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라, 생각하라 - 지금 여기, 내용 없는 민주주의 실패한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주성우 옮김, 이현우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전세계에 알려진 슬로베니아 인으로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자, 자크 라캉과 관련하여 인정받는 권위자이며, 세계 철학계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흔히 말하자면 ‘팝스타’와 같은 인기의 소유자 슬라보예 지젝의 ‘멈춰라, 생각하라’를 일독했습니다. 저에게 지젝의 서평은 이번이 3번째인데요. 저는 간혹 지젝을 떠올리면 이상하게 경희대 이택광 교수가 같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아마 두 사람에게 학문적 유사성을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아주셨음 좋겠군요. 2012년 출간된 이 책의 원제는 The Year Of Dreaming Dangerously 로서, 번역 출간된 책의 제목인 ‘멈춰라, 생각하라’의 부제가 바로 이 원제를 뜻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젝의 이 책은 크게 10장의 논제로 이뤄져 있습니다. 글의 성격이 대체로 문화비평적인 색채를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나, 특히 오늘날 세계의 정치사회적인 사건들의 분석과 비판도 분량을 할애에 담고 있습니다. 글 서두에 지젝은 독자들에게 ‘인식적 지도를 제공’하고자 하는 작은 목적을 갖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지젝에게 인식적 지도라는 것은 명백한 것으로 대중들이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현실에 나타나고 있는 심각한 정치사회적 파열현상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고 대처하기를 바라는 마음일텐데요. 여기에는 지젝의 신자유주의의 비판과 서구의 소위 민주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의 어김없는 비판의 논조를 가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논의들은 “무엇보다도 현재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거스르며 맞서는 행위”이며, 이런 정치경제적 지배이데올로기가 시민의 선택을 제공하는 것으로 포장 되어 있지만, 결국 이 선택은 기존의 체계의 복종하더가, 아니면 자기 희생적 폭력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모순을 안고 있다고 그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모순으로 시작하고 있는데요. 첫번째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저지하려는 움직임, 두번째는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세계화가 정작 ‘세계’없는 세계화라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이란으로부터 시작되어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 등으로 이어진 ‘아랍의 봄’ 내지는 ‘아랍의 시민 혁명’과 관련해서 지젝은 그들이 자유와 평등을 위해 행동에 나섰으나,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권과 관련하여 수많은 서구 자유주의자들은 너무나 물리적인 수단으로 자유와 평등을 쟁취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의 주장들에 대해 “서구 자유주의자들의 위선은 숨이 막힐 정도이다”라고 일갈합니다. 무바라크 정권에 대해 이해 관계를 갖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 정부가 사실상 이집트의 무바라크 독재 정권의 전복을 바라지 않았다는 점은 바로 이러한 것을 설명한다고 행각합니다. 이러한 유럽 자유주의자들의 위선은 오늘날 유럽의 난민 문제와도 동일한 인식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 자체를 ‘현실주의’로 포장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저로서도 부정적인 판단이 듭니다.

4장의 ‘사악한 민족주의의 귀환’이라는 부분은 실로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헝가리 정치의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정치적 이행을 다루고 있는데요. 다문화주의와 이민주의를 배격하고 자신들의 기득권과 민족주의적 체제 고수를 위한 정치 작업들이 이어지고 이에 헝가리에도 ‘자유의 방송’이 필요하다는 점은 의미 심장합니다. 유럽의 자유와 민주주의 역사에 반대의 큰 획을 긋는 이 헝가리의 사례는 이들이 파시즘으로 이르는 길을 닦고 있다고 볼 수는 없으나 매우 유념하게 봐야 하는 부분이며, 이 점은 어쩌면 현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정치적 현실과 흡사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유럽의 반이민주의는 위험한 수준인데, 이들의 반이민주의 및 인종주의가 ‘극우 포퓰리즘’을 초래하고 있으며, 마치 미국의 티파티 운동을 빗대어 말한 것 같은 지젝의 표현인 ‘새로운 기독교 근본주의 포퓰리즘’과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면적으로 기존의 사회와 정치를 붕괴시키는 이 포퓰리즘을 과거 파시즘과 동일하게 위험하게 인식하고 있는 지젝의 평가는 그래서 매우 합리적입니다.

