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 이덕무 청언소품
정민 지음 / 열림원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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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수치스럽지 않고, 출세 못함이 억울하지 않으며, 아침에 일어나면 글을 읽고, 햇살 밝은 오후에 문 창호지에 비친 꽃과 나비를 크로키해서 벗삼은 삶. 정답고 존경스러운 벗이 생기면 나무를 심고 누에를 쳐 만든 옷감에 친구의 얼굴을 수놓고 강 옆에 나가 펼쳐놓고 마주보다가 날이 지면 품에 안고 돌아오는 것이 바램이라는 삶.

이덕무가 그런 삶을 살았던 것은 조선시대였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어떤 이가 가난을 부끄러워하고, 출세 못할까 전전긍긍하며, 창밖에 날아든 참새를 외면하고 친구에게마저 득실을 따지는 것은 그가 현대인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여전히 각박하고 살벌하기까지 한 세상에서 이덕무의 따듯함과 여유는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나 뒤뜰에 피어 있는 꽃처럼 감미롭기만한 것은 아니었다. 삶과 순수하게 손잡은 인간이 되기까지 이덕무는 그의 시대를 극복해야 했었다.

그는 가난했고, 그는 서얼이었으며, 그는...... 하지만 그의 글은 지상에 유배된 신선의 쓰라린 자기토로는 아니었다. 깊은 밤에 혼자 방에서 임금의 귀를 막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간신들을 향해 칼날을 뽑아들고 비분강개하기도 했지만 태평스럽게 자는 어린 동생의 모습에서 스승을 발견하고 씨익 웃었던 이덕무에게서 세상을 원망하는 지식인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쉬이 분노함과 계산적인 지식을 쌓기 위한 공부, 남을 헐뜯음과 놀이, 주색에 빠지는 것에 분노한 것을 보면 선비가 분명한 것 같다. 하지만 백성에게 권위로 군림하고 붕당을 지어 권력을 도모하려 한 넓은 갓 쓴 동료들의 잔영조차 비치지 않으니 과연 그는 조선이란 나라가 슬며시 내놓은 선비세계의 정수라 할 만하구나.

평생 책을 헤어지지 않는 벗으로 삼고 두보의 시를 음미하며 무릎을 치고 기뻐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나에게 겨울 바람이 새어들어오는 방에서 논어로 벽을 막아 병품을 삼고 한서로 이불 위를 덮어 얼어죽음을 면하면서도 만족스러워할 만한 여유와 강함이 있을까. 외유내강이란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흔히 책과 글에만 빠진 사람은 나약하고 현실성에 없다고 비웃음을 당하지만 이덕무에게서는 전장에 있는 장수나, 시장바닥에서 손님들을 향해 목이 쉬게 외치는 상인의 치열함이 느껴진다.

학문은 그에게 가장 사랑하고, 그래서 가장 높은 경지까지 가보고 싶은 산이었기 때문에 한결같은 애정과 성실함으로 대했고, 시대에 택함을 받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망치고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흔적을 남기려는 몸부림을 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길을 찾아서 걸어간 인내와 지혜를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대에도 그런 이덕무를 잊지 않고 누에로 천을 짜서 그의 얼굴을 수놓고 마주보고 싶어한 친구가 하나쯤은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지금도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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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지음, 유경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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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야말로 정글이다. 전쟁이야말로 완벽한 약육강식의 세계인 것이다. 힘과 힘이 싸워 약한 쪽은 궤멸 당하고 복종해야 끝이 나는 인간계의 비정한 법칙이다. 그래서 전쟁이란 약자에게는 공포요, 삶의 종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1000년 동안 중국이란 제국에 항거하고, 식민지로 삼았던 프랑스를 몰아냈으며, 결국은 20세기 최고의 강국인 미국과의 전쟁에서 판정승을 거둔 나라가 있다. 호치민과 베트콩(베트민)들이 목숨보다 사랑한 조국, 베트남이 그곳이다.

