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뜨 - 상 창비교양문고 38
샬롯 브론테 / 창비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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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에어'는 '빌레뜨'에 비하면 잘 구워진 도자기나 예쁜 동화책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질에 있어서 그런게 아니라 성격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제인에어의 일생도 의지처 없이 어려움에서 다른 어려움으로 넘어가는 연속이지만 주위에는 그녀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셰익스피어에 필적한다는 시적이고 내밀한 묘사는 제인 에어의 고난마저 아름답게 보이게 했던 것이 사실이다. 제인 에어의 생명력 어린 개성 역시 처음부터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그에 비해 '빌레뜨'의 루씨 스노우는 그녀가 주인공이라는 것을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이다. 오히려 그녀가 관찰하는 꼬마소녀 폴리나, 폴리나를 놀리던 미소년 존이 중심인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는 혹시 그들의 기나긴 이야기를 '목격해줄' 소설 속 화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들을 지켜보는 루씨 스노우의 확립되지 않은 자아는 그 고집스러움 때문에 더욱 불안해보였고 그녀가 주인공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 소설은 '제인에어'가 허용했던 약간의 낭만적인 감미로움마저 허용하지 않을 것임을 예감케했다.

루씨는 언뜻 침착하고 냉정할 정도로 차분해 보인다. 누구나 그녀를 내성적이지만 자기몫을 해내는 책임감 있는 사람, 하지만 재미나 매력은 없는 소녀, 혹은 아가씨로 생각한다. 그건 독자에게도 마찬가지여서 무미건조해보이는 루씨보다는 핸섬하고 장난끼있는 영국신사인 존 브레튼, 인형같지만 조숙하고 섬세한 신경의 소유자인 폴리나가 '소설의 주인공' 답다고 느낄것이다. 심지어 경박하지만 아름답고 명랑한 지네브라는 어떤가? 그녀가 루씨 스노우보다는 나을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인상은 소설이 진행되고 루씨의 내면이 드러날수록 점차 깨어진다. 사실 가장 다채로운 개성을 가진 것은 루씨이다. 다른 현실의 인간이 그렇듯 무미건조한가 하면 유머감각이 있었고 내성적이고 평범한가 하면 당돌하고 솔직한 면을 드러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벙어리가 되어버리는가 하면 모든 걸 포기했을 때 마지막 끈을 놓지 않았다. 소설을 다 읽은 지금은 루씨가 가장 공감이 가는 인물이며 그녀만이 실제인물로 생각되고 나머지는 '소설 속의 인물들'과 다름없어 보인다.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존과 폴리나가 결국은 허구적인 재미밖에 주지 못한다는 것을 현실의 독자는 깨닫게 되는 것이다.

'빌레뜨'의 특이한 점은 소설 속의 소설성을 비웃는 것이다. 불완전한 외모와 척박한 운명의 남녀주인공을 내세움으로써 당시 소설의 관행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 '제인에어'라면, 매력있는 등장인물들은 결국 감동을 줄 수 없는 조연에 불과하며,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아름답고 순수하며 부자입니다. 세상에는 그렁 운명을 타고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라고 말하는 것이 '빌레뜨'의 파격적인 점이자 영국 중간계급여성의 삶을 묘사하는 것에 천착해왔던 샬롯 브론테의 작가로서의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직업을 구하기 위해 배를 타고 외국-빌레뜨-으로 가서 보모 겸 영어교사로 취직한 루씨에 비해 매력적인 전문직 남자와 아름다운 상속녀, 귀여움받고 살아가는 명랑한 소녀는 끝까지 설득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빌레뜨'는 환상을 주는 소설이 아니다. 루씨와 뽈 선생의 실랑이가 독자를 웃게 만들기는 하지만 행복하게 결합하는 남녀주인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런건 기껏해야 조연에게만 가능하다. 물러설 곳이 없는 20대 자립여성의 내면에 대한 묘사는 '감동적이면서 끔찍'했다. 하지만 독자에게 단순한 만족감을 주기를 거부했던 이 소설은 대신 읽는 사람의 내면까지 정복했다. 어느 소설이든 감정에 호소하기는 쉽지만 이성에 호소하기는 어렵다. 이 소설은 루씨 내면의 풍부한 감성과 현실의 사실성을 촘촘히 짜면서 '제인에어'의 투명한 감수성과 리얼리즘 소설의 힘을 결합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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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神話다 - 기독교 탄생의 역사를 새로 쓰는 충격보고
티모시 프리크 & 피터 갠디 지음, 승영조 옮김 / 동아일보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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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다. 문명(종교를 포함한)에 단절은 없으며 모두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는 고래의 유산이다라는 것. 그런데 이 명백한 사실을 말하기 위해 왜 이렇게 도발적인 글을 써야 했을까? 불교가 힌두교의 연장선상에 있고, 이슬람교가 그리스도교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은 불교나 이슬람교가 인정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리스도교는 자신이 고대 지중해 미스테리아의 연장이라는 것을 부인했고, 모든 증거를 인멸함으로써 근 이천년간의 아집에 빠져있었다는 것이 이 책의 문제의식이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실존 인물이었나? 즉, 역사적 인물인가? 성서는 그리스도교의 유일한 자료인가? 그리스도교는 고대 지중해 미스테리아(영지주의)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교가 오랫동안 이단시해온 영지주의에 속해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이 책에서 밝히는 주된 내용이다.