앞선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들의 사례에서 아랍의 봄 당시 이스라엘은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을 다소 지지하거나 자신들의 이익에 유리하다고 봤던 것은 유대인들만의 배타적인 현재 민족주의가 미국과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과 시민사회의 비판을 ‘반유대주의’로 몰고 가는 것처럼 우리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편협한 가치체계에 물들어 있는지 여실히 이를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문제는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관여가 만들어낸 것이지만 현재의 팔레스타인들의 거의 인종 차별과 다름없는 분리 정책은 실로 우리를 비인간적으로 보이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지젝은 이스라엘의 래즈비언 시위대와 팔레스타인 시위대들이 만나서 서로 포옹을 하고 위로 했던 것을 큰 인식의 전환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인들이 이러한 목소리에 귀기울일 것인지는 회의적이나 전세계의 많은 이들이 이러한 경각심을 전하는데 노력해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뉴욕 발 세계금융위기로 그 ‘정합성’에 의구심을 불러 일으킨 신자유주의는 지젝의 언급대로 “미국에는 이미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가 있으며, 부자들의 부가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상실될 위험에 처하면 사회가 나서서 막아줘야 한다”고 희화화 하고 있는데요. 그는 오늘날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모순과 폐해에 주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는 노골적인 암시”가 있다고 소개하며 이 신자유주의적 정책 자체는 사회안전망을 비롯한 국가의 최소한의 정책에 노골적으로 적대하는 등의 입장을 보이고, 지그문트 바우만의 입을 빌리자면 “타인의 상황과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존재들”은 바로 이 신자유주의자들을 빗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신자유’가 타인의 고통이 비롯되는 최소한의 보장 장치를 박탈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모두가 이에 나서야 한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여기에 인용된 바우만의 일침도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것도 이와 같습니다. 더불어 “포퓰리즘적 보수주의자들의 주된 경제적 요구는 규제적 개입의 재원을 마련하자고 열심히 일하는 국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강력한 국가를 타도하라는 것”이며, 이는 많은 국민들의 세금 부과를 담보로 부유층의 증세는 뒷전으로 밀어버리는 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자들의 경제적 포퓰리즘과 동일한 시각입니다.

끝으로 자본주의의 번영이 오로지 한길이라고 주입되는 세상에 이 건강한 자본주의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많은 시민 사회의 연대와 공감, 행동일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의 모순이 강요된 선택을 주입시키고 더욱이 점차 확대되는 포퓰리즘의 위기 시대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모두를 지켜내기 위해 앞으로도 시민들의 역할과 직접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지젝의 말대로 각각의 시민 내지는 대중이 현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그 이후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진지한 성찰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다른 시민들과 연대를 함으로써 이러한 과정의 ‘위대한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진정한 ‘유토피아’의 길에 한걸음 내딛는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폭력이란 무엇인가 - 기원과 구조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평화인문학 기획총서 - IPUS 평화인문학총서 4
