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이야기
다이안 세터필드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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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전에는 역사나 인문학 책도 열심히 읽었건만 이제는 ‘소설 나부랭이’만 읽고 있다. ‘이야기’가 좋은 것이다. 탐구보다는 위안을 원하게 됐다는 징조일까. 벌써 이러면 안되는데..ㅠ

어쨌든, 이야기라면 뭐니뭐니해도 음산한 분위기와 매력적인 등장인물이 필수이다. 한참동안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에 올인하다가 더 이상 읽을 것이 없어 선택한 ‘열세번째 이야기’는 척 보기에도 나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집 앞 계단에 떨어져 있는 한 장의 편지로 시작되는 이 책은 근사하긴 했으나 감정몰입이 어려웠다. 기대는 컸으나 공감하기 어려웠다고나 할까? 일본의 소시민적이면서도 건조한 범죄현장에만 있다가 갑자기 축축한 안개와 녹색 눈동자의 비밀을 대해야 하는 시차 차이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문장은 작위적으로 느껴졌고, 기이한 쌍둥이들은 잔혹동화의 주인공 같았으며, 제인 에어에 대한 오마쥬는 도를 넘은 것 같았다. 작가의 내면은 18세기, 좋게 봐줘도 19세기의 창백한 문학소녀에 머무르고 있는 듯했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살짝 두려워진다. 출판계에서든 독자계에서든 이 책에 대한 평은 무척이나 호의적이던데 내 눈이 사시가 된 것일까? 막상 내가 이 책에 빠져든 것은 중반 이후였다. 제인에어를 열 번도 더 읽었을 법한 여주인공과 죽기 직전의 늙은 천재 작가, 기이한 쌍둥이 자매의 이야기가 얼기설기 이어져 하나의 가지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 보였을 때에야 난 이 책이 제대로 된 이야기, 아니, 그것을 넘어서 내가 애초에 기대했던 그 이야기임을 알았다. 결과적으로는 500페이지가 넘는 두께가 나에게는 도움이 된 것이다.


지금 나에게 이 책은 상실과 복원에 관한 이야기로 잔상이 남아 있다. 플라톤이 말했다시피 모든 연인은 애초의 자웅동체에서 갈라져 헤어졌던 반쪽이다. 반쪽을 다시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 지고의 행복이다. 이것이 연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쌍둥이도 자웅동체와 같이 영혼이 하나로 이어져 있을 수 있다. 사랑하는 모든 관계는 육체와 영혼의 자웅동체이다. 완벽한 하나이다. 이 반쪽을 찾지 못한 사람은 ‘절단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절단자가 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운명이어서 연인과 쌍둥이, 모든 사랑하는 관계들은 한 쪽이 죽거나 떠나거나 혹은 더 시윈찮은 이유로 헤어지게 된다. 애초의 완벽했던 상태와 헤어진 후‘절단자’로서 살아야 하는 상실의 세월.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스스로 상처를 아물게 해야 하는 ‘인간의 운명’이 ‘열세번째 이야기’가 들려준 이야기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고 보니 동화같다고 느꼈던 애초의 느낌이 맞은 것도 같다. 옛날옛날에 커다란 저택에 쌍둥이 소녀가 살았습니다. 그들은 갈색 머리칼과 신비스런 녹색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로 시작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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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7-03-21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넘 읽어보고 싶네요. 기대했던 그 이야기임을 알아차렸을 때의 짜릿함 ㅋㅋ

hoyahan1 2007-03-24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나서도 향수를 남겨주는 책들이 있는데요, 이것도 그 중 하나인 거 같아요. 축축한 날에 느긋하게 코코아를 마시면서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추천해요~^^

