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얼단상 - 한 전라도 사람의 세상 읽기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런 종류의 글을 뭐라고 하나? 제목엔 '단상'이라고 했지만 잘 쓰이는 말은 아니고, 칼럼이라고 하던가? 하지만 그의 글을 칼럼이라고 하기엔 좀 망설여지고, 그를 칼럼니스트라고 부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사회문제를 다루는 책은 몇 권 읽어봤지만 고종석의 글에는 그런 글들에서는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름다움은 작가의 글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과 흡사했다. 그는 스스로의 글을 '기자의 글'이라고 했지만 작가로서의 자의식도 좀 있지 않았나 싶다. 사실 그의 글은 칼럼니스트라기 보다는 '작가'의 글에 가깝다.

고종석은 나에겐 좀 희한하고,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다. 전라도를 주요 화두로 다루는 것을 보고 전라도에서 나고 자란 체험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는 부모님이 전라도 출신인 서울내기였다. 전라도에 대한 기억이라곤 외가에 몇 번 가 본 경험밖에 없었고, 전라도 사투리는 낯선 방언일 뿐이었다고 한다. 그 정도면 서울사람이라고 하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만약 그가 경기도나 강원도 출신이라면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라도가 차별의 땅이기 때문에, 비극의 땅이기 때문에 그는 잊어도 좋았을 자신의 출신을 놓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려왔다. 그것은 노동자 부모를 둔 사람이 성공해 자본가가 됐어도 자신의 출신을 잊지 않는 것이나, 성공한 커리어우먼이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잊지 않는 것과 같은 태도이다. 실용적이기보다는 양심적이고 철학적인 태도인 것이다.

처음 이 책이 내게 튄 것은 제목 때문이었다. '서얼'이라니... 요즘 세상에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소수자나 아웃사이더면 모를까. 하지만 고종석이 그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했음은 곧 드러났다. '전라도'라는 것은 이제 한국사회에서 숫자에 관계없이 약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전라도는 근대적 의미의 소수자나 아웃사이더라기 보다는 전근대 사회의 낮은 신분에 가깝다고 고종석은 말한다. 한국에서 전라도에 대한 타지방 사람들의 시선은 집단적인 우월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상된 혈통을 기반으로 자신은 높은 신분으로, 상대는 낮은 신분으로 간주하는 전근대인의 사고방식에 가깝다. 즉 전라도는 '상놈'이고, '서얼'인 것이다. 잘 알려진 사실대로 정계에서 전라도 출신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기는 어렵다. 아, 더이상은 못하겠다. 잠깐 쓰는 나도 구역질이 나는데, 고종석이 자신의 출신을 부정하지 않고 거기에 천착한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에게 느낀 희한함은 또 있는데, 그렇게 양심적이고 투철한 사람이 한편으로 너무 문약했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고 방어적이기까지 한 그의 글은 마구 내지르는 글과는 달리 품위 있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그만큼 답답했다. 고종석은 또한 굉장히 솔직하다. 솔직해서 좋긴 한데 소탈함 이상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남성이라는 데에 자부심을 느껴본 적은 없지만 한국의 현실에서 다행스럽게 느낀 적은 많았다는 것, 몸과 머리가 따로 놀아서 머리는 동성애자들을 무심히 대하고 동성애자들의 완전히 평등한 인권을 지지하지만, 밀폐된 공간에서 남성 동성애자와 단둘이 있어야 한다면 조금 불편할 것 같다는 것 등등.

그래서 뭐...? 공적인 자리에서의 솔직함이란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완전히 인정하고 그걸 넘어서는 시도를 할 때에 미덕이 되는 것인데, 그의 솔직함은  좀 푼수로 여겨졌다. 인정하는 것 이상의 태도나 행동을 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글쓰기 이상의 행동이나 실천은 하지 못한다고 언명하고 있기도 하다. 그정도로 자신의 모순과 모자란 점을 말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하지만, 그리고 공적인 글을 쓰는 사람은 그런 점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회문제에 매달리는 사람으로서는 2% 모자라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서얼'들, 전라도인,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외국인 노동자들의 아픔과 불평등에 공감하고 세상 사람 모두가 서얼이 되어 끝내는 아무도 서얼이지 않는 세상을 꿈꾸는 고종석과, 글로 쓰는 것 이상의 행동은 못한다는 고종석 중 뭐가 진짜일까?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그는 드물게 양심적인 사람이지만, 문약한 사람이기도 하다. 고종석을 처음 접하는 나로선 '서얼단상'을 감탄스럽게 읽었지만 그만큼의 미적지근함이 남기도 한 경험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옐로
돈 리 지음, 임주현 옮김 / 문학사상사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질문 자체가 편견을 포함하는 경우는 흔히 있다. 가장 간단한 말 가운데서도 말이다. 가령,

