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 하워드 진의 자전적 역사 에세이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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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기득권들에게 세상은 안락한 살롱일지도  모르지만, 기층민이나 소수자에게 세상은 살벌하게 달리는 기차 위다. 권력자들에게 세상이 그대로 유지해야 할 완벽체라면 노동자나 이민자에게 세상은 바뀌어야 할 힘든 삶의 현장이다. 세상에 빈부와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중립적 태도란 때론 비겁이 되기도 한다.

사람은 타고나지 않으며 삶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생은 의미를 가지며 세상에 대해 아직도 희망이란 말을 쓸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워드 진은 젊은 시절부터 계급차별에 눈을 떴고, 노력하는 자는 부유함을 얻을 수 있다는 미국의 기치(그래서 부유하지 못한 자는 자신의 게으름을 탓해야 하는)에 분노했지만 그가 진정한 인권운동가가 된 것은 2차 세계대전과 남부 교수생활을 거치면서였다.

전쟁때는 연합군의 폭격수로써, 남부 흑인 대학에서는 교수로써 기득권의 위치에 있었지만 그가 미처 실감하지 못했던 세계의 문제, 약소국에 대한 폭력과 인종차별에 눈을 뜬 것도 그때였다. 지배층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민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패전직전의 나라에 필연적인 이유도 없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며, 흑인들을 억압하기 위해 살인이란 수단까지 동원하는지를 그는 바로 앞에서 목격하게 된 것이다.

20세기의 굵직한 문제-유럽에서 몰려온 가난한 이민자들, 빈곤, 세계대전, 흑인문제, 베트남 전쟁-을 한 평생 겪는 동안 그가 여전히 희망을 간직하고 꿋꿋한 것에 대해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분노해야 할 현장엔 항상 연대하여 그에 대항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매번 경험으로 배웠다고 한다. 반전운동으로 들끓었던 60년대 뿐 아니라 젊은이들이 소극적이었다는 70, 80년대에도 여전히 어떠한 계기로든 세상의 불의를 깨닫고 고민하는 젊은이들이 있다는 것을 교수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의지이며, 우리를 멈추게 하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포기라고 했던가. 감히 희망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의지라도 모두 쏟아보았는지 말한다면, 하워드 진이 여전히 희망이란 말을 즐겨 쓰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열패감에 젖어 있는 어떤 한국인들에게 이 책은 특히 좋은 것 같다. 많은 힌국사람들이 사회부조리에 대해 얘기하면서 선진국과 비교하기를 즐기며, 그런 선진국이 아닌 한국에 대한 실망과 탄식을 주저하지 않는다. 마치 모든 방법을 다 써본 것처럼, 민주주의를 위해, 복지국가를 위해 수백년은 싸워온 것처럼. 처음부터 민주사회, 복지사회였던 국가는 없으며, 권력자들이나 부유층이 인권에 눈을 떠 신사적으로 권리를 양도해 온 역사도 없으며, 어느 나라건 현재 누리는 권리는 모두 기층민과 소수자가 피흘리기를 각오하고 쟁취해온 것이다. 오히려 어디에도 출구라곤 없어 보였던 미국의 인종문제, '까부는' 흑인이 있으면 경찰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대낮에도 총질을 해댔던 미국에 비해 우리는 나은 상황이 아닌가.

하워드 진은 교수로서의 은퇴강연 때 자신의 학문적, 사회적 소신을 얘기한 다음 학생들과 함께 간호사들의 파업현장에 가 시위에 동참하는 것으로 강의를 마쳤다고 한다. "지식의 축척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혹적인 것이지만, 세계의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매혹을 경험할 기회가 없는 한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교수로써 중립을 지켜본 적이 한 번도 없으며, 항상 사회문제에 대해 학생들이 생각하게 되기를 바랬다. 그는 자신 또한 편견을 지니고 있음을 기꺼이 인정했지만, 그것이 기득권을 위한 편견이 아니라 정의를 위한 편견이 되길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에게 영원히 중립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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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 지적 망국론 + 현대 교양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정환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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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바나라는 지식인의 가장 큰 특징은 과학과 인문학을 포함한 광대한 지식세계를 아우르는 능력과 통찰력이다. 하지만 그는 흔히 잡학다식을 연상하게 되는 수준 낮은 제너럴리스트가 아니다. 그는 책에서도 명시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제너럴리스트, 한정된 지성만 가진 스페셜리스트는 절대 될 수 없는 사회적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는 제너럴리스트이다. 다치바나가 이 책에서 누누히 말하는 것도 그런 제너럴리스트의 필요성과 제너럴리스트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교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다.

