그걸 감안하고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전체 일독을 하셨는데 요약이 되어 있으니 참고만 하세요! 소리가 제법 크니 볼륨 조절도 적당히 하시고요 ^^
 
다시 쓰는 전쟁론 (반양장) - 손자와 클라우제비츠를 넘어
마틴 반 크레벨드 지음, 강창부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인 마틴 반 크레벨트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일생의 대부분을 이스라엘에서 보낸 군사사와 전략에 대한 세계적인 석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런던정경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보아 엄밀히 말하면 그를 역사학 학자로 인식해야 하지만 이스라엘을 비롯한 노르웨이와 캐나다 등지에서 국방 조직 자문가로 활동했던 특이한 이력도 갖고 있습니다. 아마도 전쟁사나 군사사의 대부분이 역사와 관련되어 있어서 역사학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전쟁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오늘날 세계에는 손자와 클라우제비츠와 같은 소수의 전쟁 전술 이론가들만이 알려져 있는데요. 과거에서 뿐만 아니라 현대에 이르는 많은 전쟁의 일면들이 전략과 전술만으로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렵게 되었습니다. 총력전과 같은 단계에서 경제와 사회를 빼놓고는 설명이 안되는 것처럼 말이죠.

이 책은 총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6장인 전략을 다룬 부분까지 종래의 전통적인 의미로서의 전쟁을 설명하고 있고, 7장인 해전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양상의 전쟁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자인 마틴 반 크레벨드는 전쟁의 속성에 관해서 ‘전쟁은 국제적 무정부 상태의 산물’이라고 정의합니다. 일찍이 많은 학자와 사상가들은 전쟁 자체가 고도의 정치적 산물이라고 여겨왔죠. 국제 정치가 본래 무정부주의적인 어떤 틀에 연연하지 않는 혼란스런 상황임을 우리가 인지한다면 크레벨드의 앞선 전쟁에 대한 언급은 꽤 의미심장합니다. 더불어 글의 마지막 장에서도 ‘전쟁은 악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아 많은 부분을 할애하면서 전쟁을 분석하고 분류했지만 이것의 본질에 대해서는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불행한 일이라는 인간의 양심이 느껴졌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보기에도 ‘전쟁의 원인이 전쟁의 일부가 아니다’라는 저자의 단언에 절로 동의하게 되는데요. 여기의 이 글에서도 많은 부분에 걸쳐 할애되고 있는 전쟁의 동기와 과정 그 결말이 연구적 결과물의 문체로 설명되고 있지만 ‘살육과 무차별적인 강간, 재산피해, 약탈’ 등은 고대의 부족 사회의 소규모 전쟁에서부터 있어왔던 파급물로 계몽주의 시대에 사상가들이 이런 전쟁에 대한 연구를 일정 수준의 틀로 해석하고 분석했지만 이 전쟁의 과정과 결과로 나타나는 인간과 문명의 파괴를 제대로 설명하기란 어려워 보입니다. 장자크 루소가 ‘인간의 기본적 본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말한 것은 간혹 인간 본연의 이성으로도 포장하기 힘든 최악의 모습을 전쟁 자체가 속성으로서 갖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전략, 전술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전쟁의 일반적인 측면의 언급과 주장을 위해 사용되는 대체적인 수단들은 저자의 전공답게 로마 시대부터 근현대의 여러 전쟁 등을 꽤 상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많은 전쟁사들의 향연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사실 많은 문명의 역사들이 정복과 지배가 빠질 수는 없어서 그것의 실현 수단으로 애용됐던 전쟁이 제외될 수 없는 이유일 것입니다. 책의 제목만 봤을 때는 군사학의 측면에서 한정되고 유일한 개론서로 처음엔 느껴졌지만 크레벨드의 정확한 취지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일반인들을 위한 교양서적인 약간의 유익한 측면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갖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글의 장점이라고 봐도 되겠습니다.

이후 7장부터 논하고 있는 해전부터 인류 역사에서 기술의 진보가 가져온 전쟁의 변화에 대해 단순히 전략의 유무에 대한 한정이 아니라 총력전과 같은 분위기에서 제한적인 성격으로서의 전쟁 유발은 이제 더이상 보기 힘들어졌다는 요지가 중점적인 성격인 것 같습니다. 1차대전에는 다소 미미했지만 2차대전 이후부터는 독일과 일본에 행해진 공군력에 의한 폭격으로 엄청난 민간인 희생과 괴멸적인 파괴를 불러와 상대 적국에 대한 제한적인 군사적 승리 만으로는 전쟁의 추를 바꿀 수 없어 총력전의 시점에서 대량 파괴가 수반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 전쟁을 더이상 정치적 수단으로만 여길 수 없는 의미가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기본적인 전쟁 수행에 대한 요건과 과정, 리더쉽과 같은 꽤 자세한 설명이 필요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뒤이어 나오는 핵무기 시대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는 전쟁의 승리에 대한 전통적인 우리의 개념이 우리들의 손에서 멀어지지 않았나 또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가 아쉽게 이 부분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꼭 국제 사회에서의 전쟁법이 전쟁 자체의 비이성적인 측면을 강제할 수도 있고 그 비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인 전쟁 범죄를 행한 국가에 거의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게 만드는 명분이 됨으로 승자와 패자로 갈리는 전쟁의 일반적인 결과론적인 상황은 핵무기 시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무의미해지지 않았나 싶네요.

저자인 크레벨드도 9개국이 보유한 핵무기가 그 자체로 어떠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없으며, 핵확산 방지에 나서는 비핵보유 국가들의 상당수가 이미 핵보유국들 간에 ‘핵무기적 국제 균형’이 이미 심각하게 불안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국제적 행동을 보이는 것이라고 저는 그리 해석이 되었습니다. 핵보유국 국가들간의 재래식 전쟁이 결국 그 끝에 인류 파멸을 항상 끌어들이려 하고 있는 측면의 절멸 파괴성으로 굳이 2격을 논하지 않더라도 이 ‘불안한 균형의 시대’가 어찌 될지는 학문의 방법으로 유추하기란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케네스 월츠와 같은 신현실주의자들이 국제사회에 핵확산이 평화에 이롭다는 주장은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지 바로 이 점이 그 증거가 될 것입니다.

끝으로 저자는 전쟁의 미래는 있는것인가? 라는 자문을 통해 우리 시대에서도 정치/정책의 산물이라고 봐도 무방한 이 전쟁이 거대한 아포칼립스적인 파멸로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수많은 국제 정치 행위자들이 이 짧은 시기의 평화를 우습게 보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우리에게 있어서 충동과 감정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엘리트들이 밝히고 싶지 않은 내심처럼 전쟁 상태에서 다수의 국민들을 익명의 지원병들과 같은 수단으로 취급해 여차하면 전쟁으로 해결하겠다는 매우 편의적인 생각을 우리들이 제어하고 관리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올더스 헉슬리나 조지 오웰이 전망했던 전쟁에 의한 디스토피아를 이렇게 예방할 수 있는 것도 분명 가능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