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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1 - 불꽃의 자유혼
김신명숙 / 금토 / 1998년 12월
평점 :
절판
허난설헌의 이름은 허 초희, 자는 경번, 호는 난설헌이다. 주민등록 제도가 없었던 시대이니 자식의 이름을 짓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소관이었고, 조선시대 중반, 시대는 점점 보수적으로 변해 여자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을 망각해가고 있었다. 개도 '멍멍이' 정도의 이름은 있었으니 여자아이는 대개 '간난이, 큰년이, 점순이, 언년이' 등으로 불렸다.
허난설헌은 부모님으로부터 초희라는 이름을 받았고, 글을 배움으로써 경번이란 자를 썼으며, 창작을 함으로써 스스로에게 난설헌이란 호를 부여했다. 그리고 저자 김신명숙에 의하면 여자의 이름이 없었던 시대에 세 가지나 되는 이름을 날린 것이 허난설헌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허난설헌의 부모님은 개방적인 사람들이었다고 전하지만 어린 초희에게 일부러 글을 가르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깨너머로 배운 글실력이 곧 오빠를 추월하자 글공부를 시작했고 10대 시절의 몇 년 간은 당대의 대표적인 시인인 손곡 이달로부터 시를 배우기도 했다. 8살 때 현대 학자들도 해석하기 어렵다는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이라는 글을 써서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고 많은 시를 지었지만 15세가 되자 안동 김씨 집안으로 시집을 가게 된다. 자유롭던 어린 시절은 종말을 고했고, 본격적인 삼종지의와 칠거지악의 굴욕적인 비극 속에 발을 내딛은 것이다.
허난설헌은 천재였으나 그녀의 남편인 김성립은 평범한 범부였다. 김성립이라고 자색 뛰어나고 재기발랄한 신부가 싫지는 않았겠지만 자신이 그에 따르지 못한다고 여겨지자 곧 열등감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밖에서 글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난설헌을 멀리하고 외도를 일삼기 시작했다. (천재에 반발하는 방법 또한 지극히 범부다웠다.) 엄격한 시어머니 송씨도 난설헌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고부갈등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가 조선조 양반가의 기와집 깊숙한 곳에서 일어난 일을 자세히 알 수는 없겠지만 허봉과 허균 등 친정 형제들의 격려가 난설헌의 시집살이에 그나마 용기를 줬다는 것, 행복한 순간은 많지 않아 친정아버지의 객사, 오빠의 추방과 병사로 친정이 몰락하는 것을 바라봐야 했다는 것, 두 아이를 모두 병으로 일찍 잃어야 했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시에서 예견한 대로 27살에 죽었고, 죽으면서 모든 시를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것.
허난설헌의 시들은 그녀의 죽음 이후 곧 동생인 허균에 의해서 편집됐고, 허균은 중국에 가거나 중국에서 손님이 오면 그 시들을 보여줬다고 한다. 그 경로로 난설헌의 시들은 중국에 널리 퍼져 성당의 시를 뺨친다는 감탄을 자아냈고, 그 후에는 일본에서도 출판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담장밖에 이름이 나간 여인으로써 조선 내에서는 계속 폄하되어야 했고 심지어는 중국시의 표절이라는 누명까지 써야 했다. 진실은 전해지기 마련이라는 것은 항상 지켜지는 법칙은 아니어서 난설헌의 진면목은 오랫동안 왜곡되어 있었고 오늘날에도 천재시인으로보다는 허균의 누이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일찍이 매천 황현이 허씨 집안의 재능 있는 삼남매 중에서 최고라고 평가했던 난설헌이 말이다.
'나의 첫 번째 한은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요, 두 번째 한은 여자로 태어난 것이며, 세 번재 한은 김성립의 아내로 태어난 것이다.' 이 말은 허난설헌이 자신의 생을 세 가지로 요약한 것이다. '십오세에 뜻을 세우고, 삼십세에 어쩌고, 사십세에 하늘의 뜻을 알았으며' 운운한 공자와 얼마나 비교되는가. 두 천재의 차이는 남자와 여자라는 것밖에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