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와 악마 2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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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댄 브라운은 역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지식과 오락, 배려의 완벽한 삼위일체라니. 그의 소설은 어느 만찬보다 풍요롭고, 어느 영화보다 시간을 빨리 가게 하며, 어느 자극보다 짜릿하다.

댄 브라운의 소설에 매료되는 이유 중 하나는 흥미롭게 펼쳐지는 방대한 지식이다. 주로 하버드 기호학자인 로버트 랭던의 입으로 소개되는 지식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고 여겼던 역사나 예술작품의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드러내고 비밀을 밝히는 탐험에 동참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천사와 악마'에서도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만들어진 비밀 결사조직인 '일루미니티'와 바티칸의 구조, 베르니니의 건축물들에 대한 색다른 해석이 펼쳐진다. 댄 브라운이 말하는 것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풀어놓는 배경지식들은 줄거리와 정확하게 맞아들어가면서 역사가 숨겨놓은 음모를 폭로하는 것 같은 흥미진진함을 제공한다. 지식으로 오락을 이끌어내는 댄 브라운의 솜씨를 보면, 어디까지 맞고 어디까지 틀린 거라는 비판을 하기 전에 그의 롤러코스트에 무작정 몸을 맡기게 된다. 흔히 맛보기 힘든 재미를 제공할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로버트 랭던은 '다 빈치 코드'에서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롤러코스트 안내자가 된다. 자택에서 자다가 한통의 전화로 깨어나 이상한 초청을 받은 후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로버트 랭던은 박식함 외에도 젠틀함과 특유의 순진함으로 모험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음침한 음모도 그를 우울하게 할 수 없고, 생명의 위협도 그의 기를 꺾을 수 없다. 로버트 랭던은  끌려나왔지만 일단 달리면 끝을 보고야마는 씩씩한 신사이다. 과학과 종교가 어지럽게 교차되는 사건의 해결자로 그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은 달리 없을 것이다. 물론 그 힘은 곁에 있는 이상형의 여인에게서 나오기도 한다. 영민하고 괄괄하며 아름다운 여성은 댄 브라운의 소설을 이끄는 한 축이고, 로버트 랭던을 끝까지 뛰게 만드는 에너지이다.

핵탄두를 뛰어넘는 신무기와 광신자들이 난무하는 '천사와 악마'를 읽고도 상쾌한 기분으로 책을 덮을 수 있는 것은 댄 브라운의 또 하나의 특기인 '배려' 때문이다. 균형감각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지만. 댄 브라운은 가톨릭을 비방한다는 '누명'을 쓰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다빈치 코드'는 가톨릭측의 오해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과 종교의 가치를 역설하는 책이며, 댄 브라운의 소설에 나오는 광신자들은 항상 연민을 불러 일으킨다. '다빈치 코드'의 수도복 입은 킬러와 '천사와 악마'의 사제의 말로는 소설에서 가장 가슴아픈 순간이다. 성직자들은 경직되고 과격한 첫인상에도 불구하고 항상 선한 의도를 가진 것으로 판명나며 절대적인 악을 행한 것은 다른 사람으로 밝혀진다. '천사와 악마'에는 과학지상주의자들도 나오지만, 그들 또한 과학의 발전이 파괴적인 의도로 사용되려는 것을 막는다.

