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심장
츠쯔이 도모미 외 / 시나리오친구들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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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후지오. 32세. 언뜻 보면 다정하고 사심없는 얼굴이지만, 사람을 무지막지하게 죽일 수 있는 광기가 잠재되어 있다. 여자를 연달아 죽이지만 '헤븐리 블루'라는 나팔꽃의 이름을 가르쳐준 여인을 플라토닉하게 사랑한다. 독자들이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여자: 유키꼬. 39세. 기모노 재단사. 고적한 바닷가에 살고 있음. 취미로 나팔꽃을 키우고 지하실에서 맥주를 즐김. 내향적인 성격이지만 후지오를 친구처럼 대해준다. 그리고 그를 사랑한다.

제목: 천상의 푸르름. <또 하나의 심장>에 수록되어 있는 다섯 이야기 중 하나. 서정적인 제목이지만 내용은 결코 서정적이지 않다. 그리고 황당한 소재지만 내용은 전혀 황당하지 않다. 오히려 다 읽고나면 가슴을 쥐어뜯기는 느낌을 맛볼 것이며 자기 전에 읽었다면 한동안 잠이 안 올수도 있다. 이상은 로맨스 이야기를 싫어하는 축에 속하는 독자의 의견이었음. 감상: 드라마 대본이지만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음. 이런 드라마라면 무조건 환영. 무서운 아름다움을 선사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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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11 - 조선과 일본의 7년전쟁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11
이이화 지음 / 한길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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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비극은 난세마다 무능력한 지도자를 만난다는 것이고 행운은 그럼에도 끝내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약소민족중에 한민족만큼 생명력이 질긴 민족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는 무수한 외침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참담한 것 중의 하나가 임진왜란이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책이 바로잡은 바에 의하면 '조일전쟁')은 조선사회의 모든 모순을 폭로한 대란이기도 했다.

조선사회가 드러낸 가장 큰 모순은 조선조의 특징인 배타성이다. 중국에 대한 숭배와 일본에 대한 무시로 대표되는 조선조의 배타성은 외교 미숙을 낳았고 무능력한 중국에 전적으로 기대고 모든 지휘권을 넘겨주게 했으며, 선조의 왕의로서의 의지마저 증발시켜 버렸다. 그뿐인가. 양반이고 군사들이고 할 것 없이 모두 도망가 조선조의 문무 대립이라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약체성의 일치를 보여줬다.

결국은 청야전술도 아니면서 한 나라의 수도를 몇시간만에 무혈점령하게 허용한 세계 전쟁사에서도 희귀할 풍경을 연출했다. 외교적 미숙과 일본에 대한 무시는 일단 터진 전쟁을 일찍 끝내는 최소한의 의무도 이행하지 못했다. 전 아시아를 지배하겠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망상에는 능란한 사람도 대처하기 어려웠겠지만 조선 정부는 상식을 초월한 뻣뻣한 대응으로 결국 자기 나라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질질 끌고 재침까지 허용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말하면 조선왕조는 조일전쟁때 교체가 되도 하나 아쉬울 것 없는 왕조였다.

그렇다면 조일전쟁은 한반도에 고춧가루 전래로 인한 음식문화의 발전과 일본의 대규모 조선 장인 납치로 인한 도자기 문화의 발전 빼고는 보여준 게 없었을까? 그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의병 활동을 들 수 있는데, 사실 명군이 들어오기 전에는 정예군이 아니라 의병들이 일본군에 전적으로 타격을 입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활약이 대단했다. 가히 베트남 전쟁 때 미군에 대항한 베트콩을 연상하게 하는 활동이었던 것 같다.

믿을 만한 중앙권력도 없는 상황에서 모든 재산을 쏟아붓고 생명을 걸었던 그들의 활동은 외침에 대항하는 민족의 자생력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줬다. 그리고 전쟁이 터지자 관군들도 버리고 간 조선왕조실록을 어깨에 지고 피난을 간 무명의 선비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야말로 민족 최대 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을 구해낸 힘없는 민중의 파워를 보여주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조일전쟁은 결국 7년만에 끝났다. 그리고 남은 것은 시체까지도 파먹는 민중의 굶주림과 자존심의 타격이었다. 전쟁에서 역사의 교훈을 찾고 의미를 따지는 것은 예의없는 것이다. 위의 참혹함만으로 현대인에게 모든 걸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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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온들의 아침식사
커트 보네거트 지음, 이형식 옮김 / 금문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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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작가가 무정부주의자란 것은 아니다. 나는 작가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글은 왠만한 무정부주의자들을 뺨칠 정도로 사회 도전적이다. 그리고 그 도발은 더없이 익살맞고 능청스럽게 진행돼 책을 덮지 않는 한 독자는 그의 펜대에 놀아날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피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오지만 중간에는 한참 황당하다가 결국에는 감탄한 채 그의 스타일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내 취향은 아니어도 와, 이런 작가도 있구나, 이런 게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리는구나 하는 것들을 실감할 수 있다.
여성과 남성의 성기와 아인슈타인 공식의 결함에 대해 동시에 늘어놓을 수 있는 작가의 글, (그가 애정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한) 조국 미국과, (그가 존중하는 것이 분명한) 아프리카의 나라를 동시에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작가의 글을 한번쯤 읽고 싶다면, 더 이상의 선택은 없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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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의 이단자들
중국철학회 지음 / 예문서원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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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철학은 출생부터 그 맥이 끊긴 적이 없다. 종교나 과학에도 함몰되지 않고 그 줄기를 수천년간 이어온 셈인데, 그 중심은 유교철학, 도교철학, 불교철학이었다. 그러나 면면히 이어온 인문학의 전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사상사에도 빛과 그림자는 존재했는데, 대개 그 그림자는 경직화된 유교사상으로 인한 폐혜였다. 도교나 불교가 존재했다고는 하나 유교가 왕좌를 빼앗긴 적은 없었고, 과거제의 오랜 시행은 유교를 움직일 수 없는 위치에 자리잡게 했다. 중국의 엘리트인 관료들과 지식층, 그리고 입신양명을 해야 하는 일반인들의 바램마저 한 몸에 받았으니.