이문영 엮음 / 아카넷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의 평화인문학 기회총서 시리즈중의 한 권인 이 책은 이른바 ‘평화 및 평화상태’에 대한 인문사회학적인 탐구를 통해 시대의 진정한 평화 담론을 제시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그와같은 연계로 평화와 대응하여 결코 따로 이해될 수 없는 ‘폭력’에 관한 사회철학적인 의미론과 현실론적인 입장을 이 책에 잘 담고 있는데요. 서울대 이문영 교수를 비롯한 집필진들의 주의 깊은 폭력론에 관한 이 글이 아직까진 국내에 처음 시도되는 학문적 연구가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목차를 봤을 때, ‘3장 탈폭력적 폭력 : 신자유주의 시대 폭력의 유형’이 새삼 관심을 끌었는데요. 더불어 근래 서평을 쓴 지그문트 바우만의 ‘레트로토피아’에서 소개한 근대적 폭력과 폭력주의에 대해 좀 더 면밀한 이해가 필요하여 이 책을 손에 들게 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논의하게 앞서, 폭력의 기원과 의미를 담은 1장과 2장을 접하고 나서 꽤 놀라고 말았는데요. 왜냐하면 최근까지 읽었던 아감벤, 슈미트, 벤야민, 아렌트, 데리다 등의 책이 폭력론과 관련하여 책 도입에 소개되고 있어서 뭔가 저만을 위한 책이 아닌가 하는 소감이 들었습니다. 예외상태, 정치신학, 법의힘, 폭력의 세기 등이 여태 제가 소화한 글의 목록인데요. 이 책을 읽기 위해 앞선 책들이 무대가 되어 준 느낌이랄까요. 조금 허무맹랑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네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들의 홀로코스트와 관련하여 지그문트 바우만은 “홀로코스트의 폭력은 문명화의 예외적 일탈이 아니라, 바로 그 문명화 자체의 산물이자 악의 근대적 합리성의 가장 충실한 재현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마치 파시즘의 그 원초적 기원에 붕괴한 민주주의가 있는 것처럼 후기근대론의 선구자가 특유의 이와 같은 통찰력을 보이는 것은 우리의 근대가 어느 정도 폭력에 기반한 결과 위에 있다는 것을 교훈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폭력의 의미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문영 교수는 벤야민을 필두로 데리다, 지젝, 아렌트, 아감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신적 폭력이라는 개념을 만든 벤야민과 폭력의 양가적인 측면에서의 지젝의 논의 즉,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체제적 폭력이 존재”와 같은 인식과 권력과 폭력을 구별하기 위한 학문적 연구에 많은 시간을 쏟아 부은 한나 아렌트의 성과, 카를 슈미트와 비교하며 분석해 내고 있는 조르주 아감벤의 폭력에 관한 해석은 과거 나치 독일과 근래의 9.11 사태 이후의 부시 정부를 비교하며 그의 ‘예외상태’ 개념에 폭력론을 끄집어 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본적인 폭력과 폭력론에 대한 기본적인 의미를 우리는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기반으로 이문영 선생은 데리다, 아감벤, 발리바르를 재해석하고 있는데요. 특유의 해체철학이 모태가 된 폭력과 비폭력의 외부적인 경계에 대해 데리다는 레비스트로스의 언어적 폭력을 기본으로 인식하여 ‘법의힘’에 이르러 “합법적 폭력과 불법적 폭력 사이의 차이를 정의하고 그 위계를 제도화하는 ‘법의힘’일 것이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벤야민과의 불화를 의미하는 데리다의 ‘법의힘’은 매우 중요한데요. 즉 오늘날 폭력의 합법과 불법을 규정하는 것에 이 법의힘이 관여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뒤이어 데리다와 아감벤의 논의 이후, 이 폭력은 “폭력, 비폭력, 대항폭력 사이의 상호구성성”에 관해 의미를 확장시키고 이러한 구분에 발리바르의 대응과 폭력의 필연성에 관해서도 논박을 하고 있는데요. 