2007-03-27 0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화차
미야베 미유키 지음, 박영난 옮김 / 시아출판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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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미 우리는 CF에서 보여주는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파멸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TV와 쇼윈도가 보여주는 빛에 감전된 욕구불만은 만성이 됐고, 세계 곳곳에서 모델들은 거식증으로 사망하고 있으며, 일확천금을 주겠다는 리얼리티 쇼가 대중적인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다. '화차'는 그런 시대를 그리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을 한자로 보지 못했을 때는 '꽃수레'란 뜻인 줄 알았다.  현대사회는 사람들에게 '요화'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불수레건 꽃수레건 사람을 망치는 건 같으며, 여기에 저항하지 못하는 어떤 사람들을 결코 이기지 못할 인력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두 여자는 '지옥으로 가는 수레'에 몸을 실었다. 이들이 지옥으로 가는 수레에 몸을 싣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죄들을 저질렀지만, 가지를 다 쳐내고 남은 가장 근본적인 죄는 돈을 잘못 썼다는 것이다. 자기 혹은 가족이. 현대 사회에서 돈을 잘못 썼다는 것 혹은 잘못 빌린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버림받고 파멸로 치달을 수 있는 죄가 된다. 감옥에 가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원히 무등록자로 방랑하거나 사채업자에 의해 험한 꼴을 보기도 한다. '화차'에서는 그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예가 나온다.

세키네 쇼코와 신조 교코. 두 여자에게 일본은 평화로운 경제대국이 아니라 맹수가 덮쳐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정글, 온정이 존재하지 않는 전시상태였다. 둘은 금융부채라는 같은 덫에 걸려 있었지만 한 사람은 자신이 초래했고, 한 사람은 가족으로 인해 발이 묶였다. 하지만 그 둘에게 닥친 무자비함은 누가 초래했는지에는 관심없었다. 굳이 관심이 있었다면 누가 희생자로 적합한가, 정도였을 것이다. 은행, 카드회사, 사채로 이어지는 빚의 고리에서 빠져 나가려면 죽을 정도의 노력에다 주위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것마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택하는 것은 애초의 실수를 뛰어넘을 만한 극단적인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일회용 사람들'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빚에 팔려서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도 흔한 현상이지만 대부분은 상황에 굴복하여, 혹은 빚을 진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 여기고 노예상태까지 수용하게 된다. 원금을 상회하는 이자를 받아내는 부조리한 구조에 대해서 항의할 수 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런 의미에서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그런 상황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꿈을 꾼 신조 교코는 대단한 여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다른 사람을 부여잡고라도 탈출하고자 하는 것을 누가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전에는 미야베 미유키가 여성 캐릭터는 잘 다루지 못한다고 느꼈었다. 대부분의 책에서 캐릭터가 살아 숨쉬는 경우는 대부분 남자였고(특히 매력적인 소년을 창조하는 솜씨는 발군이다), 여자는 전형적인 캐릭터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도 두 여자는 직접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추적하는 사람들에 의해 복원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화차'에서만은 현대사회의 금융부채에 ?기는 두 여자의 불안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누르고 괜찮은 척하는 것을 볼 때는 거의 눈물이 날 뻔했다. 그것도 희생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해자를 위해서. '연민을 일으키는 범죄자'는 이제 지겨울 정도지만 나도 그녀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보고 싶은 걸 보니 혼마 형사와 같은 심정이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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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 1 -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김대중 옮김 / 새만화책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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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베일은 이슬람 세계에 대한 찬반양론에 대한 상징으로 굳어져버린 듯하다. 베일에 대한 지나친 의미부여에 대해 거부감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여성의 베일쓰기였다. 그리고 베일쓰기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과거 지향적인 혹은 이슬람 근본주의적인 정권에 반대하는 것을 뜻했다. 이 만화를 주인공이자 저자인 마르잔 사트라피는 명백히 후자에 속한다. 판화를 연상케하는 단순하고 명확한 흑백의 만화를 펼치자마자 제일 먼저 나를 웃겼던 것은 베일을 갖고 장난치는 소녀들이었다. 묶어서 줄넘기를 하거나 얼굴에 뒤집어쓰고 도둑놀이를 하는 소녀들.