베트남 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거칠게 요약하자면 프랑스 식민지배 시절의 혼란을 사회주의로 극복하려 한 북베트남을, 미국이 동남아시아에 더 이상 사회주의가 확장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북베트남측에서는 자주(베트남)와 외세(미국)의 전쟁이었고, 미국측에서는 민주주의(미국)와 공산주의(베트남)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북베트남이 많은 외세 중의 하나였던 미국을 잘 이해했던 데 반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분법에 사로잡힌 미국은 북베트남의 생활과 특성, 신념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에게는 애초부터 적을 알지 못한 싸움이었던 것이다.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무장한 초강대국과 (분열되어 있는) 아시아의 약소국. 누가 봐도 승패는 명확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첨단무기와 막대한 자본은 점차 인민의 지지를 얻은 북베트남의 게릴라 작전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계속되고 있었던 북베트남의 대항이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어려운 시기에 호치민과 그 동료들이 북베트남의 지도자였다는 것은 베트남 역사에서 가장 값진 축복이었다. 남베트남이 미국의 군정과 지도부의 무능력, 부패로 신음하고 있었던 데 반해 북베트남의 게릴라들은 농민과 하나가 됨으로써 단결력의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끊어진 다리를 보수하고, 정찰기를 격추시키는 것은 게릴라들의 일임과 동시에 농민들의 일이기도 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2000년까지 항쟁을 계속해야 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외세에 대한 항쟁은 그들의 삶 자체였던 것이다.

그해 반해 미국은 점차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초기에 베트남전을 지지했던 미국 시민들은 부상자와 전사자가 증가함에 따라 정부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게 됐다. 전사자는 너무 많아졌고 많은 젊은이들이 새로운 징집대상이 되고 있었다. 길어지는 전쟁 속에서 미국의 첨단무기들은 베트남의 정글 속으로 흡수된 것처럼 보였다. 명확한 비젼과 작전이 없는 정부에 대한 반전시위는 날로 거세졌다.

점점 혼란스러워지는 미국에 반해 북베트남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대규모 전투도 많았고 언제나 미군보다는 북베트남이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전쟁의 우세는 점차 북베트남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미군과 정부, 미국 국민들은 전쟁을 계속할 의지를 상실해가고 있었다. 1975년, 결국 미국은 북베트남에서 철수했고 북베트남은 사이공에 입성했다. 그 날은 북베트남이 미국에 승리한 날이자 남북 베트남이 통일된 날이었다.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병합, 통일시켜 사회주의 국가를 세운 것이 잘 된 일이었을까? '민주국가'에 사는 사람이라면 엇갈리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베트남, 미국과 나란히 놓고 봤을 때 북베트남의 지도부만이 베트남의 현실에 정통하고, 광범위한 인민의 지지를 받았으며, 사리사욕 없이 조국의 독립만을 생각했다. 사회주의, 민주주의의 문제가 아닌 제대로 된 국가를 세울 만한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민족주의자', 곧 '민족자결주의자'였고, 그것이 그들의 가장 존중받을 만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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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1 - 불꽃의 자유혼
김신명숙 / 금토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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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의 이름은 허 초희, 자는 경번, 호는 난설헌이다. 주민등록 제도가 없었던 시대이니 자식의 이름을 짓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소관이었고, 조선시대 중반, 시대는 점점 보수적으로 변해 여자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을 망각해가고 있었다. 개도 '멍멍이' 정도의 이름은 있었으니 여자아이는 대개 '간난이, 큰년이, 점순이, 언년이' 등으로 불렸다.

허난설헌은 부모님으로부터 초희라는 이름을 받았고, 글을 배움으로써 경번이란 자를 썼으며, 창작을 함으로써 스스로에게 난설헌이란 호를 부여했다. 그리고 저자 김신명숙에 의하면 여자의 이름이 없었던 시대에 세 가지나 되는 이름을 날린 것이 허난설헌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허난설헌의 부모님은 개방적인 사람들이었다고 전하지만 어린 초희에게 일부러 글을 가르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깨너머로 배운 글실력이 곧 오빠를 추월하자 글공부를 시작했고 10대 시절의 몇 년 간은 당대의 대표적인 시인인 손곡 이달로부터 시를 배우기도 했다. 8살 때 현대 학자들도 해석하기 어렵다는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이라는 글을 써서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고 많은 시를 지었지만 15세가 되자 안동 김씨 집안으로 시집을 가게 된다. 자유롭던 어린 시절은 종말을 고했고, 본격적인 삼종지의와 칠거지악의 굴욕적인 비극 속에 발을 내딛은 것이다.

허난설헌은 천재였으나 그녀의 남편인 김성립은 평범한 범부였다. 김성립이라고 자색 뛰어나고 재기발랄한 신부가 싫지는 않았겠지만 자신이 그에 따르지 못한다고 여겨지자 곧 열등감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밖에서 글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난설헌을 멀리하고 외도를 일삼기 시작했다. (천재에 반발하는 방법 또한 지극히 범부다웠다.) 엄격한 시어머니 송씨도 난설헌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고부갈등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가 조선조 양반가의 기와집 깊숙한 곳에서 일어난 일을 자세히 알 수는 없겠지만 허봉과 허균 등 친정 형제들의 격려가 난설헌의 시집살이에 그나마 용기를 줬다는 것, 행복한 순간은 많지 않아 친정아버지의 객사, 오빠의 추방과 병사로 친정이 몰락하는 것을 바라봐야 했다는 것, 두 아이를 모두 병으로 일찍 잃어야 했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시에서 예견한 대로 27살에 죽었고, 죽으면서 모든 시를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것.

