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 밀레니엄 프로파일 1
로버트 서비스 지음, 정승현 외 옮김 / 시학사 / 2001년 9월
평점 :
품절


역사에서 혁명가는 도처에서 움직이고 있다. 전제적인 지배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거대 권력으로 사람들을 휘어잡고자하는 곳은 어디든지 그에 반대해 새 세계를 부르짖는 혁명가가 있었다. 성경의 예언자들에서부터 동학 농민혁명까지. 그리고 최근에 만나게 된 혁명가는 시몬느 베이유와 체 게바라, 그리고 레닌이었다.

그들은 모두 유복한 가정 출신이었지만 세상의 아픔에 무관심하게 대처하는 강심장을 지니지 못한 정열가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사심이 없었으며 민족과 국가를 초월해서 인간을 위해 활동했던 세계주의자들이었다. 하지만 시몬느 베이유, 체 게바라와 레닌 사이에는 분명 차이점이 있다. 그리고 그 차이점으로 인해 시몬느 베이유와 체 게바라가 실패하고 레닌만이 성공했다는 것이 이 세상의 한계며 끊임없이 역사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들의 철학은 달랐지만 목적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가 삶의 권리를 쟁취하는 것이었다. 시몬느 베이유는 그런 신념을 실천하고자 최소한의 따듯함과 배부름도 거부한 채 아사했고 체 게바라는 타국의 혁명을 위해 게릴라의 세계로 뛰어들었다가 결국 게릴라로서 죽었다. 그들은 혁명가들이었지만 힘없이 살다가 비참하게 죽었다. 그에 반해 결국 성공한 것은 양갓집 처녀 두 명을 혁명 자금을 위해 이용하는 재주가 있었으며 러시아 민중의 죽음에 대해 무심했고 의견을 달리하는 혁명가들을 무력으로 배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정치가 레닌이었다.

레닌이 사회개혁가에 가까웠느냐 독재자에 가까웠느냐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분분한 모양이지만 그는 개혁을 위해서라면 피를 볼 수도 있으며 민중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 비정하고 결단력있는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지금은 사회주의가 비웃음만 당하고 있지만 레닌 체계는 70년이나 생존했다.

경쟁도 좋고 돈도 좋다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자본주의와 달리 만인의 평등을 (어찌댔든) 추구한 사회주의가 70년 이상 갔다는 것은 분명 앞으로도 무시될 수 없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 70년 체제는 레닌과 스탈린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몬느 베이유나 체 게바라가 사회주의 정권을 세웠다면 물론 약자의 소외없이 개혁이 진행되었겠지만 그토록 오래 가지도 못했고 미국을 위협할 만큼 강국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현대 혁명가의 대표격인 레닌. 가장 성공한 혁명가. 그에 대한 평전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했던 것은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를 지키려면 오히려 계속 핍박받고 오해받을 수밖에 없으며 강해지려면 그만한 나의 예속을 대가로 치러야한다는 것이었다. 레닌은 강한 사회주의 정권이라는 힘을 얻기 위해 러시아 민중의 예속을 요구했고 자신의 욕망을 억눌렀다. 그의 70년 체제는 영원히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는 얼마나 옳았는가? 그리고 후세인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신구라
다케다 이즈모 외 지음, 최관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평점 :
품절


같은 인간이 사는 모습이라도 시대마다 사회구조나 가치관은 판이하게 다르게 마련이어서 오늘날의 잣대로 옛 일을 섯불리 평가할 수는 없다. 시대를 초월하는 초인이 아닌 이상 사람은 그 시대 안에서 최선의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고, 후세인은 그것을 존중한다. 하지만 시대의 단점에 매몰돼버려 그 시대를 비판받게 만들고, 후세인들에게도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 또한 분명히 있다. 예컨데 미국의 노예제도는, 아무리 인종간의 평등이나 인권의 개념이 없었던 시대의 일이라고 해도 동시대인들을 헛된 고통 속에 밀어넣었고, 후세인들의 비난도 피해가지 못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주신구라'는 그만큼 심각하지도 않고 단순하지도 않다. '주신구라'는 미국 영화에까지 모티브가 도입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47사무라이의 복수이야기다. 주군의 억울한 할복과 주군 집안의 몰락에 복수를 다짐한 사무라이들은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바보, 주정뱅이 흉내를 내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복수를 계획해간다. 심지어는 장인이나 부모의 목숨도 충절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희생될 수 있다고 여기며 자금 마련을 위해 아내를 유곽에 팔기도 하고 아내는 그것을 명예스러운 의무로 여긴다. 나라가 팔렸다고 한들 이보다 더한 희생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하! 허무한 것은 그들의 맹목적이고 나아가 47명 사무라이의 죽음까지도 초래한 복수의 원인은 그들 주군의 하찮은 오해 때문이었다는 데에 있다. 정숙한 아내를 사이에 두고 남편과 남의 아내에 욕심을 품었던 한 남자사이의 다툼, 높은 신분의 자존심때문이라면 둘의 결투 정도로 끝났으면 될 일에 불과했다. 더구나 그 아내가 바람을 피거나 겁탈을 당한 것도 아니었다. 몇 마디 모욕적인 말로 생긴 오해 때문에 남편인 주군이 죽음까지 간 상황은 그렇다쳐도 그 밑에 있던 사무라이들은 왜 그런 희생을 해야 했을까. 아무런 보편적인 정의도 명분도 없는 복수극에 47사무라이와 그 주변 사람들은 불나비처럼 뛰어들었다.