"어디 사람이에요?" 라고

미국의 백인이 동양인에게 물었다고 하자. 많은 동양인들은 이 질문에 "난 미국인이에요."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나름대로 재치 있는 대답이다. 하지만 효과는 생각보다 크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그 말에 움찔할 정도면 그런 질문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난감한 질문은 또 있다. 백인이 어떤 한국인에게 묻는다.

"중국인이죠?"

사실 이 말은 질문이 아니라 일종의 이름짓기이며 구획확인이다. 너 동양인이지?라고 묻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 대답에 "난 한국인이예요."라고 대답해봤자 듣는 미국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에겐 한국과 중국의 경계는 모호하며 오로지 서양과 동양이 있을 뿐이므로.

이 정도쯤 되면 이민자들은 미국에서 태어나 영어를 잘 하고 명문대를 나왔다 하더라도 근원적인 딜레마에 시달리게 된다.

난 미국인인데, 왜 그들은 날 미국인으로 보지 않는가, 하는 것.

그 이민자는 미국인으로 살아왔고 미국인이 아니면 어느나라 사람으로도 살아갈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한국인, 혹은 중국인, 필리핀인으로서의 정체성이나 소속감은 보잘 것 없는 흔적으로도 찾기 어려운, 모래 속에 묻힌 반지와도 같은 것일 뿐이다. 그런데 막상 그가 속한 사회에서는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창래의 소설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미국의 한인들은 더 이상 갓 이민 와서 사회 최하층을 차지하고 있는 '무지렁이'들은 아니다. 그들은 많은 경우 중산층에 속해 있고, 상류층으로 올라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들이 그렇게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는 건 백인도 알고 흑인도 안다. 하지만 백인들의 머리 속에 맴도는 것은 아시아에 대해 굳어진 이미지, 혹은 편견, 그러니까 갓 이민 와서 사회 최하층을 차지하고 있던 '무지렁이'들에 대한 이미지 뿐이다. 이제는 고급 수트를 입고 와인잔을 기울인다 하더라도 '어쭈-' 정도의 반응밖에 못 이끌어낼 때의 허탈감은 어떤 노력으로 극복해야 할까.

그것은 자주 백인과 동양인 커플들이 싸우고 헤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동양인은 백인이 자기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백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그런 불안을 잠재울 만한 제스쳐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싸우고, 헤어지고, 신경증에 시달린다. 때로는 바보같은 음모까지 꾸미거나, 누군가의 음모에 희생될 거라고 지레 겁을 먹기도 한다.

'다른 것'이란 왜 이렇게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일까? 사실 '다른 것' 자체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르게 생겼으니까. 아주 옛날에는 '인종'이란 말도 그런 정도의 의미 밖에 없었다고 한다. 나와, 혹은 내 지방 사람과 다르게 생긴 사람. 그래서 눈에 띄는 사람, 정도. 하지만 어느 한 쪽이 지배자가 되고 다른 쪽들은 노예 혹은 식민지가 되면서부터 '다른 것'은 '못난 것' 혹은 나쁜 것'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방식은 500년 전엔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이제 그 개념은 천지가 개벽하지 않는 한 인간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 여러 나라의 이민자들은 평생 부평초의 딜레마를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사실 그 대답은 '옐로'의 인물들도 모두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한편으로는 신경증이 시달리고 한편으로는 슬며시 달관해가기도 한다. 그들이 그런 문제들을 자기 내부로만 삭힐 뿐 어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은, 그런 '진지한' 노력들조차  냉소적인 조롱거리로 전락해가는 미국, 혹은 세계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만의 리그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최선을 다하라, 그 대신 싸우지 마라, 그러다 모욕을 당하면 겉으로라도 태연히 넘겨라, 그리고 관조하라, 정도일 수밖에 없다. 내 귀엔 '화내도 소용 없어'로 들리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티보가의 사람들 1
로제 마르탱 뒤 가르 지음, 정지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데미안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친해지기 전 하교길을 함께 걸으며 카인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이다. 그때 데미안은 카인이야말로 선택받은 인간이며, 그가 받은 낙인은 저주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평범한 사람들과 구별해주는 '표시'라고 말해 싱클레어를 혼란에 빠트린다. 물론 데미안은 그 '표시'를 받은 인간이었고, 싱클레어 또한 그런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명의 카인이 여기 있다. 티보 가의 둘째 아들인 자크.