허난설헌의 시들은 그녀의 죽음 이후 곧 동생인 허균에 의해서 편집됐고, 허균은 중국에 가거나 중국에서 손님이 오면 그 시들을 보여줬다고 한다. 그 경로로 난설헌의 시들은 중국에 널리 퍼져 성당의 시를 뺨친다는 감탄을 자아냈고, 그 후에는 일본에서도 출판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담장밖에 이름이 나간 여인으로써 조선 내에서는 계속 폄하되어야 했고 심지어는 중국시의 표절이라는 누명까지 써야 했다. 진실은 전해지기 마련이라는 것은 항상 지켜지는 법칙은 아니어서 난설헌의 진면목은 오랫동안 왜곡되어 있었고 오늘날에도 천재시인으로보다는 허균의 누이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일찍이 매천 황현이 허씨 집안의 재능 있는 삼남매 중에서 최고라고 평가했던 난설헌이 말이다.

'나의 첫 번째 한은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요, 두 번째 한은 여자로 태어난 것이며, 세 번재 한은 김성립의 아내로 태어난 것이다.' 이 말은 허난설헌이 자신의 생을 세 가지로 요약한 것이다. '십오세에 뜻을 세우고, 삼십세에 어쩌고, 사십세에 하늘의 뜻을 알았으며' 운운한 공자와 얼마나 비교되는가. 두 천재의 차이는 남자와 여자라는 것밖에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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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1
나쓰메 소세키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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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는 자체로는 완벽하지만 남들에게는 바보로 보이는 두 사람이 나온다. '도련님' 훗타와 그 도련님을 키운 유모 '기요'가 그들이다. 다소 막무가내이고 앞 뒤 정황을 못 가리는 도련님은 아버지나 형의 눈에 찬 적이 한 번도 없지만 기요에게만은 둘도 없이 훌륭한 사람이다. 도련님이 크게 될 것을 믿은 사람은 기요밖에 없다. 출세의 이미지라면 이층집에 살고 큰 자동차 모는 것이 전부인 단순한 기요에게 꼬인 데 없고 씩씩한 도련님은 더없이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도련님은 허영심과는 거리가 멀어서 자기가 그렇고 그런 말썽쟁이라는 것을 언제나 망각해본 적이 없다. 그저 그런 학교를 그저 그런 성적으로 졸업하고 깡촌의 교사로 갈 때에도 귀하신 분을 귀양보내는 듯한 기요와는 달리 시골구석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불만일 뿐이다. 어찌댔건 도련님은 도쿄 태생이니까. 그리고 그곳에서 도련님의 좌충우돌은 시작된다.

외따로 떨어진 섬, 못 알아듣는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 메밀국수집에 가거나 목욕탕에 빨간 수건만 들고 가도 온 동네에 소문이 퍼져 버리는 작은 마을. 집안에서 하품만 해도 모든 사람이 알아버리는 그 곳은 도쿄토박이인 도련님에게는 기가 막힌 곳일 뿐이다. 더구나 엉터리 골동품을 팔기 위해 매일 찾아오는 첫 번째 하숙집 아저씨, 반찬은 감자밖에 주지 않는 두 번째 하숙집 할머니에다, 짖궂은 장난을 치고도 시침 뚝 떼는 학생들은 시골 생활의 괴로운 활력(?)이었다.

하지만 도련님은 비록 보는 사람은 위태위태해도 한 번도 기죽지 않는다. 눈치를 못 봐서 일을 더 크게 만들고 흥분하면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하고 버벅거리기는 하지만 교장이나 떼로 반항하는 학생들하고 붙어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남 일에 끼어들어서 학교까지 때려치우는 도련님이 사람들에게는 풋내기로 보일 뿐이지만. 어쨌든 속물보다는 좌충우돌의 우직한 풋내기가 낫다.

