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동행 1
닛타 지로 지음 / 일빛 / 1999년 1월
평점 :
품절


이것은 등산에 관한 이야기다. 아니, 등산 중에서도 암벽등반에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등산은 꽤 좋아하지만 암벽등반은 생각해본 적도 없는 내겐 상당히 생소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암벽등반 뿐이 아니다. 겨울산이라면 나도 몇 번 다녀본 적이 있지만, 이 책에 나오는 겨울등반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추위와  눈, 얼음만 조심하면 되었던 나의 겨울 산에 반해 3000m급 이상의 겨울산에서는 표층 눈사태와 며칠 간의 고립도 불사해야 했다. 나는 그들이 약간 경멸적으로 하는 말에 의하면, '등산'이 아니라 '하이킹'만 해 온 셈이다.

이 책의 두 주인공이자, 실화의 모델인 미사코와 도시코가 만나는 것도 그런 겨울산에서였다. 눈보라로 인해 길을 잃고 대피소로 몸을 피하다 만난 두 여성은 비슷한 이름과 달리 성격은 딴판이었다. 미사코는 공예 장인이자 조용하기 이를 데 없는 성격이었고, 도시코는 괄괄하고 당당한 의대생이었다. 이 부분 뿐 아니라 뒤의 전개에서도 상당히 작위적이라고 느낀 부분들이 있었지만, 이 소설이 거의 실화대로 쓴 것임을 알고 나자 작위성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흥미가 생겼다. 픽션에서의 '톰과 제리'는 식상하지만 논픽션에서의 '톰과 제리'라면, 그 그럴듯한 구성 때문에 더 유쾌하게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며칠 간의 대피소 생활 끝에 날씨가 호전되자 한 무리의 남자들이 대피소에 들이닥친다. 산악회 소속 남자들인 그들은 악천후에도 암벽등반을 해서 올라왔고 비박에도 익숙했다. 미사코와 도시코는 암벽등반이라는 미지의 영역과 그들의 실력에 매료된다. 그들이 속해있는 산악회 이름은 '재그'로 야심만만한 목표를 갖고 있는 신생 산악회였다. 그리고 '재그'의 리더 사쿠마는 미사코와 도시코를 트레이닝 시켜 세계 최초로 여성 이인조 암벽기록을 세우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소설 중간에 미사코가 꼬마 때 패전을 맞았다는 걸 보아 그들이 한창 활동한 시기는 60년대였다. 여성 암벽등반가가 정상으로 여겨지지 않는 시대였다. 그래서 이들이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상천외한 훈련들을 발명해 밤에 몰래 자신을 단련하는 모습을 보면 '록키'나 '빌리 엘리어트'를 볼 때와 비슷한, 소박하지만 보는 사람도 주먹을 쥐게 만드는 감동이 있다.

꾸준한 훈련으로 이들의 기량은 점차 향상돼 일본의 암벽들을 마스터하고 드디어 둘은 유럽의 마터호른 암벽을 오르게 된다. 여기에 오르면 세계 최초 여성 등반대의 마터호른 등반기록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행보에 쏟아지는 매스컴에 대한 반응은 둘 사이의 성격만큼이나 상이했다. 미사코는 한사코 매스컴의 접근을 피했고, 도시코는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산에서는 둘도 없는 파트너였지만 결국 이들의 상이한 성격은 둘이 가는 길까지 가르게 된다. 마터호른 이후에 '재그'의 두 번째 프로젝트인 아이거 암벽 등반에 도시코는 참석하지만 미사코는 '재그'를 탈퇴하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산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산에 대한 비중과 동격으로 미사코와 도시코의 인생, 그리고 원래 그들의 일인 전통 공예와 의학에 대한 세계가 나온다. 이들은 '산이 있기 때문에 산에 오른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붙잡고 있는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고, 공예의 기술을 익히고, 의사수업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산에 오른다. 달리 말하면 얽혀 있는 인생의 실마리를 플고 삶을 발전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미사코는 산의 하늘에서 받은 영감을 공예에 도입하고, 공예가 한계에 다다르면 다시 산에 가는 과정을 반복하며 장인으로써 스스로를 단련해간다. 도시코는 아이거 암벽 등반에 도전함으로써 등반가로써 미사코를 앞지른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는 것은 산과 일과 인생은 동격이라는 둘의 인생관 때문이다.

이 책을 보자 어렸을 때 스포츠 만화를 보면서 홀딱 반해 권투나 무술을 따라하는 흉내를 내곤 했던 것이 기억났다. TV에서 체조나 발레를 하면 또 그런 것들을 하는 상상을 했었다. 하지만 좀 더 큰 후에 록키나 빌리 엘리어트를 보면서도 권투나 발레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는데, 이 책은 등산에 대한 나의 꿈에 불을 질렀다. 언뜻 전형적으로 보이지만 스포츠물의 공식을 전혀 따라가지 않는 논픽션이 주는 리얼리티가 더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스토리가 전개될수록 발전해 거의 신적인 경지에 이르는 스포츠물의 주인공들과 달리, 갈수록 자신의 한계를 절감해가는 그들의 모습은 인생의 유한함과, 그보다 더 짧은 20대의 유한함 속에서 세계에서 가장 가파른 절벽에 오르고자 하는 꿈을 더 절실하게 만들었다.

생명이 길지 않았던 '재그'였지만 도시코와 미사코가 모이고, 기존에 있던 남자 대원들이 힘을 합쳐 마터호른과 아이거 등벽을 오른 것은 그들 생애에선 평생의 시간과 맞먹는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해 모였느냐에 따라 그 집단의 공기는 달라진다. 실리적인 목적을 위해 모인 집단에는 그런 공기가 흐르고 꿈을 위해 모인 집단에는 역시 그들에게밖에는 존재할 수 없는 공기가 흐르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운 동행'은 미사코와 도시코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산에 대한 공통의 목적과,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훈련된 사람들이 모인 '재그'의 멤버들은, 함께 행동할때나 혼자 혹은 둘이서 행동할때나 항상 '아름다운 동행'이었다. 산이 있기 때문에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올라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사람들의 동행이었기 때문이다.

P.S :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 신영복 선생의 추천사는 맨 마지막에 보라고 당부하고 싶다. 추천사는 1권 끝에 나오는데, 방심해서 먼저 읽으면 미사코와 도시코의 최후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실화를 충실히 묘사했다는 이 책에서 거의 유일하게 작가의 창작이 개입된 부분이라고 하는데, 내 감상으론 실화를 그대로 도입했으면 더 나았을 것 같다. 뭐, 결과적으론 별 차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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