'티보가의 사람들'은 여러모로 '데미안'을 연상시킨다. 두 소년의 등장. 진지하다 못해 열기까지 띄는 그들의 특별한 우정까지도. 하지만 데미안은 요즘 말로 '쿨'한 작품이다. 데미안은 현실의 인간이기보다는 비너스에 가깝다. 하지만 '티보가의 사람들'은, 동시대와 거의 같은 지역을 다루고 있음에도 '데미안'의 물기와 후광까지 모조리 빼버린 현실의 소설이다. '티보가의 사람들'이 여러가지 면에서 '데미안'의 추억에 젖게 만들긴 했지만 거기까지란 얘기. 그래서 조금 아쉽기도 하고, 조금 더 긴장되기도 했다.

자크와 다니엘 두 소년의 우정은 순수하고 강렬하지만 감추어진 균열이 그 배면에 항상 존재한다. 이들 사이의 균열은 가출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하는 도중에도 감지된다. 강력한 가부장적 집안에서 숨막혀하는 반항적이고 고집 센 소년 자크와 자애로운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을 두고 나온 섬세한 소년인 다니엘은 행동은 같이 하지만 마음은 다른 불안으로 차 있다. 다니엘의 시선은 끊임없이 가족과 안락한 세계로 향해 있지만, 자크의 시선은 과거를 염두에 두지 않고 어떻게 독립된 미래로 나갈 것인가에만 맞춰져 있다. 그리고 자크와 다니엘의 이러한 성격은 그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지속된다.

10대 초기에 아프리카로의 가출을 감행했던 자크와 다니엘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사춘기를 보낸다. 가정으로 돌아온 다니엘은 다시 어머니의 세계에 안착했으나 아버지에게 용서받지 못한 자크는 감화원으로 보내진다. 감화원은 자크와 다니엘의 우정도 멀어지게 했을 뿐 아니라 예민하고 고집 센 소년이었던 자크를 백치에 가깝게 세뇌시킨다. 자크의 형인 앙트완느가 자크를 빼내지 않았다면 자크는 아버지가 바라는 우둔하고 성실한 성인이 됐을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사회가 인간에게 끼치는 강력한 영향력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큰 주제며, 사회가 옳지 않은 방향으로 흐를 때 인간은 어떻게 순수한 독립심을 유지할 수 있는가는 절박한 호기심으로 추구되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후에 1914년의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구체화된다.

자크의 인생은 어떻게 견고하고 억압적인 구세계에서 탈출해 비젼에 찬 신세계를 구축할 것인가에 몰입돼 있다. 그가 '가출'과 귀환을 반복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성인이 된 자크가 찾아낸 세계는 사회주의 인터네셔널이었고, 그 와중에 전쟁이 터진다. 그리고 자크는 목격한다. 자기의 이기심마저 극복하고 노동자의 세계를 향해 달려가던 각국의 동지들이 전쟁이 터지자 얼마나 빨리 변절하는가를. 개인의 안락은 쉽게 포기했지만 조국의 권위와 부름 앞에서 약해지던 이율배반.

국가 위기시의 '국민 통합'이라는 기치는 국민 개개인의 공포를 먹고 자라나는 거인의 명령에 다름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전포고 삼일 전까지 국제 노동자의 사회주의 통합을 외치던 사람들도 국가에의 충성을 외치게 되고, 사람들은 기꺼이 적군에게 총을 들이댄다. 두려움은 힘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과 타인에 대한 잔인함을 낳는 것이다. 자크는 이러한 것을 목격하면서 어떠한 전쟁에도 반대하는 개인으로 남고자 결심한다.

그리고  이때 어릴 때부터 지속됐던 자크와 '티보 가'와의 갈등이 다시 불거진다. 티보 가의 가장이었던 아버지는 죽었고, 형인 앙트완느는 아버지보다 한층 세련되고 무신론적이지만 보수적인 시민인 건 다름이 없었다. 앙트완느는 참전을 거부하려는 자크에게 사회는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계약으로 이루어져 있고, 국민은 전쟁에 찬성하지 않더라도 국가가 위기에 처한 이상 그 위기를 극복하는데 동참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그것은 동시에 국가에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받을 수 있는 처벌 내지 보복을 피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크는 전쟁을 일으키려는 지도자들의 야욕을 막지 못한 것은 국민들의 자발적인 순종 때문이며, 그에 반대한다면 전쟁이라는 '국가의 위기' 앞에서도 개인으로써 끝까지 저항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가의 위기 때 국민통합을 외치는 건 애초에 국민이 소외된 '국가의 이익'을 추구했던 지도부의 기만일 뿐이기 때문이다.