결국 1장과 2장의 논의는 폭력의 합법적이고 불법적인 속성을 지나서 권력의 정당성이 법의 유무에, 그리고 에티엔 발리바르가 경고하는 ‘폭력상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시민의식을 우리가 쟁취해내야 한다는 점으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폭력 상태 자체의 경계화와 외부화 등과 같은 생소한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이들 ‘경계의 경계’에 대한 깊은 고찰이 앞선 해결책에 앞서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뒤이어 3장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폭력은 자기 자신이 가해자이며 피해자라는 탈폭력에 관한 논의를 4장은 종교근본주의의 폭력적 구조에 대한 분석으로 ‘이 종교적 근본주의’가 얼마나 많은 폭력을 포함고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기독교 근본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 역시 양자가 매우 해악하고 오늘날 미국의 현실에서 기독교 근본주의가 과거 프랑스 공화주의의 전통인 종교와 정치의 분리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고 평가 내리고 있습니다. 5장은 폭력의 효과, 즉 ‘공포’를 다른 사람들에게 퍼뜨리려는 테러와 테러리즘에 대해 설명하며 ‘폭력과 권력의 밀접한 관계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렌트에 의하면 ‘오히려 폭력이 권력을 파괴한다’는 인식을 덧붙이고 있는데요. 이 5장은 여러 의미로 주의깊게 읽어야만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6장은 한국전쟁 시기의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동일한 제노사이드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인식으로서, 해방 이후의 한반도에 미군정과 좌우 대립으로 인한 경찰 권력의 조선인들에 대한 사상 검증과 제주의 4.3 사건과 보도연맹 사건을 폭력을 넘어 제노사이드적 멸절 상태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살처분 (extermination)이라는 표현으로 이 당시의 인간 멸절을 표현하고 있는데요. 이 살처분이라는 표현은 오늘날 기르고 있는 가축에나 해당된다는 점에서 이승만 정권의 불법적으로 자행된 폭력 행위가 어떠한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여기의 이 글은 우리가 명확하게 알고 있지 못한 폭력과 폭력론에 대해 사전적인 의미를 넘어 사회철학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접근으로까지 이와 관련한 확장을 해내고 있습니다. 특히 1장과 2장 그리고 5장은 몇번이고 읽어봐도 좋은 논의였는데요. 이처럼 이문영 선생의 해석과 논지에 대해서는 깊은 공감을 받을 수 있었고 데리다와 벤야민, 아감벤, 아렌트를 넘나드는 이론적 도입과 해석은 폭력에 관한 우리의 인식을 크게 넓혀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근대와 근대성의 어두운 폭력주의와 권력과 폭력의 이론적 구분을 원하는 분들에게도 좋은 자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트로토피아 - 실패한 낙원의 귀환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후기근대론을 대표하는 울리히 벡, 앤소니 기든스와 함께 인용되고 일독되었던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작이라도 불러도 무방한 작품, 레트로토피아 Retrotopia 를 정독했습니다. 2017년에 그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적지 않은 충격에 빠졌는데요. 고령이라는 것과 그럼에도 충분히 긴 삶을 보낸것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으나 아직은 전세계에 그가 필요했던 것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무분별한 인류의 근대를 통렬하게 비판한 그의 양심은 실로 존경받을 만하며, 그가 남긴 메시지는 아직도 우리에게 충분히 유용하다고 여겨집니다.

이 책의 구입은 국내의 출간일 즈음이었는데요. 이제서야 서평을 남기는 것은 글이 다소 난해하여 정독이 한 번 더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부족한 편협한 글이 될까 걱정이 앞섭니다.

바우만은 이 책의 제목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대한 부정의 부정으로 말이죠. 이것은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인식하는 현재의 우리 사회의 모습이 차별적이고 일부 소수는 반대로 이 세계를 유토피아로 여길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상황과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존재 내지는 상황”이 여기 이 글의 중요한 문제점의 인식이자, 마땅히 개선되어야 할 현실적 상황입니다. 이것의 유토피아는 “타인에 대한 절대적인 책임감”을 갖는 인간 및 사회일 것입니다.

