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5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렇잖아도 미야베 여사의 등장인물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처럼 생생하게 느끼지게 마련인데, 한 인물이 시리즈물로 나와버리면 당장 일본 전화번호부 책에서 그 사람의 연락처라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모방범'에서 연쇄살인마사건 해결에 한몫을 거든 마헤하타 시게코는 '낙원'에서는 아예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연쇄살인마사건 이후 9년간을 트라우마를 껴안고 프리라이터로서도 침체기를 겪은 시게코. 어린 아들을 사고로 잃은 중년부인을 만나면서 시게코는 연쇄살인마사건에 못지 않은 또 다른 사건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특종을 잡는 기자는 대타 근무에서도 특종을 잡는 운이 따른다고 하는데, 앞으로 마헤하타 시게코가 미야베 여사의 사건들의 특종 기자로 계속 등장하는건 아닌지, 혹은 등장했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이 생긴다. 냉철하고 똑똑하기는 하지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보통 사람이고, 귀여운 남편을 둔 주부인 마헤하타 시게코는 보통 사람들의 특별한 사건을 다루는 미야베 여사의 특종기자로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낙원'에서 벌어지는 큰 사건은 두 가지다. 하나는 어린 아들을 트럭 사고로 잃은 어머니의 방문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12살 난 아들이 다른 사람의 마음이나 미래를 보고 그림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가졌었다고 말한다. 아들이 남긴 그림 중에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트럭사고, 박쥐 모양의 풍향계가 있는 집에 누워있는 소녀의 시체, 그리고 9년 전의 연쇄살인마사건이 일어났던 별장 그림이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특별했던 능력을 객관적으로 조사하고 인정받고 싶어한다.

또 다른 사건은 어느 집에 화재가 일어나 16년간 감춰왔던 살인사건이 표면에 드러난 일이다. 자수로 인해 범인은 부모로 밝혀졌고, 부모는 16년 전 자신들의 큰 딸을 죽여 마루 밑에 묻고 살아왔다고 한다. 그 집에는 박쥐 모향의 풍향계가 달려 있었고, 딸은 당시 15살의 소녀였다. 어떻게 사고로 죽은 소년은 어렸을 때 일어난 연쇄살인마 사건의 별장을 생생히 묘사했고, 소녀의 살인사건이 밝혀지기 전에 알고 있었던 것일까? 불합리하고, 선뜻 믿을 수 없는 소년의 능력과 실제 일어난 비극적인 가족 살인사건의 접점은 무엇일까?

미야베 여사의 범죄소설이 좋은 것은, 범죄를 다루는 미야베 여사의 태도가 지극히 윤리적이기 때문이다. '모방범'에서도 그랬지만 '낙원'의 희생자들이 보는 이의 눈요기가 되는 것을 미야베 여사는 경계하는 듯하다. 애초에는 미야베 여사 못지 않게 히가시노 게이고를 좋아했지만 히가시노 게이고가 '방황하는 칼날'에서 묘사한 범죄는 너무 실망스러웠다. 어떻게 아버지가 복수심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딸이 당하는 범죄현장의 테잎을 반복해서 볼 수 있단 말인가. 애초에 그렇게 해야 유지되는 복수심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겠다. 딸을 죽여 마루 밑에 묻고 16년 간 살아온 가족의 이야기도 그 못지 않게 자극적이지만, 애초의 불안감과는 달리 그 가족의 속살을 드러내는 방법은 지극히 미야베 여사다웠다.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고 싶어한다. 그것이 '낙원'이라 이름붙일 수 있는 거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낙원은 순수한 아담과 이브의 것이기도 하지만 뱀과 악마의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 책은 말하고 싶어한다. 연인에게는 둘만의 공간이 낙원이지만, 연쇄살인마에게는 살인의 무대가 낙원이다. 누구나 자신의 낙원을 원하며, 그렇기에 때때로 너무나 잔혹한 방법을 쓰기도 하는 것이다. 과연 너와 나의 낙원은 무엇인가. 나의 낙원이, 만약 있다면, 누군가의 눈물이나 희생양을 발판 삼아 지탱되고 있지는 않은가. 나에게는 아름다운 낙원이 너에게는 잔혹이 되는 엇갈림. 범죄란 여기서 시작되는 건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방랑기 -상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21
하야시 후미코 지음, 최연 옮김 / 소화 / 2001년 6월
평점 :
품절


일본에는 사소설이란 문학전통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일기체의 자전소설이라는 것은 매사에 정신차리고 사는 사람의 것이 아니면 곤란하다. 누군가의 사사롭고 내밀한 이야기 따위, 자기연민과 잘난척의 기록이기 쉽고, 누군가의 푸념을 문학이라는 이유로 참고 읽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부와르는 시대상과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하지 않는 자서전은 쓸 가치도 없고 읽을 가치도 없다고 했는지도 모른다.

