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왕을 죽였는가
이덕일 / 푸른역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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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살은 어떤 배경이나 이유를 가지고 있던간에 음습하고 비열한 방법이다. 거기에는 최소한의 인륜이나 페어플레이도 찾아볼 수 없는 맹목적인 목적의식만이 있을 뿐이다. 이 책에 의하면 조선왕조 전체 왕의 3분의 1이 독살혐의로 비명에 죽었다고 한다. 시민의식이 없는 왕조시대라면 왕들의 능력에 나라의 운세가 걸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조선왕조에는 연산군을 제외하면 나라를 망칠 정도의 폭군이나 혼군은 없었다.

전체적으로 유약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의 성격보다도 군사력을 중심으로 하는 절대권을 잡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라의 중심인 왕에게 절대권이 없었다면 왕권을 견제한 사대부들이라도 잘해줬으면 좋으련만 조선의 비극은 모두 여기서 생겨났다. 사대부들은 유생들이고 유생들은 모두 명분이 강하고 말이 많다는 단점이 있다. 그리고 이론에 강하고 평화시에는 잘 꾸려나가지만 위급할때는 대처능력이 없다. 현실적인 힘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대부들이 지배계급을 이루고 있던 조선에서 왕이란 제일 높은 사대부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인명을 중시하고 질서가 강하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무력을 경멸함으로써 초래된 군사의 약체화는 왕권과 나라의 힘을 약화시켰다. 언론을 중시하는 사대부의 전통은 하나의 의견을 수렴하기가 어려웠고 왕의 권위에 번번히 도전했다. 이것이 평화시에라면 그런대로 먹혔지만 일단 임진왜란같은 전란이 터지자 것잡을 수 없는 모순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왕조는 임진왜란에 망하지 않고 그 생명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리고 사대부 또한. 조선의 왕들이 독살설에 휘말릴 만한 토양이 갖추어진 셈이다.

사대부들은 명문에 따라 저마다로 사분오열된 당쟁에 속했고 왕은 점점 조선 전체의 왕이 아니라 일개 당의 수장으로 전락했다. 모두 자기 당의 명분만을 중요시할 뿐 당론에 벗어나면 왕의 의사마저도 무시했다. 당쟁이 격화됨에 따라 여러 당들이 모여 국정을 논하거나 국사를 처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됐고 노론이 득세하면 남인은 전멸한다거나 남인이 득세하면 노론이 전멸하는 살벌한 모습만이 연출됐다. 이런 현실에서 자기 당에 동조하지 않는 왕이 일정 이상 당의 생존을 위협하면 그 왕은 꿀꺽, 음식에 섞여 있던 무엇인가를 삼키고 갑자기 죽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항상 정적이나 대립상태에 있던 왕족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왕이 죽자마자 권력이 바뀌었다.

독살은 또한 폐쇄적이고 어둠을 틈 타 일어나는 비극이다. 유학과 당론만을 인정하는 사대부들의 폐쇄정치, 청나라와 일본을 모두 무시하고 빗장을 닫아건 조선의 폐쇄정치의 비극이 왕들의 독살만을 낳았겠는가. 왕들이 독살되는 동안 백성들은 피폐해졌고 명분과 복종을 강조하는 유학은 중세 신학에 버금갈 만큼 백성들의 삶을 옥죄었다. 이유없는 의문의 죽음이란 왕의 비극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조선땅이 그런 죽음을 맞이하고 36년 동안 매장됐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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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크리스토 백작 1
알렉상드르 뒤마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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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클베리핀의 모험, 보물선, 빨강머리 앤, 작은아씨들, 삼총사, 장발장과 함께 으레 어린시절을 사로잡는 책이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다. 정신없이 읽었지만 이상하게 결론은 잘 생각나지 않는 게 특징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들의 이름들은 뇌리에 또렷이 각인되어 있다. 그 주인공들을 나로 착각하고 공상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 책들이 사실은 원작을 줄인 축약본이었다는 사실도 오래 무시했고, 그 책들과의 관계는 어린시절에 헤어진 친구처럼 나의 기억속에만 완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친구는 다시 만나는 법. 그리고 다시 만난 친구는 실망스럽기는 커녕 너무나 멋진 모습으로 자라 악수한 손을 놓지도 못한 채 정신없이 그에게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친구는 나의 기억이 자라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새로운 매력을 펼쳐놓기 시작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던 에드몽 당테스의 탈출과 복수담이라고만 생각했던 '몬테크리스토 백작'에 이렇게 많은 인물들이 등장했었던가? 그리고 이렇게 오랜 시간을 다루고 있었던가? 이렇게 넓은 세계를, 정교한 플롯을, 정직한 세계관을 펼쳐놨었던가? 하는 순간순간 느껴지는 놀라움에 다섯권이란 분량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지막 권의 마지막 장을 닫을 때는 떠나가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행복을 빌어줄 겨를도 없을만큼 안타까움을 털어버리지 못할 정도였다.