즉 그런 확장된 의미로서, 1장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인식론으로 확장했던 과거의 홉스주의에 대해 2장은 작게는 부족주의 Tribalism, 크게는 민족주의적 과거와 현실을 오늘날의 난민 문제와 재조명 하고 있고, 3장은 과거 영국 총리였던 대처의 ‘대안은 없다’는 신자유주의의 유일론적 방식에 따른 현재의 우리 세계의 현실, 4장은 제대론 된 ‘연결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는 현대인들과 나르시스주의로서 변질된 성과 성의식, 성관념 등의 오늘날 변화된 남녀 관계론 및 인간관계론에 대해 비판론적인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여기의 바우만은 우리 인간사회가 매몰되어 있는 비인간화와 탈인간화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정말 주의깊게 그의 나레이션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폭력을 관리하고 조정하기 위한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의 작업은 근대 국가의 출현에 큰 사상적 이론을 제공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국가만이 온전한 합법적인 폭력을 다룰 수 있다는 측면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루소와 토크빌의 주장대로 인간과 사회를 위해 아주 적절하게 조절되어야 함을 반증하는 것임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이 ‘국가의 폭력’이 탈국경화가 되어가고 있으며 유효한 폭력 수단을 더 많이 보유한 일부 국가들이 자신들의 국경 안이 아니면 된다는 식의 안일주의와 소급주의로 많은 희생자와 난민을 양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홉스주의가 이런식으로 발현되는 것을 바우만은 비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기대했던 ‘우리의 홉스주의’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실용주의가 최상의 합리성인 세상에서 살고 있고, 나는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반드시 할 것이다” 의 측면은 거침없는 폭력의 사유화를 동반했는데, 이것은 많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민들의 사적 무장과 이를 조장하는 수많은 무기 회사, 더 나아가서는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경고했던, ‘군산복합체’의 출현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우만의 이러한 사회 인식을 이것들의 만연한 확장들로 부족주의 및 민족주의적 감성이 초래하는 결과들이 더 위험하고 폭력적일 수 있다는 저의 사소한 예측이 어쩌면 허무맹랑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글의 일독을 통해 저는 이 정도의 이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불평등의 모습은 앞서 언급한대로 ‘타인의 상황과 고통에 별반 관심없는 자들’ 즉,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고착화 되어 왔고, 여기에 시민들의 네트워크적인 연결성이 어려워 짐에 따라 심각해지고 있는 것으로 글에서 분석되고 있습니다. 또한 소득의 불균형과 마찬가지로 상위 소득자들과 그렇지 않는 사람들의 분리와 단절이 이론적인 모습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경계를 강화시켜 이 불평등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 어려워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일면 근대론의 일상이 점차 이렇게 계층적으로 시스템화가 되어가고 있으면, 결국에는 고소득층 및 기득권층들이 다른 계층의 삶을 무지한 채로 넘겨버리는 몰이해적인 상황으로 이 인식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프레카리아트의 문제가 해결되기 힘든 것에는 고정적인 사회적 차별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이식된 자본주의가 더욱 계층의 고착화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바우만의 해석이라면 어떤 물리적 혁명이나 강제적 상황 전환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연대, 진실된 네트워크의 회복, 각 집단이 노골적으로 갈등하는 것들을 개선시키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 자체를 뒤엎거나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다소 시대착오적이며, 다만 오늘날 잊혀지고 있는 복지와 복지 국가 개념이 ‘살 가치가 없는 인간의 삶’ , ‘소위 인간쓰레기 취급’을 방지하고 그들과 우리의 삶을 분명히 개선시킬 수 있는 중요한 수단으로서 받아들이고 복지라는 주제를 이념적으로 도태시키려고 하는 시도를 시민들이 먼저 거부해야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4장은 성과 나르시즘과 관련된 프로이트적 주장과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하지만 이 장 중간에 아인 랜드의 ‘이기주의적 가치관의 재해석’을 바우만이 삽입한 것은 미국에서의 아인 랜드의 재조명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는 티파티와 신보수주의자들을 통해 전면적 이기주의의 숭배를 그의 탁월한 분석으로 비판한 것에 대한 부분은 놀라웠습니다. 사실상 현재의 미국 시민들의 변화와 포퓰리스트들의 등장은 바로 이 ‘아인 랜드 현상’이 기반해 있고, 그것을 면밀하게 관찰한 것은 바우만의 통찰력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육체적인 정신적인 스트립쇼’라고 지칭하며 현재 변화된 성과 사랑에 대한 이번장의 분석도 어쩌면 인간과 인간의 네트워크성의 결여로 인한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통적인 성의 결박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인간 관계가 ‘애처롭게 트위터, 인스타, 페이스 북에 매달리는 수 많은 현대인들의 모습’에 보며 성찰한 바우만의 현실 해석이라 여겨집니다. 즉 앞선 이 부분을 먼저 해결하는 것이 성과 사랑 및 인간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연결성의 회복이라고 봐야겠죠.

