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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희망의 세상을 만나다 - 해외 자원봉사 여행기
설지인 지음 / 동아일보사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고등학교 때부터 난민과 빈민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한 젊은이의 해외 봉사활동 체험기. 이 책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던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네팔에서의 봉사활동을 마치고 귀국하는 김에 석류를 사가지고 가기로 하고 시장에 간 그녀. 한 소년이 석류 한 웅큼을 팔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모두 상한 것이다. 소년은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불렀다. 그렇지 않아도 외국인을 모두 돈덩어리로 보고 한푼이라도 더 뜯어내려고 하는 모습들에 환멸을 느끼던 그녀는 석류를 사지 않고 소년을 떠난다. 몇 걸음 걸었을까, 뒤에서 소년이 슬프게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손님, 제발. 깍아드릴께요!' 그녀는 소년의 너무나 슬픈 외침에 가슴이 내려앉았지만 그대로 그곳을 떠난다.
소년의 집에는 굶주리는 가족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곳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하지만 나중에 깊이 후회했음에도 설지인은 끝내 뒤돌아서지 않았다. 현지인에겐 관광객과 구별되지 않는 자원 봉사자의 어려움, 제3세계에 가서 너무나 무분별하게 돈을 쓰는 '외국인'과, 그 결과 외국인을 모두 돈으로 보게 된 현지인의 뿌리깊은 정서적 반목이 부딪히는 슬픈 순간이었다.
'연대'란 것의 어려움을 최초로 엿본 것은 인도에서 집없는 사람들을 위한 NGO 활동을 취재하던 한 TV프로그램에서였다. 그들은 낮에 하는 활동 외에도 밤마다 거리를 돌아다니며 무방비상태로 자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불을 덮어주곤 했다. 아름다운 일이었다. 하지만 처음에 활동가들을 경계하거나 고마워했던 이들은 곧 그들이 빈손으로 나타나면 왜 이불이나 다른 것들을 가져오지 않았냐고 항의하기 시작했다. '연대'가 '적선하는 사람'과 '적선받는 사람'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NGO들은 활동가와 빈민 혹은 난민을 동등한 위치로 보고 '연대'하고자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강자의 여유임을 부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도움받는 측에서는 언제나 '연대'보다는 수혜로 느끼지 않을까. 주는 것은 쉽지만, '잘' 주는 것은 무엇보다 어려운 일 같았다.
가난은 항상 있는 것이나 거지는 만들어지는 것이라 했다. 가난한 사람이 자존심을 버리게 되는 것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때이다. 제3세계의 공항에서 외국인이 나올 때 손을 벌리며 몰려드는 아이들은 그 공항이 없던 때에는 집에서 물을 긷던 아이들이었다. 설지인이나 다른 외국인이 자신들을 돈덩어리로 보는 현지인에게 불쾌감을 갖는 건 당연하지만, 만약 몇백원을 주고 그 석류를 샀으면 역시 '수혜와 수혜자'라는 부조리한 구조에 기여하게 됐을 것이다. 상한 석류를 사는 순간 그들을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도움 받아야 될 사람'으로 본 것이기 때문이다. 자원 활동가들조차 현지인과 겪어야 하는 이런 갭은 분명 비극이다. 난민문제같은 긴급구조는 상황이 다르지만 부국과 빈국의 연대는 이 딜레마를 개선시키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서는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러나 설지인의 활동이 이런 딜레마로만 점철된 것은 아니었다. 현장에 참여하고 있다는 보람, 부유한 나라의 사치스럽고 가벼운 삶이 아닌 세계의 진실한 문제들과 직면하고 활동한다는 기쁨이 있었다. 해외 봉사활동을 떠날 때나 국내에 있을때나 그녀의 촉수는 항상 난민과 빈민문제로 쏠려 있었고, 책 말미에 있는 글은 그런 문제를 얼마나 자신의 삶과 일치시키고 체화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젊은 설지인의 활동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태국 아이들에게 영어 가르치기, 필리핀 고아원 아이들 돌보기, 이라크 의약품 지원 모니터링 등, 단기간의 방학에 하는 산발적 봉사활동이라는 한계도 있었다. 한식구가 한방에서 모두 생할하는 오지 마을의 집을 서양식으로 바꾸는 작업같은 것은 한방에서 생활하게 된 자연, 문화적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꼭 필요한 것이었냐는 의문도 들고, 이라크 파병을 미국의 침략적 군사작전에 대한 한국군의 지속적인 보조구도라는 근원적인 문제보다 한국과 이라크의 교류와 상호도움을 중요시한 조선일보 기고글은 외교학과 학생답지는 않았다고 생각되지만, 어쨌든 설지인은 전진하고 있는 중이다. 한 알이 밀이 또 땅에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활동은 같은 길을 계획하는 모든 사람을 고무하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