이것이 사무라이들의 절의라면 참으로 가소롭다. 이 사건은 이미 바쿠후가 성립된 후인 1700년대 초반에 일어난 일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국시대는 이미 끝나고 사무라이들이 더이상 칼을 잡을 필요가 없던 시대에, 그 사무라이들은 '사무라이답게' 목숨을 버릴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오히려 생활 자체가 죽음의 친구였던 전국시대에는 사무라이들에게 그런 절의의 개념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주군과의 맹세는 계약에 가까웠고 목숨이 위태로우면 배신도 번번히 일어났다. 그것이 오히려 인간적이고 자연스럽지 않은가. 47사무라이의 복수와 죽음, 그리고 그로 인해 성립한 작품의 광범위한 인기는, 사무라이의 존재가 이미 픽션에 불과했던 시대의 소설같은 현상이었다.

미국 영화감독과, (번역자의 말에 의하면) 루즈벨트 대통령과 중국 혁명가들에게까지 감명을 주었던 작품인 '주신구라'. '주신구라'가 감명을 줬다면 정의라고 생각되는 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용기와 추진력, 그리고 명예를 지킬 줄 아는 인간군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오늘날까지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주신구라'는 비판적인 재해석이 필요한 게 아닐까. 그 비판적인 재해석 자체가 진짜 명예와 용기는 무엇인지를 드러나게 해줄 테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외수 지음 / 동문선 / 1996년 2월
평점 :
절판


40대의 남자가 있다. 그는 오늘 권고사직을 당했다. 물론 딱히 잘못한 일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공중전화로 친구에게 전화를 걸곤 한다. (왠지 집에서는 걸지 못한다.) 그는 집 가까운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신다. 이 정도면 그의 무력에의 굴복으로 점철되었던 과거사를 끄집어내지 않아도 아, 하는 감이 올 것이다. 그 남자는 몇 마디 소개로도 모든 사람에게 정체를 들켜버릴 만큼 '대중적(!)'인 사람이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사람 속에 내재되어 있는 현대인을 상징한다.

그런데 그에게는 한 가지 특별난 점이 있다. 칼에 대한 정열이 그것인데, 단순히 학창시절에 많이 맞으면서 약한 힘에 대한 위안으로 갖고 다닌 과도로 시작해 지금은 소형 박물관을 차릴 만한 칼 전문 수집가가 되었다. 그리고 칼에 관계된 거라면 이론만큼은 세상에서 꼽을 수 있어서 몇 시간이라도 떠들 수 있을 정도다.

그는 평범하고, 현실적으로 무력하지만 사실은 무서운 정열을 지닌 사내인 것이다. 그리고 그 정열은 결국 권고사직을 당한 후 일을 벌이게 된다. 비록 남에 의해 직장에서 쫓겨난 신세지만 그는 그때부터 신검이라 불리는 칼을 만들기 위해 모든 걸 바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아내에게 무시당하고(당연하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미쳤다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그는 신검을 만드는 일에 착수한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을 비우고 하늘에 선택됐다고 한들 그의 동기는 열등감 때문이었다. 그가 아무리 한동안 신선으로 묘사되곤 있지만 마지막까지의 그의 행동과 심리에서 느껴지는 것은 '열등감' 하나였다. 그리고 욕망뿐. 슬픔도, 한도 없었다. 세상을 태워버릴만한 분노조차도 아니었다. (그가 유일하게 하는 욕은 '염병할'이라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는 선량하긴 해도 순수하진 않았다. 그래서 그런 최후를 맞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약할 수 있다. 특히 권력(돈, 빽)이 없는 상태에서 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칼'의 주인공은 너무나 인간적인 울림과 색채가 없는 사람이었다. 칼이 잔인한 본성을 포기하게 하기 위해 사람의 피가 필요했다는 설정은 그 때문에 핑계로 보인다. 이외수가 말하는 궁극적인 '인을 위해서'는 설득력을 주지 못했다. 그는 그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그를 찾아온 불가사의한 노인을 끌여들이지 않더라도. 아무리 신선 가까운 경지에 갔었다고 한들 그는 신내림을 받을 만큼 순수한 울림과 색채를 갖지 못한 범용한 현대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분신, 가난한 사람들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분신은 여러모로 번뜩이는 작품이다. 밀도높은 문장은 수많은 독자를 매료시켰던 도스토예프스키적 문체를 예고하고 있고 현대인의 내면을 완벽하게 형상화시킨 주인공 골랴드낀은 동시에 19세기 베쩨르부르크에 잘 녹아 있다. 20세기, 그리고 21세기 시대상까지 체현한 작가의 인물들이 한편으론 안개낀 베쩨르부르크의 골목을 헤매고 다니는 고전적인 이미지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거의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지 않지만 산업화시대의 공무원이자 비열하지도 않지만 선하지도 않은, 적당적당하기도 하고 내면의 콤플렉스를 티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범용한 골랴드낀의 묘사는 매우 생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발표 당시에는 비평가와 독자의 냉대를 받았다는 것 또한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데, 혼란스럽고 정리되지 않는 분위기는 끝까지 갈수록 수습이 안되고 고골리의 <코>를 뛰어넘고자 했던 야망 또한 성공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작 <가난한 사람들>에 비해 도스토예프스키답다고 할 수 있을 이 소재를 작가는 의욕이 앞섰을 뿐 충분히 소화시키지 못했던 것 같다.