끝으로 바우만은 우리가 서로 손을 맞잡을 것인지, 아니면 같이 공동묘지로 갈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사활적 선택’의 문제를 언급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함께 가야만 하는 당위성의 문제이며, 현대 인간 사회의 통렬한 현존의 부조리들이 마찬가지로 함께 해결해야 되는 책무로 남겨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던져주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북관계의 이해 경희대학교 국제학연구원 학술총서
우승지 지음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립외교원 교수를 거쳐 현재 경희대 국제학부 우승지 교수는 지난 15년간 남북관계 연구를 해 온 학자입니다. 이 ‘남북 관계의 이해’는 11편의 논문 형식의 글인데요. 지난 1948년부터 남북 관계의 고찰을 통해 고찰해보고 현재의 남북 문제와 남북 대화 전반의 방향타가 되었으면 하는 저자의 바람이 담겨져 있기도 합니다. 현존하는 국제 정치 이론으로 독자들을 주눅들게 만드는 글은 아니어서 일반 독자가 보기에도 꽤 수월한 글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여튼 흥미로운 부분들도 적잖이 있어서 일독을 하고 나서 책의 내용에 대해 잠시 고민도 해보게 되었습니다.

우선 저자는 지난 남북관계를 해석하는 수단의 틀로 북한의 체제적 성격을 김일성 정권이 시작되는 1948년의 ‘48체제’ , 김일성 숭배체제가 확고화 되는 1968년의 ‘68체제’ 그리고 김정일 정권의 형성인 1998년의 ‘98체제’ 등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흥미로운 점은 68체제 기간의 남한의 박정희 전 대통령 시기의 ‘유신’체제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시기’를 한반도의 정치적 및 군사적 대립이 첨예했던 시기로 분석하고, 이것의 이유에는 남북한 양자의 군사정권이 강고화 되면서 그만큼 양자간의 불예측성과 불안정성이 심대하게 증가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꽤 설득력이 있었는데요. 굳이 ‘민주평화론’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배타적인 군사독재 정권이 서로 맞붙어 있으면 어떠한 불안감이 조성되는지에 대한 탁월한 증거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도 미국 닉슨 대통령에 의한 미중간의 데탕트로 한반도에도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어 갑작스런 화해 무드가 짧게 나타나기도 했습니다만 이것은 정말 우연에 가까운 것이었죠. 약간의 논외로 저자는 박정희 정권 시절의 한미 관계에 대해서도 얼마간 평가를 하고 있는데요.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체제 안정과 정권 유지를 위해 미국을 이용할 줄 알았고, 하나를 내주면 하나를 얻는 식의 거래 정치에 탁월해 이 시기의 한미 관계가 일종의 ‘밀월’의 시기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다 우리에게 ‘한국 전쟁의 기원’으로 잘 알려져 있는 시카도 대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언급을 덧붙이고 싶은데요. “1970년대에 미국 국무부 장관은 한국, 필리핀, 일본 외교 장관들을 거느리고 국제 회의에 나타나기도 했다”는 점은 사실상 자유 진영의 맏형인 미국이 당시 아시아 지역의 ‘동맹 위성국’을 당시 소련의 동유럽 위성국들을 영향력하에 둔 것과 마찬가지로서, 일본의 요시다 독트린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영향력에 의해 정권의 안정이 유지된 것과 비슷하게 한국도 동일한 위치의 시기였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각 정치 세력이 눈여겨 봐야 할 점은 미국 닉슨 대통령 시절의 헨리 키신저가 당시 국무부 외교 기조에 ‘두 개의 한국 정책’을 제안하고 강조한 것으로 봤을 때, 현실 국제 정치가 이처럼 명백하게 현실주의적이고 미국도 동맹이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의 이익과 행동 반경이 먼저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즉, 이렇게 이상주의적으로 여기는 국제 외교 내지는 국제 정치는 정말 공상에 불과한 것이죠. 특히 이 글의 저자도 서두에 밝혔듯이 “북한이 핵을 협상용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논지를 비판”하며 “북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핵무장”임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는 것이죠. 