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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씨 ㅣ 범우 사르비아 총서 612
N. 호손 지음, 이장환 옮김 / 범우사 / 2002년 1월
평점 :
품절
세상의 모든 억울한 일들 가운데 두 남녀의 사랑이 간통으로 몰리는 것보다 더 심한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로 인해 젊은 여인이 평생 가슴에 죄를 가리키는 주홍글씨를 새기고 살아야 하는 처벌을 받았다면. 그리고 보수적인 사람들의 공개적인 지탄과 손가락질을 받으며 외딴 곳에서 고립되어 살아야 했다면. 이것은 17세기 보스턴에서 살았던 헤스터 프린이란 여인의 슬픈 이야기다.
헤스터 프린은 감옥 속에서 아이를 낳았고 석방이 된 순간부터 공개 처벌을 통해 가슴에 주홍글씨를 달아야 했다. 죄목은 사생아를 낳았다는 것.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힘들 정도의 지탄을 받는 그 '죄'는 17세기 보스턴에서는 '죽음의 형벌'을 요구하는 자가 있을 정도의 중죄였다. 그곳은 망명자들이 어설프게 개간한 도시로, 청교도의 결벽증이 지배하고 있는 고립된 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스터 프린은 아버지를 밝히라는 재판관과 성난 사람들의 요구를 묵살한다. 그리고 어린 딸과 함께 마을에서 떨어진 오두막에서 삯바느질을 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눈치챈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헤스터 프린의 오랫동안 실종됐던 남편인 로저 칠링워어드였다.
로저 칠링워어드는 아내를 먼저 보스턴으로 보낸 후 뒤따라 출발했지만 배가 난파되어 오랫동안 떠도는 생활을 했다. 그가 보스턴에 나타났던 때는 헤스터 프린이 공개 처벌을 받던 바로 그 날이었다. 원래 깊이 있는 지성과 점잖은 인간성으로 존경받는 학자였던 그이지만 아내의 부정을 알자 복수심에 사로잡힌다. 지성은 독으로, 성실함은 집념으로, 신중함은 위선으로 변해 그를 결국 복수를 위한 악마로 타락시키게 된다.
하지만 헤스터 프린이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은 그 남자는 그들의 사랑을 정당하게 생각할 용기도, 헤스터 프린이 침묵함으로써 지켜진 자신의 위신을 기뻐할 정도의 뻔뻔함도 없는 예민하고 나약한 사람이었다. 로저 칠링워어드의 적수는 애초에 되지 못했다.
복수를 하려는 남자와 그것에 저항할 힘이 없는 남자. 자부심이 강했던 남자와 누구보다 순수하고 예민했던 남자. 그 둘은 사실 복수나 힘겨운 사랑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이었다. 눈앞에 닥쳤던 시련을 극복하거나 흘려보내지 못하고 칡뿌리처럼 얽매여 서로를 괴롭혔던 그들이 그 담보로 인간다운 삶을 내놔야 했던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헤스터 프린은 달랐다. 로저 칠링워어드의 영혼이 미움으로 타락할 때도, 존경받는 지역 인사였던 그녀의 '애인'이 죄책감과 자기 학대로 지쳐갈 때에도 오기와 자존심, 그리고 딸 퍼얼에 대한 사랑으로 버텨나갔다. 그녀가 비웃음을 당하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행을 한 것은 남에 대한 미움이나 자신에 대한 자책감으로 삶을 좀먹지 않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꼿꼿하고 순수하게 살았던 그녀를 사람들도 결국 존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수 년이나 지난 후였다. 장 발장과 마찬가지로 헤스터 프린도 평생을 지켜나갔던 강인함과 다른 이에 대한 사랑으로 소중한 인생을 열매를 획득한 것이다.
로저 칠링워어드와 딸 퍼얼의 숨겨진 아버지였던 남자가 모두 허무하게 삶을 마치고, 퍼얼이 장성해서 결혼했을 시간이 훌쩍 지난 후에, 헤스터 프린은 한 동안 떠나 있었던 보스턴에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장 발장이 모든 것을 잃은 가운데서도 평안하게 눈을 감았듯이 노년의 헤스터 프린은 슬픔에 잠긴 사람들, 특히 '상처입은 사랑, 헛된 사랑, 억울한 사랑, 배신당한 사랑, 불의의 사랑'에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였다고 전해진다.
헤스터 프린의 일생과 그녀가 한창 사랑에 괴로워하던 청춘, 방황하는 사람들의 친구가 된 노년이 진중한 무게로 다가오는 것은 '주홍글씨'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