종교와 과학의 갈등을 다루고 있지만 한쪽 편을 들거나 한쪽을 악인으로 만들지 않는 배려랄까. 이것은 종교나 과학 한쪽에 믿음을 갖고 있는 대부분의 독자들을 의식한 배려이기도 할 것이다. 실제 종교와 과학의 정체를 보면 댄 브라운의 예의가 우유부단하게 여기질 수도 있지만 롤러코스트에 안전벨트가 없다면 어찌 즐길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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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 상
샨 사 지음, 이상해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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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측천무후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을 기대한다면 이 책보다는 당나라나 측천무후를 다룬 역사책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요즘에는 중국 역사상 유일의 여황제였던 측천무후에 대한 편견도 많이 타파되어 그의 치세를 재조명하는 흐름이  대세이기 때문이다. 아마 샨 사의 측천무후는 그런 기대는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소설이고, 당연한 얘기지만, 샨 사 버젼의 측천무후이기 때문이다. 샨 사의 측천무후는 사료를 밟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샨 사의 전작인 '바둑 두는 여자'를 밟고 서 있다. 그래서 뜨겁고, 수려하며,  에로틱하다.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세상을 느끼고 관찰한다는 식의 발상은 이 책의 특색인 동시에 약점이다. 영민한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납득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측천무후를 현실을 살다간 인물이 아니라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나는 붉은 빛이 도는 황실의 내음보다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냉철하고 대담했던 인물에 대한 단백한 묘사를 보기를 원했던 것이니, 이 불만은 역시 취향의 차이일 것이다. 산 샤의 측천무후 역시 냉철하고 대담하지만 어떤 때이든지 어떤 인물이든지 붉은 향을 풍기는 것이 샨 사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아마 샨 사의 이런 특징이 서구인들이 열광하는 중국작가로 만들었을 것이다. 서구인들이 동양에 기대하는 바를 매끈한 솜씨로 충족시키는 것이 샨 사이기 때문이다. 영화감독으로 치면 최근의 장이모정도 될까.

행동력이 강한 인물들의 특징은  말을 아낀다는 것이다.  말이 많을 때는 그것이 필요할 때 뿐이다. 측천무후가 여자의 도리에 대한 책을 쓸 때는 궁중의 암투를 가라앉힐 필요성 때문이었고, 효자의 도리에 대한 책을 쓸 때는 아들의 '반역'을 경계해야 될 때 뿐이었다. 말 많은 군주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1인칭을 택한 것은 좀 유감이었다. 탄생, 성장과정, 보는 것, 느낀 것, 행한 것, 사랑한 사람, 미워한 사람, 죽음, 사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입으로 하나하나 묘사되어지는 것은 역시 측천무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단편적이 되더라도 어린 시절은 보호자였던 비구니에 의해, 젊은 시절은 치노에 의해, 중년은 상관완아에 의해 관찰되는 식으로 묘사되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다양한 중요인물이 보는 측천무후는 관찰자에 따라 다양한 면을 보여줄 테고 관찰자 역시 생명력을 얻었을테니. 샨 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지만. 역시 취향의 차이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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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우 -하
다카무라 카오루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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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부라든가, 금기라든가 하는 것을 하나도 지키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당황스러움과 쾌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다른 사람의 시선까지는 접어두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하늘에는 별, 내 마음엔 양심'이 엄연히 살아있어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면 마음이 불편하고 죄책감을 느껴 행동에 제한을 두게 되지 않는가. 예를 들면 아들을 버리고 외국인 애인과 도망가거나,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쏘아죽이거나, 아내를 아끼면서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애인인지 친구인지를 한결같이 기다리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말을 변용하자면 그들은 '신격'이거나 '인간이하'거나 둘 중 하나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은 또한 두 남자의 평생에 걸친 '사랑과 우정사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랑과 우정사이라......동성애자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동성간에 '사랑과 우정사이'는 가능하지만, 대부분의 '사랑과 우정사이'가 모호하고 애매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과는 달리 이 책의 '리오우'와 '카즈'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과 우정사이'는 굉장히 명확하다. 이 둘은 자신들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자각하고 있고, 서로가 평지풍파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최상의 인연이란 것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자기 사는 것에 골몰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처자까지 만들면서도 '너의 심장과 간은 내꺼야', '반했다고 말해', '세월을 세지마'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이런 짜릿하고 멋진 말은 도덕관념이 없는 사람들의 몫인 걸까?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리오우'라는 인물인데,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은 가늠하기 힘든 리오우와 카즈의 관계보다도 리오우라는 인물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작가는 '네가 본 그 누구보다 멋진 인물을 창조해주마'라고 결심한 듯했다. 리오우는 홍콩 신디케이트의 데미안이자, 중국 벌판의 생 쥐스트이며, 남자 경국지색이다. 아마 데미안이 젊었을 때 죽지 않았다면, 생 쥐스트가 권력을 잡았다면, 경국지색이 똑똑했다면 리오우같은 인물이 됐으리라. 어렸을 때는 유니크하고, 젊었을 때는 되바라지게 아름다우며, 어른이 된 후에는 압도적이다. 이 책은 이런 '리오우'를 아슬아슬한 균형감각으로 묘사해낸다. 아마 조금만 빗나갔으면 충분히 황당한 소설이 됐을 법한데, 일본 최고의 추리소설 작가로 꼽힌다는 다카무라 카오루의 군더더기 없는 문체가 균형을 잡는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나긋나긋한 문체가 주를 이루는 일본 소설의 문체와는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의 매력 중 하나이다.