서문에 빅토르 위고가 말한 그대로 이 책은 '읽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 일으킨다. 이 책은 과거와 현대의 독자, 어린 독자와 성인 독자를 모두 사로잡는 위대한 대중문화였던 것이다. 확실히 그의 문체가 그와 명성을 겨뤘던 다른 프랑스 최고의 작가들보다 허술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탈출해야 할 때와 복수해야 할 때, 용서하고 떠나야 할 때를 방대한 스토리 속에 녹여놓아 독자를 사로잡는 작가 뒤마의 힘은 누구도 넘보지 못할 것이다.
권선징악.

그것은 재미없는 전래동화의 성격을 지칭한 대명사였다. 하지만 권선징악이란 단순한 말 속에 갈등, 질투, 야심으로 비롯된 음모와 지하감옥 속의 두 죄수의 만남, 젊은 죄수의 탈옥, 변신, 복수의 극적인 상황, 그리고 지옥에서 부활한 백작과 아들을 그리워하며 굶어죽은 아버지, 두 인물을 매장하고 출세한 군인귀족, 냉혈 검사, 속물 은행가, 그들의 아들 딸들인 젊고 매력적인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인물들을 병풍처럼 펼친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권선징악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소설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소설이 가장 재미있고 위대할 때는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실제 실존하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이다. 내게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인물들이 그렇다. 마치 지중해에 가면 그들 중 한 명과 마주치기라도 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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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 역사인물 다시 읽기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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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수그레한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벌써 여기저기로 귀향처를 옮긴 사람이고, 제주도에서는 하나뿐인 몸종에게 구박을 받고 살아야 했다. 같이 귀향을 다니던 아들은 땅굴을 파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곧 붙잡히고, 나무 위에 올라가 망을 보던 며느리는 지아비가 잡힌 것을 보고 그만 나무에서 떨어져 얼마 후에 죽었다. 부인도 귀향처에서 먼저 죽었으며 그 남자가 홀로 눈을 감았을 땐 염을 해 줄 사람조차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선조의 아들로 태어나 임진왜란 중 세자에 책봉되어 전국을 누비며 왕의 대행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중국과 일본, 후금 사이에서 숨가쁜 외교를 펼쳤던 왕, 광해군의 말로였다.

여러 인간군상들 가운데에서 왕만큼 특이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없다. 평범한 곳에서 태어났다면 큰 무리없이 살다 죽었을 그들은 왕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만으로 만인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고, 기껏해야 일기문학의 재료로 쓰였을 그들의 성격과 성품, 활동은 역사의 줄기를 바꿔놓는다.

광해군. 그가 꽤 긴 세월을 왕으로써 보낸 것은 확실한데, 무슨 -조, -종이라고 불렸는지는 역사책 대부분에 나와있지 않다. 물론 그뿐만은 아니다. 연산군도 그랬고, 노산군도 그랬다. 하지만 단종이었던 노산군은 폭군이 아니라 비운의 왕이었기 때문에 사후에 복위되어 왕의 이름이 남았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단종보다는 연산군과 짝지워져야 하는 인물이었을까?

광해군이 조선왕조에서 보기 드문 외교적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게다가 그가 폐위되어 조선은 폐쇄적이고 사대적인 시대로 되돌아가 후금의 침략을 자초했기 때문에 차라리 광해군이 있었더라면...하는 가정법까지 나오고 있는 지금, 그런 역사의 물음에 답해줄 책이 있다는 것은 너무 반가웠다. <광해군>은 기존의 연구성과들을 수렴하면서도 종래의 해석과 역사관에 얽메이지 않고, '재해석'이라는 명분 아래 역사가의 입맛대로, 혹은 독자들에게 아부하기 위해 시원찮은 인물을 대단하게 치장하지도 않은, 쿨한 매력이 있는 책이다. 게다가 광해군과 그 주변인물들, 혼란한 국제정세가 현장감있게 읽혀 훌륭한 소설처럼 읽는 이를 빨아들인다.

