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윤의 유마경 풀이
통윤 지음, 일지 옮김 / 서광사 / 1999년 11월
평점 :
품절


인간에게 구원이란 나의 손을 잡아주고 아픔을 이해해주며 어루만져 주는 것일 것이다. 그것은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일 수도 있고 어떤 다른 사람이나 집단일 수도 있다. 그리고 세상이 바라는 구원의 한 축은 종교라는 집단이 담당해왔다. 하지만 유마경에 등장하는 이들은 대형 종교의 권위적인 구원이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같은 구원을 우리에게 내민다. 가장 순수한 사랑. 유마힐은 말한다. 중생이 병들었기 때문에 내가 병들었고 중생이 아파하기 때문에 내가 아픈 것이라고. 그런 유마힐에게는 이미 자신이 구원자라는 의식도 문둥이라는 의식도 없다. 오직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순수만이 있을 뿐이다.

여러 불경이 있지만 유마경만큼 쟁쟁한 이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경우도 별로 없을 것이다. 부처에서 시작해서 부처의 가장 유명한 제자들, 보살들, 그리고 불교의 전설적인 존재인 유마힐이 모두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권위를 부정하며 중생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느끼는 순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자기 반성을 거듭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읽는 내가 '그만하면 되지 않았나'라고 생각할 때도 그들은 끝내 자신의 마지막 이기까지 내던져 버린다.

유마경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느날, 유마힐이 아프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부처는 유마힐의 문명을 위해 제자들과 보살들을 불러모은다. 그리고 한 명 한 명에게 묻는다. '네가 가겠는가?' 제자들은 겸손하게 거절한다. 부처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선택됐을 그들이, 살았을 때 이미 신의 제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던 그들이, 더구나 자신들을 있게 한 가장 큰 장점을 득도하지 못한 걸림돌로 내세우며 유마힐의 문병을 고사한다.

학문을 잘하던 자는 학문을 잘해서 교만했다는 이유로, 봉사를 잘하던 자는 봉사를 잘 한다는 자의식에 빠졌었다는 이유로, 기억력이 좋은 자는 기억력이 좋은 것을 자만했다는 이유로 유마힐의 문병가는 소임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의 장점을 장점이 아닌 아집과 사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우쳐 준 사람이 유마힐이었기 때문이다. 신의 권위를 부정하고 나선 종교인 불교가, 성인의 권위까지 얼마나 철저히 깨부수는가를 보여주는 현장이 바로 유마경이다. 성인은 성인이라 특별시 되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미 순수로 다가가는 길에 걸림돌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단점을 줄이고 장점을 늘려가는 것을 가장 건강한 인생의 목표로 여긴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모두 칭찬하고 본받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단점보다도 장점이 인간의 순수를 망치고 자기 만족이라는 아집 속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유마경은 말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분신, 가난한 사람들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이처럼 애절한 로맨스는 본 적이 없다. 내노라하는 고전의 비극에서도, 사랑에 목숨걸기는 옛날 못지않은 오늘날의 넘쳐나는 러브스토리에서도 하급 관리 제부쉬낀만큼 안타까운 연서를 보낸 남자는 없었다. 그는 고귀한 태생이 아니다. 잘생기지도, 젊지도 않다. 성격이 대담하거나 적어도 지적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대부분이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소설에서 제부쉬낀의 편지는 그의 영원한 여인 바르바라의 편지와는 다르게 장황하며 감정적이고 조리가 없다. 하지만 그 어설프고 격한 편지는 결국 독자를 울리고 말 것이다. 적어도 가슴만큼은.