기시감이라고나 할까. 이들의 딜레마와 갈등은 오늘날과 전혀 다를 게 없다. 정작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사람들은 그것으로 모든 문명의 악이 말소되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전쟁을 끝내는 전쟁'으로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것은 딜레마 뿐 아니라 자기기만과 착각까지 포함해서였던가.

앙트완느의 설득과 동료들의 변절에도 불구하고 자크는 무모할 정도로 고집스럽게 자기 길을 가며, 끝내는 공상적이라고 불릴 만한 작전을 계획한다. 작전명을 짓자면 '사막 위에 한 송이의 꽃을 피워라' 정도 될까. 본인은 '메마른 땅에 물주기'라고 불렀겠지만. 모두가 황당하다고 생각한 일을 자크는 하지 않으면 안 될 필연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평화에 대한 관점의 차이이기도 하다. 모두가 평화를 좋아하지만 평화를 지키려고 고군분투하는 사람은 바보로 불리는 것처럼.

자크야말로 데미안이 말한 '표시'가 있는 인간이었다. 어떠한 것도 그를 변하게 하거나 꺾지 못했다. 그렇게 사는 게 옳아서라기보다는 그렇게밖에 살 수 밖에 없는 인간. 자크는 '자유'라는 낙인이 찍힌 또 하나의 카인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름다운 동행 1
닛타 지로 지음 / 일빛 / 1999년 1월
평점 :
품절


이것은 등산에 관한 이야기다. 아니, 등산 중에서도 암벽등반에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등산은 꽤 좋아하지만 암벽등반은 생각해본 적도 없는 내겐 상당히 생소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암벽등반 뿐이 아니다. 겨울산이라면 나도 몇 번 다녀본 적이 있지만, 이 책에 나오는 겨울등반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추위와  눈, 얼음만 조심하면 되었던 나의 겨울 산에 반해 3000m급 이상의 겨울산에서는 표층 눈사태와 며칠 간의 고립도 불사해야 했다. 나는 그들이 약간 경멸적으로 하는 말에 의하면, '등산'이 아니라 '하이킹'만 해 온 셈이다.

이 책의 두 주인공이자, 실화의 모델인 미사코와 도시코가 만나는 것도 그런 겨울산에서였다. 눈보라로 인해 길을 잃고 대피소로 몸을 피하다 만난 두 여성은 비슷한 이름과 달리 성격은 딴판이었다. 미사코는 공예 장인이자 조용하기 이를 데 없는 성격이었고, 도시코는 괄괄하고 당당한 의대생이었다. 이 부분 뿐 아니라 뒤의 전개에서도 상당히 작위적이라고 느낀 부분들이 있었지만, 이 소설이 거의 실화대로 쓴 것임을 알고 나자 작위성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흥미가 생겼다. 픽션에서의 '톰과 제리'는 식상하지만 논픽션에서의 '톰과 제리'라면, 그 그럴듯한 구성 때문에 더 유쾌하게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며칠 간의 대피소 생활 끝에 날씨가 호전되자 한 무리의 남자들이 대피소에 들이닥친다. 산악회 소속 남자들인 그들은 악천후에도 암벽등반을 해서 올라왔고 비박에도 익숙했다. 미사코와 도시코는 암벽등반이라는 미지의 영역과 그들의 실력에 매료된다. 그들이 속해있는 산악회 이름은 '재그'로 야심만만한 목표를 갖고 있는 신생 산악회였다. 그리고 '재그'의 리더 사쿠마는 미사코와 도시코를 트레이닝 시켜 세계 최초로 여성 이인조 암벽기록을 세우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소설 중간에 미사코가 꼬마 때 패전을 맞았다는 걸 보아 그들이 한창 활동한 시기는 60년대였다. 여성 암벽등반가가 정상으로 여겨지지 않는 시대였다. 그래서 이들이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상천외한 훈련들을 발명해 밤에 몰래 자신을 단련하는 모습을 보면 '록키'나 '빌리 엘리어트'를 볼 때와 비슷한, 소박하지만 보는 사람도 주먹을 쥐게 만드는 감동이 있다.