남한의 각 정치 세력은 북한의 핵무장 시도와 인권 문제와 관련하여 극렬한 남남 갈등을 보이고 있는데, 후자의 경우는 본질을 벗어날 위험이 있다손 치더라도 전자의 북한의 핵무장 시도는 매우 명백하고 이것이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의 협상용으로 쓰이기 위해 시도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우리의 대북 정책 전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저자는 이러한 이론적 접근을 통해서 남북 관계를 소위 ‘숙적 관계’로 분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숙적이라는 표현은 사실상 적대관계에 있는 국가 관계에서나 쓰일 수 있는 것인데, 조금 냉정히 평가해 본다면 1998년 이후 진보 정권의 짧은 대북 포용 시기를 제외하면 숱한 직간접적인 남북 대결이 있어왔고, 앞서 설명해 드린대로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은 거의 40년 이상의 기간 동안 러시아와 중국, 파키스탄을 통해 핵무기 기술을 얻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표면상 이러한 수식은 합당해 보입니다. 우리가 북한에 대한 온정적인 관념인 같은 민족이자 같은 역사적 동질감을 갖고 있는 대화와 포용의 상대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과거 냉전 시기에 한국의 민주 정치와 국가 정체를 위해 대결에 나섰던 것은 분명합니다. 집토끼를 먼저 간수하고 나선 이후에 외부의 집나간 토끼를 품에 안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러한 과정에서 상대를 명확히 파악하고 분석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책의 9장인 ‘북한은 현상 유지 국가인가?’ 라는 주제는 상당 부분 동의하기 힘들었는데요. 이 ‘현상 유지 국가’라는 잣대는 현재 중국에 대한 분석틀로 많은 국제정치학자들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미국과 서구 유럽이 만들어 놓은 국제 체제 시스템에 대해 중국이 이것을 받아들이고 존중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이 참여해서 일조한 것이 아니므로 거부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으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중국 경제에 대한 위협론으로 대두된 일종의 이론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북한에 적용해 이론화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감이 듭니다. 우선 북한은 체제 속성상 자신들의 안전에 일순위를 두고 있는 국가로서 핵무장과 핵무기를 통해 현실 타파를 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멸망에 직결되니까요. 그리고 국제 정치 이론에서 ‘비대칭 동맹’에 대한 부분을 후견국과 피후견국 관계로 미국-남한, 중국-북한을 개념화 했는데요. 연루와 방기의 문제를 언급했을때부터 좀 더 정확하게 ‘비대칭 동맹 관계’로 설명하는 것이 마땅해 보였는데요. 이미 널리 통용되고 있는 용어를 후견-피후견 개념으로 사용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는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끝으로 일전에 이삼성 교수는 파키스탄의 물리학자 압둘 아디드 칸의 북한 핵무기 개발 관여 여부에 대해 그의 자백 번복에 따라 다소 불확실하다고 밝힌 것이 기억이 나는데요. 우승지 교수의 이 글에서는 이 파키스탄인 물리학자가 북한에 13차례 방북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일단은 파키스탄과 북한의 미사일-핵기술 거래는 거의 기정사실이라고 봐야 할 것 같고, 이집트에서 일부 도입한 스커드 미사일의 분해 및 역설계와 관련된 내용을 봤을 때도 이 부분이 사실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결론에 대한 보론이라 볼 수 있는 11장의 ‘제3의 길 : 북한 문제와 창조적 관여’는 대체로 귀담아 들을만 하지만 한반도 주변부의 강대국들의 한반도에 의한 이익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현재 문재인 대통령과 우리 정부가 미국과 북한에서 치열하게 중재 외교를 펼치고 있지만, 중국에 대한 영향력이 사실상 전무하고 러시아는 주변 지역의 경협을 통해 이끌어 낼 수도 있지만 일본과의 관계는 이미 상당히 틀어진 부분이 많아서 이러한 주변 4대 강국의 정치 과정이 우리에게는 녹록하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미국과 북한과의 중재 만으로도 우리 외교 당국이 이렇게 진을 빼고 있는데 우리의 영향력이 전무한 중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또 어려운 길이 있는 것이죠. 트럼프와 김정은을 움직여 궁극적인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기초를 만든다는 설정은 크게 지지할 만하고 이것에 대해서는 우리 각 정치 세력과 국민들의 응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론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토마스 홉스 지음, 이준호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장자크 루소와 사회계약론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위대한 주저 ‘리바이어던’의 저자인 토마스 홉스의 ‘인간론 (On Man)’을 읽었습니다. 홉스의 이 책은 얼마전에 서평을 쓴 코리 로빈의 ‘보수주의자들은 왜?’에 인용이 되어 참고로 읽게 되었는데요. 뒤이어 연결되는 홉스의 ‘시민론’을 읽기 전에 이 ‘인간론’을 먼저 읽는 것이 개인적으로 필요해 보입니다.

