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투스 세계문학의 천재들 7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지음, 정창 옮김 / 들녘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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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것이든 막론하고 소설 리뷰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지키지도 못할 약속의 증거인 두번째의 그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은 따로 서평은 쓰지 않았지만 몇년전에 ‘차가운 피부’를 인상깊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차가운 피부’ 또한 판이 바뀌어 국내에 꽤 많은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판매량이 작품 수준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책의 저자인 피뇰은 충분히 좋은 평가를 받을만한 작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소개할 이 책의 제목은 저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약간 변형한 것인데요. 특히 ‘바르셀로나’를 지칭해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 작품의 배경은 1701년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의 카탈루냐와 바르셀로나를 삼고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스페인의 올바른 국호는 에스파냐라고 생각해왔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이 에스파냐라는 국호는‘카스티야’에 한정된 것이었습니다. 카탈루냐인들은 아마도 오늘날까지도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하여튼 바르셀로나 출신의 작가가 얘기하는 카탈루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글의 장점이라 지칭해도 무방할 것인데요. 갑자기 드는 생각은 지금 스페인의 카탈루냐와 바르셀로나는 이를테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와 같은 입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만큼 양자가 이질적이라는 것입니다.

주인공 마르티 수바리아는 꽤 흥미로운 이력을 쌓게 됩니다. 전혀 종래의 귀족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프랑스의 귀족 보방에게 공병에 대한 교육 뿐만 아니라 당시 평민으로서 받을 수 없는 여러 혜택과 호의를 얻게 됩니다. 속세의 틀에 박힌 관념과 거리를 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귀족의 상이 바로 이 보방일텐데요. 마르티는 이 처음의 스승에게 영혼에 새겨진 고마움을 간직하게 됩니다. 뒤이어 프랑스 군에 복무하게 되고 모종의 사건으로 다시 아버지와 자신의 모태라 볼 수 있는 바르셀로나로 돌아오게 되는데요. 주인공 못지 않은 비중을 갖고 있는 바예스테르와의 인연을 미리 암시하기 위해 좀 더 뒤이어 나타나는 주인공의 행적과 사뭇 이해하기 힘든 사건을 피뇰은 안배하는데요. 어쩌면 속세와 탈속이 크게 의미없다는 식의 설정이든지 아니면 반대로 다 수렴한 인물상을 만들기 위해서인지는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판단하기는 어렵군요. 그리고 이 바예스테르는 1918년 카탈루냐 독립파들이 사용하는 분리주의 깃발 ‘에스테랄다’를 도안한 비센스 알베르트 바예스테르와 묘하게 연관있어 보이는데요. 주인공 수바리아와 바예스테르는 둘 다 현실적 인식에 저항하지 못하다가 결국 그것을 극복하는 공통의 인물로 바라봐도 될 것 같습니다.

카탈루냐인들에게는 자신들의 불행한 역사인 이 에스파냐 왕위 계승전쟁을 같은 바르셀로나인인 피뇰이 끄집어 내왔다는 점에서 이것을 다룬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덜 표면적인 진정성이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왕정에 예속되고 자신들의 권리를 빼앗긴 채 이후 운명의 바깥에서 소모되어 왔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일 겁니다. 지금도 독립은 커녕 자치정부 마저 스페인 정부로부터 타도되었으니까요. 한 가지 더 충격적인 점은 이 때의 영국은 ‘세력균형’이라는 미명하에 여기저기 물타기를 했고 끝내 바르셀로나를 방치했는데요. 자구력이 존재하지 않는 민족에게는 냉엄하고 가차없는 국제 정세가 기다리고 있다는 점은 정말 뼈아픈 교훈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지저기에서도 이 왕위 계승의 진정한 승자는 영국이라고 모두 손꼽고 있습니다. 참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자들이죠.

끝으로 출판사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리고 싶은 것은 이 8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글을 나눠서 몇권으로 내놓지 않고 오로지 한 권으로 출판한 점입니다. 요즘 같은 도서정가제 시대에 한 권으로 퉁친 것은 독자들에게 정말 매우 이로운 혜택이라 생각됩니다. ㅋㅋ (초성체는 안쓰려고 했지만 이번만큼은 삽입해야겠군요) 토요일과 일요일에 걸쳐 이 책을 붙잡고 있었는데 저자의 글로써만이 아니라 번역의 질도 좋아서 매우 수월하게 읽혀졌던 것 같습니다. 곳곳의 글 분위기는 문득 카잔차키스가 생각나서 더욱 좋았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느낌이죠. 그리고 판타지 소설을 쓰려고 하는 분들은 이 책을 꼭 읽어보시길 권유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의 여러 전쟁 방법들과 전략전술적인 측면의 소개들이 적잖게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저자인 피뇰이 많은 사료와 당시 전쟁 자료들을 참고한 것이기 때문일텐데요. 특히 주인공이 공병 교육을 받는 1부와 본격적인 바르셀로나 공격전이 벌어지는 3부는 동일한 측면으로 큰 도움을 받으실 것 같습니다. 소설이어서 어떠면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가급적 최소한으로 스토리 라인의 소개를 한정시켰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부분 역사적으로 실존했는데 피뇰은 이들에게 매우 생생한 입체적 분석을 시도했습니다. 전형적인 틀로 이뤄지는 인물묘사 아니어서 읽는 내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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