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희망의 세상을 만나다 - 해외 자원봉사 여행기
설지인 지음 / 동아일보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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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등학교 때부터 난민과 빈민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한 젊은이의 해외 봉사활동 체험기. 이 책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던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네팔에서의 봉사활동을 마치고 귀국하는 김에 석류를 사가지고 가기로 하고 시장에 간 그녀. 한 소년이 석류 한 웅큼을 팔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모두 상한 것이다. 소년은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불렀다. 그렇지 않아도 외국인을 모두 돈덩어리로 보고 한푼이라도 더 뜯어내려고 하는 모습들에 환멸을 느끼던 그녀는 석류를 사지 않고 소년을 떠난다. 몇 걸음 걸었을까, 뒤에서 소년이 슬프게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손님, 제발. 깍아드릴께요!' 그녀는 소년의 너무나 슬픈 외침에 가슴이 내려앉았지만 그대로 그곳을 떠난다.

소년의 집에는 굶주리는 가족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곳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하지만 나중에 깊이 후회했음에도 설지인은 끝내 뒤돌아서지 않았다. 현지인에겐 관광객과 구별되지 않는 자원 봉사자의 어려움, 제3세계에 가서 너무나 무분별하게 돈을 쓰는 '외국인'과, 그 결과 외국인을 모두 돈으로 보게 된 현지인의 뿌리깊은 정서적 반목이 부딪히는 슬픈 순간이었다.

'연대'란 것의 어려움을 최초로 엿본 것은 인도에서 집없는 사람들을 위한 NGO 활동을 취재하던 한 TV프로그램에서였다. 그들은 낮에 하는 활동 외에도 밤마다 거리를 돌아다니며 무방비상태로 자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불을 덮어주곤 했다. 아름다운 일이었다. 하지만 처음에 활동가들을 경계하거나 고마워했던 이들은 곧 그들이 빈손으로 나타나면 왜 이불이나 다른 것들을 가져오지 않았냐고 항의하기 시작했다. '연대'가 '적선하는 사람'과 '적선받는 사람'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NGO들은 활동가와 빈민 혹은 난민을 동등한 위치로 보고 '연대'하고자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강자의 여유임을 부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도움받는 측에서는 언제나 '연대'보다는 수혜로 느끼지 않을까. 주는 것은 쉽지만, '잘' 주는 것은 무엇보다 어려운 일 같았다.  

가난은 항상 있는 것이나 거지는 만들어지는 것이라 했다. 가난한 사람이 자존심을 버리게 되는 것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때이다. 제3세계의 공항에서 외국인이 나올 때 손을 벌리며 몰려드는 아이들은 그 공항이 없던 때에는 집에서 물을 긷던 아이들이었다. 설지인이나 다른 외국인이 자신들을 돈덩어리로 보는 현지인에게 불쾌감을 갖는 건 당연하지만, 만약 몇백원을 주고 그 석류를 샀으면 역시 '수혜와 수혜자'라는 부조리한 구조에 기여하게 됐을 것이다. 상한 석류를 사는 순간 그들을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도움 받아야 될 사람'으로 본 것이기 때문이다. 자원 활동가들조차 현지인과 겪어야 하는 이런 갭은 분명 비극이다. 난민문제같은 긴급구조는 상황이 다르지만 부국과 빈국의 연대는 이 딜레마를 개선시키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서는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러나 설지인의 활동이 이런 딜레마로만 점철된 것은 아니었다.  현장에 참여하고 있다는 보람, 부유한 나라의 사치스럽고 가벼운 삶이 아닌 세계의 진실한 문제들과 직면하고 활동한다는 기쁨이 있었다. 해외 봉사활동을 떠날 때나 국내에 있을때나 그녀의 촉수는 항상 난민과 빈민문제로 쏠려 있었고, 책 말미에 있는 글은 그런 문제를 얼마나 자신의 삶과 일치시키고 체화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젊은 설지인의 활동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태국 아이들에게 영어 가르치기, 필리핀 고아원 아이들 돌보기, 이라크 의약품 지원 모니터링 등, 단기간의 방학에 하는 산발적 봉사활동이라는 한계도 있었다. 한식구가 한방에서 모두 생할하는 오지 마을의 집을 서양식으로 바꾸는 작업같은 것은 한방에서 생활하게 된 자연, 문화적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꼭 필요한 것이었냐는 의문도 들고, 이라크 파병을 미국의 침략적 군사작전에 대한 한국군의 지속적인 보조구도라는 근원적인 문제보다 한국과 이라크의 교류와 상호도움을 중요시한 조선일보 기고글은 외교학과 학생답지는 않았다고 생각되지만, 어쨌든 설지인은 전진하고 있는 중이다. 한 알이 밀이 또 땅에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활동은 같은 길을 계획하는 모든 사람을 고무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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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의 노래 1
콜린 맥클로우 지음, 박혜수 옮김 / 동녘라이프(친구미디어)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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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역사에서 전쟁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인간의 잔인함을 증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전쟁이 그 시대의 모든 특징과 모순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트로이 전쟁 또한 그랬다. 전쟁의 원인은 다른 거의 모든 전쟁과 마찬가지로 자원싸움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트로이 전쟁은 다른 전쟁들과 구별되는 점이 있었다. 다른 전쟁은 기록되었지만, 트로이 전쟁은 노래되었다는 것.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의 싸움임과 동시에, 올림푸스에 사는 신들의 수호와 사랑을 받는 인물이 있었고, 신들에게 버림받은 인물이 있었다. 영원한 명성을 얻기 위해 전쟁에 참가한 무자비한 전사와, 풍요로운 자신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무자비한 전사와 싸운 용기있는 왕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전쟁은 트로이의 어리석고 잘생긴 왕자 파리스가, 그리스의 전설적인 미녀 헬렌을 트로이로 데려오면서 시작됐다.

