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토피아 - 실패한 낙원의 귀환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후기근대론을 대표하는 울리히 벡, 앤소니 기든스와 함께 인용되고 일독되었던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작이라도 불러도 무방한 작품, 레트로토피아 Retrotopia 를 정독했습니다. 2017년에 그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적지 않은 충격에 빠졌는데요. 고령이라는 것과 그럼에도 충분히 긴 삶을 보낸것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으나 아직은 전세계에 그가 필요했던 것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무분별한 인류의 근대를 통렬하게 비판한 그의 양심은 실로 존경받을 만하며, 그가 남긴 메시지는 아직도 우리에게 충분히 유용하다고 여겨집니다.

이 책의 구입은 국내의 출간일 즈음이었는데요. 이제서야 서평을 남기는 것은 글이 다소 난해하여 정독이 한 번 더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부족한 편협한 글이 될까 걱정이 앞섭니다.

바우만은 이 책의 제목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대한 부정의 부정으로 말이죠. 이것은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인식하는 현재의 우리 사회의 모습이 차별적이고 일부 소수는 반대로 이 세계를 유토피아로 여길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상황과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존재 내지는 상황”이 여기 이 글의 중요한 문제점의 인식이자, 마땅히 개선되어야 할 현실적 상황입니다. 이것의 유토피아는 “타인에 대한 절대적인 책임감”을 갖는 인간 및 사회일 것입니다.

즉 그런 확장된 의미로서, 1장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인식론으로 확장했던 과거의 홉스주의에 대해 2장은 작게는 부족주의 Tribalism, 크게는 민족주의적 과거와 현실을 오늘날의 난민 문제와 재조명 하고 있고, 3장은 과거 영국 총리였던 대처의 ‘대안은 없다’는 신자유주의의 유일론적 방식에 따른 현재의 우리 세계의 현실, 4장은 제대론 된 ‘연결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는 현대인들과 나르시스주의로서 변질된 성과 성의식, 성관념 등의 오늘날 변화된 남녀 관계론 및 인간관계론에 대해 비판론적인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여기의 바우만은 우리 인간사회가 매몰되어 있는 비인간화와 탈인간화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정말 주의깊게 그의 나레이션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폭력을 관리하고 조정하기 위한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의 작업은 근대 국가의 출현에 큰 사상적 이론을 제공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국가만이 온전한 합법적인 폭력을 다룰 수 있다는 측면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루소와 토크빌의 주장대로 인간과 사회를 위해 아주 적절하게 조절되어야 함을 반증하는 것임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이 ‘국가의 폭력’이 탈국경화가 되어가고 있으며 유효한 폭력 수단을 더 많이 보유한 일부 국가들이 자신들의 국경 안이 아니면 된다는 식의 안일주의와 소급주의로 많은 희생자와 난민을 양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홉스주의가 이런식으로 발현되는 것을 바우만은 비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기대했던 ‘우리의 홉스주의’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실용주의가 최상의 합리성인 세상에서 살고 있고, 나는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반드시 할 것이다” 의 측면은 거침없는 폭력의 사유화를 동반했는데, 이것은 많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민들의 사적 무장과 이를 조장하는 수많은 무기 회사, 더 나아가서는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경고했던, ‘군산복합체’의 출현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우만의 이러한 사회 인식을 이것들의 만연한 확장들로 부족주의 및 민족주의적 감성이 초래하는 결과들이 더 위험하고 폭력적일 수 있다는 저의 사소한 예측이 어쩌면 허무맹랑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글의 일독을 통해 저는 이 정도의 이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불평등의 모습은 앞서 언급한대로 ‘타인의 상황과 고통에 별반 관심없는 자들’ 즉,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고착화 되어 왔고, 여기에 시민들의 네트워크적인 연결성이 어려워 짐에 따라 심각해지고 있는 것으로 글에서 분석되고 있습니다. 또한 소득의 불균형과 마찬가지로 상위 소득자들과 그렇지 않는 사람들의 분리와 단절이 이론적인 모습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경계를 강화시켜 이 불평등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 어려워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일면 근대론의 일상이 점차 이렇게 계층적으로 시스템화가 되어가고 있으면, 결국에는 고소득층 및 기득권층들이 다른 계층의 삶을 무지한 채로 넘겨버리는 몰이해적인 상황으로 이 인식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프레카리아트의 문제가 해결되기 힘든 것에는 고정적인 사회적 차별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이식된 자본주의가 더욱 계층의 고착화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바우만의 해석이라면 어떤 물리적 혁명이나 강제적 상황 전환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연대, 진실된 네트워크의 회복, 각 집단이 노골적으로 갈등하는 것들을 개선시키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 자체를 뒤엎거나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다소 시대착오적이며, 다만 오늘날 잊혀지고 있는 복지와 복지 국가 개념이 ‘살 가치가 없는 인간의 삶’ , ‘소위 인간쓰레기 취급’을 방지하고 그들과 우리의 삶을 분명히 개선시킬 수 있는 중요한 수단으로서 받아들이고 복지라는 주제를 이념적으로 도태시키려고 하는 시도를 시민들이 먼저 거부해야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4장은 성과 나르시즘과 관련된 프로이트적 주장과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하지만 이 장 중간에 아인 랜드의 ‘이기주의적 가치관의 재해석’을 바우만이 삽입한 것은 미국에서의 아인 랜드의 재조명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는 티파티와 신보수주의자들을 통해 전면적 이기주의의 숭배를 그의 탁월한 분석으로 비판한 것에 대한 부분은 놀라웠습니다. 사실상 현재의 미국 시민들의 변화와 포퓰리스트들의 등장은 바로 이 ‘아인 랜드 현상’이 기반해 있고, 그것을 면밀하게 관찰한 것은 바우만의 통찰력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육체적인 정신적인 스트립쇼’라고 지칭하며 현재 변화된 성과 사랑에 대한 이번장의 분석도 어쩌면 인간과 인간의 네트워크성의 결여로 인한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통적인 성의 결박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인간 관계가 ‘애처롭게 트위터, 인스타, 페이스 북에 매달리는 수 많은 현대인들의 모습’에 보며 성찰한 바우만의 현실 해석이라 여겨집니다. 즉 앞선 이 부분을 먼저 해결하는 것이 성과 사랑 및 인간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연결성의 회복이라고 봐야겠죠.

끝으로 바우만은 우리가 서로 손을 맞잡을 것인지, 아니면 같이 공동묘지로 갈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사활적 선택’의 문제를 언급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함께 가야만 하는 당위성의 문제이며, 현대 인간 사회의 통렬한 현존의 부조리들이 마찬가지로 함께 해결해야 되는 책무로 남겨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던져주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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