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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일기
지허 스님 지음 / 여시아문 / 200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 때는 성직자들은 모두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갈하고 흠없는 무오류의 존재라고나 할까. 그 환상이 깨진 것은 아는 신부님과 수녀님이 말싸움을 하는 것을 본 다음부터였는데, 웃기게도 그 다음부턴 성직자들의 인간적인 결함이 먼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떤 신부님은 젊은 신부님들을 며느리 시집살이 시키듯 못살게 굴었고, 어떤 수녀님은 자기만 고고한 줄 알았다.
그들을 보는 내 시각이 공평치 못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성직자란 완벽체가 아니라 일상과 이상 사이에서 민감하게 움직이는 진자와 같은 존재니까. 그들이 일반인과 다른 것은 오류가 없어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좌충우돌 하면서도 이상에 대한 끈을 놓지 않는 구도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도자에게 일상생활은 중요하다. 이상이란 것은 수많은 일상생활의 정진을 계속하다 얻어지는 득도의 길일 것이고, 득도를 한 다음에도 (육체가 소멸할 때까지) 일상생활은 계속됨을 부처님도 몸소 보여주셨으니.
오대산의 깊은 자락에 있는 절에 동안거를 위해 모인 스님들이 있다. 외부와 단절된 채 겨울동안 수도에 매진하기로 다짐했을 그들이지만 그동안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은 득도를 위한 용맹정진 또한 일기로 서술이 가능한 생활 그 자체라는 것을 보여준다. 가진 것이라곤 단벌의 옷과 한 두권의 책, 매 끼니는 소소하기 그지없는 절식뿐이다. 그 가운데서 일어나는 견딜 수 없는 식욕이 화두를 망치게도 하고 심지어 밤에 식창고의 감자서리를 하게 하기도 하는 것을 어찌할까. 검소할 순 있어도 굶주릴 순 없는 것을.
하지만 굶주림을 충족시키려는 그들의 방편은 순수한 장난같아 재미있지만 정신의 굶주림을 충족시키려는 방편은 때로 자신을 망치고 남을 괴롭게 하기도 한다. 주위 스님들의 수도방법이 안일하다고 여겨 생식을 고집하고, 사람들을 무시하는 궤변을 계속하다 결국 스스로에게 가했던 고행을 견디지 못해 하산하는 어떤 스님의 모습은 구도자의 본질적인 굶주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굶주림을 채우는 길이 얼마나 조심스럽게 닦아져야 하는지를 대변한다.
일찌기 얼마나 많은 스님들이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절을 떠났는가. 그것을 보면 절이나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이 현실도피라는 말은 실례다. 그것은 퇴로가 없는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인은 직장을 때려칠 수도 있고 주말에는 늘어지게 늦잠을 자기도 하고 카드를 긁으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지만 수도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손은 빈손, 주위에는 고독 뿐. 어떤 수녀님은 현실도피를 하려면 수녀원은 가장 적합하지 않은 장소라고 말했었다. 수녀원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현실세계라고. 현실의 모든 단점이 모여있는 곳이라고.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니 인간문제는 끊이지 않을 것이고 덧붙여 폐쇄적이고 가난한 생활속에서 종교적인 생활까지 해나가야 하니까.
동안거가 끝날 때쯤에는 탈락한 스님과 공부를 성공적으로 마친 스님이 명확히 나뉘어진다고 한다. 탈락한 스님은 스스로의 사명을 상실한 채 먹빛 옷만 걸친 사람이 될 것이고 공부를 마친 스님은 다른 공부를 위해 어딘가의 절로 또 떠날 것이다. 그들의 수도는 언제나 되야 끝이 날까. 그들을 보는 이 중생의 마음이 시리다. 부디 그들의 수도가 절망으로 끝나지 않기를. 밤에 감자를 구워먹는 재미를 잊지 말기를. 끝내는 큰스님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