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지음, 유경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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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야말로 정글이다. 전쟁이야말로 완벽한 약육강식의 세계인 것이다. 힘과 힘이 싸워 약한 쪽은 궤멸 당하고 복종해야 끝이 나는 인간계의 비정한 법칙이다. 그래서 전쟁이란 약자에게는 공포요, 삶의 종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1000년 동안 중국이란 제국에 항거하고, 식민지로 삼았던 프랑스를 몰아냈으며, 결국은 20세기 최고의 강국인 미국과의 전쟁에서 판정승을 거둔 나라가 있다. 호치민과 베트콩(베트민)들이 목숨보다 사랑한 조국, 베트남이 그곳이다.

베트남 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거칠게 요약하자면 프랑스 식민지배 시절의 혼란을 사회주의로 극복하려 한 북베트남을, 미국이 동남아시아에 더 이상 사회주의가 확장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북베트남측에서는 자주(베트남)와 외세(미국)의 전쟁이었고, 미국측에서는 민주주의(미국)와 공산주의(베트남)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북베트남이 많은 외세 중의 하나였던 미국을 잘 이해했던 데 반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분법에 사로잡힌 미국은 북베트남의 생활과 특성, 신념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에게는 애초부터 적을 알지 못한 싸움이었던 것이다.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무장한 초강대국과 (분열되어 있는) 아시아의 약소국. 누가 봐도 승패는 명확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첨단무기와 막대한 자본은 점차 인민의 지지를 얻은 북베트남의 게릴라 작전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계속되고 있었던 북베트남의 대항이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어려운 시기에 호치민과 그 동료들이 북베트남의 지도자였다는 것은 베트남 역사에서 가장 값진 축복이었다. 남베트남이 미국의 군정과 지도부의 무능력, 부패로 신음하고 있었던 데 반해 북베트남의 게릴라들은 농민과 하나가 됨으로써 단결력의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끊어진 다리를 보수하고, 정찰기를 격추시키는 것은 게릴라들의 일임과 동시에 농민들의 일이기도 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2000년까지 항쟁을 계속해야 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외세에 대한 항쟁은 그들의 삶 자체였던 것이다.

그해 반해 미국은 점차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초기에 베트남전을 지지했던 미국 시민들은 부상자와 전사자가 증가함에 따라 정부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게 됐다. 전사자는 너무 많아졌고 많은 젊은이들이 새로운 징집대상이 되고 있었다. 길어지는 전쟁 속에서 미국의 첨단무기들은 베트남의 정글 속으로 흡수된 것처럼 보였다. 명확한 비젼과 작전이 없는 정부에 대한 반전시위는 날로 거세졌다.

점점 혼란스러워지는 미국에 반해 북베트남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대규모 전투도 많았고 언제나 미군보다는 북베트남이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전쟁의 우세는 점차 북베트남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미군과 정부, 미국 국민들은 전쟁을 계속할 의지를 상실해가고 있었다. 1975년, 결국 미국은 북베트남에서 철수했고 북베트남은 사이공에 입성했다. 그 날은 북베트남이 미국에 승리한 날이자 남북 베트남이 통일된 날이었다.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병합, 통일시켜 사회주의 국가를 세운 것이 잘 된 일이었을까? '민주국가'에 사는 사람이라면 엇갈리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베트남, 미국과 나란히 놓고 봤을 때 북베트남의 지도부만이 베트남의 현실에 정통하고, 광범위한 인민의 지지를 받았으며, 사리사욕 없이 조국의 독립만을 생각했다. 사회주의, 민주주의의 문제가 아닌 제대로 된 국가를 세울 만한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민족주의자', 곧 '민족자결주의자'였고, 그것이 그들의 가장 존중받을 만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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