왕비를 도둑맞는다는 것은 확실히 치욕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래서 전쟁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당시 그리스는 강국 트로이의 방해로 인해 소아시아로의 자원조달이 끊겨있었다. 고대인들에게 주석과 같은 금속은 오늘날 석유와 같은 중요한 자원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점차 줄어드는 주석과 청동의 공급에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헬렌의 사건은 거기에 불을 붙인 것이다.

전쟁이란 것은 묘해서, 한번 일어나면 전쟁에 끼기 싫었던 사람, 무관심했던 사람까지 한꺼번에 끌고 들어가는 성질이 있다. 트로이를 사사건건 노리고 있었던 아가멤논이나, 아내를 도둑맞은 메넬레오스, 이득에 욕심을 낸 연합국들은 기꺼이 참가했지만 누구도 비껴가지 않는 전쟁의 손길은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을 이 전쟁에 끌어들인다. 아킬레스와 오디세우스가 그들이었다. 전쟁과 명성을 목숨보다 사랑했으나 아버지의 방해로 그리스의  사자를 만나지 못할 뻔했던 아킬레스와, 한번 그리스를 떠나면 20년동안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미친 척하고 있었던 오디세우스가 끝내 전쟁에 참가하게 되면서, 그리스는 최고의 전사와 최고의 두뇌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제 트로이 전쟁의 막이 열렸다. 그러나 이 복잡한 이야기가 원작 일리아드처럼 난해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철저히 현대적으로 각색하고자 한 콜린 맥클로우의 의지 때문이다. 원작에서 인간들을 좌지우지하고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를 제공했던 신들은 구름 저 너머로 밀려나 어렴풋한 영향력만 끼칠 뿐이다. 여기서 신은 인간에게 가호를 빌어주는, 혹은 영웅들의 조상으로만 화자화된다. 왕족들은 신의 직계자손들이지만, 그들은 점을 칠 때를 빼고는 철저히 인간적으로 전쟁에 대처한다. 그건 트로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에 아킬레스가 있었다면 트로이에는 헥토르가 있었다. 하지만 트로이의 불행은 오디세우스와 맘먹는 지략가를 가지지 못했다는 데에 있었다. 그리스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헬렌이 트로이에 있었지만 '적국의 여자'라는 허상에 눌려 누구도 그녀를 활용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트로이 성벽안에 있었던 헬렌에게 정보를 캐낸 것은 오디세우스였다. 헬렌의 결혼식부터 헬렌의 아름다움을 정치적으로 완벽히 이용해 그리스를 연합하게 만들고, 트로이 성벽 안으로 첩자들을 잠입시켜 정보를 캐내며 트로이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오디세우스. 그는 모두가 신들의 계율을 지켜며 전쟁에도 법도가 있다는 것을 믿을 때, 전쟁이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해서 이기고 봐야 된다는 것을 관철한 인간이다. 하지만 그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10년 더 방랑과 모험을 해야 했던 것은 지략이 너무나 뛰어났던 그에게 신들이 내린 운명이 아니었을지.