이 책에는 10명의 아웃사이더들이 나오지만 내가 가장 주목했던 사상가는 유교의 폐습에 반대했던 '분서'의 저자 이지였다. 그는 과거에 합격해 관직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결국 이단으로 몰려 자살하듯 죽어야 했던 풍운아였다. 태워버려야 할 책이란 뜻의 '분서', 묻어버려야 할 책이란 뜻의 '잠서'라는 제목의 책을 지은 그는 남들이 이단으로 몰기 전에 이미 이단을 자처했다.

어릴 때부터 공맹을 되뇌이는 동료 지식인들을 비웃으며 '따라 짖기는 거부한 한 마리 개'가 되었고 관학과 거짓 도학을 거부하며 '윤리나 물리는 옷 입고 밥 먹는 것처럼 일상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거침없는 사상은 끝내 음양과 천지 이론을 들먹이며 고착화시켰던 남녀 차별마저도 비판하고 경전과 대중 소설의 구분은 없다고 했으며 공자보다 어린아이의 동심이 더 중요하다고 설파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불과 16세기에, 중국에서 태어난 인물의 주장치곤 파격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깨어있는 자는 시대의 구속을 받지 않는 것일까? 동시대인을 격분시킨 그의 말로는 예상할 수 있는 바였지만 그의 거침없는 주장들은 자체로 중국철학에 활기를 불어넣었을 것이다. 정통은 항상 이단을 처벌하고 단죄하지만 이단을 단죄함으로써 그 권력을 더욱 공고히하고 더불어 신선한 피까지도 수혈받는 것이니. 중국철학사가 끝내 그와 같은 사상가에 존경을 표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앞에도 말했듯이 이 책에는 10명의 사상가가 나온다. 이지는 <중국철학의 이단자들>에 소개된 사람치고는 체계있는 저술활동을 한 사람이지만 나머지 사상가들은 활기와 파격은 앞섰지만 체계는 이지만도 못했고 다른 '정통' 사상가들만도 못했다는건 안타까운 점이다. 왜 반 권력적인 생각을 주장할 수 있는 이단사상가들은 체계적인 저술을 남기지 못하는 것일까? 안타깝지만 그것이 그들의 한계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들의 사상을 소개받기보다는 그들의 순수함과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의 진지한 태도를 소개받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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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이치 풍경 1
야나하라 노조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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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인간과 로봇과의 동거. 이 정도면 만화나 영화에서 이미 많이 접할 수 있었다. 하나같이 인간을 닮은 이 로봇들은 로봇이라는 콤플렉스와 아픔 때문에 인간을 그리워하며 애정을 구하기도 하고 인간 세상에 분노하고 파괴시키기도 했다. 전자가 순진하고 착한 로봇이라면 후자는 강하고 악마적인 로봇일 것이다. 외계인의 경우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선악 이분법을 편리하게 적용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 것 같다. 이성, 소수자, 타민족같은 고전적인 주제에서도 그러더니 로봇이나 외계인이라는 사이버틱한 주제에 와서도 유구한 편견의 전통은 여전하다.

<마루이치 풍경>은 이 구분을 '상식'이라는 무기로 가볍게 물리친다. 어디에나 있을 것 같지만 정작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는 '상식'. 이 '상식'은 로봇에 대해 자연스럽게 정의를 내린다. 로봇은 기계며, 인간의 복잡다단함을 닮을 수 없다. 로봇이 인간 흉내를 낼 수 있다 하더라도 정작 문제가 되는 단 하나의 존재는 진짜 '인간' 뿐이다라고.

사실 이 정의는 다소 뻔뻔스럽다. 무수한 만화 캐릭터에 한 번도 눈길을 안 줬던 내게 만약 '마루이치'라는 캐릭터 상품이 있다면 모조리 사고 싶다고 느꼈을 정도로 귀여운 로봇을 보여준 후에 로봇은 로봇일 뿐이다라고 능청스럽게 말하고 있으니.

커다란 선글라스같은 눈과 작은 키. 동물 인형같은 무표정. 창의성은 없지만 너무나 성실한 마루이치. 이 로봇과 얽히면서 사람들은 정을 주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지만 마루이치는 사람이 입력해준 동작밖에 하지 못하는 귀여운 로봇일 뿐이다. 인간과 로봇을 감정의 타래로 얽히게 만들고 인간과 인간을 얽히게 만드는 것은 예나 지금에나 인간의 마음일 뿐이었다.

이 귀여운 로봇을 탄생시킨 작가는 계속 말한다. 로봇과 기계는 인간을 편리하게 만들어주며, 인간의 소외는 로봇과 기계 때문이 아니다. 노동해야 하는 의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협동할 수 밖에 없었던 인간은 이제 없으며, 인간은 자유로워졌다. 오히려 로봇과 기계로 지리한 반복 노동에서 벗어나게 된 인간은 서로를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된 때가 온 것이라고. 나아가 로봇 마루이치를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은 로봇의 인간다움 때문이 아닌 로봇을 사랑스럽게 보는 인간의 감정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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