'교양'이라는 말이 흔히 깊이가 없고, 사교에 필요한 지식이나 행동거지만을 가리키는 말인 것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런 교양에 대한 천시가 일본과 한국에 진짜 교양이 드물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치바나가 말하는 '교양'은 그런 것이 아니다. 원어 그대로 두뇌를 경작하여 문화와 과학,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지성을 갖추는 것이다.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 머리를 사용하는 방법의 문제, 또는 마인드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느 때인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갖추면 갖출수록 새로운 영역에 대해 뻗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증대되는 것인 것이다.

이런 교양은 20대부터 사회에서 활동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고, 대학에서 가르쳐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대학이 그 기능을 거의 못하고 있다는 것이 다치바나가 지적하는 문제점이다. 문이과의 조기분리로 인해 상대의 영역에 대해 중학교 수준의 지식밖에 없는 것, 대화와 토론에서 상대방과 교류하는 능력의 부족, 상대방을 이성적으로 설득하는 방법의 부재, 외국인과 교류하는 유일한 수단인 외국어 구사의 무능력과 현대인으로써 필수적으로 알고 이해해야 할 현대과학에 대한 무지는 일본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교양의 부재가 가져온 문제점은 현재 사회의 문제점과 그대로 통한다. 사회를 굴러가게 하고 외국과 경쟁하는 '테크닉'의 부족과 더불어 정신과 정서가 각박해지는 이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교양의 안티테제는 편협한 정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기 때문에 다치바나는 교양의 수준이 점차 하락해가는 것이 미래에는 사회를 침몰시키는 요인이 된다고까지 말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타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은 고등교육기관에서 교양교육을 강화하고 중앙에 지시를 받지 않는 대학의 자치권을 보장하며 수준 높은 교수들과 교사들을 길러내는 것이지만 대학만의 문제는 아니다. 다치바나가 강조하고 있는 또다른 것은 대학 이외에 우리가 정보를 익히고 배울 수 있는 채널이 매우 방대해졌다는 것이다. 매일 쏟아져나오는 서적들과 인터넷, 문화행사, 각종 크고 작은 단체에서 우리는 교수의 강의와는 비교할 수 없는 배움을 얻을 수 있다. '교양'은 현재 대부분의 사람이 갖추고 있지 못한 것이지만 노력과 계획여하에 따라서 누구나 갖출 수 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제너럴리스트'는 현대와 미래사회에 가장 중요한 인간상이라고 다치바나는 말한다. 조직의 최고 지도자는 물론 "기술자이지만 경영에 대해서, 영업을 전개하는 전략에 대해서, 정치나 사회의 동향에 대해서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조직의 개인들을 매니지먼트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지만 지도자가 아니라도 현대인이라면 마찬가지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무엇인가, 미래를 향해 세계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현대인으로서, 온전한 인간으로써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궁금해한다면 교양을 갖춘 '제너럴리스트'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교양은 '철학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며 철학은 인간세상을 보는 만고불변의 방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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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김혜자 지음 / 오래된미래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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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적당한 신파나 타인의 불행에는 눈물을 흘려주지만 뼈에 검은 피부만이 덮혀있을 뿐인 아프리카 아이의 튀어나온 두 눈은 마주보지 못한다. 절대적인 비참은 동정을 사기보다는 오히려 증오를 받는다. 고작해야 할 수 있는 것은 몸을 돌리고 손끝으로 약간의 돈을 건네주는 것뿐이다. 혹시 그들이 말을 걸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김혜자도 생의 대부분을 그렇게 보냈다. 그녀가 아프리카와 조우하게 된 것은 우연에 가까운 일이었다. 월드비젼에서 그녀에게 친선대사의 일을 부탁하지만 않았던들 김혜자의 여행지는 아프리카가 아니라 유럽이었을 거다. 더없이 어울리지 않는가. 유럽과 우아한 배우인 김혜자는. 하지만 월드비젼의 요청을 받고 아프리카에 간 김혜자는 우리가 그토톡 적극적으로 외면하던 바로 그들과 만난다. 이 책은 김혜자가 10년동안 만나고 인연을 쌓은 그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그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들은 인간으로 존재하지 못했다. 우리에게는 통계로 제시되었을 뿐이다. 예컨데 몇 분에 한 명이 죽어가고 있으며, 몇 억이 물부족 상태로 지내고 있고, 하루에 몇 명이 지뢰에 희생당하는가에 대한 것. 세상에서 제일 먼 거리는 머리와 가슴까지의 거리라 그랬던가, 그런 수치가 우리의 가슴까지 내려가는 일은 드물었다. 주위 사람과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일도 드물었다.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는 방글라데시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게 나왔다는 얘기는 즐겨하면서.