그러고보니 '카즈'에 대해 충분히 말하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다. 어렸을 때부터 기계에 매료된 허름한 공장의 기계공이지만 외국인 애인과 도망간 엄마의 피를 이어받아서인지 범상치 않은 연애편력을 거친다. 22살의 어느 밤에 만난 리오우와 평생 이어지는 인연은 아마 그가 아니었으면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일본 소설에는 얌전한 것 같으면서도 왠만한 충격도 수용해버리는 태연자약한 남성상이 자주 나오는 것 같은데, 일본에는 실제로 이런 남성군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일본인이 생각하는 이상형 중 하나일까? 뜬금없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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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불꽃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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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이십 몇년동안 하나하나 쌓아온 그것들은 너무나 소중해서, 누군가가 빼앗으려고 하면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빼앗길 상황에 처한다면 분명 살의를 느끼지 않을까. 그것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일궈온 가족의 행복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 작은 행복이 짓밟혀갈 때 절박하게 조여오는 살의를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치밀함 ,혹은 용기, 혹은 분노가 필요할 것이다. 푸른 불꽃과도 같이 모든 것을 태워버릴 만한.

대부분의 원한 살해는 우발적으로 행해지지만, 슈이치는 몇년 만에 나타난 양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고등학생이라고는 믿기 힘든, 아마 대부분의 어른이라도 생각해내기 힘든 방법으로 말이다. 하지만 범죄과정을 보여주는 다른 소설들과 같은 흥미진진함이나 스릴보다는 범죄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길 때의 소년의 심리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아마도 그가 소년이기 때문이겠지만, 슈이치가 겪는 심리상태가 워낙 실감나게 나를 압박하기 때문이다. 사춘기때 누군가를 칼로 찌르는 꿈을 꾼 적이 있는데, 그 때의 기분이란 '이제 더이상은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 편히 들을 수 없겠구나'였다. 살면서 찾아오는 평화나 안식은  자취르 감추고, 평생 짐을 지고 걸어야만 하는 형벌을 받은 사람처럼 등의 무게를 항상 의식하고 살아야 하는 기분. 아마도 살인의 본질이란 같은 것이어서, 당하는 사람이나 행하는 사람에게 같은 상처를 입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한 사람은 진짜 죽는 것이고, 행한 사람은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살아간다는 차이는 있겠지만.

나중에 드러나는 것이지만, 슈이치는 좀 더 참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한 치 앞의 미래도 알 수 없어서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얼마나 계속될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슈이치의 살인과 같은 사건이 진짜 일어나서 매스컴을 탔다면 내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모르겠다. 가족을 협박하던 양부를 죽인 것은 이해하지만 진짜로 이해한다고 하기도 우습고, 또 다른 살인을 한 것에 대해서는 심하다고 하겠지만 어차피 이성적인 판단이란 제삼자의 속편한 관전평일 뿐이다.  더구나 이 책을 읽고난 지금으로선 판단을 한다는 게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인간은 다만 행동하고, 그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일 뿐, 그에 대한 주변의 평가와 말들은 잔여물질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주변에서 일어난다면 슈이치의 행동에 개입하는 방법에 따라 내 판단도 드러나는 것일 뿐. 슈이치의 친구인 노리코와 다이몬처럼.