꾸준한 훈련으로 이들의 기량은 점차 향상돼 일본의 암벽들을 마스터하고 드디어 둘은 유럽의 마터호른 암벽을 오르게 된다. 여기에 오르면 세계 최초 여성 등반대의 마터호른 등반기록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행보에 쏟아지는 매스컴에 대한 반응은 둘 사이의 성격만큼이나 상이했다. 미사코는 한사코 매스컴의 접근을 피했고, 도시코는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산에서는 둘도 없는 파트너였지만 결국 이들의 상이한 성격은 둘이 가는 길까지 가르게 된다. 마터호른 이후에 '재그'의 두 번째 프로젝트인 아이거 암벽 등반에 도시코는 참석하지만 미사코는 '재그'를 탈퇴하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산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산에 대한 비중과 동격으로 미사코와 도시코의 인생, 그리고 원래 그들의 일인 전통 공예와 의학에 대한 세계가 나온다. 이들은 '산이 있기 때문에 산에 오른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붙잡고 있는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고, 공예의 기술을 익히고, 의사수업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산에 오른다. 달리 말하면 얽혀 있는 인생의 실마리를 플고 삶을 발전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미사코는 산의 하늘에서 받은 영감을 공예에 도입하고, 공예가 한계에 다다르면 다시 산에 가는 과정을 반복하며 장인으로써 스스로를 단련해간다. 도시코는 아이거 암벽 등반에 도전함으로써 등반가로써 미사코를 앞지른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는 것은 산과 일과 인생은 동격이라는 둘의 인생관 때문이다.

이 책을 보자 어렸을 때 스포츠 만화를 보면서 홀딱 반해 권투나 무술을 따라하는 흉내를 내곤 했던 것이 기억났다. TV에서 체조나 발레를 하면 또 그런 것들을 하는 상상을 했었다. 하지만 좀 더 큰 후에 록키나 빌리 엘리어트를 보면서도 권투나 발레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는데, 이 책은 등산에 대한 나의 꿈에 불을 질렀다. 언뜻 전형적으로 보이지만 스포츠물의 공식을 전혀 따라가지 않는 논픽션이 주는 리얼리티가 더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스토리가 전개될수록 발전해 거의 신적인 경지에 이르는 스포츠물의 주인공들과 달리, 갈수록 자신의 한계를 절감해가는 그들의 모습은 인생의 유한함과, 그보다 더 짧은 20대의 유한함 속에서 세계에서 가장 가파른 절벽에 오르고자 하는 꿈을 더 절실하게 만들었다.

생명이 길지 않았던 '재그'였지만 도시코와 미사코가 모이고, 기존에 있던 남자 대원들이 힘을 합쳐 마터호른과 아이거 등벽을 오른 것은 그들 생애에선 평생의 시간과 맞먹는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해 모였느냐에 따라 그 집단의 공기는 달라진다. 실리적인 목적을 위해 모인 집단에는 그런 공기가 흐르고 꿈을 위해 모인 집단에는 역시 그들에게밖에는 존재할 수 없는 공기가 흐르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운 동행'은 미사코와 도시코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산에 대한 공통의 목적과,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훈련된 사람들이 모인 '재그'의 멤버들은, 함께 행동할때나 혼자 혹은 둘이서 행동할때나 항상 '아름다운 동행'이었다. 산이 있기 때문에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올라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사람들의 동행이었기 때문이다.