그리고 역사적 예수를 추적하는 현대의 모든 노력이 거의 실패로 돌아갔으며 성서는 어디까지나 편집된 문서의 일부일 뿐이고, 역사적 사실을 밝혀주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은 이미 20세기 전반에 걸쳐 차례로 밝혀졌다. 그리스도교가 고대 지중해 미스테리아의 다른 버젼이며 바울이 살았던 시대에는 영지주의(그노시즘)와 문자주의(후대의 로마카톨릭)의 구분이 종교적 수련의 단계일 뿐 배타적이지 않았다는 지적 역시 타당성이 있다.

이런 것들을 서술하는 두 공동저자는 시종 안타까움을 감추지 않는다. 문자주의가 로마제국에 공인되면서 영지주의(미스테리아)가 박해되는 동시에 영지주의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던 고대 지중해의 지적 문화유산도 그들 손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파괴된 것은 영지주의라는 하나의 종교가 아니었으며 개방적인 정신이 낳았던 모든 수학, 과학, 방대한 문서들, 예술, 기술을 포함했다. 저자는 그것을 중국 공산당의 문화혁명에 비유한다. 애초에는 사람들간의 평등을 위한 사회주의가 정권을 잡으면서 사회주의에 어긋나는 모든 전통과 문화, 지식인과 무수한 사람들을 탄압했듯이 문자주의 그리스도교의 승리가 고대를 폐허로 만들고 중세 1000년의 암흑시대를 불러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서양 근대문명은 그리스교를 부정함으로써 획득되었다).

저자가 그리스도교와 고대 지중해 미스테리아의 연관성을 추적한 것은 그리스도교의 독창성(!)에 흠집을 내고 그것을 조롱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을 밝힌다고 그리스도교가 부정되리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의 목적은 그리스도교가 신의 선택을 받은 인류유일의 종교라고 단정하면서 발생한 모든 배타주의, 당대의 탄압과 파괴뿐 아니라 지금까지 내려오는 '그리스도교와 이교도, 남자와 여자, 과학과 종교, 믿음과 이성'의 대립의 역사를 비판하고 고대의 개방성과 문명교류의 장점을 상기시키는 데 있다. 참된 종교는 문명의 발전에 공헌한다는 것이 이들이 말하고 싶었던 전부다. 그리고 문명의 발전은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것. 그렇다면 더더욱 종교, 과학, 철학이 모두 깨달음을 위한 방편이었던 고대의 지혜에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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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지음, 오숙은 옮김 / 미래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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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창조한 젊은 학자의 이름이다. 스위스 제네바의 부유한 가문에서 신비과학 서적을 탐독하며 자라난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대학에서 배운 현대 과학의 힘으로 생명의 비밀을 풀어 인간의 분신을 만들어내지만 결국 그로 인해 파멸한다.

프랑켄슈타인은 또한 젊은 학자가 창조한 괴물을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 괴물은 창조됐을 때부터 창조주(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버림을 받고, 호감을 얻으려 노력한 인간들에게 차례로 공격 받는다. 증오심에 휩싸인 그는 끝내 진짜 '괴물'이 되어버린다.