전쟁에 이기고도 10년을 방랑해야 했던 오디세우스처럼, 전쟁은 트로이인 뿐 아니라 그리스인들의 운명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 고대의 전쟁. 하지만 전쟁에 행복한 승자란 없다는 것이 이 '노래'가 다른 전쟁 이야기와 다른 점이다.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자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죽은자, 미쳐서 죽은 자, 병으로 죽은 자와 동료에게 살해당한 자, 고향으로 돌아가다 혹은 돌아가서 죽은 자. 불행은 이름없는 병사와 왕들을 가리지 않았다. '그대 그리스는 트로이에 이기지만 결코 행복하지 못하리라'가 혹시 부푼 마음을 안고 트로이를 향해 출정하는 그리스인들에게 내려진 숨겨진 신탁이 아니었을지.

신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공존하던 시대, 여자의 힘을 상징했던 옛신앙과 남자의 힘을 상징하는 새신앙이 힘겨루기를 하던 시대, 적을 대할 때도 예우를 지켜야 한다는 계율과 비정한 승리의 법칙이 충돌하던 시대, 두 문명이 백중세를 겨루며 10년을 싸우다 하나의 목마로 명운이 갈리던 시대.  '일리아드'가 쉼없이 사람들에 의해 노래되고 현대에 '트로이의 노래'등으로 끊임없이 각색되는 것은, 현대의 논리적이고 빈약한 세계인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광활한 세계를 이 이야기가 보여주기 때문이다. 고대에도 이성을 중시하긴 했지만, 이성만을 최고로 치는 현대인과 여러가지 덕목의 하나로써 이성을 중시한 고대인은 확실히 풍부함의 그릇이 달랐다. 트로이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것은 그것이다. 다시 한 번 그 세계로 들어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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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도르를 벗겨라
베흐야트 모알리 지음, 이승은 옮김 / 생각의나무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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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슬람은 서구에 의해 너무 많이 조작, 이용되었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는 "이슬람인이 말하는 이슬람"에 대해서만 신뢰를 가지기로 했었다. 서구인들이 제공하는 정보로만 판단하다가는 이슬람에 대한 나의 인식이 돌이킬 수 없는 편견에 빠져들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슬람은 폭력적이며 광신적이다"라고 할 때도 "아니야, 사실 그건..."이라고 말할 준비를 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슬람은 여성억압적이다"라고 할  때는 "아니야,  사실 그건..."이라고 선뜻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여성을 집 안에 있게 하고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소중한 것일수록 깊이 감춰두고 보호하는 이슬람의 특성이다"라고 말하는 이슬람인의 말에 동조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개운치 못한 혼란속에서 나는 누구보다 이런 책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이슬람의 현실에 대해 말하는 객관적이고 명철한 이슬람 여인의 말 말이다.

이란은 유명한 사실대로 1979년 호메이니의 '혁명'을 거쳐 과거로 회귀한 듯 보이는 나라였다. 그전에는 몇 십년간 팔레비 왕조의 서구화 정책을 거쳤다고 하는데, 이란 여성의 현재는 수천년간 계속된 전통사회와 몇 십년간의 급격한 서구화, 그리고 다시 전통으로 돌아간 '혁명'과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그 기복을 상징하는 것이 베흐야트라면 견고한 전통사회 아래의 세상을 상징하는 것이 타라의 삶이다.

두 여인의 어린시절은 극과 극의 세계를 보는 듯 했다. 베흐야트는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과 부유한 생활환경, 많은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독똑하고 능력있는 아이로 자라났다. 특히 개방적이고 유쾌했던 외할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할머니는 베흐야트에게 자주 순종적인 여인을 칭송하는 옛날 이야기를 비판적인 비평을 곁들여 해주곤 했다. 콩쥐팥쥐 이야기를 해주면서 어리석고 포악한 계모밑에서 저항할 줄 모르고 순종만 하는 콩쥐는 무능력한 바보라고 얘기해주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란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희귀한 이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베흐야트와는 달리 타라의 삶은 이란 벽촌에서의 '여인의 삶' 바로 그것이었다. 타라의 어머니는 타라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이것은 비록 아들을 더 아끼긴 했지만 딸을 보호하고 딸의 행복을 생각하는 유일한 인물이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타라를 학교를 보내는 대신 밭에 내보냈다. 딸을 학교같은 곳에 보내 낯선 이들의 눈에 내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대신 밭에서 매일 남자들의 눈에 띄인 타라는 11세 때 늙은 홀아비에 시집을 가게 된다.  천만다행이도 타라의 남편은 선한 사람이어서 7년동안 아이를 못 낳던 타라를 보호하고 주위의 비방으로부터 감싸주었다고 한다. 소녀와 결혼하는 노인이 선하다는 이유만으로 소녀가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자체로 소녀의 처지를 대변하는 말이지만 타라는 남편이 살아있던 동안은 행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남편을 잃은 젊은 타라를 마을 여자들은 경계하고 질투했고, 남자들은 탐을 내고 추근덕거렸다.

