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불꽃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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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이십 몇년동안 하나하나 쌓아온 그것들은 너무나 소중해서, 누군가가 빼앗으려고 하면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빼앗길 상황에 처한다면 분명 살의를 느끼지 않을까. 그것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일궈온 가족의 행복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 작은 행복이 짓밟혀갈 때 절박하게 조여오는 살의를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치밀함 ,혹은 용기, 혹은 분노가 필요할 것이다. 푸른 불꽃과도 같이 모든 것을 태워버릴 만한.

대부분의 원한 살해는 우발적으로 행해지지만, 슈이치는 몇년 만에 나타난 양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고등학생이라고는 믿기 힘든, 아마 대부분의 어른이라도 생각해내기 힘든 방법으로 말이다. 하지만 범죄과정을 보여주는 다른 소설들과 같은 흥미진진함이나 스릴보다는 범죄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길 때의 소년의 심리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아마도 그가 소년이기 때문이겠지만, 슈이치가 겪는 심리상태가 워낙 실감나게 나를 압박하기 때문이다. 사춘기때 누군가를 칼로 찌르는 꿈을 꾼 적이 있는데, 그 때의 기분이란 '이제 더이상은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 편히 들을 수 없겠구나'였다. 살면서 찾아오는 평화나 안식은  자취르 감추고, 평생 짐을 지고 걸어야만 하는 형벌을 받은 사람처럼 등의 무게를 항상 의식하고 살아야 하는 기분. 아마도 살인의 본질이란 같은 것이어서, 당하는 사람이나 행하는 사람에게 같은 상처를 입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한 사람은 진짜 죽는 것이고, 행한 사람은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살아간다는 차이는 있겠지만.

나중에 드러나는 것이지만, 슈이치는 좀 더 참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한 치 앞의 미래도 알 수 없어서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얼마나 계속될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슈이치의 살인과 같은 사건이 진짜 일어나서 매스컴을 탔다면 내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모르겠다. 가족을 협박하던 양부를 죽인 것은 이해하지만 진짜로 이해한다고 하기도 우습고, 또 다른 살인을 한 것에 대해서는 심하다고 하겠지만 어차피 이성적인 판단이란 제삼자의 속편한 관전평일 뿐이다.  더구나 이 책을 읽고난 지금으로선 판단을 한다는 게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인간은 다만 행동하고, 그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일 뿐, 그에 대한 주변의 평가와 말들은 잔여물질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주변에서 일어난다면 슈이치의 행동에 개입하는 방법에 따라 내 판단도 드러나는 것일 뿐. 슈이치의 친구인 노리코와 다이몬처럼.

이 책을 처음 펼칠 때 자전거로 해안 도로를 질주하며 등교하는 슈이치는 10대 소년의 싱그러움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슈이치의 내면은 이미 양아버지 살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터질 지경이었다. 겉으로는 싱그럽지만 내면은 지옥을 거닐고 있는 것은 모든 십대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슈이치는 거기서 '어둠 속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가고 말았다. 그리고 푸른 불꽃은 그를 남김없이 삼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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