P.S :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 신영복 선생의 추천사는 맨 마지막에 보라고 당부하고 싶다. 추천사는 1권 끝에 나오는데, 방심해서 먼저 읽으면 미사코와 도시코의 최후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실화를 충실히 묘사했다는 이 책에서 거의 유일하게 작가의 창작이 개입된 부분이라고 하는데, 내 감상으론 실화를 그대로 도입했으면 더 나았을 것 같다. 뭐, 결과적으론 별 차이 없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조숙영 옮김 / 르네상스 / 200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끔 해보는 생각인데, 세계는 60년대에 더 행복했을까, 오늘날 더 행복할까? 60년대엔 정의를 '믿었고', 민주주의를 '믿었고', 조국의 해방을 '믿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베트남 반전시위를 벌이며 히피의 예술까지 함께 만들어냈고, 68혁명을 터트렸으며, 외국인 의사가 낀 게릴라들은 쿠바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다. 반전시위는 결국 철군을 촉진시켰고, 68혁명으로 남녀평등과 낭만을 함께 이뤄낼 수 있었으며, 쿠바는 미국의 집요한 훼방이 있기 전까지 라틴 아메리카에서 의료와 교육이 가장 튼튼한 나라였다. 그때의 불평등과 부조리란 극복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오늘날에는 모든 환상이 깨졌다. 모든 분야가 최첨단을 달리고 있고, 인류는 21세기인이 되어 우쭐해있지만 더 이상 이상과 꿈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이렇다할 반전운동도, 혁명의 기운도 없다. 세계는 더 나빠졌는데도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정직하고 진실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겠다. 이제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믿는 사람도 없고, 람보에 열광하는 사람도 없다. 여전히 세계는 미국의 대중산업의 술독에 빠져 있지만 그 상황을 불편하고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을 큰 잔치에 초대해놓고 수많은 사람들의 면전에서 문을 쾅 닫아버리는 이 세상은 균등한 동시에 불평등하다. 세상이 강요하는 습관과 생각은 균등하지만, 세상이 가져다주는 기회는 불평등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누구나 열광할 수는 있지만,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의 현실이다. 사회주의는 무너졌지만, 그때문에 자본주의는 더욱 폭주하게 되었다. "사회주의는 정의의 이름으로 자유를 희생시켰다. 놀랄 만한 균형이 아닌가. 자본주의는 자유의 이름으로 매일 정의를 희생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둘 가운데 하나의 제단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가?"


오늘날 선진국들과 무역단체들이 말하는 자본주의, 자유무역이란  "니네 나라의 자원과 시장을 통째로 주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에 다름아니다. 그들의 이익추구란 너무 집요하고 교활해서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나라인 미국이 전세계 마약의 40%를 수입하며, 자국내의 거물 마약상을 단 한번도 처벌한 적이 없다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스위스는 오랜 금융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2차 세계대전때 히틀러와 나치의 돈을 세탁해주면서 급성장했고, 오늘날에도 세계의 검은돈을 빨아들인다는 면에선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알프스에 사는 성실하기로 소문난 이 나라의 국민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와 정의, 자유와 평등을 존중하는 '척'하던 모습은 단 한 번도 진실이 아니었던 것 같다. 기껏해봐야 자기네 나라 안에서 일정한 계층이 향유하던 관습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옛날 귀족사회의 살롱 계몽주의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가난한 계층과 가난한 나라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적용된 때가 없었다. 그래서 라틴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세계의 모든 구역질나는 부조리를 까발리고 나서 희망을 얘기하는 갈레아노가 언뜻 어이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지막에 그가 얘기하는 것은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금의 이 상황도 현실이자 역사라면, 베트남 반전시위와 68혁명, 쿠바혁명도 현실이자 역사다. 저울추가 한쪽으로 너무 기우뚱하다고 해서 반대편 저울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게 갈레아노의 생각인 것 같다. "우리는 우리 인간 족속이 이웃을 집어삼키고 지구를 황폐화하기 위해 대단히 열심히 살고 있음을 잘 알고 있지만, 멀고 먼 구석기 시대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자신들이 일부를 이루고 살았던 자연에 적응하지 못했더라면, 또 채집하고 수렵하는 것을 나누지 못했더라면 우리가 지금 이곳에 없으리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어디에 살든, 어떻게 살든, 언제 살든, 한 사람은 그 속에 다른 많은 사람을 포함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좀 생.뚱.맞.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아메리카 인디언들이나 한반도의 조상들이 기술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자연을 훼손하는 행위를 진심으로 경멸했다는 것은 진실이다. 위의 말이 생뚱맞게 여겨지는 것 만큼 우리의 세계관은 전락한 것이다. 구조도 타락했고, 세계관도 타락했다면 세계관부터 끌어올려보는 건 어떨까? 예를 들면, "아무도 자신이 가장 편한 일을 하는 대신에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일을 함으로써 영웅이나 바보로 취급되지" 않는 것이 상식이 되는 것. 세계관을 바꿀 수 없다면 구조를 바꾸는 것은 더욱 요원한 일일 테니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샘 2005-02-16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이제 절망할 만큼 절망해서 희망을 가져도 되는 걸까요? 아니면 더 어둠을 겪어야 하는 걸까요...

hoyahan1 2005-02-16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제 생각엔 절망이나 희망은 따로따로 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우리의 세상을 보면 절망이나 희망은 같은 곳에 있는 것 같거든요. 사람은 절망한 만큼 희망을 꿈꾸게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희망보다 중요한 건 의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