상상력이 풍부했던 타라, 누구보다 공부하고 싶어해서 선생님 놀이를 즐겼다는 타라, 넒은 세상을 꿈꾸고 남편이 죽자 재가하는 대신 일하기를 소망했던 타라. 하지만 그녀는 얼마 후 자살기도에서 깨어난 뒤 고용주의 두 아이를 죽인 살인죄로 기소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누가 아이들을 죽인 것일까? 타라가, 혹은 타라를 질투했던 누군가가? 혹은 이란이? 베흐야트가 타라를 만난 것은 이때이다. 돈 한푼 없어서 재판조차 하고 있지 못하는 타라의 국선변호사로서였다. 그때는 극심한 독재를 일삼던 팔레비왕조가 국민들의 저항에 무너지고 여러 정당들이 혼란한 가운데 호메이니가 국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귀국하던 때였다. 그리고 호메이니가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는 애초 약속을 깨고 '팔레비독재'에서 '이슬람독재'로 방향을 선회한 후 숙청을 일삼고 국가 체제를 과거로 되돌리던 때였다. 또한 검사와 판사, 변호사 제도와 이성적인 변론, 정신감정서가 통하던 재판에서 이슬람 성직자인 물라가 판사보다 위에서 재판을 주재하기 시작했던 때이기도 했다. 타라에게는 재앙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베흐야트에게도.

이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타라가 어떻게 됐는지 모두 알테니 숨기지 않겠다. 타라는 사형당했다. 그리고 목숨이 위험한 건 베흐야트도 마찬가지였다. 타라 뿐 아니라 많은 여성의 변호를 맡았던 베흐야트가 새 정권의 눈엣가시로 보인 것이다. 타라의 죽음과 베흐야트의 망명. 완전히 상반된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두 여성의 고난은 한결같았다. 그리고 베흐야트가 망명지 독일에서 망명자 단체를 위해 활동을 하던 곳에서 만났던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칸영화제에도 몇 번 출품을 했던 이란의 젊은 여성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뒤짚어써야만 칭송받는 아프간의 여성이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발가벗어야만 칭송받는 서구의 여성이나 본질적인 처지는 다르지 않다고. 여성문제의 핵심을 짚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복지국가에 사는 여성이라도 밤 골목길에서 낯선 남자가 뒤에 걷고 있다면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 그 남자가 집에 가서 라면 먹을 생각을 하고 있는 남자인지 나에게 위협을 가할 생각을 하고 있는 남자인지 여자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 이란은 확실히 특이한 곳이지만 낯선 곳은 아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여성을 억압했던 것은 전세계의 공통된 역사였다. 다만 현대에 민주주의가 종교를 극복하면서 여성해방의 길이 열린 것이다. 사회의 혼란을 종교의 이름으로 잠재우려 하는 이슬람 독재자들. 종교를 억압의 도구로 이용하여 종교 본래의 가치를 빼앗은 이들 사이에서 여전히 여인의 삶은 고되고 때로는 생명을 위협받는다.

베흐야트는 여전히 타라의 꿈을 꾼다고 한다. 타라는 베흐야트가 혜택받은 환경과 재능으로도 벗지 못했던 '여인의 삶'을 뜻하는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서구에는 많은 베흐야트들이 있지만, 이들은 얼마나 굴곡에서 벗어났는가? 타라의 삶에서 베흐야트의 삶으로 이동중인 한국의 여성들은? 우리는 여전히 베흐야트고, 타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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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일기
지허 스님 지음 / 여시아문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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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성직자들은 모두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갈하고 흠없는 무오류의 존재라고나 할까. 그 환상이 깨진 것은 아는 신부님과 수녀님이 말싸움을 하는 것을 본 다음부터였는데, 웃기게도 그 다음부턴 성직자들의 인간적인 결함이 먼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떤 신부님은 젊은 신부님들을 며느리 시집살이 시키듯 못살게 굴었고, 어떤 수녀님은 자기만 고고한 줄 알았다.

