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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우 -하
다카무라 카오루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터부라든가, 금기라든가 하는 것을 하나도 지키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당황스러움과 쾌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다른 사람의 시선까지는 접어두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하늘에는 별, 내 마음엔 양심'이 엄연히 살아있어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면 마음이 불편하고 죄책감을 느껴 행동에 제한을 두게 되지 않는가. 예를 들면 아들을 버리고 외국인 애인과 도망가거나,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쏘아죽이거나, 아내를 아끼면서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애인인지 친구인지를 한결같이 기다리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말을 변용하자면 그들은 '신격'이거나 '인간이하'거나 둘 중 하나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은 또한 두 남자의 평생에 걸친 '사랑과 우정사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랑과 우정사이라......동성애자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동성간에 '사랑과 우정사이'는 가능하지만, 대부분의 '사랑과 우정사이'가 모호하고 애매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과는 달리 이 책의 '리오우'와 '카즈'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과 우정사이'는 굉장히 명확하다. 이 둘은 자신들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자각하고 있고, 서로가 평지풍파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최상의 인연이란 것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자기 사는 것에 골몰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처자까지 만들면서도 '너의 심장과 간은 내꺼야', '반했다고 말해', '세월을 세지마'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이런 짜릿하고 멋진 말은 도덕관념이 없는 사람들의 몫인 걸까?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리오우'라는 인물인데,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은 가늠하기 힘든 리오우와 카즈의 관계보다도 리오우라는 인물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작가는 '네가 본 그 누구보다 멋진 인물을 창조해주마'라고 결심한 듯했다. 리오우는 홍콩 신디케이트의 데미안이자, 중국 벌판의 생 쥐스트이며, 남자 경국지색이다. 아마 데미안이 젊었을 때 죽지 않았다면, 생 쥐스트가 권력을 잡았다면, 경국지색이 똑똑했다면 리오우같은 인물이 됐으리라. 어렸을 때는 유니크하고, 젊었을 때는 되바라지게 아름다우며, 어른이 된 후에는 압도적이다. 이 책은 이런 '리오우'를 아슬아슬한 균형감각으로 묘사해낸다. 아마 조금만 빗나갔으면 충분히 황당한 소설이 됐을 법한데, 일본 최고의 추리소설 작가로 꼽힌다는 다카무라 카오루의 군더더기 없는 문체가 균형을 잡는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나긋나긋한 문체가 주를 이루는 일본 소설의 문체와는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의 매력 중 하나이다.
그러고보니 '카즈'에 대해 충분히 말하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다. 어렸을 때부터 기계에 매료된 허름한 공장의 기계공이지만 외국인 애인과 도망간 엄마의 피를 이어받아서인지 범상치 않은 연애편력을 거친다. 22살의 어느 밤에 만난 리오우와 평생 이어지는 인연은 아마 그가 아니었으면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일본 소설에는 얌전한 것 같으면서도 왠만한 충격도 수용해버리는 태연자약한 남성상이 자주 나오는 것 같은데, 일본에는 실제로 이런 남성군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일본인이 생각하는 이상형 중 하나일까? 뜬금없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