도스토예프스키 이전에 누가 보잘 것 없고 나이 많은 하급 관리에게 이런 로맨스를 부여할 수 있었을까? 하층민들의 고난한 생활을 묘사한 프랑스 자연주의나 러시아의 고골리, 실패한 아웃사이더를 그린 헤르만 헤세도 등장인물에게 이만한 감정이입을 하게 하지는 못했다. 단지 로맨스 이야기일 뿐인데! 제부쉬낀뿐이 아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은 동정이나 연민, 혐오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들의 존재감은 너무나 커서 읽는 이의 가슴에 멍이 들게 만들어 버린다. 단테나 괴테는 묘사할 꿈도 꿔보지 못했을 제부쉬낀의 날개 꺽이고 지적인 베아트리체 바르바라. 그녀가 조그만 방에서 바느질을 하던 모습, 오만한 대학생 아들을 절대적으로 숭배하고 사랑했던 한 노인의 마지막, 제부쉬낀의 이웃에 살던 나약한 가장 고르쉬꼬프의 최후는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린다.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미화된 게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들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들의 비굴하고 소박하며 다사다난한 인생을 확대경처럼, 그 시대는 물론 지금으로서도 너무나 갑작스럽게 느껴질 만큼 정직하게 들이댔을 뿐이다. 난 아직도 눈이 아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도원 - 일본 시나리오 걸작선 3
후루하타 야스오 외 지음 / 시나리오친구들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역시 현대 일본인들의 삶을 다룬 글들을 읽으면 고대나 중세의 일본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관통하는 정서야 있겠지만 어쩌다가 주어진 자신의 일에 평생을 묵묵히 헌신하는 자세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꾸준히 걸어온 메이지 유신 후의 일본인들의 정형일 것이다. 시나리오친구들에서 나온 다른 책 '나라야마부시꼬'가 상이한 분위기의 이야기 네 개를 실었다면, 이 책에는 '현대를 살아가는 일본인의 삶'이란 하나의 주제로 통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철도원'의 오토마츠는 그런 일본인의 삶을 시골 역을 배경으로 다소 낭만적이고 장인같은 분위기로 구현하고 있다. 그 시골 역은 눈이 많이 내리는 한적하고 아름다운 곳이고, 선량한 사람들과 평생을 함께 해 온 오토마츠는 그가 가장 기다려왔을지도 모르는 방법으로 숨을 거둔다. 하지만 '광주'의 남자는(그는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철로 대신 회사에 일평생을 매진하다 구조조정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해있다. 아내는 그와 이혼한 후의 삶을 계획하고 있으며 딸에게는 음침해서 싫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광주'는 아내와의 이혼에 합의해주기 위해 집에 돌아가는 남자의 상황을 그리는 비극적인 정형이다. 또 다른 이야기 '가을 국화'는 30년 동안 두 번 밖에 불이 나지 않은 마을에서 어렸을 때 본 탐스러운 국화를 만들기 위해 평생을 국화재배만을 해 온 소방서 직원 마노씨를 소개하고 있다. 어렸을 때 절에서 본 아름다운 국화를 재현하기 위한 그의 모습은 언뜻 '예술'로 보이지만 그 외에는 여유나 삶의 방법이 전혀 없고, 아내와 자식은 그런 그를 숨막히고 지루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앞의 두 명과 통한다. 그들을 그렇게 살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목표가 기차를 인도하는 것이든 회사일을 하는 것이든 국화를 재배하는 것이든 그들은 그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전혀 없어 정상적인 인간처럼 느껴지지가 않는다. 아니면 그것이 바로 '현대인'이라는 것일까?

이중에서 가장 희망적인 이야기는 '철탑 무사시노선'의 소년이다. 철도원의 오토마츠가 아무리 아내의 헌신과 딸의 늦은 사랑을 받았고, 그런 아름다운 장면이 영화 '철도원'이 관객들의 심금을 울린 이유일지라도 평생 하나의 대상에만 사로잡혀 살았다는 점에서 다른 두 이야기의 남자들과 다를 것이 없다.

그에 반해 '철탑 무사시노선'의 소년은 철탑이란 대상에 매진한다는 점에서 어른 주인공들과 같지만 온전히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는 점에서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소년은 어쩌다가 주어진 상황에 자신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철탑 1호의 정체를 보기 위해 수십개의 철탑을 순례한다. 소년이 철탑 1호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느꼈느냐에 따라 그의 삶이 앞의 이야기의 일본인들처럼 될 것인지 다른 무엇을 얻을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말그대로 '시나리오걸작선'이란 타이틀이 아깝지 않은 책이었지만 한가지 아쉬운 것은 일본 남자들의 삶을 다루고 있을뿐 아내와 딸로만 나오는 일본 여성들의 삶은 관찰되거나 묘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 여성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으며, 무엇이 부족하며,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시츠네 - 일본 고전 영웅소설
이우희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재밌긴 하지만 대작은 아니다. 요시츠네에 대한 이야기를 전래동화처럼 알고 있고, 그에 대한 애정이 녹아있는 일본 독자들을 위해 쓰여져서 그런지 국제적인 공감을 받기에는 부족하다. 개인적인 원한 이외에 요시츠네가 군사를 일으키는 사회적인 정황과 필연성을 알려주는 설명도 부족하고, 육친간에 죽고 죽이는 상황에서 인물들이 느끼는 쓰라림도 밋밋할 뿐이며 요시츠네를 향한 부하들의 충성심도 박력이 없다.