그들을 보는 내 시각이 공평치 못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성직자란 완벽체가 아니라 일상과 이상 사이에서 민감하게 움직이는 진자와 같은 존재니까. 그들이 일반인과 다른 것은 오류가 없어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좌충우돌 하면서도 이상에 대한 끈을 놓지 않는 구도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도자에게 일상생활은 중요하다. 이상이란 것은 수많은 일상생활의 정진을 계속하다 얻어지는 득도의 길일 것이고, 득도를 한 다음에도 (육체가 소멸할 때까지) 일상생활은 계속됨을 부처님도 몸소 보여주셨으니.

오대산의 깊은 자락에 있는 절에 동안거를 위해 모인 스님들이 있다. 외부와 단절된 채 겨울동안 수도에 매진하기로 다짐했을 그들이지만 그동안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은 득도를 위한 용맹정진 또한 일기로 서술이 가능한 생활 그 자체라는 것을 보여준다. 가진 것이라곤 단벌의 옷과 한 두권의 책, 매 끼니는 소소하기 그지없는 절식뿐이다. 그 가운데서 일어나는 견딜 수 없는 식욕이 화두를 망치게도 하고 심지어 밤에 식창고의 감자서리를 하게 하기도 하는 것을 어찌할까. 검소할 순 있어도 굶주릴 순 없는 것을.

하지만 굶주림을 충족시키려는 그들의 방편은 순수한 장난같아 재미있지만 정신의 굶주림을 충족시키려는 방편은 때로 자신을 망치고 남을 괴롭게 하기도 한다. 주위 스님들의 수도방법이 안일하다고 여겨 생식을 고집하고, 사람들을 무시하는 궤변을 계속하다 결국 스스로에게 가했던 고행을 견디지 못해 하산하는 어떤 스님의 모습은 구도자의 본질적인 굶주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굶주림을 채우는 길이 얼마나 조심스럽게 닦아져야 하는지를 대변한다.

일찌기 얼마나 많은 스님들이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절을 떠났는가. 그것을 보면 절이나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이 현실도피라는 말은 실례다. 그것은 퇴로가 없는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인은 직장을 때려칠 수도 있고 주말에는 늘어지게 늦잠을 자기도 하고 카드를 긁으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지만 수도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손은 빈손, 주위에는 고독 뿐. 어떤 수녀님은 현실도피를 하려면 수녀원은 가장 적합하지 않은 장소라고 말했었다. 수녀원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현실세계라고. 현실의 모든 단점이 모여있는 곳이라고.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니 인간문제는 끊이지 않을 것이고 덧붙여 폐쇄적이고 가난한 생활속에서 종교적인 생활까지 해나가야 하니까.

동안거가 끝날 때쯤에는 탈락한 스님과 공부를 성공적으로 마친 스님이 명확히 나뉘어진다고 한다. 탈락한 스님은 스스로의 사명을 상실한 채 먹빛 옷만 걸친 사람이 될 것이고 공부를 마친 스님은 다른 공부를 위해 어딘가의 절로 또 떠날 것이다. 그들의 수도는 언제나 되야 끝이 날까. 그들을 보는 이 중생의 마음이 시리다. 부디 그들의 수도가 절망으로 끝나지 않기를. 밤에 감자를 구워먹는 재미를 잊지 말기를. 끝내는 큰스님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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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 새 시대를 열어간 사람들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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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인물의 주변 사람들이 걸출한 재능을 지녔음에도 전설적인 인물에 가려 정당한 관심과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일이 흔히 있다. 예컨데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소크라테스 사후 어떻게 됐는지 알려주는 책은 거의 없다. 그들 역시 각 분야에 뛰어난 사람들이었는데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더불어 역사의 관심에서 멀어져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난 정말 궁금했다. 그들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정약용 형제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허난설헌, 허균 남매와 더불어 조선시대 최고의 천재형제였던 정약용, 정약종, 정약전. 그들은 실학의 집대성이라는 다산학의 주인공 정약용에 가려 흔히 들러리로 언급되기 일쑤였으나 이 책에서는 그들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정약용의 삶 역시.