진보적인 지식인 가정의 외동딸로 자란 고집 센 소녀 마르잔에게 베일은 보수주의자들의 집착이자 자기분열증의 증거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의 지지를 받는 괄괄한 소녀도 이란을 덥치는 이슬람 근본주의와 독재, 전쟁의 습격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마르잔의 성장기는 오롯이 그 '습격들'과 함께했다. 하루아침에 베일을 쓰지 않으면 밖에도 나갈 수 없게 되었고, 독재정권에 처형당하는 삼촌과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감옥을 방문해야 했으며, 이라크의 포탄을 피해 지하 방공호로 뛰어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세 흉흉한 나라에 살고 있는 나에게 마르잔의 성장기는 먼나라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마르잔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녀의 고통을 일부분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마르잔의 용기, 괄괄함, 혹은 시니컬은 더 감탄스러웠다. 나이키 신제품을 신고 청자켓을 걸치고 거리를 활보하는 마르잔에게 머리를 덮은 베일은 무색한 것이었을 것이다. 분명 그녀에게 베일 쓰기를 강요한 사람들이 원하던 효과는 아니었다. 마르잔은 그렇게 청자켓을 걸치고 록을 들으면서 그녀의 나라를 견뎌나갔다.

격동기의 이란에서 성장기를 보낸 마르잔을 얘기할 때 그녀의 부모님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중산층의 풍요로움과 진보적인 지식인의 자유로움으로 마르잔을 키웠던 부모님의 사랑은 시니컬한 절제가 특징인 만화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눈물겨웠다. 외국여행에서 마르잔의 부탁으로 산 가수의 포스터를 뺏기거나 구기지 않고 갔다주기 위해 외투의 등에 넣고 꿰멘 후 공항을 통과하는 것은 재밌는 에피소드였지만 그 다음에는 눈물이 핑 돌 수밖에 없었다. 이라크의 폭격이 심해지고 모두가 피난을 떠나는 테헤란에서 마르잔의 부모는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마르잔을 외국으로 보낼 유일한 가능성이 있는 장소는 테헤란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미 이란의 상황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목숨을 걸고라도 탈출해야 할 만큼 숨통을 조여왔다. 마르잔의 부모님은 재력과 용기로 그것을 실현했다. 부모와 14살 먹은 소녀의 생이별은 거기에 덧붙여야 하는 대가였다.

세상에는 60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 중 너무나 많은 사람이 불가항력적인 국가 정세 따위로 고통받는다. 탈출에 실패한 수많은 마르잔들이 이란과 수많은 나라에 존재한다. 마르잔은 처형당한 삼촌의 말대로 '별'이었다. 많은 친척과 이웃이 고문과 처형, 전쟁으로 죽어나간 후 부모의 결정적인 희생이 뒤따른 뒤에야 가능했던 탈출. 마르잔은 결국 '페르세폴리스'라는 만화를 세상에 내놓음으로서 또 하나의 증인이 되었다. 아마도 오랫동안 러시아 스파이로 몰려 처형당한 마르잔의 삼촌과, 마르잔과 보낸 마지막 밤에 가슴에서 떨어지는 꽃의 향기를 느끼게 해줬던 마르잔의 할머니를 기억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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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노랫소리 - 제6회 일본추리서스펜스대상 수상작
텐도 아라타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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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불치병으로 자리잡았다. 백년 후 쯤 씌여질 역사책에는 21세기 초의 불치병으로 '에이즈, 감기, 고독'을 꼽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누구나 질색하는 고독이지만 그것이 묘한 중독성을 발휘할 때이다. '고독하지만 나만의 세계는 포기하지 않겠어' '고독하지만 자유로운 게 좋아' 라는 기분. 묘한 자부심? 어쨌든.