그것은 요시츠네의 매력이 '아름답다, 아름답다'고만 할 뿐 어떤 인품과 능력이 있는지 충분히 전달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좀 심한 비평을 덧붙이자면 '겐지모노가타리'란 고전소설에서도 느꼈다시피 일본 고전은 삶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분출되는 감정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당연히 느껴야 하는 정서적인 의무감이라도 다하려는 것처럼 꾸민듯한 감정이 많은 것 같다. 외국 독자의 무지인지는 모르겠으나 단순히 불운한 무사 귀족 이야기 이상의 가치가 있는 거라면 내가 먼저 알고싶다. 단, 책 앞에 실린 그림들의 색감은 무척 멋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자 철학 - 노자의 연대고증과 텍스트분석
유소감 지음, 김용섭 옮김 / 청계(휴먼필드) / 2000년 11월
평점 :
품절


나는 노자 철학에 매료되면서도 그것의 현실적인 체현은 불가능하다고 여겼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었을 때도 같은 느낌이었다. 과연 이 세상에 이런 소년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데미안과 에바 부인같은 모자 관계가 가능할 수 있을까? (멋지긴 하지만.) 하지만 그 몇년 뒤에 데미안과 에바 부인같이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이번에는 노자 철학에 대해 같은 증명을 받게 되었다.

그는 실존 인물로 한제국의 멸망기에 살았던 삼국지의 유비 현덕이다. 관우와 장비라는 걸출한 인물들의 진심어린 충정과 사랑을 받았으며 희대의 천재 제갈공명을 오른팔로 두었고 민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유비. 하지만 그는 자주 미련하고 어리석어보이며 보는 사람이 화가 날 정도로 자기 이익을 챙길 줄 몰랐다. (이미 챙긴 이익이라도 쉽게 내놓았다.) 그래서 조조의 매력이 득세하는 요즘에는 약간 모자르지만 주위 사람의 도움으로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인물로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유비같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강하면서도 기골 없는 인물로 무시당하기도 쉽지 않다.
삼국지와 노자를 따로 읽을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그가 노자가 말한 이상적인 인간상을 체현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것 같다. 약한 듯 하면서도 약하지 않았고 없는 듯 하면서도 가장 큰 것을 가지고 있었다. 노자 철학은 이미 수천년전에 한 사람에 의해 증명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유비처럼 이름을 드날린 사람이 아니라 역사의 붓질앞에 침묵한 사람들까지 합하면 그 수는 적지 않을 것이다. 현대인이 궁금해하는 것과는 달린 노자의 현실성은 계속 증명이 되어왔다.

그렇다면 노자 철학의 현대성은 어떨까? 동아시아 철학은 과학에 대해 완벽할 수준의 면역력을 가지고 있다. 서양 철학이 중세에는 신학의 하수인이 되었다가 근대 이후에는 과학의 하수인이 되었다는 것에 비하면 놀라운 일이다. 그게 동양이 최근세에 서양 앞에 무릎 꿇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는 하지만 이제와서는 새로운 대안 철학으로 각광받고 있다. 과연 슬픈 일 앞에서도 슬퍼하지 말고 기쁜 일 앞에서도 기뻐하지 말라는 노자의 말 그대로가 아닌가? 아무리 쉽게 이해가 안되는 형이상학적인 노자 철학이라도 지식을 위한 지식을 추구했던 서양 철학과 성격부터가 판이하게 다르다.

노자를 비롯한 동양 철학은 항상 '삶'을 염두에 두었다는 지적을 끝으로 노자 철학의 현대성에 관해서는 이 책의 저자인 유소감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면서 끝내야겠다. '신은 죽었다란 말에 우리는 그렇지 않다, 여전히 도가 있다고 대답할 수 있다. ...도는 과학과 종교 사이에 있는 개념이다. 창조설을 부정한다는 점에서는 종교와 다르고 과학에 가까우며, 종국적인 관심과 직관적인 체험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과학과 다르고 종교에 가깝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과학적 탐구정신을 드러낸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주와 인생에 대한 종교의 궁극적 관심을 드러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