역사는 언제나 연구의 보충과 재해석의 가능이 열려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이 광해군에 대한 물음에 완벽한 답을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없는 명백한 폭군 연산군과, 가련하기가 이를 데 없는 소년왕 단종(노산군) 사이 어디엔가 자리잡고 있을 인간 광해군에 대해, 그리고 그 둘보다 복잡한 환경속에서 발군을 능력을 발휘했음에도 결국은 몰락을 자초할 수밖에 없었던 왕으로서의 광해군을 상상해보기에는 더없이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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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0 -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0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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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일직선으로 흘러 대해에 이르는 강물이라기보다는 울퉁불퉁한 단층에 가깝지 않을까. 일방적으로 진보한다거나 퇴보한다거나 하는 기준으로는 역사를 바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고대에 현대 뺨치는 문명을 일궈낸 로마도 그 하나의 실례가 될 것인데, 시오노 나나미가 그런 로마 문명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는 것이 인프라다.

이번 10권은 시오노 나나미가 그토록 높이 평가했고 매력을 느꼈던 로마의 인프라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일관했다. 읽고보니 과연 왜 한 권을 모두 할애하고 싶어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는데, 전에 군데군데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장 15권 예정인 로마인 이야기에서 그녀가 가장 말하고 싶어했을 주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놨기 때문이다.

로마의 인프라는 고대인에 대해 화려하고 고색창연한 문화나 미개하고 미숙한 생활환경만을 떠올리는 사람에겐 '현대성'이란 시공을 초월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마인과 시오노 나나미에게 '문명'이란 '인간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고 그것은 '편리'와 '안전'이었다. 가도와 다리, 수도를 대표로 하는 방대하고 오랜 세월에 걸친 인프라의 구축은 그런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과 물건의 신속하고 안전한 이동을 보장하는 가도, 배 없이 강을 건널 수 있게 해주고 지역과 지역의 단절을 잇는 다리, 식생활과 위생, 공업에 필수적인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가도는 문명생활의 기본이었다.

다리와 수도도 대단하지만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을 그물망처럼 뻗어나간 가도의 모습은 확실히 질릴 정도로 장관이다. 그에 비하면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인공위성에 잡힐 정도로 긴 만리장성을 쌓은 중국인의 심리는 그런대로 이해가 간다.

하지만 외부의 침입을 받을 것을 각오하면서도 장벽과 문턱을 없애고 그들의 '세계'에 도로망을 깐 로마인의 사업과 사고방식은 개방적이라는 면에서 세계 역사의 전례로 남을 만하다. 높은 성벽안에 거주했던 중국인이 안일과 긴장의 균형을 잡지 못해 수없는 전란을 겪은 것과 달리, 개방된 세계에 살았던 로마인은 그만큼 단련과 방비를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1200여년이나 장수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로마인이 시오노 나나미의 호감과는 달리 무자비한 정복민족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뒤로 로마인을 흉내낸 영국이나 파시스트 하의 이탈리아, 미국이 로마 제국의 무력만을 배웠지 그들의 철저한 개방성과 융통성을 뛰어넘지 못했다는 것은 시사적이다. 역사의 의미가 시간을 초월하지 못한다면 역사를 배울 가치는 없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또 한 권의 신선한 저작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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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 - 라틴아메리카 환상 문학선 (구) 문지 스펙트럼 14
루이사 발렌수엘라 외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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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자체의 완성도나 성취도보다는 그 소설이 지니는 선구자적인 위치나 다음 대에 끼친 영향력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이 있다. 이 <탱고>에 실린 단편들도 그런게 아닐까. 12편의 많은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음에도 상당히 아담한 책의 크기는, 아무리 단편이라고 해도 구성과 효과의 설득력을 위해 얼마간의 길이를 확보해야 하는 소설의 특성을 생각해볼 때 이 책이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는 이유를 설명해 줄지도 모른다. 혹은 이 쟁쟁한 작가들의 이력에서 최고도로 평가되는 작품들만 실린 것은 아닐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후에 만개한 라틴소설의 선구 역할을 한 소설들이 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은 그 역할을 충분히 할 것이고, SF나 판타치보다는 고전적인 환상소설이 읽고 싶다면 갈증을 달래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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