하야시 후미코는 늘 정신차리지 않으면 살 수 없던 부류의 사람이라는 점에서 '방랑기'는 내 정신까지 차리게 만드는 '사소설'이었다. 20세기 초의 일본의 룸펜. 고향도 없고, 부모 또한 집이 없는 떠돌이 장사꾼이라 20대까지의 반은 등짐을 지고 걸었던 삶. 늘 동화와 시를 쓰고, 소설을 구상했지만 20대 중반까지는 온갖 아르바이트와 장사를 병행하며 글을 썼다. 그래서 '방랑기'에는 항상 무엇을 먹고 싶다거나 돈을 가지고 싶다는 말이 나온다. 마지막 남은 돈으로 돈가스를 사서 먹어도 배가 고팠던 것은, 다음날부터는 쌀 한 톨 없이 굶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약간의 기름기가 뱃속을 달래주었다고 한들 내일부터 시작되는 굶주림의 공포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야식으로 먹은 돈가스에 기분이 좋아져 분발하며 쓴 글들이 '방랑기'이고, 방랑기 속의 시들이다.

"고향은 멀리 있어서 생각하는 것이다. 설사 타향의 거지가 된다 하더라도 고향은 두 번 다시 돌아올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에서 배다른 자매에게 은근한 냉대를 받고, 여학교 시절의 친구와 지지부진한 만남을 가진 후의 감상이다. 고향을 저 정도로 생각할 수 있어서 그랬는지, 하야시 후미코의 사생활 또한 그 시대로서는 파격이었다. 아니, 사생활 자체보다는 그것을 숨김없이 드러낸 것이 더 파격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애인들과의 생활, 애인들이 아니더라도 때때로 강렬히 남자를 원하는 감정. 하야시 후미코에게 성욕은 식욕만큼이나 정직한 욕구였다. "남자에게 얻어먹는 것은 진흙을 씹는 것보다도 괴로운 일이다"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을 때리는 남자와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했던 그저 그런 면을 가진 여자. 하지만 강한 생명력만큼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던 여자.  

굶주리고, 미인도 아니고, 잡지사에서 거절당하며 자기혐오에 시달리면서도 타인을 보는 시선에 따듯함과 유머감각이 있다는 것은 그녀의 또 다른 미덕이다. 자기를 원망하는 것 이상으로 세상을 원망하게 되는 것이 가난의 질병 아닌가. 같이 일용직에 종사했던 사람들에 대해 보이는 동료애, 어머니와 의붓아버지에 대한 책임감과 연민(지겹다고 한 적도 많았지만)을 보면 "당신은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군"하는 닭살스런 말을 해보고 싶어진다.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오래 살지 못했다고 하던데, 보통 사람들이 자아를 부정하거나 외면하고 사는 80년의 세월에 비하면 하야시 후미코의 대단하다 할 정도의 정직한 삶은 오히려 후회 없을 인생이 아니었나 싶다. 그녀의 가난이 부럽다고는 빈말로도 못하겠지만, 내가 가난하거나 고생스러울 때는 하야시 후미코의 삶의 자세를 떠올릴 것 같다. 끊임없이 일하고, 오기와 자존심을 갈고 닦고, 욕구에 정직하며, 한줄기 꿈을 놓지 않는 자세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골든 슬럼버 - 영화 <골든슬럼버> 원작 소설 Isaka Kotaro Collection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갑자기 세상 모두로부터 추격을 당해 도망쳐야 할 때는 전문적인 기술 몇 개 쯤은 가지고 있는 편이 좋을 것이다. 좀 살벌하지만 칼 쓰는 법이라던가, 핸드폰과 소형기계들을 이용해서 나를 추격하는 사람들을 역추격하는 능력이라던가, 컴퓨터 해킹 능력이라던가, 헬리콥터나 배 운전 같은 것들. 하지만 대개는 빠른 발조차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 아닌가. 적은 국가, 혹은 국가를 움직이는 힘이라면,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루아침에 총리 암살범이 되어 쫒기는 아오야기가 가지고 있는 기술은 대학시절의 친구에게 배운 밭다리후리기 뿐이다. 그리고 택배기사 시절에 익힌 시내지리와 약간의 저금 정도. 8년 만에 연락온 친구와의 만남에서 시작되는 추격전에서 갖고 있는 무기치고는 서글플 정도로 알량하다. 살인자, 그것도 총리 암살범이 되어 있는데다 경찰들은 실탄이 장전된 총을 쏘아대며 쫒아온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로 인해 어려움에 처한다. 이런 경우라면 너무 억울하고 억울해서 콱 죽고싶을 게 뻔하다.  