이 책을 구입하기 전에 너무 얇은 분량이라 과연 완역본일까 고민을 했는데요. 하지만 따로 대안은 없었습니다. 다만 따로 삽입된 해설에서 홉스의 인간론 영역본이 1장부터 9장까지 인간에 대한 직접적 논의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서 편집이 되었고 바로 이 영역본을 번역한 것이 이 글인데, 결국 10장부터 15장까지의 분량을 책에 실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영역본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토머스 홉스가 프랑스 망명 중에 불어본으로 이 글을 출판해서 아마도 그런 연유에서 영역본이라는 판본이 나오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보는데요. 따로 찾아보지는 않았습니다. 이 점 양해 말씀 드립니다.

여기에 할애된 분량은 언어와 학문, 욕구와 혐오, 만족과 불만 그리고 그 원인에 관해, 정념 또는 정신의 동요에 관해, 기질과 태도에 관해, 종교에 관해, 인공 인간에 관해로 분리되어 있는데요. 한 가지 특이할 만한 부분은 마지막 장인 15장 ‘인공 인간에 관해’에서 보듯이 일종의 물리학과 자연법칙 등을 넘나들며 이론의 수단으로 취합하는 홉스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이는 당시 영국 귀족의 교육이 여러 방면의 전인을 만들어내기 위한 방편으로서 나타난 결과가 아닌가 추측하면서, 이러한 다방면의 이해도를 갖춘 사상가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지식인과는 조금 직접적으로 표현하자면 스스로 수용한 학문의 밀도 격차가 있어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더불어 홉스도 도박에 중독된 불우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삼촌의 배려로 당시 귀족의 준하는 교육을 받은 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실로 크나큰 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홉스가 인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고유한 ‘인간의 그 기질’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규명하고 구분하는데 수단인 언어를 비롯한 학문, 의지와 무관한 감정 상태인 여러 상반되는 개념들과 인간 고유의 특징이라고 봐도 무방한 정념에 대한 홉스의 부정과 가까운 태도는 흥미로웠습니다. 이러한 홉스의 태도는 이를테면, 언어가 학문을 만들어내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언어의 단점인 ‘오류와 망상의 원천이기도 하다’라고 서술하는 것에서는 그의 면밀한 이성적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홉스는 익히 알려진대로 자연상태에 있는 인간들은 이기적이라고 언급한바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후에 토크빌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장 자크 루소도 마찬가지로 ‘특별한 계약 상태’ 에 따른 인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사상의 많은 부분을 천착해 왔습니다. 다시 홉스로 되돌아와서, 그가 이렇게 양쪽의 대비되는 가치들을 서로 연계하여 분석하고 이를통해 균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명확한 의미 부여가 되지 않나 판단해 봅니다. 더 나아가서는 “홉스가 인간의 정신을 과학적 방법으로 탐구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역자의 해석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인간 정념에 대한 부정적 태도와 종교에 대한 제한적인 의미 부여, 즉 ‘신앙은 법률에 따른다’ 와 같은 경우도 홉스가 얼마나 현실 전제 왕권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영국의 성공회가 국왕에 귀속된 상황에 대해 옳다고 믿었던 것 같고, 이러한 측면의 입장은 영국 국왕의 종교 수장으로서의 지위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도 느껴집니다. 여기에 인간 괘락의 감정에 대해 이것은 ‘경험적인 것’이라고 밝히며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에서도 확실하게 홉스가 이성의 우위나 이성의 감정에 얼마나 주안점을 두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끝으로 인문학 특히 역사학이 유용하다고 언급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로서 가늠해 볼 수 있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