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 역사인물 다시 읽기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늙수그레한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벌써 여기저기로 귀향처를 옮긴 사람이고, 제주도에서는 하나뿐인 몸종에게 구박을 받고 살아야 했다. 같이 귀향을 다니던 아들은 땅굴을 파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곧 붙잡히고, 나무 위에 올라가 망을 보던 며느리는 지아비가 잡힌 것을 보고 그만 나무에서 떨어져 얼마 후에 죽었다. 부인도 귀향처에서 먼저 죽었으며 그 남자가 홀로 눈을 감았을 땐 염을 해 줄 사람조차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선조의 아들로 태어나 임진왜란 중 세자에 책봉되어 전국을 누비며 왕의 대행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중국과 일본, 후금 사이에서 숨가쁜 외교를 펼쳤던 왕, 광해군의 말로였다.

여러 인간군상들 가운데에서 왕만큼 특이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없다. 평범한 곳에서 태어났다면 큰 무리없이 살다 죽었을 그들은 왕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만으로 만인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고, 기껏해야 일기문학의 재료로 쓰였을 그들의 성격과 성품, 활동은 역사의 줄기를 바꿔놓는다.

광해군. 그가 꽤 긴 세월을 왕으로써 보낸 것은 확실한데, 무슨 -조, -종이라고 불렸는지는 역사책 대부분에 나와있지 않다. 물론 그뿐만은 아니다. 연산군도 그랬고, 노산군도 그랬다. 하지만 단종이었던 노산군은 폭군이 아니라 비운의 왕이었기 때문에 사후에 복위되어 왕의 이름이 남았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단종보다는 연산군과 짝지워져야 하는 인물이었을까?

광해군이 조선왕조에서 보기 드문 외교적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게다가 그가 폐위되어 조선은 폐쇄적이고 사대적인 시대로 되돌아가 후금의 침략을 자초했기 때문에 차라리 광해군이 있었더라면...하는 가정법까지 나오고 있는 지금, 그런 역사의 물음에 답해줄 책이 있다는 것은 너무 반가웠다. <광해군>은 기존의 연구성과들을 수렴하면서도 종래의 해석과 역사관에 얽메이지 않고, '재해석'이라는 명분 아래 역사가의 입맛대로, 혹은 독자들에게 아부하기 위해 시원찮은 인물을 대단하게 치장하지도 않은, 쿨한 매력이 있는 책이다. 게다가 광해군과 그 주변인물들, 혼란한 국제정세가 현장감있게 읽혀 훌륭한 소설처럼 읽는 이를 빨아들인다.

역사는 언제나 연구의 보충과 재해석의 가능이 열려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이 광해군에 대한 물음에 완벽한 답을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없는 명백한 폭군 연산군과, 가련하기가 이를 데 없는 소년왕 단종(노산군) 사이 어디엔가 자리잡고 있을 인간 광해군에 대해, 그리고 그 둘보다 복잡한 환경속에서 발군을 능력을 발휘했음에도 결국은 몰락을 자초할 수밖에 없었던 왕으로서의 광해군을 상상해보기에는 더없이 좋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