인간이란 한꺼풀 속에 무한한 색의 스팩트럼을 숨긴 흰 종이와 같아서 밖의 자극에 따라 다양한 색깔을 산란하는 존재인 거 같다. 그래서 고독한 세 명의 등장인물들은 내면의 스팩트럼에 따라  한 명은 범죄자가 됐고 두 명은 그 범죄자를 쫓는 사람이 됐다.

다카시. 일본어는 젬병이지만 왠지 이 이름은 순박한 사람한테 어울릴 거 같다. 평범하지만 상냥하고, 신입사원이나 고등학생한테 어울릴 만한 이름. 하지만 여기서는 연쇄 살인마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 또한 요즘 뉴스에 나오는 것처럼 낮에는 모범적인 회사원이었다. 비록 얌전히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치고 있는 입 속에는 납치한 여자의 이빨을 굴리고 있었지만.

이 다카시를 쫓는 두 사람 중 한 명은 여형사이고, 한 명은 편의점에서 알바로 생계를 이어가는 소년이다. 형사는 어린 시절에 죽은 친구에게 깊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아주 조그마한 비겁함이 친구가 납치되어 살해당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죄책감은 그녀를 혼자 도쿄에 올라와 형사가 되게 했으며 마음껏 젊음을 즐길수도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또 한 명인 소년은 음악을 하고자 하는 소년의 고집과 그 고집을 꺽으려 했던 부모와의 갈등 때문에 집을 나왔다.  소년의 반항심은 용납되지 않았고 그 역시 혼자가 되었다.

평범하고 안락하게 살아도 고독이란 어쩔 수 없이 스며드는 습기와 같은 것인데, 이들은 모두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내쳐졌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가 지니고 있는 단 하나의 소중한 것은 포기할 수 없었고, 그것이 상관없었던 하나의 사건에 얽히게 했을 것이다. 형사의 경우에는 옆집에 살던 젊은 여자의 실종이, 소년의 경우에는 편의점 동료가 당한 린치가 원인이지만 진짜 이유는 아마도 고독한 사람에 대한 상호간의 의무감 아니었을까? 고독하지만 자신의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이 당하는 외로운 고통이나 죽음에 더 분노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실종된 지 몇달이나 지난 후에 피해자가 시체로 발견되는 연쇄 살인사건에 관여하게 되고 '다카시'를 ?는 것이다.

다카시. 그는 어린시절에는 피해자였다가 성인이 되었을 때는 가해자로 돌변한 남자이다. 많은 범죄자가 그렇듯이. 그의 끔찍한 환경을 동정하고 그의 범행에 분노할 수는 있겠지만 다카시와는 어떠한 교집합도 느낄 수 없다. 다카시는 자기의 세계를 포기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의 의욕과는 상관없이 그와는 공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는 너무나 깊이 들어가 버렸다. 그 자신은 어쩔 수 없었겠지만.

한밤중의 편의점에 쳐들어 온 복면 강도의 린치와 젊은 여자의 실종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 이 사건은 끝까지 숨가쁘게 달려간다. 하지만 사건의 키워드는 단 하나, '고독'이다. 그리고 결말은 생각보다 암울하지 않다. 지하 터널에 비치는 한 순간의 맑은 바깥바람을 쐰 기분이랄까? 마지막에 뒤로 내민 손에서 '인간의 조건'을 받아들인 사람의 당당함과 여유가 느껴져서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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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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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까지 잔인한 더위가 계속됐었다. 땀은 온몸에서 흘러나왔고, 겨울 추위는 견뎌도 삼복더위는 못 견디겠다는 말만 되뇌이는 나날이었다. 이런 날에는 책을 읽을 수도 없다. 더위를 무릅쓰고 몇 권의 책을 빌려왔지만 100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임시 주인에게 버림받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E.M 포스터의 소설과 사회과학 책들이 평등하게 버림받았고, 아시모프만 겨우 살아남았다. 그래, 아시모프라면 이 더위에라도 읽을 수 있다. 결국 다시 도서관에 가는 용기를 내지 못하고 반쯤 속는 기분으로 시킨 이 책으로 말복더위를 넘겼으니 기특함을 넘어 고맙기까지 하다.