프랑켄슈타인은 신의 영역에 도전했지만 비참하게 패배하고 절망한 파우스트적 영혼이며, 인간성을 지니고 태어났지만 흉측한 모습과 괴력으로 모든 이에게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 된 의지할 데 없는 괴물의 상징이다. 빅터 박사는 생명을 창조하려는 연구에 모든 열정을 바치지만 인간의 껍데기와 여러 화학물질로 얼기설기 엮은 진짜 '생명'을 창조하자 괴물에 대한 혐오와 자신의 연구에 대한 회의에 휩싸인다. 그는 자신의 창조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괴물의 영혼은 박사와 인간들에게 사랑받기를 원했지만 인내심 어린 노력은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그는 글을 배우고 가난한 집에 장작을 갖다 놓고 물에 빠진 소녀를 구해주지만 가장 선량한 사람조차 그를 쫓아내고 공격한다. 괴물은 다정한 말을 듣기 원했지만 그가 들은 것은 사람들의 비명소리 뿐이었다. 사랑과 우정의 구애에 보답받지 못한 괴물의 외로움은 복수심을 낳고 괴물은 박사 주변의 인간들을 차례로 죽인다. 버림받은 피조물은 창조주를 죽이지는 못하지만 세상을 파괴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실패한 과학과 실패한 자연의 서로에 대한 원망이며 욕망에 굴복한 이성, 이성에 버림받은 감성이 서로를 잡아먹는 톱니바퀴다.

괴물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을 지닌 자연적인 존재지만 그의 거대하고 끔찍한 외양, 그 외양을 이루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화학물질들은 그가 반자연적인 존재임을 드러낸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그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집 안에 살게 했더라도 이들의 관계가 '가위손'의 우정버젼이 됐을 것 같진 않다. 더구가 '가위손'의 두 연인도 결국 이별해야 했지 않은가. 신에게 도전한 과학자는 파멸해야 했고 그 결과로 태어난 괴물 또한 다른 운명을 선택할 수 없었다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이 황당한 이야기가 전혀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 '필연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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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 이산의 책 17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차혜원 옮김 / 이산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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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교수는 이 책에서 두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옹정제와 독재군주가 그것이다. 왕조시대의 황제라면 모두 독재군주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옹정제에게는 다른 황제와는 다른 독특함이 있었다.

권력이 물보다 자연스럽게 느껴지는게 황제의 자리지만 옹정제는 누구보다도 황제권이란 것을 강하게 의식했다. 낮은 지위의 어머니를 둔 옹정제가 여러 황자들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의무감이 강하고 치밀한 성격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옹정제는 개인의 안락을 포기하고 독재권을 나라를 위해 사용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옹정제는 평생동안 관료제의 폐단을 없애고 민생안정을 꾀하기 위해 줄기차게 노력하는데, 독재를 이용한 선한 정치라는 이른바 '선의에 넘치는 악의의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옹정제에게 황제의 절대권은 사치와 향락, 과시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금욕적이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고 전국의 지방 관료들과 긴밀한 서한 교류를 통해 지방의 실정을 파악하고 정치를 해나갔다. 선한 백성이나 능력있는 관리에게는 상과 함께 화려한 선전을 해주고, 정체되어 있고 사재를 착복하는 관료층은 처벌하면서 악습을 타파하려 했다. 전쟁을 싫어했고 청조를 비방한 시골서생을 끝까지 논설로 설득시키는 끈질김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이 모든 치적을 수행하는데 독재권을 사용했지만 반항의 혐의가 있는 형제를 차례로 죽일때에도 사용했다. 독재자가 흔히 저지르는 과오와 독재자로서 나라에 이로울 수 있는 모든 일을 한 것이다.

하지만 옹정제 사후, 가장 유능했던 두 명의 재상은 옹정제의 정치체제를 이어가지 않기로 합의했다. 초인적인 근면성실과 끈기, 대담함을 통해 이룩된 옹정제의 정치는 옹정제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 옹정제의 치적도 잊혀졌다. 그것은 옹정제의 치세가 비교적 짧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13년), 독재군주라는 인상이 과히 좋지 않았는데다 건륭제가 그런 것처럼 화려한 정복이나 사업을 일으킨 적도 없기 때문이다. 눈에 띄지 않지만 끊임없이 국가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고, 성과 또한 거두었던 옹정제의 장점이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그런 장점은 정치가의 기준으로서 후대의 전범으로 남기에 손색이 없었을텐데. 전쟁을 싫어하면서도 큰 전쟁(혁혁한 무공)을 일으킨 황제가 존경받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역사를 인식하는데 그만큼 장애물이 되는 것도 없지 않을까.