실학자들은 흔히 현실정치에서 소외됐었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이 위대했음에도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다고 국사책은 언급하곤 한다. 하지만 정약용은 유배생활을 하기 전까지 현실정치의 일선에서 뛰던 벼슬아치였으며 정조의 총애를 받아 암행어사로 활동하기도 했고,  후에 재상자리까지 점지된 인물이었다. 정약용을 그토록 총애했던 정조는 어떤가? 실학자는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강한 개혁의지를 갖춘 계몽군주였으며 국가를 위해서는 아버지를 죽인 정적과도 얼굴을 맞대고 정사를 의논했던 위대한 정치가였다. 하지만 당대 최고 인물들이 개혁의 흐름에 있었음에도 결국 세상은 바뀌지 못했다.  당시 다수를 점하고 있었던 기득권 세력인 노론 벽파가 개혁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국왕암살까지도 기도했던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현실정치의 중심에 있었으나 상황이 이렇다면 그들의 개혁의지는 바람앞의 등불과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 독살일지도 모르는 정조의 죽음 이후 정약용 형제의 운명은 급물살을 탄 가랑잎같이 전락한다. 당시 노론 벽파가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내세운 것은 그들이 천주교도라는 것이었다.  정약용 형제가 젊을 때만 해도 천주학은 서학의 일종으로 새로운 기술과 특이한 사상을 뜻할 뿐이었으나 천주교측에서 제사를 거부하는 강경노선으로 나가고, 조선의 지배층이 천주교를 성리학을 거부하는 이단으로 보면서 천주교는 금기가 된다. 정조 생전에도 천주교를 공언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고 정조 사후에는 정적을 풍비박산 낼 수 있는 노론벽파의 최대 무기로 쓰인다. 그 철퇴를 맞은 것이 정약용의 집안이었다.

정약종을 제외한 형제들이 일찌감치 천주교를 버렸다는 것은 그들의 결백을 증명하는 방패가 되지 못했다. 한때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결국 정조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를 가고, 천주교를 지키기 위해 가족들과 소식까지 끊었던 정약종은 천주교도로서 순교한다. 형제들 중 가장 늦게 천주교를 믿었으나 박해가 시작되고 다른 양반들이 모두 배교할 때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던 정약종. 베드로를 연상케 하는 그의 순교는 선교사도 없이 종교가 먼저 전파되었던 조선 천주교의 순결함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정약종은 죽었지만 정약용과 정약전은 살아남아 귀양길을 떠난다. 그리고 완성된 것이 정약용의 다산학. 그리고 어류 백과사전인 정약전의 수산어보였다. 유배객의 생활은 주민들의 외면 속에 가난과 외로움의 극치였다고 하는데  가까운 절의  스님인 혜장선사를 감복시켜 제자로 삼은 정약용이나 어부들과 어울려 지내며  아이들의 훈장노릇을 한 정약전의 유배생활은 그리 비인간적이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혜장선사는 한 젊은 스님으로 하여금 정약용을 시중들게 했는데 그 젊은 스님이 정약용을 시중들다 머리가 자라는 줄도 모르고 나중에는 본분을 잊고 물고기까지 요리하곤 했다는 시를 지으면서 정약용은 슬핏 웃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런 소소한 기쁨이 정약용을 위로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비정했다. 풍비박살 난 집안과 유배생활 동안 죽어간 가족들. 하지만 결국 정약용은 자신의 운명에 초탈한 것 같았다. 그를 완전히 제거하려는 음모가 꾸며져도, 유배가 풀리지 않아도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방대한 저작의 유일한 독자로 인정했던 형이 먼저 죽고 시대에 대한 기대도 모두 상실한 채 그는 어떻게 정신을 닦을 수 있었을까. 단지 우리는 그가 저술에 온 힘을 쏟으며 자신의 글이 후대에 전해지기를, 그래서 역사가 정약용과 그의 형제, 친구들을 왜곡 없이 평가해주기를 바랬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시대와의 불화는 때로 역사와 악수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 부조리한 시대에 순응하지 않는 자의 용기는 역사를 믿는 데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래로부터 사람들을  안고 흐르는 역사에 오점을 남기지 않고 나아가 기여했다는 믿음. 그것은 후대가 지켜줘야만 살아남는 믿음이기도 하다. 그들이 믿은 것은 후대의 역사, 곧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약용을 지키고 있는가. 이 책이 묻는 것도 그것이다. 정약용의 양심과 학문세계, 정약종의 순결, 정약전의 실학정신을 우리는 지키고 있는가. 정약용 형제를 안고 흘렀던 역사는 우리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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