아프리카, 특히 오랜 내전이 계속된 시에라리온의 이야기는 눈을 감아도 악몽으로 떠오를 정도였다. 그들에 대한 공감과 동정보다는 두려움이 더 나를 사로잡았다. 단지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뿐인데도. 자비도 용기가 있어야 하는 것이었던가. 이런 일을 보거나 듣고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증오지만, 사실은 그것도 회피일 뿐이다. 어떻게 해도 비참한 사람은 없어지지 않으니 모든 노력이 헛수고라는 생각도 회피일 뿐이다. 그 중의 한 사람에게 손을 내민다면 한 사람의 생명이 구해지고 손을 내민 사람의 영혼도 구해지는 것이 아닌가. 인간은 그렇게 시작해야 하는 존재인 것 같다.

그렇다 해도, 아직 텔레비젼에 나오는 그들의 나뭇가지같은 팔다리와 파리가 끓는 눈을 똑바로 쳐다볼 자신은 없다. 굶주려 벌판에 쓰러져 있는 아기와 그 옆에 아기가 죽기를 노리고 앉아 있는 새를 찍어 퓰리처상을 받은 젊은 사진기자는 고국으로 돌아간 뒤 자살했다고 한다. 우리는 괴로워하지 않고 살기 위해 그들을 외면하지만, 그곳에 비참이 있는 이상 부유한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은 없다. 그들을 '그들'이 아니라 '우리'라고 부르게 될 때, 그들의 비참한 모습에 등을 돌리지 않고 껴안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 될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요, 생각하는 존재요, 신의 영혼을 닮았다고 말하는 존재라면 우리는 아직 인간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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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는다 1 - 아나톨리아 횡단 나는 걷는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음, 임수현 옮김 / 효형출판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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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가는 것을 빼고는 이렇다할 여행을 해보지 못한 나에게 여행가란 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강하고 부지런하며, 무엇보다 여행에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을 얻었노라 자신했다. 여행을 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 그런데 그것은 또한 말로는 설명할 수 없고 체험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진정 사람은 여행을 해본 사람과 안 해본 사람으로 나뉘는 것이었더란 말인가?

그런데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거기에 한 마디를 덧붙인다. 여행이라고 다 같은 여행은 아니며 걷는 것만이 여행 중의 진짜 여행이다, 라고. 왜냐하면 걷는 것은 여행지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현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의 속도와 보조를 맞추며 그들 속을 '걸어'다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런데 개방성이란 자체로는 좋지만 개방한 만큼 외부의 위험에도 노출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동차 여행중에도 그렇게 두려워 한 터키의 맹견 캉갈의 공격, 미친사람과 강도, 혹은 강도를 겸업하는 부패한 경찰과 관료주의. 사막의 모래바람과 탈수증. 덧붙이자면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는 자동차의 위협까지. 이 모든 위험을 맨몸으로 맞서야 했지만 그래도 그는 걷는다. 겪은 위험 만큼 걷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아름다운 인연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여행은, 특히 타문명을 여행하는 것은 많은 한계를 가진다. 전부터 그 세계에 가지고 있던 편견이 현지에 직접 간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더군다나 서양인이 아시아를 여행할 때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전직 기자이며 역사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온 지식인이자, 서양이 아시아에 많은 역사적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사람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아시아의 전통생활과 문화는 오롯이 보존했기를 바라면서 현대화를 이루지 못한 것을 비판하는 무책임한 감상. 민주주의와 시멘트가 별개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중성. '동도서기'라면 아시아에서는 안타깝게도 1세기 전에 밀려난 철지난 대안이다. 아니면 아시아가 서양처럼 3세기에 걸쳐 민주화되고 현대화되길 기다릴 정도로 세계가 여유롭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는 서양의 좋은 점을 받아들여 급속히 현대화시켜야 될때 일어나는 전통과 문화의 파괴라는 아시아의 기본적인 딜레마조차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그저 유감스러워 할 뿐.