평화를 사랑한 독재군주. 미야자키 교수가 옹정제를 평가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어 지적하고 있다시피 그런 옹정제를 오늘날의 관점에선 전적으로 칭찬만 할 수는 없다. 선의의 목표를 가진 독재자라 할지라도 단기적이 아닌 장기적인 역사를 두고 보면 폐해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독재자의 자의적인 운영방식은 시스템을 무력하게' 만들어 정책이 아닌 개인의 능력과 의욕이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게 되고, 사람들로 하여금 어려울 때마다 '독재자를 희구'하도록 하는 악순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옹정제가 오늘날 독재정치에 대한 반성을 제공하는 것도 그가 오늘날의 기준으로 봐도 훌륭한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중국의 많은 황제들이 과거의 필요속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만 봐도 말이다. 당신에게는 시대를 초월한 가치가 있었다, 라고 말하면 옹정제도 만족스러워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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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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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를 읽으면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이 떠오른다. 어쩌면 그렇게 변한 게 없는지! 100년 이상의 시간차가 있지만 여전히 살이 떨어질 것 같은 추위 속에서 강제노동을 하고, 아사를 면할 만큼의 식사와 허름한 막사 생활을 한다. 얼음장같은 영창에 보내질 것을 조심해야 하며 간수들에게 복종하지만 교묘하게 줄다리기를 하면서 그들을 속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또 어떤가. 비열한과 밀고자가 있지만 경멸받지 않은채 수용소를 활보하고, 순수하고 어린아이같은 청년이 있으며, 외국출신의 특이한 죄수와 매일 성경을 읽어대는 독실한 신자도 있다. 19세기 제정러시아와 20세기 사회주의 소련은 적어도 수용소만큼은 부자지간보다 더 흡사하다.

그럼에도 두 작품의 차이는 분명해 보인다. <죽음의 집의 기록>이 지적이고 내성적인 귀족 출신 주인공의 시각으로 형이상학적이고 감정적인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면, <이반 데니소비치...>는 시골 출신의 평범한 촌부, 사상범따위가 아니라 전쟁에 끌려나갔다가 독일군 포로가 됐었다는 이유만으로 10년 형을 선고받은 슈호프(이반 데니소비치)가 주인공이다.

솔제니친의 정치관과 세계관 또한 도스토예프스키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명확하다. 소설은 시종일관 차분하게 진행된다. 누구에게나 명백해보이는 구 소련의 압제적이고 잔인한 수용소의 풍경을 마치 현대 한국의 소시민들이 회사에 출근하고 학교에 나가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적당히 불만을 가지고 있고 적당히 비참하며, 위사람과 주변의 눈치를 끊임없이 살피면서도 일면 담담하고 반쯤 포기한 속편함. 그들은 자신의 명의로 집사기를 바라는 대신 자신의 발로 고향에 돌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날까지는 힘들어도 참아야지!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응하는 존재라지만, 나라면 글쎄, 그런 곳이라면 진작 죽지 않았을까. 슈호프도 자신있게 말하다시피 그런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침착한 평상심이 필요한 것이다. 더불어 죽 한 그릇도 더 먹을 수 있는 기민한 눈치와 적당한 계획력과 대담함도.

이 책을 읽을 때 가장 놀라는 것은, 제목을 알고 읽었음에도 마지막 장을 닫는 순간 이 책이 하루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깨달을 때이다. 약간의 다른 에피소드가 곁들여진다고 한들 이 책은 슈호프가 새벽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때까지의 기록이다. 사람의 하루가 이렇게 다사다난하고, 많은 생각으로 꽉 차 있으며, 추위와 굶주림, 많은 위험-영창행을 포함해서-을 피하기 위한 모험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놀랍다.

슈호프는 이 수용소 안에서 십 년, 삼천육백십삼일을 보냈다고 한다(사흘이 더 늘어난 것은 중간에 윤년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나라면, 확실히 죽었을 것 같다. 적어도 정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면 슈호프처럼 훌륭하게 적응했을까. 어쨌든 슈호프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 부인과 재회하고 계획한 대로 염색장이가 되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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