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칼
이외수 지음 / 동문선 / 1996년 2월
평점 :
절판
40대의 남자가 있다. 그는 오늘 권고사직을 당했다. 물론 딱히 잘못한 일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공중전화로 친구에게 전화를 걸곤 한다. (왠지 집에서는 걸지 못한다.) 그는 집 가까운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신다. 이 정도면 그의 무력에의 굴복으로 점철되었던 과거사를 끄집어내지 않아도 아, 하는 감이 올 것이다. 그 남자는 몇 마디 소개로도 모든 사람에게 정체를 들켜버릴 만큼 '대중적(!)'인 사람이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사람 속에 내재되어 있는 현대인을 상징한다.
그런데 그에게는 한 가지 특별난 점이 있다. 칼에 대한 정열이 그것인데, 단순히 학창시절에 많이 맞으면서 약한 힘에 대한 위안으로 갖고 다닌 과도로 시작해 지금은 소형 박물관을 차릴 만한 칼 전문 수집가가 되었다. 그리고 칼에 관계된 거라면 이론만큼은 세상에서 꼽을 수 있어서 몇 시간이라도 떠들 수 있을 정도다.
그는 평범하고, 현실적으로 무력하지만 사실은 무서운 정열을 지닌 사내인 것이다. 그리고 그 정열은 결국 권고사직을 당한 후 일을 벌이게 된다. 비록 남에 의해 직장에서 쫓겨난 신세지만 그는 그때부터 신검이라 불리는 칼을 만들기 위해 모든 걸 바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아내에게 무시당하고(당연하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미쳤다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그는 신검을 만드는 일에 착수한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을 비우고 하늘에 선택됐다고 한들 그의 동기는 열등감 때문이었다. 그가 아무리 한동안 신선으로 묘사되곤 있지만 마지막까지의 그의 행동과 심리에서 느껴지는 것은 '열등감' 하나였다. 그리고 욕망뿐. 슬픔도, 한도 없었다. 세상을 태워버릴만한 분노조차도 아니었다. (그가 유일하게 하는 욕은 '염병할'이라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는 선량하긴 해도 순수하진 않았다. 그래서 그런 최후를 맞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약할 수 있다. 특히 권력(돈, 빽)이 없는 상태에서 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칼'의 주인공은 너무나 인간적인 울림과 색채가 없는 사람이었다. 칼이 잔인한 본성을 포기하게 하기 위해 사람의 피가 필요했다는 설정은 그 때문에 핑계로 보인다. 이외수가 말하는 궁극적인 '인을 위해서'는 설득력을 주지 못했다. 그는 그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그를 찾아온 불가사의한 노인을 끌여들이지 않더라도. 아무리 신선 가까운 경지에 갔었다고 한들 그는 신내림을 받을 만큼 순수한 울림과 색채를 갖지 못한 범용한 현대인에 불과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