결국 이 빼어난 여행서를 읽으면서 나는 여행서에 대한 맹신을 버렸다. 어행이란 본질적으로 '보는 것'이지 '생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고 보면 여행이란 상대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는 것이기 보다 자신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는 과정이 아닌가 한다. 남들에게 여행으로 얻은 인생의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결국 독자는 여행서를 읽으며 그가 접한 사람과 문명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베르나르 올리비에라는 한 인간의 중요한 전환점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베르나르 할아버지(62세)는 은퇴로 정체될지 모를 자신의 삶을 새롭게 하기 위해 도보여행을 감행했다고 한다. 여행을 마친 지금 그는 비행청소년에게 도보여행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주는 '쇠이유 협회'를 운영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 걷는다는 것은, 그에게는 사는 것 자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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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
서준식 지음 / 야간비행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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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 수 없다는 말을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정말 맑은 물이란 그 깨끗함으로 우리를 울리면서도 두려움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맑은 물과 더러운 물을 분별하는 이에겐 이미, 맑은 물을 편하게 느낄만한 순수함이 없기 때문에.

서준식 선생이 어떻게 감옥에 들어가게 됐는지, 70년대의 시대상황이 어땠는지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맑스주의자였다는 것, 친북주의자였는지, 진실된 사회주의를 꿈꾸었는지 간에 맑스주의자란 한 마디면 감옥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80년대생인 나에게도 요컨데 그건 상식이다. 그리고 서준식 선생이 '전향'이란 것을 거부하고 17년간 감옥에 있었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개인의 사상에 법이, 국가가 심판을 내릴 수는 없다는 것. 그는 일개 힘없는 개인이기에 감옥에 가고 고문받는 것은 거부할 수 없었지만 감옥에서 나오는 것은 거부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쓰여진 편지는 그의 살과 피를 실은 채 그의 형제자매에게로, 부모님에게로, 친척들에게로 전해졌다. 그의 편지를 읽고 가슴이 찔린 듯 아프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나는 끊임없이 서준식 선생이 꾸짖는 순자나 영실이가 되어야 했다. 확실히 나는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했고, 냉담하며, 아프고 힘없는 사람들을 너무나 자주 외면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그의 조카들처럼 외치고 싶기도 했다. '살아가는게 얼마나 힘든데! 그 모든 걸 갖추기에는 힘이 없어요' 라고.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세상의 문제를 속편히 망각해버리지 않는 이상, 그가 말한 대로 한발짝씩 나아가야 한다는 걸. 그래서 그는 진보주의자란 금욕적이어야 한다고 말했고, 진실은 외롭다고 말한 것이다.

갑자기 '월든'의 작가 소로우가 불합리한 세금에 반대해 납부거부를 하다가 감옥에 갇혔을 때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쇠창살 안에 갇힌 그를 면회온 저명한 작가였던 친구는 그에게 묻는다. '왜 거기 있는가?' 소로우는 태연히 대답한다. '그러는 자네는 왜 거기 있는가?'

아마도 서준식 선생은 자기를 불쌍하다, 무시무시하다, 대단하다라고 말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정작 갇힌 사람은 누구인지 묻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편지를 읽는 나 역시 갇힌 사람임을 절실히 느낀다. 하지만 나는 내가 이기심의 감방에 갇힌 것도 거의 망각하고 살아간다. 착하게 산다는 것은 착하지 않은 모든 것에 반대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서준식 선생의 말대로 착하게 산다는 것은 까무러칠 정도로 힘든 일이다. 타인들의 벽에도 부딪히지만 우선 나의 이기심을 버려야 하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착하게 살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벌써부터 속이 쓰리다. 만약 내가 그의 조카였다면 누구보다 가혹한 편지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의 매에 끊임없이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끔이라도 칭찬이 섞인 편지를 받는다면 다시 용기를 내 나의 감옥에 달린 창살을 하나하나 부러뜨리려는 시도를 해 갈 것이다. 그의 편지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부족하다 말하며, 보는 사람도 그가 사회적으로 대단하게 될 거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따르고 그의 말에 공명하게 되는 것. 여지껏 나에게 무의미한 낱말이었던 '진실의 힘'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그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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