이 책을 처음 펼칠 때 자전거로 해안 도로를 질주하며 등교하는 슈이치는 10대 소년의 싱그러움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슈이치의 내면은 이미 양아버지 살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터질 지경이었다. 겉으로는 싱그럽지만 내면은 지옥을 거닐고 있는 것은 모든 십대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슈이치는 거기서 '어둠 속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가고 말았다. 그리고 푸른 불꽃은 그를 남김없이 삼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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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는 늑대
팔리 모왓 지음, 이한중 옮김 / 돌베개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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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늑대와 관련된 프로를 본 적이 있었다. 어두운 황야에서 울려퍼지는 늑대의 울음소리는 완전한 야생의 소리,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름답고도 섬뜩한, 내 안의 야성마저도 흔들어 깨울 것 같은 소리였다. 어떤 악기도 그런 소리를 내지는 못하리라. 그때부터 늑대는 나에게 일종의 이상형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런 아름다운 동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늑대를 동경하던 나도 늑대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같았다. 위험하고, 사나운 동물. 늑대 사냥꾼들이 그것을 혐오했다면 나는 동경했다는 차이만 있을 뿐, 늑대에 대한 오해의 정도는 같았다. 팔리 모왓이 본 늑대는 그보다 훨씬 순진하고, 정도를 지키며, 가족애가 넘치는 동물이다. 내가 알고 있었던 늑대와 팔리 모왓이 묘사한 늑대는 너무나 달랐다. 하지만 야성의 결정체였던 늑대가 알고보니 사회적인 신사 숙녀들이라는 걸 알게됐어도 실망은 없다. 그들은 여전히 아름다우니까.

팔리 모왓은 풍자가이다. 특히 인간이라는 동물종에 관한 신랄한 풍자에는 관용이 없다. 하지만 풍자가 없었으면 이 책은 읽기가 너무 마음 아팠을지도 모른다. 관료제의 어리석음이야 그렇다고 쳐도, 야생의 동물들, 특히 늑대에 대한 인간들의 잔인함은 그 인간들을 바보로 만들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직접 늑대들과 동거동락하며 지내온 팔리 모왓으로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을 것이다. 유머가 없다면 이 세상을 어떻게 견디랴.

내가 알기로 모든 동물은 정도를 지키며 살아간다. 배고프지 않은데도 심심풀이로, 혹은 '그냥' 살생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늑대는 여기에다 덧붙여 자기가 낳지 않은 새끼들도 기꺼이 기르며, 부부애가 돈독해 평생 한명의 짝하고만 살아간다. 이 책에 나오는 늑대 부부의 생활을 보면 인류가 칭송해 마지 않은 일부일처제의 모든 묘사는 늑대 부부를 모델로 쓴 것만 같다. 덧붙여 그들은 낯선 이방인인 인간에게 관대하기까지 하다. 팔리 모왓이 늑대의 생태를 연구하기 위해 늑대 가족의 영역 안으로 잠입했을 때 보여주는 늑대 가족의 반응은 '잠시 실례하겠습니다'라고 하는 이방인에게 '기꺼이'라고 말하는 신사숙녀들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팔리 모왓은 낯선 환경에 던져진 관계로 좀 어리버리한 이방인의 모습이지만.

이런 신사숙녀들이 무례하고 잔인한 인간들의 손에 죽어가는 것을 보는 것은 안타까움을 넘어 한심할 정도이다. 이런 일이 도처에서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새삼스런 나의 분노조차도 진부하게 느껴진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인간들의 손에 추가로 죽어갈 것인가. 그 수가 급감한 늑대들은 이제 '사냥대상'이 아니라 '보호동물'로 지정되어 있지만, 인디언 보호구역과도 같은 그 알량함이 얼마나 늑대들을, 그리고 다른 야생동물들을 지켜주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그들이 인간들을 의식하지 않고 살던 땅은 이제 어디에도 없는데. 팔리 모왓이 관찰하던 늑대 가족의 앞에 던져졌다는, 캐나다 야생생물보호국의 독이 든 미끼를 마치 내가 먹은 것처럼 입 안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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