도련님이 크게 출세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기요가 학교까지 때려치운 도련님을 마지막까지 사랑하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은 그런 면 때문이 아니었을까. 막부 시절부터 살았을지도 모르는 할머니 기요에게 도련님의 밝은 우직함은 겁나는 세상의 푸른 잎사귀와 같았을 것이다. 존경심이 우러나오기보다는 친근함부터 느껴지는 이들이 '성공'하는 세상까지는 바랄 수 없겠지만 천성이 꺾이지 않고(그런다고 꺾일 그들도 아니지만)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라면 좋겠다. 원래는 심각한 작가인 나쓰메 소세키가 이런 소품을 쓴 것도 그런 기분좋은 사람들을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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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씨 범우 사르비아 총서 612
N. 호손 지음, 이장환 옮김 / 범우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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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억울한 일들 가운데 두 남녀의 사랑이 간통으로 몰리는 것보다 더 심한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로 인해 젊은 여인이 평생 가슴에 죄를 가리키는 주홍글씨를 새기고 살아야 하는 처벌을 받았다면. 그리고 보수적인 사람들의 공개적인 지탄과 손가락질을 받으며 외딴 곳에서 고립되어 살아야 했다면. 이것은 17세기 보스턴에서 살았던 헤스터 프린이란 여인의 슬픈 이야기다.

헤스터 프린은 감옥 속에서 아이를 낳았고 석방이 된 순간부터 공개 처벌을 통해 가슴에 주홍글씨를 달아야 했다. 죄목은 사생아를 낳았다는 것.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힘들 정도의 지탄을 받는 그 '죄'는 17세기 보스턴에서는 '죽음의 형벌'을 요구하는 자가 있을 정도의 중죄였다. 그곳은 망명자들이 어설프게 개간한 도시로, 청교도의 결벽증이 지배하고 있는 고립된 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스터 프린은 아버지를 밝히라는 재판관과 성난 사람들의 요구를 묵살한다. 그리고 어린 딸과 함께 마을에서 떨어진 오두막에서 삯바느질을 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눈치챈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헤스터 프린의 오랫동안 실종됐던 남편인 로저 칠링워어드였다.

로저 칠링워어드는 아내를 먼저 보스턴으로 보낸 후 뒤따라 출발했지만 배가 난파되어 오랫동안 떠도는 생활을 했다. 그가 보스턴에 나타났던 때는 헤스터 프린이 공개 처벌을 받던 바로 그 날이었다. 원래 깊이 있는 지성과 점잖은 인간성으로 존경받는 학자였던 그이지만 아내의 부정을 알자 복수심에 사로잡힌다. 지성은 독으로, 성실함은 집념으로, 신중함은 위선으로 변해 그를 결국 복수를 위한 악마로 타락시키게 된다.

하지만 헤스터 프린이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은 그 남자는 그들의 사랑을 정당하게 생각할 용기도, 헤스터 프린이 침묵함으로써 지켜진 자신의 위신을 기뻐할 정도의 뻔뻔함도 없는 예민하고 나약한 사람이었다. 로저 칠링워어드의 적수는 애초에 되지 못했다.

복수를 하려는 남자와 그것에 저항할 힘이 없는 남자. 자부심이 강했던 남자와 누구보다 순수하고 예민했던 남자. 그 둘은 사실 복수나 힘겨운 사랑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이었다. 눈앞에 닥쳤던 시련을 극복하거나 흘려보내지 못하고 칡뿌리처럼 얽매여 서로를 괴롭혔던 그들이 그 담보로 인간다운 삶을 내놔야 했던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헤스터 프린은 달랐다. 로저 칠링워어드의 영혼이 미움으로 타락할 때도, 존경받는 지역 인사였던 그녀의 '애인'이 죄책감과 자기 학대로 지쳐갈 때에도 오기와 자존심, 그리고 딸 퍼얼에 대한 사랑으로 버텨나갔다. 그녀가 비웃음을 당하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행을 한 것은 남에 대한 미움이나 자신에 대한 자책감으로 삶을 좀먹지 않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꼿꼿하고 순수하게 살았던 그녀를 사람들도 결국 존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수 년이나 지난 후였다. 장 발장과 마찬가지로 헤스터 프린도 평생을 지켜나갔던 강인함과 다른 이에 대한 사랑으로 소중한 인생을 열매를 획득한 것이다.

로저 칠링워어드와 딸 퍼얼의 숨겨진 아버지였던 남자가 모두 허무하게 삶을 마치고, 퍼얼이 장성해서 결혼했을 시간이 훌쩍 지난 후에, 헤스터 프린은 한 동안 떠나 있었던 보스턴에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장 발장이 모든 것을 잃은 가운데서도 평안하게 눈을 감았듯이 노년의 헤스터 프린은 슬픔에 잠긴 사람들, 특히 '상처입은 사랑, 헛된 사랑, 억울한 사랑, 배신당한 사랑, 불의의 사랑'에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였다고 전해진다.

헤스터 프린의 일생과 그녀가 한창 사랑에 괴로워하던 청춘, 방황하는 사람들의 친구가 된 노년이 진중한 무게로 다가오는 것은 '주홍글씨'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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