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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의 노래 1
콜린 맥클로우 지음, 박혜수 옮김 / 동녘라이프(친구미디어) / 2000년 2월
평점 :
절판
역사에서 전쟁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인간의 잔인함을 증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전쟁이 그 시대의 모든 특징과 모순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트로이 전쟁 또한 그랬다. 전쟁의 원인은 다른 거의 모든 전쟁과 마찬가지로 자원싸움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트로이 전쟁은 다른 전쟁들과 구별되는 점이 있었다. 다른 전쟁은 기록되었지만, 트로이 전쟁은 노래되었다는 것.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의 싸움임과 동시에, 올림푸스에 사는 신들의 수호와 사랑을 받는 인물이 있었고, 신들에게 버림받은 인물이 있었다. 영원한 명성을 얻기 위해 전쟁에 참가한 무자비한 전사와, 풍요로운 자신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무자비한 전사와 싸운 용기있는 왕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전쟁은 트로이의 어리석고 잘생긴 왕자 파리스가, 그리스의 전설적인 미녀 헬렌을 트로이로 데려오면서 시작됐다.
왕비를 도둑맞는다는 것은 확실히 치욕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래서 전쟁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당시 그리스는 강국 트로이의 방해로 인해 소아시아로의 자원조달이 끊겨있었다. 고대인들에게 주석과 같은 금속은 오늘날 석유와 같은 중요한 자원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점차 줄어드는 주석과 청동의 공급에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헬렌의 사건은 거기에 불을 붙인 것이다.
전쟁이란 것은 묘해서, 한번 일어나면 전쟁에 끼기 싫었던 사람, 무관심했던 사람까지 한꺼번에 끌고 들어가는 성질이 있다. 트로이를 사사건건 노리고 있었던 아가멤논이나, 아내를 도둑맞은 메넬레오스, 이득에 욕심을 낸 연합국들은 기꺼이 참가했지만 누구도 비껴가지 않는 전쟁의 손길은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을 이 전쟁에 끌어들인다. 아킬레스와 오디세우스가 그들이었다. 전쟁과 명성을 목숨보다 사랑했으나 아버지의 방해로 그리스의 사자를 만나지 못할 뻔했던 아킬레스와, 한번 그리스를 떠나면 20년동안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미친 척하고 있었던 오디세우스가 끝내 전쟁에 참가하게 되면서, 그리스는 최고의 전사와 최고의 두뇌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제 트로이 전쟁의 막이 열렸다. 그러나 이 복잡한 이야기가 원작 일리아드처럼 난해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철저히 현대적으로 각색하고자 한 콜린 맥클로우의 의지 때문이다. 원작에서 인간들을 좌지우지하고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를 제공했던 신들은 구름 저 너머로 밀려나 어렴풋한 영향력만 끼칠 뿐이다. 여기서 신은 인간에게 가호를 빌어주는, 혹은 영웅들의 조상으로만 화자화된다. 왕족들은 신의 직계자손들이지만, 그들은 점을 칠 때를 빼고는 철저히 인간적으로 전쟁에 대처한다. 그건 트로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에 아킬레스가 있었다면 트로이에는 헥토르가 있었다. 하지만 트로이의 불행은 오디세우스와 맘먹는 지략가를 가지지 못했다는 데에 있었다. 그리스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헬렌이 트로이에 있었지만 '적국의 여자'라는 허상에 눌려 누구도 그녀를 활용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트로이 성벽안에 있었던 헬렌에게 정보를 캐낸 것은 오디세우스였다. 헬렌의 결혼식부터 헬렌의 아름다움을 정치적으로 완벽히 이용해 그리스를 연합하게 만들고, 트로이 성벽 안으로 첩자들을 잠입시켜 정보를 캐내며 트로이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오디세우스. 그는 모두가 신들의 계율을 지켜며 전쟁에도 법도가 있다는 것을 믿을 때, 전쟁이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해서 이기고 봐야 된다는 것을 관철한 인간이다. 하지만 그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10년 더 방랑과 모험을 해야 했던 것은 지략이 너무나 뛰어났던 그에게 신들이 내린 운명이 아니었을지.
전쟁에 이기고도 10년을 방랑해야 했던 오디세우스처럼, 전쟁은 트로이인 뿐 아니라 그리스인들의 운명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 고대의 전쟁. 하지만 전쟁에 행복한 승자란 없다는 것이 이 '노래'가 다른 전쟁 이야기와 다른 점이다.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자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죽은자, 미쳐서 죽은 자, 병으로 죽은 자와 동료에게 살해당한 자, 고향으로 돌아가다 혹은 돌아가서 죽은 자. 불행은 이름없는 병사와 왕들을 가리지 않았다. '그대 그리스는 트로이에 이기지만 결코 행복하지 못하리라'가 혹시 부푼 마음을 안고 트로이를 향해 출정하는 그리스인들에게 내려진 숨겨진 신탁이 아니었을지.
신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공존하던 시대, 여자의 힘을 상징했던 옛신앙과 남자의 힘을 상징하는 새신앙이 힘겨루기를 하던 시대, 적을 대할 때도 예우를 지켜야 한다는 계율과 비정한 승리의 법칙이 충돌하던 시대, 두 문명이 백중세를 겨루며 10년을 싸우다 하나의 목마로 명운이 갈리던 시대. '일리아드'가 쉼없이 사람들에 의해 노래되고 현대에 '트로이의 노래'등으로 끊임없이 각색되는 것은, 현대의 논리적이고 빈약한 세계인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광활한 세계를 이 이야기가 보여주기 때문이다. 고대에도 이성을 중시하긴 했지만, 이성만을 최고로 치는 현대인과 여러가지 덕목의 하나로써 이성을 중시한 고대인은 확실히 풍부함의 그릇이 달랐다. 트로이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것은 그것이다. 다시 한 번 그 세계로 들어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