데뷔작 이후의 줄줄이 이어진 실패로 영원히 빛을 볼 것 같지 않던 도스토예프스키가 다시 세계사에 남을 걸작을 탄생시키기까지는 20년의 세월을 담보로 내놔야 했으니 그 또한 걸작을 아무렇지도 않게 탄생시키는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천재가 아니라 동정심이 일 정도의 노력을 기울인 현대의 천재였던 것이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투르게네프나 톨스토이같은 길을 가지 않았기에 골랴드낀같은 인물을 탄생시키는 전혀 새로운 유형의 작가가 됐다. 자신과 똑같은 인물이 나타나 모든 생활을 곤란하게 하고 직장에서도 신용을 잃으며 결국 끝간데까지 가게 만드는 위기 속에서도 도움을 청할 가족이나 친구의 가능성조차 나오지 나오지 않는 <분신>의 골랴드낀. 이 골랴드낀이란 '현대인'을 비참하게 만든 분신의 정체를 뭘까?

그 분신의 정체가 뭐였는지는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나로서는 그 분신이 어느 순간에 굴러들어온 평범한 비열한이라고 믿고 싶지는 않다. 지금 시대에 대입해봐도, 권력이나 매스미디어같은 거대한 것에 침투당한 나의 분신(내면)에 의해 파멸한는 것보다 아무 중요성도 없는 어둡고 하찮은 나의 존재를 반영하고 있을 뿐인 분신(내면)에 파멸하는 것이 한층 현대의 무시무시함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커밍 아웃 - 300 Q&A About Gay and Lesbian People
에릭 마커스 지음 / 박영률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절판


세상의 금기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금기가 생겨난 동기를 보면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 예를 들어 절도, 강도, 살인같은 금기는 남에게 피해와 상처를 주면 안된다는 목적에서 생겨났다. 타인에 대한 폭력이 결국 공동체나 무리, 집단을 해치게 될 것이라는 보편적인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이기를 채우기 위한 타인에 대한 폭력이 금기시된 동시에 온갖 부당한 차별 또한 생겨나 금기라는 법으로 자리잡게 됐다. 여성에 대한 차별, 아이에 대한 차별, 장애자에 대한 차별, 타민족, 국가에 대한 차별,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동성애자를 포함한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다.

인류는 타인에 대한 폭력의 허용이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위기감과 함께 약자에 대한 금기와 차별이 공동체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 알아차렸던 것이다. 전쟁이 일상이었던 지난 수천년간 여성과 아이와 약자와 소수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감내함으로써 지배 남성들에게 몰아준 권력은 공동체를 더욱 무력으로 강하게 만들었을테니까. 오늘날 우리가 동성애자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도 지난 수천년간 우리에게 이어져왔던 정서가 금기를 풀지 못하고 유지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동성애자. 그들을 용납해서는 안되고 싫어하는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정당성과 설득력을 지닌 이유가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단순히 불결하고 비도덕적이라는데서부터 왜 그 많은 이성을 놔두고 친구로서의 관계여야하는 동성을 사랑하냐는 반문도 있다. 에이즈의 주범이라는 오해와 사회를 타락시키고 가족제도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확신도 만만치 않다. 누가 이런 물음에 차근차근, 이성적으로, 정확한 지식과 함께, 흥분하지 않고, 상냥하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이 책은 그 역할을 기대 이상으로 해냈다. 나 또한 동성애에 대해 상식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상식이 틀린 부분도 상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전적으로 이 책 때문이다. 또한 궁금했지만 차마 묻지 못했을 질문에도 상세하게 답을 해주고 있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단면들까지 저자는 차근차근 짚어주고 있다. 낯뜨거운 질문들에까지 성실히 답을 해주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한 개방이야말로 진정한 이해를 부를 수 있음을 이 책을 저자를 알았기 때문인 것 같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 배타와 폭력은 같다. 인종을 차별하고 여성과 아이를 차별하고 동성애자를 차별했던 것은 그들에 대한 무지 때문이었다. 그들은 수천년동안 알려지지 않은 채 기득권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세력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방치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이상,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한 이상 그들의 말을 막고 귀를 닫을 수는 없다. 이제는 듣는 것 또한 의무인 시대로 접어들지 않았을까? 그것은 인류가 성숙해졌다는 증거일 수도 있을테니. 그 첫걸음으로 이 책은 손색이 없다. 이 책은 전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철학과 의도는 모든 소수자에 대한 이해와 인정을 촉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