'뿌리깊은 나무'는 세종시대에 집현전을 배경으로 벌어진 연쇄살인 사건을 추적한다. 실제 역사에서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한글 창제를 도왔던 집현전 학사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는 연쇄살인사건이라니, 생소했다. 역시 조선이라는 이미지가 주는 편견 때문이었을까? 사화라면 몰라도 연쇄살인은 어울리지 않는 듯 했다. 그것도 집현전 학사 연쇄살인사건. 이들은 모두 야심한 밤을 틈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죽어가는데, 그 죽음에는 모두 각각의 살인에 따라 다른 상징성이 있었다. 일반 연쇄살인의 패턴과는 다르게 살인 자체에 상징을 섞는 방법. 역시 이것은 다빈치 코드의 영향이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정명은 이것을 '토속화'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토속화'를 성공시킨 일등공신은 역시 한글이다. 연쇄살인 사건의 배경이며, 사건을 쫓는 젊은 겸사복 채윤에게는 비밀기호로, 세종대왕에게는 개혁을 위한 완성이자 이상으로, 보수파들에게는 시대의 질서를 뒤엎는 원흉으로 인상을 달리하면서 한글은 이 소설의 핵심키 역할을 한다. 비밀과 상징성, 개혁성을 동시에 지닌 한글은 역사추리소설의 주연을 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을 추리소설에서 보는 재미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 시대의 특징은 천재들이 넘쳐난다는 것인데, 흥미보다는 막연한 감탄과 존경심만 가져왔던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이 연쇄살인사건에 휘말리자 마치 아는 사람들이 고생을 겪는 걸 보는 것 같은 이상한 실재감이 들었다. 하긴 그것은 실존 인물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연쇄살인 사건을 쫓는 젊은 겸사복 채윤은 그대로 이미지가 되어 떠오를 정도로 리얼하다. 아마도 스물을 갓 넘긴 나이, 중키의 얌전한 외모와 정직한 표정의 소유자.  처음에 떠오른 이미지는 나중에 소설에서 묘사되는 바와 거의 일치했다. 상관의 바람막이 역할로 사건을 떠맡은 후 하늘같은 벼슬아치들의 꾸중과 방해에 낙담하면서도 끈질기게 사건을 쫓는 채윤은 추리소설을 게임이 아니라 인간이 얽힌 사건, 고통받고 죽은 인간의 억울함을 풀고자 하는 신원의 과정으로 만들었다. 아마 냉정하고 재주많은 인간이 해결자로 나왔다면 이 소설은 얼마간의 가치를 잃었을 것이다.

이 책을 다 읽은 지금은 연쇄살인까지는 아니었어도 한글을 창제하기까지 음모와 방해가 있었을 거라고 한번도 생각지 못한 것이 이상하다. 기득권을 쥔 보수파와 강대국의 방해로 수많은 개혁가가 죽어나가고 왕들이 폐위되었던 것이 고려 이후의 한반도의 역사가 아니었던가. 그걸 생각하면 책을 읽고 감상을 쓰는 지금도 짜릿하다. 생각하고 소리내는 그대로 기록할 수 있는 문자, 28자의 자음과 모음으로 무한정하게 표현되는 문자, 누구나 쉽게 익히고 사용할 수 있는 문자. 한글은 창제 이후에도 오백년 이상의 무시와 방해를 이겨내고 살아남아 이렇듯 그것을 소재로 한 추리소설을 쓸 수 있게 하고, 그 책에 대한 감상도 끄적일 수 있게 건재함을 자랑한다. 왠지 대견하다, 한글. 그리고 오백년 전의 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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