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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가난한 사람들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ㅣ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이처럼 애절한 로맨스는 본 적이 없다. 내노라하는 고전의 비극에서도, 사랑에 목숨걸기는 옛날 못지않은 오늘날의 넘쳐나는 러브스토리에서도 하급 관리 제부쉬낀만큼 안타까운 연서를 보낸 남자는 없었다. 그는 고귀한 태생이 아니다. 잘생기지도, 젊지도 않다. 성격이 대담하거나 적어도 지적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대부분이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소설에서 제부쉬낀의 편지는 그의 영원한 여인 바르바라의 편지와는 다르게 장황하며 감정적이고 조리가 없다. 하지만 그 어설프고 격한 편지는 결국 독자를 울리고 말 것이다. 적어도 가슴만큼은.
도스토예프스키 이전에 누가 보잘 것 없고 나이 많은 하급 관리에게 이런 로맨스를 부여할 수 있었을까? 하층민들의 고난한 생활을 묘사한 프랑스 자연주의나 러시아의 고골리, 실패한 아웃사이더를 그린 헤르만 헤세도 등장인물에게 이만한 감정이입을 하게 하지는 못했다. 단지 로맨스 이야기일 뿐인데! 제부쉬낀뿐이 아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은 동정이나 연민, 혐오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들의 존재감은 너무나 커서 읽는 이의 가슴에 멍이 들게 만들어 버린다. 단테나 괴테는 묘사할 꿈도 꿔보지 못했을 제부쉬낀의 날개 꺽이고 지적인 베아트리체 바르바라. 그녀가 조그만 방에서 바느질을 하던 모습, 오만한 대학생 아들을 절대적으로 숭배하고 사랑했던 한 노인의 마지막, 제부쉬낀의 이웃에 살던 나약한 가장 고르쉬꼬프의 최후는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린다.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미화된 게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들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들의 비굴하고 소박하며 다사다난한 인생을 확대경처럼, 그 시대는 물론 지금으로서도 너무나 갑작스럽게 느껴질 만큼 정직하게 들이댔을 뿐이다. 난 아직도 눈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