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세폴리스 1 -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김대중 옮김 / 새만화책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 베일은 이슬람 세계에 대한 찬반양론에 대한 상징으로 굳어져버린 듯하다. 베일에 대한 지나친 의미부여에 대해 거부감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여성의 베일쓰기였다. 그리고 베일쓰기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과거 지향적인 혹은 이슬람 근본주의적인 정권에 반대하는 것을 뜻했다. 이 만화를 주인공이자 저자인 마르잔 사트라피는 명백히 후자에 속한다. 판화를 연상케하는 단순하고 명확한 흑백의 만화를 펼치자마자 제일 먼저 나를 웃겼던 것은 베일을 갖고 장난치는 소녀들이었다. 묶어서 줄넘기를 하거나 얼굴에 뒤집어쓰고 도둑놀이를 하는 소녀들.

진보적인 지식인 가정의 외동딸로 자란 고집 센 소녀 마르잔에게 베일은 보수주의자들의 집착이자 자기분열증의 증거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의 지지를 받는 괄괄한 소녀도 이란을 덥치는 이슬람 근본주의와 독재, 전쟁의 습격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마르잔의 성장기는 오롯이 그 '습격들'과 함께했다. 하루아침에 베일을 쓰지 않으면 밖에도 나갈 수 없게 되었고, 독재정권에 처형당하는 삼촌과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감옥을 방문해야 했으며, 이라크의 포탄을 피해 지하 방공호로 뛰어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세 흉흉한 나라에 살고 있는 나에게 마르잔의 성장기는 먼나라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마르잔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녀의 고통을 일부분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마르잔의 용기, 괄괄함, 혹은 시니컬은 더 감탄스러웠다. 나이키 신제품을 신고 청자켓을 걸치고 거리를 활보하는 마르잔에게 머리를 덮은 베일은 무색한 것이었을 것이다. 분명 그녀에게 베일 쓰기를 강요한 사람들이 원하던 효과는 아니었다. 마르잔은 그렇게 청자켓을 걸치고 록을 들으면서 그녀의 나라를 견뎌나갔다.

격동기의 이란에서 성장기를 보낸 마르잔을 얘기할 때 그녀의 부모님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중산층의 풍요로움과 진보적인 지식인의 자유로움으로 마르잔을 키웠던 부모님의 사랑은 시니컬한 절제가 특징인 만화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눈물겨웠다. 외국여행에서 마르잔의 부탁으로 산 가수의 포스터를 뺏기거나 구기지 않고 갔다주기 위해 외투의 등에 넣고 꿰멘 후 공항을 통과하는 것은 재밌는 에피소드였지만 그 다음에는 눈물이 핑 돌 수밖에 없었다. 이라크의 폭격이 심해지고 모두가 피난을 떠나는 테헤란에서 마르잔의 부모는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마르잔을 외국으로 보낼 유일한 가능성이 있는 장소는 테헤란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미 이란의 상황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목숨을 걸고라도 탈출해야 할 만큼 숨통을 조여왔다. 마르잔의 부모님은 재력과 용기로 그것을 실현했다. 부모와 14살 먹은 소녀의 생이별은 거기에 덧붙여야 하는 대가였다.

세상에는 60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 중 너무나 많은 사람이 불가항력적인 국가 정세 따위로 고통받는다. 탈출에 실패한 수많은 마르잔들이 이란과 수많은 나라에 존재한다. 마르잔은 처형당한 삼촌의 말대로 '별'이었다. 많은 친척과 이웃이 고문과 처형, 전쟁으로 죽어나간 후 부모의 결정적인 희생이 뒤따른 뒤에야 가능했던 탈출. 마르잔은 결국 '페르세폴리스'라는 만화를 세상에 내놓음으로서 또 하나의 증인이 되었다. 아마도 오랫동안 러시아 스파이로 몰려 처형당한 마르잔의 삼촌과, 마르잔과 보낸 마지막 밤에 가슴에서 떨어지는 꽃의 향기를 느끼게 해줬던 마르잔의 할머니를 기억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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