하지만 아오야기는 열심히 도망친다. 그리고 도망치는 와중에 그가 알고 있던 사람들, 그를 아끼는 사람들로 인해 위험에 빠지기도 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 한다. 인생의 위기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인생 자체가 자원이 되기도 하고 덫이 되기도 하는 것. 나를 아끼는 사람은 자신들이 가진 걸 이용해서 도와주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만큼 더 위험한 존재가 된다.

골든 슬럼버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정교한 아귀를 자랑하는 복선이 깔려있는데, 이 복선은 아오야기가 살아온 인생 자체라는 데 다른 복선들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 사소한 습관, 대학시절의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 생각 없이 했던 행동들이 모두 그의 명운을 결정짓는 복선이 된다. 그리고 그걸 보는 나느 아오야기를 응원함과 동시에 그의 사소한 특징들까지도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그를 아끼고 있는 사람들과 끝까지 연결시키는 고리가 되고, 그를 더 멀리 도망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한 명의 사람은 얼마나 복합적인 존재인가. 그래서 아오야기가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을 해하려는 무리들에게서 도망치는 것을 보는 것은 감동 이상의 메타 감동이 있다. 지금도 잘생기고 순박한 청년이 어리둥절하고 겁먹은 얼굴이지만, 가끔씩 밭다리 후리기를 성공해가면서 열심히 달리는 모습이 눈에 떠오르는 듯...오락물임에는 분명하지만,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2. 책도둑(2권)

3. 속죄

4. 누구나 홀로 선 나무

5-6. 눈물(2권)

7. 열린 사회와 그 적들

8. 한시의 세계

9. 문명의 우울

10. 방울져 떨어지는 시계들의 파문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외딴집 - 상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천한 출생과 굼뜬 성격-사실은 신중한 것 뿐이지만- 때문에 바보라고 불리는 소녀의 이야기란 걸 알게 되자 조금 슬퍼졌다. 이름까지 '호'(바보의 한 글자를 따서)인 이 소녀에게 그리 좋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애고아인데다가 바보라고 불리는 '호'가 해안가 마을인 '마루미 번'에 흘러들어온다...가 이 이야기의 시작이지만, 소설에 나타나지 않은 호의 삶을 추측해본다면 전에도 힘들고 앞으로도 힘들 것 같다. 의지할 핏줄 하나 없는데다가 요령부릴 줄 모르는 성격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을 듯하다. 하지만 호의 장점을 보아주고 그녀의 스승이나 가족, 친구가 되어주는 사람도 항상 있을 것 같다. 누구보다 불리한 입장이지만 나름대로 유니크한 이 소녀가 사는 법. '외딴집'을 읽는 내 나름대로의 키워드였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답게 '외딴집'에는 미스테리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하지만 살인사건은 사건에 얽힌 '사람들간의 관계'를 드러내는 장치일 뿐이다. 작은 마을인 마루비 번과 막부와의 긴장관계, 무시무시한 죄인의 귀양지가 된 마루비 번의 생존의 몸부림, 고향의 불리한 입장을 자신의 복수를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 등등.

어둠이 무서운 이유는 어둠을 틈타 음습하고 잔인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둠 속에서는 항상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막부의 죄인이자 그 죄질로 인해 이미 악령 취급을 받고 있는 '가가 님'이 귀양을 오게 되자 사람들은 가가 님이 재앙을 몰고 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 확신을 이용해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평화롭던 시골인 마루미번은 살인과 화재가 뒤섞인 한바탕 난리잔치를 벌이게 된다. 

그리고 그 난리 한 구석에 호가 있었다. 작은 마을 마루비번에서도 여기저기 떠돌던 호는 가가 님이 유폐되어 있는 저택에 하녀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잖아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모두 악령 가가 님이 일으키는 재앙으로 여겨지던 분위기에서 산제물로 바쳐졌다고 하면 너무 심한 말이 될까. 하지만 버린 패였던 호는 뜻밖에 가가 님과 만나게 되고, 마치 폭풍의 핵처럼 고요한 유폐지에서 가가님과 하루하루를 보내며 마루미번의 난리잔치에 휘말려 들어간다.

작은 새는 힘이 없어 새찬 바람 한 번에도 꺾일 수 있지만, 작은 덩치와 민첩함으로 장대비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호의 운명은 매사에 위태위태하지만 민첩하고 신중한 호는 나의 우려 속에서도 대견하게 버텨나갔다. 아마도 호의 행운의 얼마쯤은 그녀의 진면목을 알아주던 사람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호가 살아남기를 바라고, 호의 순수함을 사랑하던 사람들 때문에.

나는 남을 잘 부러워하지 않는 성격인데, 책을 보다가 유독 부러워한 '바보'가 둘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호'다. 순수함과 성실함으로 살아남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가. 호가 마루미번에서 얼마나 더 살지는 모르겠지만 파도가 치는 바닷가 언덕을 뛰어가며 '성님'과 '가가님'을 부르던 모습은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마치 내가 알고 지냈던 한 소녀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