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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야마부시꼬 - 일본 시나리오 걸작선 2
이마무라 쇼헤이 외 지음 / 시나리오친구들 / 2000년 2월
평점 :
품절
나라야마는 산의 이름, 즉 자연이다. 그리고 그 자연은 피크닉의 장소가 아닌 생명이 생명을 지키고 이어나가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비정한 자연이다. 우리가 과연 신석기 혁명으로 농경사회에 진입한 것만으로 문명인이 되었던 것일까? 이 책에서 접할 이야기는 길어봤자 몇백년 전밖에 되지 않는 한 마을에 대한 것이다. 나라야마부시꼬는 어떠한 철학도 없는, 생명을 유지하고 이어나가는 것만이 삶의 형태를 지배하는 사람들에 대한 밀착 르포라 할 만하다.
그곳에서 인간은 당연하다는 듯이 동물과 동격으로 묘사된다. 시궁쥐가 동면중인 뱀을 물어뜯고, 산무애뱀의 암수가 교미를 하고, 구렁이가 쥐를 삼키고 있는 중간 중간에 마을 사람들은 갓난아기를 남의 논에 내다버리고, 다른 집의 양곡을 훔친 사람의 식구 전체를 생매장하며, 아무런 절차도 없이 '우리 집에 와서 밥먹어'라는 말로 결혼을 대신하여 부부가 된다. 그리고 그들은 갓난아기를 버렸다는 것에 화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논이 더러워졌다는 것에 화를 내며, 팔수도 있고 죽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딸을 낳기를 바라기도 한다.
과연 끔직하다. 하지만 그 끔직함 가운에 묘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그 이야기에 몰입할 수밖에 없는 것은 수만년동안 인간은 그렇게 살아왔다고, 인간이란 생각하는 건설자들이 아닌, 자연과 짐승들과 한 피를 나누며 한 부족처럼 살아왔다는 것을 거리낌없이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세계 안에서의 '휴머니즘'이란 현대적 인권개념이 아니다. 자신을 낳고 사랑하는 이들을 빼앗고 기꺼이 바치기도 하며 결국은 그 속에 들어가야 하는 '자연'에 대한 도리일 뿐이다. '자연'이란 그들에게 가족과 마을 사람, 짐승, 일찍 죽은 이들, 팔아버린 딸들에 다름아닌 것이다. 나라야마 산은 그들을 모두 조우시켜 주는 신으로 믿어진다.
그리고 결국 내년이면 70세가 되는 할머니 오린이 나라야마 산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이 '휴머니즘'에 또 한명의 몸이 묻히게 된다. 아들은 어머니를 나라야마산으로 데려가는 것을 미루고 미루려 했지만 할머니의 재촉과 마을 사람들의 동의로 겨울이 시작되는 새벽에 할머니를 지게에 얹고 나라야마산으로 들어간다. 한 생명이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한 생명은 겨울이 되기 전에 죽어야 했던 것이다.
할머니 오린처럼 그것을 원했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 두려워하며 거부했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태도에 대해 칭찬과 비난을 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자연'에 대해 칭찬과 비난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일 것이다. 다만 할머니를 산속에 내려놓은 후 서로에게 주먹밥을 주기 위해 짧은 다툼을 하고, 나라야마로 들어가는 날 눈이 내리는 '좋은 징조'에 그나마 행복해하는 모자의 모습과, 할머니가 산으로 들어가는 날 각자의 이부자리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던 가족들의 얼굴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남아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